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시인
  • 이달의 시인
  • HOME > 이달의 시인 > 이달의 시인

2023년 2월호 Vol.20 - 이승은

 

 

이승은 시인

신작시조 2근작시조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조각 봄 

 

 

 -온천 

 노천탕에 들어앉아 바라보는 하현의 달 

 만월의 테두리는 어디로 흩어졌나

 뽀얗게 김이 서리자 그마저도 지워지고


 -치레

 동백은 이제야 붉고 매화는 망울뿐인데 

 이른 봄 미황사에 성급히 마중 나온

 양지쪽 산수유꽃만 눈인사가 한창이다

 

 -보라, 보라 

 딱 꼬집어 말 못 하는 종지나물 고깔제비꽃  

 붉다가 푸르다가 그도 아닌 먼 둘레를 

 해거름 발이 닳도록 걸어오는 저 빛깔,


 -우수 무렵

 울음을 참은 지가 몇 달은 됐나보다

 진부령을 돌아서자 폭포가 울고 있다

 다 얼어 숨겨져 있던 더 언 것도 내보이며

 

 -단디 무라

 아는 이만 찾는다는 부산 영도 ‘멍텅구리집’ 

 푸짐한 문어숙회 값 치르기 황송한데  

 한 방에 날려버리는 벽에 붙은 메뉴판

 

 -미정국숫집

 멸치국수 한 그릇씩 점심으로 마주 놓고

 마음을 더듬어서 눈 맞추며 먹던 자리

 창가 쪽 빈 테이블에 긴 햇살만 앉아있다 

 

 -나무물고기

 낙산사 전각 아래 풍경으로 걸려있다

 까마득히 떨어지다 공중을 날았겠지

 한 줄금 봄비에 씻긴 이마께가 드맑다

 

 -읍천항 주상절리

 바닷길을 질러오던 너울이 잦아들자 

 개켜진 원앙금침 윤이 나는 돌베개들 

 달빛도 숨죽인 한밤, 누가 사랑을 하나보다 

 

 -삼월 낮달

 한강 변 보광동에 종점이 없어졌다

 수몰된 고향처럼 덩그런 하늘길에 

 81번 옛 시내버스, 희끗한 바퀴 자국







 마랑고니 

 


 늦은 밤 따라놓은 한 잔의 레드와인

 이별주는 아니라고 가볍게 흔들었지

 무엇을 그리 참았나, 고여 드는 눈물방울


 섞이면서 휘발되는 사랑도 표면장력

 그렇게 오기까지 남겨 둔 숨결들이

 한 번씩 질척이는 걸 모르는 척할 수밖에 



   


  

근작시 3편ㅣ

 

 꽃집에서  


 

 봄이든 여름이든 

 꽃집은 늘 꽃집이다


 꽃들을 어르면서 

 말문을 트는 동안  


 버티는 

 내 곁가지를 

 잘라서는 버리고 


 세상일에 부대끼며 

 쓸쓸하고 격해질 때 


 슬그머니 눈치 보는 

 꽃가위가 저만치


 단번에 휘두를 뜻은 

 없다는 듯 저만치

 

 


 

 

 블라디보스토크, 하루
                      

 


 하얼빈행 열차 칸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들의 그날 아침 마지막 본 식구처럼 차창 밖 새털구름엔 붉은 기운 감돌았죠


 꼭 다시 돌아오마 다짐은 했을까요, 새겨둔 이름들이 늑골에 사무쳐서 한동안 울컥거리며 눈길을 피했었죠


 들어 알고 있다 한들 예 와서 알았던들 시베리아 횡단까진 엄두도 못 내보고 피멍 든 바퀴 자국만 철길 따라 헤아렸죠 


 멋쩍게 이제 와서 맹세니 서약이니 얄팍하게 얼굴 드는 울분도 사치라서 가슴팍 숨긴 총구로 허공이나 거덜 냈죠


 

 

 

 

 

 앵무새 길들이기


                   

 새 세상 열어보자, 앵무새에 던진 한 표 

 내가 뽑아 길렀는데 이젠 나를 길들이네

 두뇌와 구강 구조가 애초에 다른 우리


 가르쳐준 공약대로 바뀌는가 싶었는데

 벌써부터 꿈꾸는 건 새 세상일 줄이야  

 부리를 옴죽거리며 자꾸만 딴소리네



 

 

 

 

시인의 말ㅣ


 축적의 단계를 넘어선 지금,

 

 

 양자 세계에서 양자가 계단을 뛰듯이 불연속적인 흐름을 보이는 현상을 물리학적 용어로 퀀텀 점프Quantum Jump라고 한다. 어떤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발전 과정이 조금씩 일정하게 위로 나아가며 기울어진 직선이 일반적인데, 이 경우는 정체를 유지하다 어느 순간 급작스레 뛰어오르는 계단 형태의 그래프로 나타난다.

 인간 또한 어떤 결과물을 발산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축적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이렇게 내공을 쌓아가는 과정은 어제보다 오늘 한 걸음 앞서 있고 오늘보다 내일이 앞서가는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기나긴 시간을 제자리걸음 하다 어느 순간 비약적으로 뛰어올라 전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잠복기간을 거치며 모은 힘이 폭발적으로 발산,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원리를 『삶의 정도』의 저자 윤석철 교수는 ‘우회축적’이라는 용어로 설명해 냈다.


 우리는 목표점까지 최단 경로의 직선을 긋고 싶어 한다. 그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으로 목표점에 도달하는 움직임은 직선이 아니라 굴렁쇠의 일정 부분을 연상시키는 사이클로이드 곡선을 그리며 목표점을 우회하는 방식이 아니었을까.

 매는 오랫동안 하늘을 날다가 먹잇감을 발견하면 당시 위치에서 목표까지 직진하지 않고 계단모양으로 움직인다고 한다. 즉 스스로를 수직에 가깝게 땅으로 내리꽂아 속도를 높인 다음 그 힘을 받아 먹잇감까지 수평에 가깝게 나는 것이다. 영문자 L에 가까운 형태로 움직였기에 이동 거리는 기울어진 직선보다 훨씬 길어지지만 급전 낙하하여 얻은 속도는 중력의 도움으로 목표점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훨씬 줄이게 된다. 


 민족의 정신, 시조를 생각하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끌어온 것도 이와 다름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시조 창작도 분명한 목적이 정립되어야 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을 마련해두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목적에 도달하기까지의 제자리를 걷는 과정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말로 풀자면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참신한 발상과 비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무엇을 견뎌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숙고의 시간은 길고 결단의 시간은 짧은 게 좋은 결과를 낳는 이치와 같다. 


 오래되었으나 미래로 가는 지름길인, 살아있는 장르로서의 시조의 호흡을 지켜내고자 한다. 그러나 시조를 바라보는 학계 언론계 평론계의 시각이 교정되지 않는 한 시조의 발걸음은 더뎌질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소재 채택과 언어 사용의 문제가 현재와 괴리되어 있지 않기를 바란다. 예술성과 서정성을 바탕에 두고 의식적으로 사회적 관심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작품성 있는 참여시도 발굴해야 할 것이다. 이슈 속으로 들어가야 존재를 알릴 수 있지 않겠는가. 사회적 기능이 인정될 때 격과 감응이 내재된 관심을 끌 수 있다. 

 어쩌면 시조는 축적의 단계를 상당 시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시조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원로들의 노력과, 신진들의 실험적 노력이 상당 기간 지속됐고 어느 정도 조화를 이뤘다는 생각이다. 새봄, 이제는 도약이다.


 


 




 

 이승은 시인

 제1회 만해백일장 시조대상(1979) 같은 해 문공부·KBS주최 전국민족시대회 장원으로 등단.

 시집『첫, 이라는 쓸쓸이 내게도 왔다』『어머니, 尹庭蘭』『얼음동백』『넬라판타지아』『환한 적막』『꽃밥』『시간의 안부를 묻다』『길은 사막속이다』『시간의 물그늘』『내가 그린 풍경』 태학사 100인 시선집 『술패랭이꽃』 이 있음.

 백수문학상, 고산문학대상, 중앙일보시조대상, 이영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