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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호 Vol.36 - 허형만


허형만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ㅣ신작시 2편ㅣ

  

 외딴곳

 

 

 외딴곳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사나이

 그의 기도 소리에 

 침묵이 귀 기울이는,

 달려오던 바람도 숨소리를 죽이는 곳 

 별빛이 내려와 함께 자리하는 

 외딴곳에서 눈물 흘리는 사나이 

 세상 온갖 소음이 미치지 않는 곳

 사람들로부터 입은 상처를 싸매며 

 얼음처럼 차가운 외딴곳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나이 

 자비를 비는 사나이 외로운 사나이 

 



 삑사리 

 

 

 점심을 마치고 친구 따라 참 오랜만에 당구장에 갔다.

 얼마 만인가, 초크를 묻힌 큐가 가볍다. 

 내 차례가 되어 독수리처럼 노려보는 공

 각도를 재고 조심스럽게 큐를 미는데, 아뿔싸 

 풀기 없는 손가락에서 큐가 그만 미끄러져 공을 헛치고 말았다. 

 친구들이 깔깔대며 늙어서 힘이 없다고 놀린다.

 그날 당구 점수는 내가 제일 낮았다. 

 세수 팔십을 앞둔 나이에 돌아보니 큐가 미끄러지듯

 그동안 얼마나 많이 미끄러졌던가. 얼마나 많이 헛쳤던가. 

 용 가는데 구름 가듯 순리 따라 살아온 삶인 줄 알았는데

 어쩌다 부르는 노래는 음정이 어긋나고

 지는 꽃 앞에서 속울음 한번 제대로 토하지 못하고

 그렇게 한 생애가 삑사리 삶이었다.  



 

 

 

 


 ㅣ근작시 3편ㅣ

  

 불면의 노래



 내가 이렇게 잠 못 이루는 것은 

 이 한밤 누군가 잠 못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잠 못 이루며 먼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 길 위에서 새벽을 부르고 아침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가다가 잠깐 멈춰 뒤돌아보고 

 찍힌 발자국 하나하나 퍼덕이며 날아오르거나 

 땅속으로 스르르 스며드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지나온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찬 공기만 무장무장 쌓입니다. 

 누군가 잠 못 이루며 가는 이 한밤

 진심으로 평화를 빌며 

 내가 잠 못 이루며 갑니다. 




 


 외진 곳 



 잠실나루역에서 택시를 탔지 

 아산병원으로 가주세요

 출발하여 가다가 기사님이 물었어 

 동관이요? 서관이요? 

 아 참, 장례식장이라고 답했어 

 기사님이 말했지 

 손님께 장례식장은 물어보지 않는다고

 순간, 기가 막힌 배려라고 답했어

 동관도 서관도 아닌 장례식장은

 그 병원에서 밖으로 나가기 좋은 외진 곳에 있었어

 죽은 사람 만나러 가는 길도 

 죽은 사람 영구차로 떠나는 길도 

 저승으로 가기 좋은 길목이라는 듯 말이야

 맞아, 대형병원 장례식장은 다 외진 곳에 있어 

 멀리 가는 길, 좀 더 빨리 가라는 배려일 터이지만 

 혹시 그거 알아?

 외진 곳은 어디나 어둡고 쓸쓸한 곳이라는 거 

 살아있는 사람의 눈물이 고인 곳이라는 거 


 



 

 온몸으로  



 산 하나가 무너져 내려 도로를 깔고 누워버렸다. 

 산도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지진이 한 도시를 뒤죽박죽 엉망으로 만들었다. 

 얼마 후 그 도시로 밀려드는 쓰나미에 완전 쑥대밭이 되었다.

 바다도 온몸으로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한여름 몇 날 며칠 폭우도

 한겨울 몇 날 며칠 폭설도 

 하얗게 밤을 갈아 날을 세우는 시의 칼날도 

 불꽃으로 타오르는 피맺힌 한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싶은 거다. 



 




 ㅣ시인의 말ㅣ

  

 나는 시를 쓸 때마다 나짐 히크메트의 시 「진정한 여행」 중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는 구절을 떠올린다. 지금 쓰고 있는 시가 아직 씌어지지 않았던 훌륭한 시가 되어주길 희망하며 쓴다.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기에 오늘도 시 한 편을 찾아 무한히 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나의 시에 대한 희망은 써야 할 때 쓰지 않으면 쓰고 싶을 때 쓸 수 없다는 나의 평소 신념을 더욱 굳건하게 한다. 

 

 

 

 

 

 

  

 

 허형만 시인

 1973년『월간문학』등단. 

 시집『황홀』『바람칼』『만났다』등. 

 중국어 시집許炯万詩賞析』, 일본어 시집『耳な葬る』.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현재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