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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호 Vol.28 - 정끝별


정끝별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 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함박눈이 그렇게 흑백의 점묘화를 그리던 한밤 내

 

 

 

 그래 우리는 둘이서 


 함박눈이 한밤의 길바닥에 

 번지는 잉크처럼  

 검은 그림자를 피웠다 사라지는 걸 보았지 


 가로등 아래서


 흰 점 한 점은 다다다

 흰 점 만 점은 더더더

 뜨겁게 그을린 내력 위에 살그머니 내려앉자


 금세 지워지는 한 번의 생

 무슨 자서전이길래 저리 하얗게 지우려는 붓끝일까


 먼 데서 온


 한 편의 시처럼

 그것참 행간 깊은





 사랑할래요?

 

 

 

 점점 크게 보일 뿐인데

 점점 크게 들릴 뿐인데


 나는 왜 네가 더 가까워졌다고 믿는가

 네가 더 짙어졌다고 믿는가

 따뜻해졌다고 믿는가


 너는 내가 믿는 나의 너일 뿐인데

 나는 내가 믿는 너를 보고 있을 뿐인데


 이 자리를 벗어나면 우린 서로 다른 사람일 텐데 

 나는 왜 너를 너라고 믿는가


 닭이 품은 닭의 알처럼

 아주 잠시 마주하는 혁명처럼

 지치지도 않고 네가 궁금해서


 내가 잊을 때까지 너는 너라서

 끝내 실패하기 위해서 나는 너를 믿는가


 네가 아닌 네게 닿을 때까지 

 아무도 아닌 네게 닿을 때까지




 

근작시 3편ㅣ

  

 엄마가 그린 만다라 


 

 눈이나 모래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릴 적 나도 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티벳 승려들은 돌을 갈아 그 가루를 물들여 그림을 그린다

 갈수록 좁아지는 대롱에 색색이 돌가루를 넣어 대롱 한끝 한끝에 숨을 불어넣는다


 가시인 듯 촉수인 듯

 대롱 끝에서 피어나는 다반사의 만화경 


 거기서 누군가 울고 있다 나도 때때로 눈물로 그림을 그린다 죽어가는 엄마를 요양병원에 두고 올 적 엄마 눈에 피었던 만단정회, 자주 와!


 몇 명의 승려가 몇 날 며칠의 기도처럼 그려낸 그림은 그대로 쓸어 담겨 강물에 뿌려진다


 돌가루에 숨을 불어, 없던 꽃을 피워냈으니 

 단숨에 쓸어, 없던 자리로 되돌려놓았으니, 그래 엄마!


 눈이든 물이든 눈물이든

 모래든 돌가루든 뼛가루든


 고관절을 잃고 밤낮으로 기저귀에 그리는 

 오순이라는 오랜 이름의, 엄마가 그리는 



 

 

 이별의 기술

 


 식탁에서 물컵이 쓰러졌다

 기억에서 투명한 비명이 새고 있다


 어떤 폭죽은 의지고 어떤 울음은 실수인가

 먼저 쏟아진 네가, 헤어질래요?


 멈추면 다행이고 

 흘러내리면 슬플 텐데


 눅눅한 것들이 부드러운 이유는?

 비스킷 얘기가 아니다


 식탁과 물컵을 떠난 물이 바닥에 고이면

 누룩처럼 눅눅해지고 그러면 덜 외로울지도


 비명을 훔친 엔딩에서 비밀은 완성되고

 동화책 마지막 장을 덮듯 부드럽게 


 너를 닫는다 기억이 낙루된 곳에서

 네게 쏟아져, 다시 너를 채울게

 

 


 눈 그림

 

                              

 

 눈신을 신고 걸어요 

 외따로 쌓인 눈에 발자국을 찍어요


 하얀 눈밭을 한발 한발


 눈신에 밟힌 눈이 추억처럼 패었어요

 머물다간 상처의 거처처럼 움푹 움츠러들었을까요?


 자국에 자국을 더해 길을 내고

 길이 길을 반겨 하얘진 하나 된 길을 다지면


 눈의 낙서 아니 낚시라 할까

 마음의 지도 아니 미로라 할까 


 걷고 걷다 맥박까지 하얘진다면, 마침내 겨울 끝?


 눈에 새긴 쳇바퀴들 새하얗게 다 걸었으니 

 길을 내느라 패이고 패인 다짐도, 바람 분다 길 넘자, 이제 다시 풀리고 녹을 거예요


 눈신을 벗어놓고 내일로 간 눈사람의 알리바이처럼


 그럼 또 연한 발가락이 삐죽 튀어나오겠죠?


 

 

ㅣ시인의 말

 “새 쫓는 소리에 새 모여든다”. 북을 잡은 선창꾼 소리를 받아 예닐곱의 달구꾼들이 긴 막대기를 들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에헤라 달구”를 후창했다. 

 하관 후 온 가족들이 한 삽의 흙을 세 번에 나누어 헌토를 했고 이어 석회를 섞어 뿌린 흙으로 덮어 엄마의 유택을 다지면서 부르는 달구꾼들의 노래였다. 

 울음에 묻혀, 선창하는 달구꾼의 노랫말은 뭉개져 흩어지긴 했으나 후창하는 달구꾼들의 후렴은 점점 더 다부졌다. 그렇게 엄마는 땅에 묻혔다. 죽음을 밟는 노래, 제 모태에서부터 시작된 죽음을 다지는 노래와 함께. 

 달구질이 끝나고 제를 올리자 달구꾼은, 온 가족들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둘레석이 세워질 묘지 주변을 밟으며 세 번을 돌고 내려가라고 했다. 내려가면서는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우리는 그렇게 엄마의 유택을 내려왔다.

 ‘새 쫓는 소리에 새 모여든다’라는 달구꾼의 노랫말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채우려 할수록 비워지는, 아니 비워야 채워지는, 그런 순리쯤은 알고 있다. 내 몸을 준 엄마와 엄마의 죽음을 밟는 게 내 삶이었듯, 끝을 밟는 게 시작이고 뒤돌아보지 않아야 새로운 길이 열리는 이치쯤도 알고는 있다. 그 순리와 이치를 나는 시에서 배웠고 그 자체가 시라고 믿고 있다.


 

 


 

정끝별 시인

1988년《문학사상》으로 시, 1994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평론 등단. 
시집『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와락』『은는이가』『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