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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호 Vol.22 - 김병호

 

 

김병호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공 좀 차 주세요

 

 

 따라오는 발자국도 없는 저편으로 공을 보낸다


 리어카 하나 겨우 드나들 골목 담벼락 아래 아이가 있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누가 지나거나 말거나 공만 차는 아이를


 차마 지나지 못하는데


 아이는 멀리 다녀온 얼굴로 담장 안의 벚나무를 자꾸, 깨운다


 먼바다로 밀려가는 절벽의 종소리 같다


 외롭다거나 쓸쓸하다는 말은 아직 먼 말이어서


 그저 심심한 한때라고 불러줘야 얌전해질 것 같은 오후다


 이젠 당신이 벚나무 차례다





 


 고양이가 비켜서지 않는다 

 


 구름이나 오후를 따라가다 

 벚꽃 피는 시간처럼 늙는다


 돌부리처럼 앞을 막은 고양이를

 언니라고 부르면 안되나


 아직 더 가난해질 게 남은 듯

 눈빛이 고인다


 돌아갈까 잠시

 망설여도 본다


 처음이 없는 기다림처럼

 연습한 믿음은 없다


 어느 울음을 지워야 

 구름이 멈출까


 함부로 길들여진 저를 

 까맣게 잊는 일처럼 난처하다


 놀랄 일도 없이, 꽃잎이 기울고

 고양이가 지워진다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들은 

 오지 않고 


 사나흘 전에 빌려온 그림자처럼 

 울음이 말라가고


 오늘은 아파도 될까

 언니에게 묻는데


 날씨나 구름처럼 

 점괘가 없다



   


  

근작시 3편ㅣ

 

 더 기다리면 안 되나요 


 

 밤이 접혔습니다

 이 밤은 또 누구의 빈집일까요


 놀이터에 앉아 노래가 다 되도록

 하늘을 당깁니다


 그네는 표정만 간직하는 궤적이어서

 곰곰이 있으면


 더 높게 차면서

 더 깊게 헤어지는 일이


 모과나무보다도 훌쩍 자랍니다


 녹슨 손잡이처럼 모과를 바라보다

 달을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겨울로 떠나는 밤입니다


 발목을 내어줄까요

 마음을 건네줄까요


 반동으로 자라는 당신의 안부입니다


 기다리는 일이 간곡해지면

 다정할 때마다 도망치는 나쁜 버릇이 됩니다


 조금씩 버려지는 마음이 자라면

 밤마다 잠을 새로 배우는 기분이 됩니다


 밤이 한 번 더 접힙니다


 그새 모과는 멍을 새기고

 나는 당신이 올까, 두렵습니다


 

 


 

 

 시시하게 졸졸졸 
                      

 


 지천명의 친구는 어벤져스를 보다 펑펑 울었다고 했다 함께 있던 아들이 놀라 묻더란다 아빠 왜 울어? 히어로가 죽었잖아 친구들은 벌써 갱년기냐고 놀렸지만 짐작이 가지 않는, 남의 일은 아니었다 문상객 뜸한 상가喪家를 무연히 지키다 유리창에 스미는 새벽빛을 보았다 생일을 며칠 남기고 가버린 친구의 자리가 저쯤이겠다 싶었다 출근을 핑계로 하나둘 자리를 나서다 팔차선대로 중앙선에 서서 나란히, 야간자율학습 팽개치고 도망치던 그때처럼 나란히, 오줌발을 날렸다 다만 그때는 다섯 지금은 넷, 우리는 아이언맨도 캡틴아메리카도 헐크도 아니어서


 시시하게 졸졸졸

 쩨쩨하게 졸졸졸


 바지춤을 추스르는 사이 경적을 울리며 덤프트럭 하나가 지나간다 제기랄, 집에도 가기 싫고 회사도 가기 싫고 그렇다고 딱히 갈 데도 없는데 제기랄, 아직 초등학생인 그 집 늦둥이는 어쩌나 싶은데 제기랄, 친구 없이도 내일이 와버렸다 우리는 한복판에 갇혔다

 

 

 

 

 

 시인수첩 


                   

 내게 붙은 귀신은 정이 많아서

 매일매일 밤이 알약처럼 환하지


 달이 백 개 있어도

 모두 문 닫은 텅 빈 거리


 길가 눈먼 돌멩이에게 비는 마음

 낭떠러지 시커먼 파도에 비는 마음쯤은

 그때 버려야 했을까


 세상의 공손은 모난 무릎 밑에 고이고

 애쓴 마음은 독이 되고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울음보다 비참에 가까이 가는 일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들처럼

 지붕 위 귀신들과 다정해지는 일


 아프지 않고 두렵지 않고, 기꺼이

 남은 삶을 독으로 살아야만 하는 일


 오늘도 숨을 데가 없어 

 불현듯 생을 빠져나갈 수 없는 밤


 철이나 홍이나 현이나 

 멀지 않은 이름의 귀신들이, 그래서

 더욱 정다운 밤



 

 

 

 

시인의 말ㅣ

 

 

 

 봄이 되면 최소한의 숨으로 살아갑니다.

 저에겐 봄처럼 어려운 계절이 없습니다.

 보풀처럼 해진 마음이 좀처럼 감춰지지 않습니다.

 누군 귀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얼굴이 빤한 귀신들이어서 가끔 먼저 안부를 묻기도 합니다.




  




 

 김병호 시인

 2003년《문화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달 안을 걷다』『밤새 이상을 읽다』『백핸드 발리』가 있음. 

현재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