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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호 Vol.23 - 박제천

 

 

박제천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47,000가지 잡념

 

 

 옛 어른들은 머리가 복잡할 때 흔히

 오만 가지 상념에 사로잡힌다고 한다

 뇌파학자들이 측정한즉 47,000가지라 한다

 달마가 10년 정진할 때

 그 바람벽에 나타난 영상도 47,000편은 되었으리

 어린 육상산의 머릿속에 떠돌던

 위아래 동서남북, 어제오늘 오고 감이 한 집이니

 내 안에 그 한 집, 다섯 갈래 길 모두 있으니

 한순간

 우주에 피어나는 꽃 한 송이,

 아이구 머리야!

 머리통을 부수고 달려 나오는 저, 꽃 한 송이

 오만 가지 상념이 오도송으로 흘러나오는

 이 열락의 선시 한 편






 


 하늘 죽비 

 


 샅에 낀 달옹배기 북덕불에 던지면

 탁 타탁, 불에 타 죽는 모기들

 죽비 한 번 휘두를 적마다 천둥소리에

 서너 마리씩 혼절해 떨어지는 모기들

 북덕불에 타 죽는 소리, 비릿한 냄새

 머나먼 우크라이나의 모기 인생들

 지상에 나뒹굴어지는 소리, 애잔하다

 손오공과 달라

 부처님도 어쩔 수 없는 푸틴의 목숨

 하늘 천둥소리에 놀라

 북덕불에 떨어질 때까지

 밤을 도와 하늘 죽비를

 모깃불 퍼지는 우크라이나 하늘로 띄워 보낸다.



   


  

근작시 3편ㅣ

 

 이슬방울 우주


 

 뉘엿뉘엿 해가 지는 강물 반짝이는 윤슬

 모두 다

 이슬방울 속이다

 가지 마, 가지 마, 소리 뒤로 사라진

 이별도

 이슬방울 속이다

 이슬방울 물결에 떠도는 별빛,

 추억의 기록들,

 그대 입술,그대 혀,그대 숨소리

 모두 다 이슬방울 속이다

 몸을 뉘자

 꽃술을 아무리는 금강초롱꽃, 한 방울

 이슬방울 우주를 그대에게 실어 보내는 저녁노을,

 이윽고,

 이슬방울 달이 뜬다. 워 보낸다.


 

 


 

 

 날마다 좋은 날
                      

 


 누군가 잠방잠방 생각나는 날에는 솔 숲을 찾는다

 눈으로 바라만 보아도 막힌 곳 뚫어주는

 솔잎바늘에 몸을 맡긴다

 마음자리 튿어진 곳에는 햇볕을 불러

 한 땀 한 땀

 햇빛바늘로 박음질도 해주는

 솔 숲에 한나절 앉다 보면

 그만 나도 송화가 되어 노랗게 삭은 내 시름

 바람에 잠방잠방 띄우며

 허공신이나 가져가라 날려 보낸다

 

 

 

 

 

 소창다명小窓多明


                   

 천지 네 귀퉁이마다 장군봉·망천후·백운봉·청석봉을

문진文鎭으로 눌러 놓자

평평해진 물결, 저마다 물방울 창을 달고

햇빛을 불러들인다

소창다명小窓多明, 작은 창들이 불러들인 햇빛들

천지 아래 얼음물 속에 마련한 만병초 꽃밭

한 송이 한 송이 헤아리다 잠드는 기쁨,

늘어지게 한잠 자다가 깨면

얼음방석째 두둥실 떠오르니

여기가 바로 꽃자리, 꽃이 피고 꽃이 지는

물마루, 반야용선 오가는 백두나루,

오래 오래 지켜보느니,

내 한 생 맑게 빚어 피운 삶의 꽃 한 송이.



 

 

 

 

시인의 말ㅣ

 

 

 

 돈오돈수, 돈오점수, 어떤 게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절집에 가면 스님들이 명상하는 걸 보게 된다. 

 지도 스님이 죽비를 한번 내리칠 적마다 놀라 제자리를 찾는 스님을 보면 돈오가 맞을 것 같지만 인연이 그렇게 쉽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달마 10년을 보면, 달마 역시 그렇게 10년 47,000가지 잡념에 시달리지 않던가. 

 그런데 혜가는 팔 한 짝만 잘라버리고 후다닥 깨우치지 않던가.

 모두, 사람 나름이라 생각한다.




  




 

 박제천 시인

 1965~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장자시』『달은 즈믄 가람에』『나무 사리』『천기수설』『풍진세상 풍류인생』 , 저서 『박제천 시집(전10권)』『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