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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호 Vol.04 - 오정국

 

 

오정국 시인

신작시 2편, 근작시 3편, 시인의 말

 


 
신작시 2 

 

강기슭 밤낚시

 

  

 

주천강 강기슭 거기뿐이겠어요

밤은 무시무시하게 오는 겁니다

 

이젠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제 목덜미를 감아쥐는 물줄기가 있고

더 이상 머리를 들이밀면 헤어날 길 없는데

여울목 돌덩이에 이마를 찧는

물살이 있습니다

 

저희들끼리 얽어 짠 팀워크입니다

 

수면에 떠 있는 검은 눈동자

수달의 물갈퀴가 공중으로 솟구칠 때

두어 마리 물고기가 토해집니다

그토록 숨죽였던 순간순간이

저렇듯 꽃피듯이 작렬합니다

 

그 어디 주천강뿐이겠어요

낚싯줄 한 가닥에도

밤은 팽팽하게 휘감겨오고

 

옆구리가 다시 서늘해집니다

저 오랜 물길 없이는

무시무시한 깊이 없이는

()의 물빛이 이리 고요할리 있겠습니까?

 

 

 

 

 

남부터미널

 

 

 

누군가 화장실에 코피를 쏟고 갔다

남쪽은 멀고먼데

어쩌자고 여기에

 

터널과 터널과 터널 끝의 어디쯤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귀성객이 U턴하는

 

거기, 담벼락의 낙서 같고

컨테이너 지붕의 칡넝쿨 같고

형님이라고 불러놓고는 비비적거리며 엉겨 붙는

막돼먹은 사투리의 고향 후배 같은 남쪽들

 

여기도 남쪽, 남쪽이긴 했으나

무엇 하나 표해둔 게 없고

건져낼 게 없구나

 

누군가 가방을 놓고 갔다 얼굴을 두고 갔다

팔다리를 잃고 갔다 담뱃불 흉터를 남기고 갔다

 

저 발걸음들

시시각각 엇갈려서 천지사방 흩어지고

새들이 아득하게 하늘을 난다

가드레일이 무너지고

송전탑 철골이 휘어지도록

남쪽은 거기, 여전히 그렇게

 

도로공사 표지판처럼

텅 빈 창고의 문짝처럼

 

 


근작시 3



먼눈으론 알아볼 수 없었던

-외지(外地)1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허구와 허구가 뒤섞이고, 스토리와 스토리가 엉키듯

당도한 곳, 이곳이 외지다

 

지금 내 가슴을 열어보면

번갯불의 거울조각과

뽕나무 등걸의 검붉은 나이테,

표지가 뜯겨나간 몇 권의 책이 있다

 

여기서 나는

차갑고 불길한 불꽃의 책*을 읽었다

 

너무 짧거나 긴 생애들

 

가당찮은 우연의 목록을 뒤적여보면

엇갈린 사랑의 기나긴 이별

검은 상처의 블루스**

질척거리는 길바닥을 떠나지 않는구나

 

먼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던

세월의 철길 아래

회오리치듯 뻗어가는 담장의 꽃들

철따라 익어가는 붉은 열매들

 

이제 내 가슴을 들여다보면

발을 헛디딘 흙구덩이와

타다 만 숯덩이,

새의 날갯죽지 같은 게 흩어져 있다

 

샤를 보들레르가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악의 꽃이라는 책은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입고 있습니다.”라는 편지글.

** 미국 흑인 영가Broken Promises

 

 

 

추락을 견디면서 몸을 불태우듯

-외지(外地)‧3

 

 

 

몇 걸음쯤은 비켜갈 수 있었을 텐데, 유리창엔 흙먼지와 날벌레, 십자가 형상의 테이프가 말라붙어 있다 그는 공중의 십자가를 향해 성호를 긋는다 쐐기풀이 그의 입으로 들어오듯, 아베베, 쐐기풀이 입천장을 긁듯, 아베베

 

골목의 승용차들, 운전대의 손가락이 하얗다 골목까지 이어진 아스팔트의 검은 띠, 녹물 낀 수도관을 교체한 흔적이다 연립주택 주차장의 널브러진 개, 갑자기 목줄을 흔들며 뛰어오르더니, 대가리를 허우적거리더니, 잠자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밤하늘의 별이 진다 추락을 견디면서 몸을 불태우듯, 창문이 환해지고 나무들이 캄캄해지고, 그가 이마의 흉터를 더듬는다 쐐기풀을 문지르듯, 아베베, 쐐기풀에 뒹굴듯, 아베베, 그도 이젠 제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섣불리 손댈 수 없는 얼굴

 

이마에 재를 바르고

이마에 재를 바른 손가락을 헤아려본다

거기에 매달렸던 기도와 눈물을

 

나는 재의 얼굴로 거리를 지나간다

재의 얼굴은

사막 여행자 같다

 

양의 귀에 내 죄를 속삭이고

칼자루에 힘을 줬던

벌판, 수천 겹의 밤길을 헤쳐 온

낡고 거친 이마를 씻고 문지르지만

 

재의 얼굴은 무심하다

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재의 얼굴로

나를 지나간다

 

눈구멍을 움막처럼 열어둔 채

벙거지 하나 걸치고

매일매일 딴 세상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애도하면서

 

 

시인의 말

 

육성의 시, 야생의 목소리

 

 

 

시인은 찰나의 감각에 눈먼 자들이다. 감각에는 형식이 없다. 감각을 판단하는 인식은 그 다음에 온다. 시는 영적인 계시처럼 순식간에 지나간다. 무의식의 언어들이 섬광처럼 사방을 밝히는가 싶더니, 캄캄하게 불타서 사라져 버린다. 억겁의 우주로 되돌아가고 만다. 찰나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찰나는 변질되지 않는다. 그 타임캡슐을 잡아두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쓴다. 참으로 허망한 진실이다.

시는 거대한 관념의 추상체이다. 누구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형상 저편의 이데아는, 라캉이 언표했던 실재계(實在界,the real)는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다. 여기에 시인의 절망이 있다. 모든 시는 실패작이다. 실패의 얼룩만 종이에 남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패할 것인가? 내 시작활동 초기는 눈앞의 삭막한 현실을 담아냈으나 차츰 삶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행하기 시작했다. 결코 해명되지 않고, 해명될 수 없는 명제를 떠안게 된 셈이다.

나는 내 삶을 육성(肉聲)으로 증언하는 일,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립싱크 같은 가성(假聲)의 목소리를 경계하고자 했다. 자신을 교묘하게 감춰놓는 언어미학의 연금술을 믿을 수 없었다. 시인 자신이 연금의 불구덩이에 몸을 들이밀지 않은 채 언어를 한낱 기표로 사용하는 언술방식을 따를 수 없었다.

육성의 언어는 고통스럽다. 거기에 몸을 비벼야 하고, 생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속하기 이를 데 없는 생의 현실을 거듭거듭 겪어내는 일, 자신의 실존을 던져 넣은 일, 그 일을 가까스로 버텨온 셈이다. 나의 시는 목숨의 허기를 따르는 길이었다.

 

나는 시를 쓰면서 다음 두 가지를 금지약물로 여겼다. ‘자연복제는 자연물을 이상향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거기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시켜 비유와 상징을 만들어낸다. ‘가족극장은 결국 휴머니즘을 지향하기 마련인데, 독자를 억압한다. 다분히 복고적이고 전근대적인 언술이 아닐 수 없다. 옥타비오 파스가 말했던가, “현대시는 현대시이면서 동시에 현대시에 대한 비판이 되어야 한다.”“결국 시편은 빔(vacio)-인간의 모든 작위(作爲)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이라고. 시는 잠언이 아니다. 격문도 아니며, 경전도 아니다. 음습했던 기억의 생환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시는 목숨의 들숨날숨을 받아 적는 일이다. 리듬이 그러하고 언어가 그러하다. 리듬은 시의 행과 행을 흔들며 저들끼리 어울리지만 언어는 한 발짝도 그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시인의 절망이 있다. 나는 자꾸 중얼거린다. 중얼거리지 않고선 시가 되지 않는다. 중얼거린다는 행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몸짓이자 무의식의 언어를 불러내는 작업이다. 무의식의 데이터가 시를 쓰게 한다. 내가 한 편의 시를 써놓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명료한 의식으로 시를 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식으로서의 시’ ‘표현으로서의 시를 털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여전히 막막하다. 오장육부가 들끓어 거친 숨이 토해지듯, 그런 시를 쓰고 싶다. 참 많이 떠돌았다. 방학이 되면 해외나 국내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녔다. 길 위에서 나는 행복했고 얼굴이 가장 빛났다. 그 황홀했고 처연했던 중얼거림을 시에 담았던 것인데, 나는 기다린다. 저 산 계곡의 눈바람처럼 거칠고 험한 목소리를. 문득, 게리 스나이더의 마음의 심연, 무의식은 우리의 내적인 야생지대이며 그곳이 바로 지금 살쾡이가 살고 있는 곳이란 말이 생각난다. 무의식의 야생지대, 생명의 근원적인 허기가 숨 쉬는 자리가 아니겠으랴. 원컨대, 무의식의 살쾡이 같은 것들이 다시 나를 찾아와주기를.

 

 

 


 

 오정국(吳廷國)

 1988현대문학등단.

 시집 파묻힌 얼굴』『눈먼 자의 동쪽』『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시론집 현대시 창작시론 :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야생의 시학등이 있음.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