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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호 Vol.30 - 김경미


김경미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이사 정보

 


 집을 내놓자 사람들이 보러 왔다


 부동산 사장은 좋은 말만 하려 하고 

 나는 낡은 내 집의 단점을 귀띔하려고 

 계속 틈을 살폈다 


 부동산 사장은 돌아가서 전화를 했다


 사람들이 집 볼 때

 첫눈에 제일 많이 좌우되는 곳이

 두 곳이에요

 그 두 군데만 수리하면 완전히

 새집 같아져요


 나는 벽지와 바닥인 줄 알았는데 

 이십육 년 전문가에 의하면


 화장실하고 주방, 두 곳입니다 

 주방은 이미 고치셨으니 

 화장실만 완전히 새로 수리하세요


 화장실을 고쳐준다는 조건으로

 집을 다시 내놨다


 내가 고쳐주고 싶은 건

 실은 창문들인데

 나라면 거길 고쳐 달라고 할 텐데


 돈이 많으면 창문부터 고칠 텐데


 더 많으면 

 창문 밖 아파트 화단 풍경도 고칠 텐데


 맞은편 아파트 밤의 거실 조명도 

 전부 다 바꿔줄 텐데


 나도 빈집을 보러 갔다 


 베란다 배수구에 

 작은 풀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정원을 얻은 듯 맘에 들어하자 

 동행했던 집 수리 전문가 친구가 

 집이 하자 있어 안 나간다는 증거라고 

 혀를 찼다 


 돌아오면서 하늘에 난

 각종 창문과 풀꽃들을 보았다


 그 투명 액자 속 구름들이

 첫눈 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문들 다 바꾸는 조건으로

 집을 거둬들였다


 

 


 

 특보


            

 문자가 왔다


 호의 특보가 내려졌으니 

 우산 챙겨 나오라고 


 보낸 사람의 실수인지 

 읽은 사람의 착오인지 


 아직은 쨍쨍한 하늘


 얼마만의 예보일까


 거세게 쏟아져 내릴

 호의 맞으러 서둘러 나간다 


 양산 겸 우산처럼 챙겨 입고

 

 



근작시 3편ㅣ

 

 꽃 지는 날엔
        

                   

 꽃 피는 날엔 

 누구와도 다투지 않기로 한다 


 꽃 지는 날엔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는다 


 연두색 잎들 초록색으로 바뀔 땐 

 낡은 구두로 

 바다 위 돛단배와 물고기를 만든다


 어디선가 기차 지나가는 소리 들리면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고


 저녁 종소리 들릴 듯 말 듯 기억이 

 자꾸 고개를 돌리면 

 내 잘못을 용서한다


 혀로 망친 날은 

 양쪽 다 유보한다 

 일주일이나 보름 동안 별빛 보며

 세 시간 이상씩 탕감해 본다 


 안 돼도 할 수 없다 


 아무 것도 믿지 않아서 출구가 없었던 날들


 이십 대가 다 가도록 아름답지 못했고

 아름답기도 전에 이십 대가 다 갔으니


 서른과 마흔에는 갈수록 산뜻해져야 한다


 그런 봄날의 믿음

 차츰과 주춤의 간격들


 가방 무거운 날엔 입술도 무거워야 한다 

 종일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다


 눈물을 잊으면 부족한 게 점점 많아져

 얼굴이 곤두서니 


 비 오는 날에도

 비 오지 않는 날에도

 아무와도 다투지 않기로 하지만 


 꽃 피는 날에도

 꽃 지는 날에도

 후회가 많아서 운다


 가장 쓸모 있는 건

 뉘우침 뿐이라고


 꽃 피는 날에도 꽃 지는 날에도 


 

 

 

 

 


 연필통
         

                   

 그 무덤엘 가니 

 납작하게 누운 주검의 배꼽쯤에

 연필꽂이통이 놓여있었다


 다른 무덤들에는 

 립스틱 자국과

 거기까지 오는 지하철표와

 미술관 입장권이며 동전들이 가득한데 


 ‘이게 다예요’


 그녀의 책 제목처럼 


 잔뜩 요약된 무덤이었다

 연필통이었다


 배꼽 같은 연필과 볼펜들이 가득했다 


 나도 모나미 볼펜 하나 꽂았다 

 한국에서 왔어요 

 모나미는 당신 나라 말로 나의 친구여


 한나절 그녀를 생각했다

 볼펜을 생각했다

 어릴 적 친구라도 되듯이


 볼펜 심처럼 말라서

 옥상이 유일한 친구였던 시절이 있었다


 떨어질 생각은 아니었다

 배꼽이 있으니까

 설사 떨어져도 무사하리라 


 지금도 문구점을 지나갈 때면

 볼펜들이 부른다 

 나의 친구여


 번번이 친구를 사 오지만

 친구도 대체로 내 마음 같지는 않은 법


 한나절 내내 볼펜을 생각하지만

 대체로 하고 싶은 생각과

 하는 생각이 

 같지는 않은 법


 그 무덤에 다시 가서

 모나미 볼펜 한 자루 더 꽂을까 


 나의 친구여

 나는 아직 시작도 못 한 기분이지만

 떨어질 생각은 없답니다


 배꼽 자국이 있으니까

 고백하러 


 

 

 

 

 

 

 햇빛
         

                   

 햇빛에 빨갛게 달궈진 

 돌바닥에 누웠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내 안의 돌과 모래가 흘러나와

 햇빛을 따라 올라가

 먼지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햇빛이 되어 내려왔다


 뼈만 남았던 몸에

 다시 뜨거운 얼굴이 생기고

 팔 다리가 붙고

 궁둥이가 그득해졌다


 저쪽 마당 가 풀밭의 풀처럼 쑤욱

 키도 자라고

 두 눈도 커지고


 생일도 아닌데

 잘 달궈진

 생일 축하 케익도 왔다


 신생아 같은 구름들이 버둥대는 하늘에다


 깜박 잊고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한테도 못한 말을 할 뻔했다


 꿈에서 깨어나

 잔뜩 뒹굴대면서

 온 세상과 함께 뒹굴대면서

 

 

 


시인의 말ㅣ


 극심한 두통에 쩔쩔매다 보니 햇빛 속 그 돌바닥이 더욱 그립니다. 

 그 그리움이 두통을 낫게 해주겠지. 

 

 

 

 

 

 

 

  

 김경미 시인

 1983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고통을 달래는 순서』『밤의 입국 심사』『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라디오오프닝 시집『카프카식 이별』등이 있음. 노작문학상, 서정시학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