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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호 Vol.29 - 최동호


최동호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 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저주받은 영혼의 살점  

 

 

 

 

니체의 영혼이 절대자 신의 저주로


어느 겨울 아침 


누추한 육신을 떠나갔을 때


자라투스트라도 죽었다



위대한 천재가 죽은 다음


시인은 저주받은 영혼의 살점을 뜯어 먹는


하이에나이다



디지털 시대의 시인들의 시에서는 


신은 이미 사라지고


영혼은 부패하고


썩지 않는 종이 냄새가 난다      

 

 

 

 

 파지만 날리는 밤


 

 

 아무것도 되지 않아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은 밤


 시 쓰기가 물방울 하나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잉크 같은 물방울이 아니라 한지를 적시는 먹도 아니라


 세상의 아픔이 떨어트리는 물방울 그 눈물방울로


 견고한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을 것이다


 

 자신에게 아무 불만도 없이


 결여나 열망도 없이 무슨 시를 쓴다는 말인가


 시가 되지 않아 머리가 터져버릴 거 같은 밤


 청년 시절 지친 하루를 견디며 새벽까지 공부하다가

 


 다 잠그지 않은 마당 수도꼭지에서


 무거운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가


 그대로 물방울이 얼어버리던 밤이 떠올라


 아무것도 되지 않는 추운 날

 


 파지만 날리고 있는 무거운 날


 시의 문은 열리지 않고 닫힌 세계의 시 쓰기가


 지하 광맥의 금을 채굴하는 것이 아니라


 물방울 하나가 바위를 뚫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근작시 3편ㅣ

  

 경이로운 빛의 인간


 

 석가의 위대한 깨달음은 말씀을 기록한

 경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윤회의 사슬을 벗기고 벗겨  

 생명의 씨가 번개의 숨결로 스쳐 간

 

 궁극의 빛을 영원에서 발견하고

 멸하지 않는 생명의 빛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빛이었고 어둠이었고 광휘였던

 그 깨달음은 생명이 빛이 잠시 머무는 순간

 

 인간은 태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육신이 찢기고 거듭 죽었다가 태어나

 생명의 근원을 발견한 석가가 도달한 궁극의 빛은

 경전에 기록될 수 없는 찰나이다.

 

 생명의 빛이 사라지면 경전은

 폐지로 전락하고 말지만 구극의 빛을 성취한 인간,

 석가는 그 생명의 광휘를 밝히고

 경이로운 빛의 인간으로 중생을 구원한 것이다.


 

 


 밥 알갱이 


      

 쪽방 사람 


 술집 뒷골목 


 오줌 지린 길바닥 비추는 겨울 햇살 


 밥 알갱이 하얗다                    

 




 가을비



 세상을 다 적실 수 없어도 


 마음 한구석 외로운


 보푸라기 이는 먼지 


 쓸고 가는 몇 점 빗방울 

 

 

 

시인의 말ㅣ

  

 우리 시단의 상당수 시에서 서정이 메마르고 장황한 요설이 증폭되고 있다. 또는 난삽하고 기괴한 상상이 발동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현상은 사회적 변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적 문화가 서정을 고갈시키고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인공지능이 시를 쓰기 시작한 오늘 과연 시가 무엇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과 기계적 상상 사이에 시가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동호 시인

 경기도 수원 출생으로 고려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일본의 와세다대학, 미국의  UCLA 등에서 동서비교시를 연구. 
 1976년 시집황사바람을 통해 시인으로, 1979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평론가로 등단. 1980년대부터 30년 넘게 비평가로 활동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창작에 전념. 시집 공놀이하는 달마불꽃 비단벌레얼음 얼굴수원 남문언덕제왕나비황금 가랑잎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