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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호 Vol.27 - 송찬호


송찬호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 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그해 여름

 

 

 

 그해 여름 두 개의 태양이 떴다

 어느 게 옛날 태양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개가 하늘로 뛰어 올라갔다


 곳곳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아무 태양이면 어떤가

 어차피 뜨거울 텐데

 밤에 뜨는 태양이 무슨 소용 있을까

 구체제는 처형될 것인데


 날마다 뜨거웠다

 성난 시위대가 얼음궁전으로 몰려갔다

 얼음들이 끌려 나왔다

 기념비적인 청동상의 수염이 떨어졌다

 벽에 걸린 근엄한 초상화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희생양과 제단이 만들어졌다

 설탕과 크림으로 만든 희생양의 털과 뿔이 녹아 일그러지자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군중에 둘러싸인 광장에서는 미처 겨울로 돌아가지 못한

 눈사람이 불탔다


 포도송이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

 검어졌다

 포도알들이 비대해졌다

 극단적으로 달콤해졌다


 그해 여름 내내 두 개의 태양이 떴다

 지는 태양과 뜨는 태양이 좀처럼 구분되지 않았다

 자동차들이 줄줄이 불가마 터널로 들어갔다


 여름 내내 건물의 모서리를 물어뜯던

 개는 격리되었다

 그 내부엔 아무것도 없어

 기나긴 백일몽일 뿐이야


 끔찍한, 잘려진 붉은 머리

 덥다, 더워

 검찰관이 배로 불어났다

 이런 계약은 파기되어야 한다!





 옷장

 

 

 

 고집 센 옷장이 있다  어두운 실내 모서리에

 옷장은 모가지가 없다

 그러니 어디 매달릴 수도 없고 모서리에 붙박혀 있을 수밖에 없다


 어쩌다 옷장에서 파티가 열린다

 옷장이 잠시 환해지고 떠들썩해진다

 옷장에 새로 들어온 옷을 환영하기 위해서


 옷장 주인은 옷장으로부터

 아주 먼 데서 산다

 삶으로부터, 돈으로부터, 명예로부터 쫓겨 다니기 때문에


 옷장 문이 열리면

 미리 골라두었던 옷이 달려들어

 옷장 주인을 꽁꽁 묶어 결박시킨다


 세상은 아름다워라

 새 옷을 입고

 연인의 손을 잡고

 구름의 교수형을 참관할 수 있는 것은


 옷장에 살던 작은 신은 떠났다

 옷 한 벌을 구성하던

 옷의 여섯 조각 혹은 여덟 조각은

 피의 맹세를 했다

 창과 칼로 바느질된 산, 강, 영토, 경계. 자본, 상품을 영속시킬 것을


 결국 텅 비어버린 옷들의 헛간

 다 끝난 파티장

 공터에서 치러진 옷장의 장례식엔

 비구름과 검은 우산만 참석했다

 울음바다가 공터 주위를 흠뻑 적셨다.



 

근작시 3편ㅣ

  

 그것


 

 로프 토막이 그것의 꼬리라는 거요

 이름 모를 나무의 가시가 그것의 발톱이라는 거요

 발끝에 채여 뒹구는 조약돌이 그것의 눈동자라는 거요

 그리고, 헐렁한 자루가 그것의 몸통이라는 거요

 그 자루에 내장과 폐와 심장을 쓸어 담으면

 그것이 으르렁거리며 먹이를 쫓아 숲과 골짜기를 내달린다는 거요

 그러면서, 계약서를 내미는 거요

 그것에 서명하라는 거요

 빛바랜 털가죽에, 용맹함의 과거에, 공허한 메아리의 포효에, 흘러간 옛이야기에




 

 

 동쪽

 


 우산이 날아간 곳

 최초의 점모시나비협동조합 설립 흔적이 남아있는 곳

 하얗게 피부병을 앓는 자작나무들이 치유를 위해 군락을 이룬 곳

 길가에 슴슴한 보리빵집이 있고 그 너머

 종달새 고공 활강장이 있는 곳

 옛날에서 더 먼 옛날로 가는 기차역이 있는 곳

 의자의 발톱을 깎아 죄다 모아 버리는 곳

 아코디언 주자가 안경을 잃어버린 곳

 무지개가 연애하다 자러 가는 곳

 노을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던 곳

 

 


 단풍

 

                              

 

 조카 결혼식이 머지않아 팽나무 토막으로 목기러기 한 쌍 깎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칼질이 서툴러 이레가 지나도 기러기는 눈을 뜨지 못했다


 손에 물집이 잡히기 여러 날, 간신히 기러기 한 쌍이 완성됐다 


 한 마리는 날 엄두를 못 냈고, 또 한 마리는 잠깐 날다 간신히 저쪽 숲에 내려앉았다


 울긋불긋 색동옷을 입은 숲속 나무들이 혼례의 팔을 흔들어 맞이해 주었다

 

 

 

ㅣ시인의 말

 여름이 지났다. 올 여름은 유별나게 무더웠다. 기후 위기 때문인지 연일 이상 기온 상태의 폭염이 계속되었다. 거기에,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다 독립운동가의 흉상 이전이다 해서, 나라 안팎의 시끄러운 정치적 상황이 수은주를 더 끌어올렸다. 이제 가을이다. 연보랏빛 쑥부쟁이 서늘한 꽃그늘에서 더위에 지친 몸 잠시 쉬어 보자. 


 

 


 

 송찬호 시인

 1987년《우리 시대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10년 동안의 빈 의자』『붉은 눈, 동백』『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분홍 나막신』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