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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호 Vol.21 - 최문자

 

 

최문자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끝

 

 

 이응의 세계는 부드럽다.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응 이응” 여러 번 소리 내서 읽고 나면 내가 살아나고 네가 살아나고 터지고 싶은 풍선 사이로 헤어지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헤어져야 살아나는 것들이 있으니까


 개미들이 이응같이 생긴 둥근 빵을 물고 돌아오는 저녁 분홍 꽃잎들이 개미들이 나를 함부로 건너다녔다 가장 자유롭게, 발견해주기를 바라면서 새끼 개미가 물어도 내 피는 엉겨있었지 어젯밤 사람들이 꾹꾹 밟고 지나간 자국을 보다가 발자국이 되었던 발등은 무겁다가 슬프다가 그에게 끝, 끝하고 외치고 돌아왔다. 머리에 샴푸를 얹고 끝없이 물을 뿌렸다 거품과 거품 사이 끝과 끝 사이 물과 물이 닿고 끝과 끝이 섞이다 물은 사라지고 다시 끝만 남았다 불이 꺼지지도 켜지지도 않는 거실에서 쿰쿰한 냄새가 났다 긴 밤 가득 내가 끌어들인 끝이 흰 알들을 낳고 있었다  

 오히려 끝보다 겨울이 필요해 여름에 너무 붉다고 단번에 꽃에 파묻혔죠 파묻히는 동안 다

른 사람들은 개미들은 움직였다


 언제나 떠난다


 가고 나면 놓고 나면 하고 나면 붉은 신호 앞에서 눈을 뜨지 못했다 이응이 아닌 것들 너무 무거워

 꽃을 내려놓겠다 

 불완전한 곳이라도 


 물에 빠지는 일

 정지하는 일

 꿇지 못하는 무릎 몇 개 마구 생긴다

 혼자 죽는 이응들








 시간들 

 


 숨기고 있었어

 나를 누르고 있는

 가득한 바위들

 사실은 가득한 시간들이라고 해야  맞아


 어제는

 슥슥 지워졌어

 하나님을 어디에 두었는지 영 생각이 안 났어

 슬픔도 추상적이라 소리가 안 나

 친구가 물었어

 마지막 사진을 찍고 싶냐고

 대답이라도 하듯

 꽃들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마구 벌어지고 있었어

 멈추게 할 수 없었어 


 어제는

 내 이름이 이상했어

 담요 같은 이름에서 깨어나고 싶었어

 이름은 계단 같았어

 이렇게 차가운 계단을 수천 번 오르내리며 꿈을 꾸고 눈물을 흘렸어


 오늘

 풀이 길어진 걸 보았어

 멍하게 있다가도 불현듯 꽃을 달았어

 시를 쓰다 길어지면 

 담요를 벗고 나오면

 무슨 색이 될까?

 걸음을 멈추고 모두 뒤돌아볼 거야

 나는 거꾸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겠지



   


  

근작시 3편ㅣ

 

 기체로 되어있기


 

 겨울이 왔을 때 

 우리는 공기와 함께 이동했다

 식물들은 아팠지만

 눈송이는 헤엄치는 기분으로 아름다웠다

 죽어라 하고 부동한 자들과 있다가

 기체로 있으면

 혼자 있는 기분

 할 수만 있으면 기체가 되세요

 저 너머 어제의 긴 강 따라 

 자욱하게 뿜뿜 구름 잔뜩 흘리며

 다른 아침

 다른 강가에

 다른 곳의 기체가 되세요

 내 사랑


 불을 딱 껐을 때

 몇 줄기 마지막 빛이 보였다

 겨울엔

 무시무시한 얼음들이 돌아온다

 모든 어둠에게 막 쫓기면서

 힘이 없는 자처럼 하고 

 박스 안에 갖힌 스무 살짜리 절망인 것처럼 하고 

 어둠에 실패한 

 70%의 빛들이

 뭘 잘못하지 않고도 헤어진 사람들이

 병이 깊어서 돌아온다

 기체가 되세요

 알아볼 수 없게

 내 사랑


 

 


 

 

 새와 정오
                      

 


 딸이 고개를 숙이고 고추밭을 지나갔다

 무엇을 숙이고 싶었을까

 갑자기 서툰 영어로 묻고 싶었다

 정오의 시계처럼 새들이 울 곳을 찾아 날아다니고 있었다


 발이 푹하고 빠질 때마다

 구름을 더 그려야겠다

 해바라기꽃을 더 그려야겠다

 고추밭 절반을 베어내야겠다


 고추밭 사이에서 새가 울고 

 시계들이 정오를 알렸다

 베어낸 고춧대가 아직 서리 밭에 있었다

 죽거나 드문드문 빨갛거나 새파랗게 마르면서

 무심한 돌들은 이리저리 고개를 숙이면서


 고추밭에 길을 만들고

 그 길로 지나갔다

 훌쩍이던 푸른 고추들은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내일 아침 눈물 없이 빨개질 것이다


 

 

 

 

 

 여름과 마음


                   

 세 이번 여름

 몇 개의 마음을 만들었는데

 지난 봄에 먼저 가 있던 마음을 옆으로 밀어놓고

 다른 마음을 만들었는데

 나 혼자 만들었는데

 왼손잡이 손으로 어설프게 만들었는데

 은밀하게 고요하게 만들었는데

 꺼내 보니

 언덕이고 척박한 모래땅 

 왼쪽 팔을 쭉쭉 뻗어봐도 

 손에 잡히는 마음 하나 없었다

 

 오늘은 

 마음이 모두 죽어버리는 날 

 가슴을 꿰맨 죽은 어머니의 마음과 나르키소스를 애도하는 호수가 보였지

 

 여름에서 나와보니 마음은 바깥이었다

 밖을 옮길 수는 없었다

 갑자기 맘에도 없던 도시가 나타났다



 

 

 

 

시인의 말ㅣ


 시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시작 메모나 시인의 말을 쓰라고 청탁할 때마다 나는 난감하다. 시 쓰기보다 더 어렵다. 시의 생물성 때문이다. 시시때때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물성을 어떻게 짧게 응축해서 그때그때 표현할 수 있을까

 ‘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뇌’라고 모 문예지에다 한 줄 쓴 적 있다. ‘분명 내 혈관에서 꺼냈는데 나와 어긋나있는 것을 쓴 것이다. ‘비극으로 내려오던 중에 만난 시지프’라고도 썼다. 예전에 철없이 자꾸 이런 것으로 시의 생물성을 오염시킨 것 같아서 무안하다. 나중엔 힘이 빠졌다.

 또 ‘시는 구덩이 반, 꽃 반’이라고도 썼다. 꽃도 나도 구덩이라는 비극 앞에 자주 엎드린다.  약자의 어지럼증을 구덩이는 잘 알고 있다 구덩이와 꽃의 비극적 실제 공간 구덩이도 아닌 꽂도 아닌 그 사이를 바라본다. 허공을 밀며 먼 우주로 뚫린 그곳 신비한 것들은 다 그 사이에 있다 그 사이에서 손잡이도 없는 미끄러운 시를 잡으려 한다고 사족도 달았다.

 『문학동네』 서 출간된 시집 『파의 목소리』에 쓴 시인의 말이 그래도 그중 나의 시적 진실과 가장 닮아있다. ‘나쁜 습관이 있다. 중요한 것을 팔아서 덜 중요한 것을 사버린다. 참으로 무익했다. 어쩌면 나는 하찮은 것에 매혹된 자였고 이 매혹이 나를 매일매일 놀라게 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세상의 중요한 약속을 어기거나 포기하고 많은 것들과 결별할 때 시가 써졌다. 파의 매운 기분을 사랑했다. 온 군데 매운 파를 심어놓고 파밭에 나가 있었다. 그들은 힘껏 파랬다. 파밭에 서 있으면 쓰라린 파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2015년 여름, 파밭에서  

                                

 시인의 말이나 시에 대한 생각이 매번 달라질 수는 없다. 그냥 이런 생각을 해본다. 좋은 글이 있다면 그 글을 쓴 사람도 좋을 가능성이 높다. 좋은 시 한 편을 감동적으로 읽었다면 좋은 사람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시가 아니었다면 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쉽게 하고 다니는 시인들을 나는 우선 경계한다. 이런 시인이 정작 창작에는 소홀하고 쉽게 지치는 것을 여럿 보아왔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나는 시원하고 차갑고 이성적이며 쿨한 사람인 것보다 살아 움직이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시원하고 쿨하고 매듭이 확실한 것은 모두 사랑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슬라보에 지잭은 「성적 차이의 실제」에서 “오직 불완전하고 결여되어 있는 존재만이 사랑을 한다”라고 말했다. 순간의 감정이긴 하지만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며 두려움 공포와 번뇌 뜨거움 난해함 이 불편한 모두도 살아있는 사랑의 감정이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들은 우리를 그대로 편안하게 내버려 두지 못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까지 가혹하게 하는 강박증적이다. 말라르메뿐만 아니라 광기와 착란 속에서 살았던 고흐의 삶도 그렇다. 그렇다고 좁은 방에 갇혀서 꽃과 풀을 노래하는 것만이 시인의 편안하고 즐거운 삶은 아니다. 우리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건 어미 소를 잃은 어린 암소의 울음 같은 진한 슬픔이 있다거나 호랑이처럼 물어뜯고 싶은 무서운 감정도 있고 이유 없이 시무룩해지는 나만의 개인적 우울한 감정도 있다. 시인의 감정을 움직이는 생물은 기쁘게 살지도 죽지도 않는 기복이 심한 생물체이다.



 저녁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라는 이 시간은 해가 지고 있는 저녁에 해당된다. 저녁은 붉다. 이 붉은 저녁을 지나가면서 나는 많은 기억을 품은 채 말없이 걸어가고 있다. 기억은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또 탄성을 가지므로 내 안에서 무한이 다른 부분들과 작용하고, 잠재적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다. 매복하고 기다리고 침묵시키고 시가 써지는 기억은 가장 오래된 동굴벽화다.



 


 




 

 최문자 시인

 1982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사과 사이사이 새』『파의 목소리』『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해바라기밭의 리토르넬로』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