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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호 Vol.18 - 유종인


[시로 읽는 노자 이야기]

 노자(老子)와 시마(詩魔) (마지막 회)



 제71장 第七十一章 知病

  

  知不知上*1

 不知知病

 夫唯病病 是以不病

 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으뜸이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하는 것은 병이다

 무릇 오직 병을 병으로 여기면 그 때문에 병을 앓지 않는다

 성인이 병을 앓지 않는 것은

 병을 병으로 여기므로 병을 앓지 않는 것이다

 

[補註]

 *1 : [백서본(교감판)] 알지 못함을 아는 것은 (수준이) 높은 것이고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것은 병이다. 성인이 병을 앓지 않는 것은 (자신의) 병을 병으로 여기므로 병을 앓지 않는다. (知不知 尚矣 不知不知 病矣 是以聖人之不病 以其病病也 是以不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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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그날」



병들었음을 아는 것 같이 그 병듦을 지긋이 그걸 헤아려 들여다보는 것은 병을 참다이 알아가는 밝음이다. 

우리가 알고 있음에 대한 확신은 사실 얼마나 많고 깊은 무지(無知)의 묵인과 비호 속에 겨우 알아가는 미세한 실금이거나 뿌리에 곁달린 잔발 같은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세간에서는  흔히 아는 게 병(病)이다 했을 때, 우리는 이 병(病)을 치병(治病)할 계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참다이 아는 것은 징후(symptom)를 아는 것이요, 이 징후는 병의 조짐(兆朕)을 내다보는 일종의 자기전망이나 자기조망 같은 메타적 시선의 눈여겨봄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이걸 자기 진단의 우려스러움으로 톺아볼 때 돋아나는 성찰의 경우이지 싶다.

 이성복이 이 시편의 말미에 이르러 ‘나는 보았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결코 단순한 서술어가 아니라, 육체적인 감각과 더불어 정신적인 각성의 뉘앙스로 돌올해진다. 즉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무너뜨리는 것을’ 보아내는 통찰(洞察)의 지점이기도 한 것인데,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과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다는 세속의 풍경을 새삼 보아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런 ‘나는 보았다’라는 그 언술은 시인에게 있어 다름 아닌 그 일상에 배어든 생사(生死)의 와중(渦中)에 세속의 병듦을 새삼 알아차려가는 존재의 서술인 것이다.  

라오쯔가 ‘병을 병으로 여기므로 병을 앓지 않는다[以其病病 是以不病]’라고 했을 때 우리는 다는 아니지만 일말의 자기 병폐의 여줄가리를 알아가는 그 알아차림의 단계에 들어설 수 있지 않을까. 

 

 


제72장 第七十二章 畏畏 (愛己)

 

 民不畏威 

 則大威至 

 無狎其所居*1 

 無厭其所生 

 夫唯不厭 是以不厭 

 是以聖人 

 自知不自見 

 自愛不自貴 

 故去彼取此 


 백성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큰 두려움(심히 두려운 일)이 닥칠 것이다

 그들이 머무는 곳(터전)을 옥죄지 말고

 그들이 살아가는 바(생업)를 억누르지 말라

 무릇 오직 억누르지 않으므로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이 알아도 스스로 내보이지 않고

 자신을 소중히 여겨도 스스로 높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補註]

 - 노자74장 : 만약 백성이 (한결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죽임(사형)으로써 두려워하(도록 하)겠는가.

 * 1 : [백서본甲] 그들이 머무는 곳을 막지(가두지) 말라. [毋閘其所居]

       [백서본乙] 그들이 머무는 곳을 좁히지 말라. [毋狹其所居]

 - 노자80장 :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이라면 ~백성이 죽음을 중하게 여겨 멀리 옮겨 살지 않도록 할 수 있다.

 - 노자10장 : 백성을 소중히 여겨 보살필 때 그리고 나라를 바로잡을 때, 앎(지식,지략)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노자66장 : [죽간본] 성인이 백성 앞에 있을 때는 자신을 뒤세우고 (함부로 나서지 않고 머뭇거리고) 성인이 백성 위에 있을 때는 말로써 자신을 낮춘다. 그러므로 성인이 위에 자리해도 백성은 버겁다 여기지 않고 앞에 자리해도 백성은 해롭다 여기지 않는다.

 - 노자39장 : [백서본] 임금은 하나를 얻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다. ~ (임금이) 그러한 경지(지위)에 이르러 '끝없이(쉼 없이, 한없이) 귀하고 높으면 장차 거꾸러질까 두렵다 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토대로 삼는다. ※ 항룡유회(亢龍有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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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관필 선인도(李在寬筆仙人圖)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이제 밤이 차다.

 나는 또 너를 내 머리맡에 있게 하마.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

 너의 그 드리운 치맛자락으로 우리의

 겨울을 가리우자.

 -김동명,「파초(芭蕉)


 백성을 억누르려 함은 그들을 다스리려 하기 때문이다. 다스리지 않는 다스림이 라오쯔의 무위(無爲)의 정치이고 사상이고 본래적 알심이다. 그러므로 백성은 저마다 일인소국(一人小國)의 왕처럼 살기를 바란다. 작정한 아나키스트는 아니지만 그 삶의 도도한 흐름을 잘 타서 사는 백성에게는 나라가 있고 다스림을 받는 정부가 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는 아나키스트처럼 살아들 간다. 백성을 다스림에 자애로움이 없이 강퍅한 지배가 등등해질 때 죽음에의 두려움보다 두려움을 주는 죽음 너머의 것을 그리는 것이 백성들이다. 왜냐면 백성은 삶으로써 죽음을 넘어서려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왕이나 대통령이나 총리나 주석이 백성 아래에서 그들을 위하지 않으면 백성은 처음엔 굴복하는 것 같지만 나중엔 도리어 위정자를 굴복시키기에 이른다. 혁명은 이러한 백성의 밥그릇이 지어내는 엄중한 소란이고 나라 살림의 솥단지 바꿈, 그 교체의 흐름인 정혁(鼎革)에 다름 아니다. 

 파초 그림은 파초의 실용으로까지 나아갔다. 종이를 대신한 파초잎의 낙하는 한 은일처사의 붓놀림의 푸른 종이로 생생하니 땅바닥에 누워있다. 조선의 화인 이재관(李在寬)의 <파초하선인도(芭蕉下仙人圖)>는 ‘자신이 알아도 스스로 내보이지 않고/자신을 소중히 여겨도 스스로 높이 되지 않는[ 自知不自見 自愛不自貴]’ 속종을 지닌 처사(處士)의 호젓한 소일의 여줄가리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얼마 후 계절에 시들어버린 파초 잎에 마음에 새겨둔 말을 꺼내 쓰거나 일찍이 마음에 들어 기꺼이 되새길만한 상고(尙古)의 시문(詩文)을 거기 써보는 일은 싱그럽고 낙락하다. 한 번 쓰면 버리게 되는 여느 종이의 아쉬운 쓸모보다는 이 싱싱한 파초잎에 붓글씨로 적바림했다 주변 웅덩이나 허드렛물로 씻어낸 뒤 다시 쓸 수 있는 파초잎은 여간 쏠쏠하고 재밌는 자연물(自然物)이 아니다. 여느 종이처럼 한 번 쓴 뒤의 버려짐보다는 이런 자연상태의 파초잎이 주는 재생과 재활용의 여지는 마치 도(道)의 무한한 변주와 덕성스러움의 무한한 되살림의 한 실물적 경지처럼 보인다. 

 초허(超虛) 김동명의 파초는 이국적이면서도 내국적인 정취가 서로 갈마든다. 그런 소슬하니 온유하고 구순한 정취가 잎이 너른 파초의 반그늘로 가슴을 스쳐 드리우곤 한다. 파초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그대로 한 여인에 대한 온전한 관대한 순정과 은은한 자애로움을 번져놓는다. 거기에 ‘나는 즐겨 너를 위해 종이 되리니’하는 대목에서는 이러한 겸애(謙愛)의 자세야말로 남녀간의 애정뿐 아니라 위정자가 백성과 국민을 위한 마음가짐에도 불가분(不可分)의 또 불가결(不可缺)의 형태로 자리해야 할 덕목으로 종요로워 보인다.  

 

 


제73장 第七十三章 天網 (任爲)

 

 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 [勇於不敢者則栝]*1

 此兩者 或利或害 

 天之所惡 孰知其故 

 是以聖人猶難之*2 

 天之道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踈而不失 [疏而不失] 


 감행하는 데에 용감한 자는 죽이고

 감행하지 않는 데에 용감한 자는 살린다

 이 둘은 때로는 이롭고 때로는 해가 된다

 하늘이 싫어하는 바에 대해 누가 그 까닭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성인도 이를 어렵게 여긴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으면서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아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느슨해 보여도 잘 도모한다

 하늘의 그물은 널찍널찍하고

 성글어 보이지만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補註]

  *1 : [백서본] 저지르는 데에 날랜 자(반항자)는 죽이고(처형하고) 저지르지 않는 데에 날랜 자(나약한 자)는 곤봉으로 다스린다.

  *2 : [백서본]에는 이 문구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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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 잔 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뜨고 해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마종기,「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모두가 바라는 바의 선망(羨望)에 지나치게 골몰하는 것은 스스로 그 골몰의 구덩이로 자신을 밀어넣는 격이다. 선망의 그늘에 용감한 이는 그것을 양껏 이루지 못했음에 스스로 자물어지고 어쩌면 그 욕망의 덫을 놓은 자들에 의해 해코지 당한다. 그리고 끝내는 외부의 헤살과 선망하는 자의 선망이 짓는 옥생각에 얽혀 시난고난 시르죽게 될지도 모른다. 주저함이 없이 자신의 욕망과 공명심에 치우치는 것은 대중의 일부가 환호하고 성원한다 하여도 그 무리수가 돋아나기 시작하여 선망의 주체를 나락으로 밀어가기도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희망은 희망 없음을 희망하는 고요와 소박함 속에 깃들기도 한다. 라오쯔가 설파한 ‘감행하는 데 용감한 자는 죽이고, 감행하지 않는 데에 용감한 자는 살린다[勇於敢則殺 勇於不敢則活]’는 전언은 몬존한 존재로 살기를 도모하자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욕망의 축이 너무 곧추서서 주위 사방을 둘러볼 겨를이 없이 맹목이 되는 지경이라면 그 욕망은 하나의 곡두로 변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은 강물에 멀리 흘려지게 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노담(老聃)이 말한 ‘용감함’이라는 것은 맹목의 여줄가리에 가깝고 그슨대처럼 보면 볼수록 커지면서 그 선망과 질투에 사로잡힌 자를 긁어 잡아먹기에 이르곤 한다. 그러니 시인이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주저함이다. 마음 속에 주저흔(躊躇痕)이 많고 허다한 영혼이여. 불모한 욕망의 곡두에 사로잡히길 주저하는 영혼이라야 그 주저함의 상채기로부터 다시 새살이 돋고 그 새살로부터 새로운 담담한 평화의 속종이 돋아나곤 하여라.

 무모한 욕망에의 끌림 앞에 주저하는 자를 몬존하고 비겁하다 지청구를 늘어놓는 세간을 향해 그들은 오히려 미소로써 담담해질 마음의 요량을 지녀도 좋다. 굳이 남들이 다 성취하고자 하는 바의 역경의 대상을 갖은 힘으로써 나방처럼 불에 당겨들 때 우리는 고통의 무리수가 춤추는 것을 제 영육에서 보게 되리라. 선망과 욕망의 질주에 주저하다 비겁(卑怯)하다 통박을 듣는 이여, 오히려 그대의 주저함과 희망을 놓음이 진정한 용감함이로다. 

 희망하지 않음을 희망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그윽한 마음의 기운이다. 그러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해뜨고 해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은 얼마나 무구하고 담담하며 끌밋한 선처인가. 이러함에 세간에서 무수히 찬양에 가깝도록 추켜세우는 것들의 현혹에 담담해질 때까지 우리 안에 기꺼이 ‘지우고’ 또 지우고자 하는 바의 속종은 얼마나 큰 희망하지 않음의 힘인가. 야차와 가납사니 같은 희망의 내용물을 다시 들여다봄에 그것이 그악스런 추물로 이끌어갈 것을 능히 내다보는 맘이야말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을 스스로 내려놓고 슬며시 비켜가며 크고 작은 살(煞)을 지우는 손길이지 싶다. 갖은 헤살들을 헤치며 희망의 허울을 벗고자 하는 희망의 담담하고 맑은 손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면 그 손에 잇닿은 숨탄것의 마음도 허울뿐인 희망의 지수를 조금은 맑게 낮추리라. 

 평화롭고 웅숭깊은 희망의 담대함이란 잔망스런 희망의 조무래기들을 잘 다독여 풀잎처럼 스러지게 하는 것이다. 불분명한 희망과 가납사니 같은 욕망의 협잡을 멀찍이 보면서 아무 할 일 없이 거기에 머물지 않음이 가을 풀잎의 이슬 같다. 난간의 팔꿈치에 줄줄이 매달린 말간 빗방울처럼 비추기만 하고 떨어져선 씻겨주고 적셔주기만 하면서 그 스스로 물듦이 없는 담대한 희망의 꼴만 같다. 용감한 희망을 찬양하지 않아도 적이 고요함 속에 마음은 하나의 이룩됨을 얻은 것만 같을 때를 살아라. 가을처럼 희망하지 않아도 희망이 필요없이 삶을 소요(逍遙)해라.  

 



제74장 第七十四章 司殺 (制惑)

 

 民不畏死[若民恆且不畏死] 

 奈何以死懼之 [奈何以殺懼之]

 若使民常畏死[使民恆且畏死]

 而爲奇者[而爲畸者] 

 吾得執而殺之[吾將得而殺之] 

 孰敢 [夫孰敢矣]

 [若民恆且必畏死] 

 常有司殺者殺 [則恆有司殺者]

 夫司殺者[夫代司殺者殺]

 是大匠斲[是謂代大匠斲]

 夫代大匠斲者[夫代大匠斲] 

 希有不傷其手矣 [則希不傷其手矣] 


 만약 백성이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죽임으로써 두려워하도록 하겠는가

 백성으로 하여금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하고

 (그럼에도) 이상한 짓을 하는 자(가 생긴다면 그)를

 내가 장차 죽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감히 (이를 집행)할 것인가

 만약 백성이 항시 그리고 필히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죽이는 일을 맡은 자에게 항상 맡기도록 한다

 무릇 죽이는 일을 맡은 자를 대신하여 죽인다면

 이는 큰 목수를 대신하여 자귀질하는 것과 같다

 무릇 큰 목수를 대신하여 자귀질하는 자는

 그 손을 다치지 않음이 드물다

 


[補註]

  - 노자75장 : (1)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두텁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넉넉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2)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생존을 도모하기가 버겁기(심각·절박하기) 때문이다.

  - 노자73장 : 감행하는 데에 용감하면 죽이고 감행하지 않는 데에 용감하면 살린다. ~하늘의 그물은 널찍널찍하고 성글어 보이지만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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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큼직한 꽃다발, 손수건, 그리고 장갑을 가지고

 산 사람인양, 귀태 나는 몸맵시를 뽐내는 그녀에겐

 괴상한 자태 지닌 야윈 교사스런 여성의

 여유 있고 명랑한 품위가 있다.


 이보다 더 날씬한 모습을 무도회에서 본 적이 있는가?

 품위 있게 풍성하나, 너무 헐렁한 그 옷은

 꽃처럼 어여쁜, 술 달린 신이 감싸 주는

 앙상한 발 위에 헐렁하게 흘러내린다.


 바윗돌에 제 몸 부비는 음탕한 시냇물처럼

 쇄골 기슭에서 나풀대는 주름끈은

 그녀가 감추려 드는 처량한 젖가슴을

 조롱과 비웃음에서 순결하게 지켜 준다.

 

 깊숙한 두 눈, 공허와 어둠으로 만들어지고

 멋 부려 꽃을 올려놓은 그녀의 머리는

 잔약한 등뼈 위에서 하늘하늘 춤춘다.

 오, 얼빠진 듯 치장한 허무의 매력이여!


 육체에 도취한 연인들, 표현 못할 인간의

 뼈대가 가진 운치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너를 부를 테지, 하나의 삽화라고

 키 큰 해골이여, 넌 내 가장 귀한 취미에 잘 들어맞는구나.


 너는 그 충격적인 찌푸린 모습을 하고 ‘삶’의 축제를

 휘저으러 오느냐? 아니면 어느 오랜 욕망이

 산 해골바가지 너를 또다시 충동하여

 방정맞은 널, ‘쾌락’의 절정에 밀어 넣던가?


 바이올린 노래에, 촛불의 불꽃에

 빈정대는 네 악몽 쫓아내고 싶었던가.

 또한 네 심장에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을

 주신제의 술도랑에 와서 식혀 달라는 것인가?


 어리석음과 잘못이 마르지 않는 샘이여!

 해묵은 고뇌의 영원한 증류기여!

 네 갈비뼈의 구부정한 격자 너머로

 나는 본다, 아직도 기어 다니는 목마른 독사.


 내 진정 말하노니, 너의 교태로

 그 애쓴 보람 없을까 두려워라.

 이 인간들 중 그 누가 이 빈정거림 알아들을까?

 공포의 매력에 도취하는 건 오직 강자들 뿐!


 끔찍스런 생각 가득한 네 심오한 두 눈은

 현기증을 자아내고, 조심스럽게 춤추는 사내는

 쓰디쓴 구역질하지 않고는, 네 서른 두 이빨의

 영원한 미소를 바라보지 못하리라.


 하지만 누구인들 제 속에 해골을 품지 않았고

 그 누가 무덤의 것으로 양육되지 않았는가?

 향수도, 옷도, 화장도 무슨 소용 있는가?

 아름다운 것도 언젠가는 추한 것이 되고 말리니.


 코가 없는 무기(舞妓)여, 억제 못할 위안부여.

 그러니 눈 가리고 춤추는 저들에게 말하라.

 오만한 도련님들, 아무리 분과 연지로 치장을 했어도

 그대들 모두가 ‘죽음’의 냄새 풍겨요! 오, 사향 바른 해골들이여.


 시들은 안티노우스, 수염 없는 댄디

 니스 칠한 송장, 백발의 색골들이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 주검의 춤이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대들을 끌고 가는구나!


 차가운 세느 강 둑에서 이글거리는 갠지스 강가에까지

 인간 무리들이 넋을 잃고 뛰논다.

 천장의 구멍에는 ‘천사’의 나팔이 시커먼 나팔 총처럼

 불길하게 입을 쩍 벌리고 있음을 보지 못한 채


 어느 고장, 어느 태양 아래서도, 가소로운 ‘인생’들이여,

 ‘죽음’은 그대들의 비비적대는 몸짓을 즐거웁게 바라보고

 그리고 종종, 그대들처럼 몸에 몰약 냄새피우며

 그대들의 광란에 제 빈정거림 뒤섞는다.


 * 안티노우스 - 로마의 황제 아드리안의 몸종으로 총애를 받은 아름다운 소녀.


 -샤를르 보들레르( Charles-Pierre Baudelaire ,「죽음의 춤-ㅡ에르네스트 크리스토프에게


 죽음을 모르는 인간은 삶의 환희와 그 소멸의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이요,  죽음의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은 죽음의 참 의미로서의 삶을 잘 모르는 인간이기도 하다. 

 라오쯔가 말하는 죽음은 삶을 지키고 생동하고 참다이 길러내기 위한 백성이 죽음을 소홀히 여겨 역설적이게도 삶을 업신여기는 것을 경계함이 아닐까. 죽음에의 두려움은 결코 몬존한 심성을 질타하기 위한 빌미가 아니라 삶을 온전히 품어 살게하려는 위정자나 공동체의 최소한의 규율적 덕목을 드러냄이 아닌가. 

 비록 샤를르 피에르 보들레르의 이 시편은 산 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죽은 자, 망령이 깃든 해골을 대상으로 마치 ‘산 사람처럼’ 자유분방하고 게걸스럽게 혹은 개탄스럽게 노래하는 유장미(悠長美)가 있다. 

 보들레르의 이 도저한 죽음에의 탐닉과 혐오는 양가적인 노래의 축(軸)으로 삶과 죽음을 하나의 짝패로 우리에게 존재의 숙명처럼 선사한다. 아무리 화려하고 건강한 육체의 향연을 가졌다하더라도 ‘하지만 누군들 제 속에 해골을 품지 않’은 자 없으며 그 궁극에 ‘그 누가 무덤의 것으로 양육되지 않았는가?’라고 묻는다. 도저한 염세주의와 퇴폐미를 드리우고 있지만 기실 이러한 보들레의 시적 언술이 틀린 것은 아니다. 삶의 광휘에 도취돼 부나방처럼 ‘차가운 세느 강 둑에서 이글거리는 갠지스 강가에서까지/인간 무리들이 넋을 잃고 뛰’노는 꼴을 보기에 시인은 한 마디로 가소롭고 어리석다 여겼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찬양하고 사신(死神)을 숭배해서가 아니라 삶의 진정성과 그 궁극을 모르는 사람으로 스러지는 꼴을 보들레르는 개탄스럽게 바라본 것이 아닐까 싶다. 한마디로 ‘가소로운 인생들’임을 아는 것, 이것을 세속인들에게 대한 모욕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또 한끝 우리네 부박한 인생을 깨우고 똥기는 시인의 웅숭깊은 노래일 수도 있다. 



피터르


 우리는 여러 형태의 죽음에 관한 예술적 체험과 창작과 향수를 통해서 일종의 허무의 집전(執典)에 이를 수 있지 싶다. 그것을 단순히 염세주의에 빠지고 죽음에의 탐닉과 몰입에 경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의 생각과 감각적 교감을 통해서 삶의 오의(悟意/奧意)에 이르려는 역설적인 궁행(窮行)일 수 있다. 16세기 이후 죽음과 관련된 정물화가 일정하게 유행하기 시작한 듯하다. 인간의 지식체계를 뜻하는 낡은 서책이 죽음을 직시하는 해골 아래 놓였고 곧 굴러떨어져 산산이 부서질 듯한 받침 부분이 도드라진 유리잔과  검은 연기를 피우며 꺼진 촛불이 소멸의 징후를 완연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회중시계는 모두 유한한 존재의 척도인양 한탄하는 벌린 입 모양 뚜껑이 들려있다. 피로와 곡진한 사연을 적바림했을 깃털 펜의 펜촉도 검게 문드러진 모양새다. 

 피터즈 클레즈의 이런 ‘바니타스 정물화’는 죽음에의 몰입과 찬양만이 아니라 이런 음습하고 염세적인 사물이나 오브제를 통해 존재의 숙명과 그 의미를 통찰하고자 했던 사의(寫意)적인 의도가 배어있음이다. 비록 보들레르의 말처럼 ‘허무의 매력’이 그 한 요인이라고 하더라도 ‘백성(대중)으로 하여금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하고[若使民常畏死[使民恆且畏死]’자 함은 죽음의 통찰을 통해 삶의 온전한 진행과 활력이 도모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한 정치가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은 삶을 바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천지만물을 끝없이 살려나가는 도(道)의 진행이 죽음을 최종적인 종말의 단계가 아닌 하나의 과정과 그 재생을 위한 흐름으로 파악하고 있음이 라오쯔의 진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75장 第七十五章 貴生 (食損)

 

 民之飢 

 以其上食稅之多*1

 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民之輕死

 以其求生之厚*2 

 是以輕死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是賢貴生]*3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위에서 거두어 잡수는 세금이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굶주린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위에서 유위로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스리기 어렵다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생존을 도모하기가 버겁기(심각·절박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

 무릇 오직 살아서 (무엇이) 되고자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

 삶을 귀중히 여기는 것보다 낫다 (현명하다)

 


[補註]

 *1 : [왕필본] 위에서 거둔 세금으로 즐기며 생활함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以其上食稅之多) ; 附言: 食稅=享受稅賦, 靠賦稅而生活

   [백서본] 백성이 먹을 것과 세금을 착취당하는 것이 많기(중하기) 때문이다. (以其取食稅之多)

 *2 : [해석 1] 삶을 추구하는 것이 두텁기(지극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넉넉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해석 2] 생존을 강구(도모·모색)하는 것이 버겁기 때문이다. ; 附言: 求生=谋求生存, 附言: 厚=重, ;

 ※ 厚=重의 용례 : [죽간노자甲2장(노자66장)]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은 그를 무거워하지 않는다. (其在民上也,民弗厚也)

   [죽간노자甲3장(노자46장)] 심한 욕심(욕망)보다 더 큰(무거운) 죄가 없다. (罪莫厚於甚欲)

 *3 : [백서본] (1) (그렇게) 살고 (그렇게) 할 (지극한) 이유가 없는 것이 삶을 아주 소중히 여기는 일이다. ;附言:  賢=良,

   (2)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이유(정치사회상황)가 없(게 한)다면 이는 생명을 구하고 삶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다. ; 附言: 賢=以財分人,

 - 노자77장 : 누가 능히 남는 것을 가져다 천하에 바치겠는가. ~ 성인은 (천하를 구휼하려는) 자신의 어진 덕행을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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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

 그 물에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들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도종환,「어떤 마을

 

 큰 도시에 가서 살면 뭔가 그럴듯한 화려한 삶의 기회가 많아질 거라 여기고 도시로 상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그러한 로망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여러 좌절과 난처한 상황들이 사방으로 불어닥쳐 도시의 빈민이나 루저(loser)가 되고 심지어는 범죄의 그늘에 놓여 애옥살이와 감옥살이를 전전하기도 한다. 물론 비관적 전망이 앞선 부분이 있지만 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환경적인 열악한 요인과 도시로 간 사람 자신의 명민하지 못한 그러나 불가피한 행동거지에도 피차 있기 마련이다. 도시는 특히나 가난한 외지인이나 유입자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도시든 시골이든 거기에 미치는 위정(爲政)과 행정의 햇살은 그늘과 사각지대가 만만치 않다. 복지(welfare)라는 말은 복지가 종요로운 가운데서 생겨난 것이고, 복지(福祉)라는 행정은 복지에서 소외된 시공간을 인정하는 결핍된 행정의 공백을 반어적으로 드러낸다. 가난한 가운데 나름의 목표와 희망을 가진 이들이 어느 순간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생존을 도모하기가 절박하기 때문이다[民之輕死 以其求生之厚]’라고 라오쯔는 일갈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약육강식의 먹이사슬로 얽혀있는 도시라는 시공간에는 자비란 없다. 개개인이 지닌 선량한 천성을 우연한 인연으로 맞이한다는 게 일종의 천복(天福)같은 인복(人福)으로 드리울 때가 있다. 우리가 도시와 시골을 대척적으로만 견줄 필요는 없으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시골의 의미를 재장구칠 필요가 있다. 시골이 퇴락한 문명의 서자(庶者)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자연의 흐름이 작동하는 무위(無爲)의 공간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자연과 사람이 한데 몸과 맘으로 교응(交應)하는 섭생(攝生)의 시공간으로 그 대안적 마련을 가질 때 백성이든 위정자든 고위관리든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활기(vitality)를 갈마들게 된다. 이런 시인의 눈길은 경제적 복지만이 아니라 정서적 복지(福祉)와 영성과 영육의 복지가 함께 융통하고 교호하게 된다. 이런 경우 시인이 바라는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뜨는 끌밋한 자연과 하나로 호흡하는 무위의 경치가 서리게 된다. 이런 풍광이 좋은 곳에서는 딱히 자본의 부가가치로 만든 것이 애써 만들 필요가 없이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 소리 별 그림자/그 물에 쌀을 씻어 밥 짓는 냄새’가 그윽이 풍기며 나누며 살아갈 마련이 들게 된다. 

 복지라는 사회경제적 용어는 선행적인 베풂과 나눔의 여러 세세한 지표와 지수를 거느리는 인간의 경제적 산물이다. 그러나 자연은 늘 다툼과 갈등의 소지가 있는 분배의 문제에 골머리를 크게 쓸 필요도 없이 우리는 이미 이런 자연과의 교감과 정서적 연대 속에 몸과 맘을 하나로 이끄는 만족의 기분에 드나들게 된다. 

 

 


제76장 第 七十六章 柔弱 (戒强)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強 

 萬物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 

 堅強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是以 

 兵強則不勝*1~

 木強則共 

 強大處下 

 柔弱處上


 사람이 갓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여리지만

 죽어서는 단단하고 굳(세)다

 온갖 푸나무가 갓 자랄 때는 부드럽고 무르지만

 죽어서는 (딱딱하게) 마른다

 그러므로

 단단하고 굳센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여린 것은 삶의 무리이다

 이 때문에

 군사가 굳세면 이기지 못하고 (멸하고)

 나무가 굳세면 아름드리나무로 자라 베어져 서까래를 받친다

 굳세고 큰 것은 아래에 자리하고

 부드럽고 여린 것은 위에 자리한다


 

[補註]

 - 노자36장 : 부드럽고 여린 것이 억세고 굳센 것을 이긴다.

 * 1 : [열자_노담의 말] 군사가 굳세면(강하면) (싸움을 좋아하여 결국) 멸하고 나무가 강하면 부러진다.(兵強則滅 木強則折) : 나무가 강하면 상해를 입는다(木強則兵)는 본도 있는데 절(折)과 병(兵)의 전자(篆字)는 둘 다 도끼와 풀로 이루어져 형태가 거의 같아서 절(折)을 병(兵)으로 잘못 읽은 것으로 보는 설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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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폴 엘뤼아르,「모퉁이



 폴 엘뤼아르(Paul Éluard, 1895년 12월 14일 ~ 1952년 11월 18일)는 불란서의 시인이다. 본명은 외젠 에밀 폴 그랭델(Eugène Émile Paul Grindel)인데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하고 초현실주의의 대표 시인이 되었다.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이다’라는 에피그람은 그의 능동적 창의(創意)와 열정적 시의 현장을 가늠하게 한다. 

 이 짧은 시의 언표는 상당히 많은 시적 대상과 세상의 부조리를 포용하는 함의(含意)의 언어적 현장이자 선언으로 보인다. 죽음조차 끌어안아 새로운 생명의 바탕으로 삶을 만한 시적 유연성과 객관적인 사물들과 숨탄것들 간의 금지된 관계를 풀고 연동시키는 시인의 자유의지를 포괄하게 된다. 

 엘뤼아르의 아포리즘의 시구(詩句)처럼 ‘내게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그 욕망의 열정은 삶에 패퇴해 주저앉아 있을 때에도 오히려 더 반대급부적으로 존재의 내면을 추동시키는 그야말로 소망의 주술(呪術)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좌절되고 깊은 실망에 닿아 있더라도 ‘소망’은 결코 패배자가 누릴 수 없는 심중이 아닌 것이다. 

 이런 소망의 언어는 절망과 실망과 좌절 가운데서 오히려 순정하고 순결한 의지의 풀과 짐승의 새 뿔처럼 돋을 수 있다. 라오쯔는 이런 신생의 언어와 오래된 새로운 의지의 재생(再生)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되묻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부드럽고 여린 것은 삶의 무리[柔弱者生之徒]’라는 도저한 직관(intuition)에서 찾고 있다. 그러기에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모든 존재들에게 쉽게 허락하지 않고 또 ‘내게 금지된 것’들의 속성은 경직된 조건과 권위를 거느린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금지된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것들의 긍정적인 측면과 권리를 취할 수 있는 방편은 바로 이런 부드러움과 여린 유연성을 통해 딱딱하고 권위적인 세계의 심장과 관성적인 관념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삶의 개진에 있다. 

 우리가 말하듯 도(道)는 장차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을 부드럽게 풀어헤치고 덕(德)은 역시 우리에게 ‘금지된 것’들을 기꺼이 찾아내 키워내기에 이르는 자양(滋養)과 탄력과 숨결과 아우라(aura)를 품어준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방관과 막연한 기대만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소망’하는 일의 종요로움이고 그런 과정을 깨우는 일로서의 자연(自然)을 더불어 살아내는 일이지 싶다.  

 

 


제77장 第七十七章 天道


 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舉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 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1

 唯有道者 

 是以聖人 

 爲而不恃 [爲而弗又]*2~ 

 功成而不處 

 [若此]*3

 其不欲見賢*4 


 하늘의 도는 화살을 시위에 메기는 것과 같다

 (화살이) 높으면 누르고 낮으면 들어주며

 (시위가) 남으면 줄이고 모자라면 늘인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에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데에다 보태준다

 사람의 도인즉슨 그렇지 않다

 모자라는 데에서 덜어내어 남는 데에다 바친다

 누가 능히 남는 것을 가져다 천하에 바치겠는가

 오직 도를 터득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베풀고도 제 것으로 삼지 않고

 공을 세우고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처럼) 성인은

 자신의 어진 덕행을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補註]

 * 1 : [백서본甲] 누가 능히 남음이 있으면서도 그 남는 것을 가져다 하늘에 바칠 수 있겠는가. (孰能有餘而有以取奉於天者乎?)

 - 노자25장 :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 2 : [백서본乙] 베풀고도 제것으로 삼지 않고 (하고서도 소유하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왕필본] 베풀고도 기대지 않고 공이 이루어져도 머물지 않는다.

 * 3 : [백서본乙] 백서본에 의거 ‘이처럼’ 이라는 문구 삽입

 * 4 : (재화를 남에게 나누어 주는, 어려운 사람을 구휼하는, 천하를 구제하려는) 자신의 덕행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其不欲見賢也) ; 附言; 賢=以財分人, ※ 賢=多財, 多才能, 有德行.

 - 노자54장 : (나 자신, 내 집안, 내 고을, 내 나라의 시각으로써가 아닌) 천하로써 천하를 본다.

 - 노자67장 : [백서본]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나는 너무 커서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고 말한다. ~ 내가 (늘) 간직하고 있는 세 가지 보배가 있다. 첫째는 자애로움이고 둘째는 검소함이고 셋째는 감히 천하의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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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성지주일……

 희게 빛나는 마을들,

 잔 느릅나무들,

 딱총나무들,

 갈대들,

 외줄기 나무들,

 짐승들,

 그리고.

 새들이

 잠든다.


 나뭇잎들 그늘 아래

 느릿한 시냇물이

 일요일답게

 명상에 잠겨 있다.


 오, 루소여!

 갈대 피리의

 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꽃들이 가득한

 풀밭 위에

 한가로운

 양떼들.


 아침의

 생울타리들 옆으로 나는

 시골 우체부를

 따라 왔다......


 종소리는 드넓게

 퍼지고,

 소나기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내 마음은 꽃이 피어나고,

 나는 불안하고도 가라앉은

 내 영혼을

 수그렸다.


 하늘의

 푸름 아래

 저기 솟아오른

 검은 언덕 쪽으로


 흰 구름 떼가,

 좋은 날씨에도

 폭풍우를 품은 듯

 무겁게 보였다.


 소나기로 파인

 오솔길을

 우린

 걸어갔다.


 초가집들의 벽,

 돌과 고사리와 담쟁이가

 얼크러진 틈에

 숨어 있는 수챗구멍.


 그리고 지금,

 오 주여, 내 주여,

 나는 참새가 우짖는 푸른 하늘 앞에서

 당신께 기도드리고 있나이다.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성지주일(聖枝主日)-폴 라퐁에게-


 시인이 번지듯 풀어내는 풍경의 음색을 따라 우리의 가슴은 담담하고 평화롭게 젖는다. 대자연이 품어내주는 이런 풍경의 오밀조밀한 천연의 구성과 광활하게 탁 트인 민트색의 초원과 잇닿은 하늘과 색이 묻어날 것만 같은 딱총나무가 있는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천혜의 것이다. 즉 우리는 태어남으로써 이것을 무상(無償)으로 대자연으로부터 늡늡하고 끌밋하게 받아안는다. 

 자연은 사람들이 부러 나눌 것도 없이 전적으로 누구나에게 전폭적으로 드리워 있고 모자람 없이 베풀어져 있으며 그 자연의 품 안에 깃들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이 모든 은성한 풍요와 은은한 자연의 살림 앞에 기도하게 한다. 자연은 치우침 없는 풍요와 천연의 흐름으로 그 안에 든 사람들을 깨우쳐 종교를 모르는 종교를 이루어낸다. 어느 누구의 종교가 아니라 모두의 강요함이 없는 종교로 만연해 있다. 종교적 교리로 깨달을 필요조차 없는 성스러움마저 내려놓은 천지간에 드리운 흐름의 천재와도 같이 ‘참새가 우짖는 푸른 하늘 앞에’ 마음의 두 손을 모으게 한다. 이 모든 자연의 드리움이 곧 우리네 사람을 도저한 존재의 흐름을 깨우는 배경이자 실체적 진경이자 자연물(自然物)로 에워싸고 있다. 자연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숨탄것들에게 사랑의 너그러움만 주는 게 아니라 그 광폭한 변화의 공포도 함께 준다. 완보(緩步)일 때는 한없이 여유롭지만 속보(速步)일 때는 폭력적이고 거칠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흐름의 성격일 뿐 사람의 감정을 조준한 것이 아니다. ‘한가로운 양떼들’과 ‘폭풍우를 품은 듯/무겁게’ 보이는 흰 구름도 한데 보여주고 바람처럼 우리 감각에 쐬어준다. 사랑 너머의 사랑을 광활하게 보여주고 사랑 안쪽의 공포와 불안도 함께 사람들 내면에 어웅하게 드리운다. 자연의 흐름을 점차 인간의 앎으로 똥기어 가는 사람은 자연의 다양한 얼굴에 미추호오(美醜好惡)를 일방적으로 대입시키기를 자제한다. 이는 프랑시스 잠이 ‘소나기로 파인/오솔길을/우린/걸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늘의 도는/남는 것에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것에 보태어줌[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 인 것이니, 홈이 파인 오솔길의 흙과 자갈과 풀이 어딘가로 슬려가 왜가리가 편안히 내려앉은 여울가의 모래톱을 이루기도 하고 어느 강기슭에 흙모래가 모여 새로이 갈대가 자라고 짐승들의 은신처로 조성되기도 하리라. 이렇듯 자연의 도와 덕은 ‘베풀고도 제것으로 삼지 않음[爲而不恃 [爲而弗又]’이니 나는 라오쯔가 말한 이 모든 말들의 처음과 끝에 대해 나도 그처럼 되기를 가만히 ‘당신께 기도드리고 있나이다’ 라고 되새겨보는 것이다.  

 

 


제78장 第七十八章 水德 (任信)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強者莫之能勝 

 其無以易之 

 弱之勝強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是以聖人云 

 受國之垢 是謂社稷主 

 受國不祥 是謂天下王*1 

 正言若反 


 하늘 아래 물보다 부드럽고 여린 것이 없지만

 단단하고 굳센 것을 치는 데에는 물만큼 뛰어난 것이 없으니

 그것은 물(의 성질)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여린 것이 굳센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억센 것을 이긴다는 것을

 하늘 아래 모르는 이 없으나 아무도 능히 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했다

 나라의 치욕을 감수하는 자를 사직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흉조를 감수하는 자를 천하의 왕이라 한다

 바른 말은 마치 어긋난 듯하다 (반대로 들린다)

 


[補註]

*1 : [백서본] 受國之不祥,是胃天下之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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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맨 처음으로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면은

 “맨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드린 말씀은, ‘젖 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요마는,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날에 동네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다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도 아모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빨가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 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달이 무리 서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리었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좋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흗 날 밤 먼지 더미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命)이나 긴가 짧은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러웁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가다가 건넛산 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면은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쫓아가다가 돌뿌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러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어라”

 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烽火)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 하고 앉았더이다

 아- 뒷동산 장군바위에서 날마다 자고 가는 뜬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다 왕의 나라로소이다왕이로소이다 

 -홍사용,「나는 왕이로소이다



 눈물이 넉넉한 이는 자신과 더불어 세상을 받드는 이이다. 눈물의 작자는 자기만을 위한 협량한 이기심에만 몰두하는 자가 천성적으로 아니므로 그는 불민한 세상의 추악함과 강퍅함과 모질게 구는 부덕(不德)함을 스스로 일깨우듯 품어주는 수용체이다. 모진 것과 선량한 것과 안쓰러운 것과 끌밋한 것과 더부살이하는 변변치 않은 것들조차 받자하니 안아주는 이가 눈물로 항시 세상을 받드는 현량이다. 스스로를 위함에 앞서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먼저 구휼(救恤)하려니 싶은 이의 속종엔 늘 스러지지 않는 계곡의 신(神)이 어리어 있다. 계곡의 신, 즉 곡신(谷神)이 어린 이에게는 세상의 것들이 모여들고 이 모여든 바를 내어주는 그 늡늡한 출향(出鄕)의 도도함이 항시 세상의 난처로 구명(救命)의 길을 내기에 번진다.

 너름새 있는 영혼이라야 눈물이 몬존한 이의 전유물이 아니고 패배자의 전리품이 아닌 자비로운 자의 품성이 돋아내는 습습한 심연의 샘물임을 차차 알아간다. 눈물이 없는 위정자는 마른 세모눈으로 칼날처럼 백성들을 닦아세우고 몰아세워 이해득실에 충실한 개처럼 길들이기를 좋아한다. 

 눈물이 항시 넉넉한 이는 자비와 자애의 속내를 언제든 번져낼 수 있는 몸과 맘의 울림톰을 가지고 있다. 그윽한 덕성과 넉넉한 베풂을 길러내는 윤활유는 그 마음이 돋아내는 샘물인 눈물을 먼저 분비하기에 이른다. 눈물은 눈에 보이고 안 보이고의 차원이 아니라 그 마음의 덕성스러움이 모자람 없이 그 가난을 모르는 베풂과 공명의 차원을 깊이 넓혀가기에 이른다. 

 혹독한 주변의 상황에 끄달린 국민들의 마음에 새뜻한 샘물의 노래와 습습한 공감의 눈물을 먼저 내어준다. 종요로운 물질로부터 동떨어지는 이들 앞에 서슴없이 물자를 내어주는 흔쾌함이 혼돈의 눈물로부터 시작된다. 눈물이 덧없는 비탄과 자포자기의 절망의 분비물만이 아니라 현량한 존재가 세상을 향해 건네는 넉넉한 자애의 물성(物性)이다. 웅숭깊은 것이나 어웅하지 않고 명민한 것이나 필요없이 답답하지 않다. 

 거짓된 눈물을 씻어내는 눈물이며 가증스런 위선의 악어눈물을 패대기치는 때로 준열한 회초리로서의 눈물이다. 패배자의 낙담과 결부되지 않는 늘 자비와 다솜을 견인하는 듯한 햇빛이 끄는 아침 같은 것이다. 노작 홍사용이 눈물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바는 뭐냐하면 바로 이 눈물이 자비의 분비물이고 실존의 완성으로 가는 무지개와도 같은 실효가 있는 매개물임을 천명하는 데 있다. 그 비탄을 벗고 찬란한 눈물의 비전을 제시하는 구절이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다 왕의 나라로소이다 왕이로소이다’라고 자처하는 대목에서 돌올해진다. 이는 한때의 눈물바람이 아니라 촉촉이 저류하듯 불모의 옥생각들을 삭히고 눌러 도(道)의 씨앗을 다시 틔우고 덕(德)으로 자라나게 하는 마중물 같은 것이다. 눈물이 자비를 열어가고 눈물이 비탄에 빠진 이를 구휼하는 바로 나아갈 때에라야 진정한 눈물의 진경(珍景)을 열어가는 바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79장 第七十九章 右介 (任契)

 

 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是以聖人 

 執左契而不責於人

 有德司契 

 無德司徹 

 天道無親 

 常與善人 


 큰 원망을 푼다고 해도 반드시 앙금이 남기 마련이니

 어찌 그것으로 잘 (처리)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원망 살 일을 하지 않아)

 (채권의) 증표를 쥐고 있어도 사람들을 다그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사람은 채권(빌려주는 일)을 맡고

 덕이 없는 사람은 세금(거두어들이는 일)을 맡는다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다

 항상 선한 사람에게 베푼다



[補註]

 - 노자41장 : 오직 도는 잘 베풀고 (빌려주고) 잘 이룬다.

 - 노자5장 : 하늘과 땅(우주, 대자연)은 무정하다 (친애가 없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 노자49장 : 나는 선한 사람에게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하니 (나는) 선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 노자62장 : 도는 ~선한 사람의 보배요 선하지 않은 사람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선하지 않다고 해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 노자27장 :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하므로 버려지는 사람이 없다. ~본디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도우미이다. 그 스승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 도우미를 아끼지 않는다면 비록 지혜롭다고 해도 크게 미혹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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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ㅇ 하면

 은빛으로 구르는

 굴렁쇠 소리

 ㅇ 하고

 꽃잎에 이슬로 맺히리


 다시

 이슬에게 ㅇ하면

 입맞추고 떨어지는 입술

 꽃잎을 보리

 꽃잎 진 그 자리에

 ㅇ이 맺혔으리

 꼭지를 달고


 주렁 주렁 주렁

 모든 열매는

 모두 다 ㅇ이리

 ㅇㅇㅇ을

 여러 번 소리 내면

 너나 나나 모두가

 ㅇ이 될 터

 -서정춘,「ㅇ(이응)



 ㅇ(이응)은 한글의 음절에서 초성(初聲)에서는 자음으로 작용하지만 어딘가 모음의 느낌이 감돌고 다시 음절의 종성(終聲)에 들어서는 음가(音價)를 부드럽고 울림이 있으며 유연하게 소리를 굴려준다. 이런 이응의 역할은 그 모양새에서 이미 원융(圓融)의 이미지와 기능적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글 음절에서 자음과 모음으로만 형성된 글자들에 받침으로 이응을 넣으면 단연 활기와 유연성을 띠며 그 글자의 뜻과 상관없이 음성적 활기를 도모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당장 임의의 어떤 자음과 모음으로만 구성된 한 글자를 먼저 입으로 발음해 보고 다음에 거기다 종성의 받침으로 이응을 붙여 불러보면 그 차이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이렇듯 이응은 그 모양새뿐만 아니라 그 첨가된 음역(音役)으로 활달하고 울림이 있는 활자와 말소리를 도모하는데 일익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이응이라는 자음 하나의 역할은 그야말로 활자체계에 있어서는 끌밋하고 호활한 활성적인 언어의 매개요 그 활자의 모양새로는 확장성있게 여러 자연의 숨탄것들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상징화되거나 축약돼 있는 실물 자연의 꼴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응의 음가(音價)는 단순히 언어의 음역에 머물지 않고 ‘주렁 주렁 주렁/ 모든 열매’로 환원되는 자연의 산물로 둥그스름하게 도드라진다. 또 이 이응의 말과 영혼을 우리 정신과 몸의 모음(母音)으로 삼아 ‘여러 번 소리 내면/너나 나나 모두가 ㅇ 이 될 터’ 라고 시인은 소박한 주술처럼 되뇌인다. 라오쯔의 전언처럼 ‘(하늘은) 항상 선한 사람에게 베풂[常與善人]’처럼 맺히면서도 번지고 고립된 듯 하면서도 파문처럼 번져 연대하는 뉘앙스이다.

 이렇게 이응은 어디에 어울려도 두동지지 않고 거슬리지 않으며 서로 융화되는 관계적 흐름을 잘 얼러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울리는 상대를 해치지 않고 결부된 대상과 조화를 이루며 분란을 쉽게 야기시키지도 않는다. 

 

 


제80장 第八十章 安居 (獨立)

 

 小國寡民 

 使有什伯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民復結繩而用之*1~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鄰國相望 

 雞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2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이라면

 열 사람 백 사람 몫을 하는 그릇(기기)이 있어도 쓰이지 않도록 하고

 백성이 죽음을 중하게 여겨 멀리 옮겨 살지 않도록 할 수 있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고 다닐 데가 없고

 비록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벌여 놓을 일이 없다

 백성이 다시 새끼에 매듭을 지어 (어려운 문자 대신) 쓰게 하고

 음식을 달게 먹이고 옷을 잘 입히고

 사는 곳을 편안히 하고 풍속을 즐기도록 할 수 있다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다보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백성은 늙어 죽도록 서로 오가지 않는다

 


[補註]

 - 노자57장 : 사람에게 이로운 기기가 많아지면 나라는 더욱 어두워진다.

 - 노자75장 : (1)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두텁기(지극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넉넉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2) 백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생존을 도모하기가 버겁기(심각·절박하기) 때문이다.

 *1 : * [하상공註] (위에서는 진실하여 속임이 없고) 백성은 문자를 버리고 소박함으로 돌아가며 , (위에서는 백성을 착취하지 않고) 백성은 소박한 음식을 달게 먹고 , (위에서는  화려한 옷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백성은 거친 옷을 아름답게 여기고 , (위에서는 겉치레 집을 좋아하지 않고) 백성은 띠집에서도 편안해하고 , (위에서 전통 풍습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백성은 질박한 풍속을 즐긴다. (괄호 안의 내용은 초적의 자의적 해석임)

 * [장자 거협] 그대는 어찌 지극히 높은 덕을 지닌 자가 다스리던 세상을 모른단 말인가? 옛날 용성씨... 복희씨, 신농씨가 다스리던 때가 바로 그때인데, 백성은 새끼에 매듭을 지어 (오늘의 문자 대신) 쓰고, 그들의 먹거리를 달게 여겼으며, 그들이 입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풍속을 즐겼으며 그들이 머무는 곳을 편안히 여겼고, 백성은 늙어 죽도록 서로 오가지 않았다네.

 *2 : [왕필註] (그들은) 구하려고 하는 것(욕심 사납게 구하는 바)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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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김소월,「엄마야 누나야


 어느 날 하나의 기사를 보았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보게 된 것이 나라와 개인이 갖는 생사를 놓고 벌이는 기상천외한 낯설음 같은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낯설게 보고 사람이 사람을 더 낯설게 대해는 지경 속에서 우리는 국가의 의미와 국가의 정치와 국가의 생리와 생태를 되돌아보게 된다. 


[이데일리 이성민 인턴기자]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국경에서 알몸 난민 92명이 발견돼 국제사회가 충격에 빠졌다. 17일(현지시간) 가디언에 따르면 그리스 정부는 전날 옷을 입지 않은 나체 상태의 난민 92명을 튀르키예와의 국경지대에서 발견했다며 이들의 사진을 공개했다. 난민 중 일부는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14일(현지시간) 그리스·튀르키예 국경지대에서 발견된 난민들의 모습. (사진= 노티스 미타라치 그리스 이민국 장관 트위터)


 유엔난민기구(UNHCR)는 이 사건에 대한 조속한 조사를 촉구했다. UNHCR은 “이번 사건이 충격적”이며 “난민들의 모습이 담긴 끔찍한 사진으로 인해 괴롭다”고 밝혔다. UNHCR 대변인은 “난민 무리엔 아이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리스 경찰은 유럽연합(EU) 국경경비 기관인 유럽국경·해안경비청(Frontex·프론텍스)과의 합동 조사 결과 난민들 대부분이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고무보트를 통해 튀르키예에서 에브로스 강을 건너 그리스 국경지대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튀르키예군 차량 3대를 통해 에브로스 강으로 이송됐으며 보트 탑승 전 옷을 벗으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노티스 미타라치 그리스 이민국 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난민을 대우하는 튀르키예의 방식은 문명의 수치”라고 비난했다. 또 내년 대선을 앞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자국 내 난민 문제로 인한 정치적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난민들을 그리스로 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난민 문제로 오랜 다툼을 벌여왔다. 튀르키예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는 핵심 통로인데 튀르키예가 난민들을 단속하지 않아 부담이 그리스로도 전가되어 왔기 때문이다.

난민들은 현재 그리스의 경찰서와 국경경비대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며칠 내로 팔라카오 신원 확인 센터로 이송돼 그곳에서 UNHCR 관계자들을 만날 예정이다.(인용 기사)


 이 기사를 보고 있자니 잠시 멍해지고 도대체 이 땅 지구별에 태어난 존재들의 현황이 안쓰럽고 측은하고 민망하기 그지없어진다. 정치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있기에 이토록 사람을 앞두고도 정치 자체만을 앞세우는 것인가. 

 불법이든 아니든 생존의 절체절명한 상황에 내몰려 이웃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을 대하는 한 나라의 인권대처를 보는 심사가 편치만은 않다. 난민을 마치 자국의 정치적 손익계산에 따라 불편한 보따리처럼 취급하는 이런 상황은 참으로 난민들에게는 고통스럽고 서러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국이든 타국이든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기본적인 인류애의 처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크게 구하려는 욕심이 날로 늘어나가서가 아니라 예전이나 지금이나 백성과 국민은 저들의 보편적인 먹고 사는 일이 막막하고 열악함이 극에 달해 제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를 엿보게 된다. 그 국민에게 나라에 대한 정체성과 애정을 요구하는 것은 국가의 폭력에 버금간다. 그러니 급기야는 그런 나라에서의 또 다른 호구지책과 삶을 기획하여 월경(越境)을 감행하기에 이르곤 한다. 

 비근한 이웃나라 중국의 예를 들어보자. 땅덩어리가 큰 중국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경제적 열악함에도 이웃나라로 옮겨가지 않는 지역이나 국민이 다수 분포한다. 그런 경우의 대부분은 주로 전통적인 부족자치의 전통과 경제 및 공동체의 정서가 완연한 지역들인 소수민족들을 중심으로 분포한다. 자본주의의 파급력에 쉽게 자치 부족의 공동체적 전통이 무력화되거나 와해되지 않은 상태의 경우라 볼 수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계급과 계층을 파생시킨 가난과 부의 절대적 구분의 분별이 그 막강하고 속악한 힘을 덜 발휘된 상태라 볼 수 있다. 소강사회의 유물, 아니 소강사회의 미덕이 잔존하고 현생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어쩌면 개념의 차이가 있겠지만 소강사회와 대동사회가 이런 소수민족 내부에 여전한 하나의 짝패처럼 공존하는 사회도 있다. 

 샤오캉을 새롭게 정의한 사람은 중국공산당 최고지도자이자 중근 현대화의 막강실세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이다. 그는 1987년 제13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中國共產黨全國代表大會)에서 중국의 경제발전 목표로 원바오(溫飽, 온포), 샤오캉, 다퉁의 3단계로 이뤄진 싼부쩌우(三步走, 세 걸음) 계획을  발표했다. 원바오는 인민이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다는 뜻으로 기초적인 의식주가 해결되는 전체 인민의 삶의 기본단계를 예시한다. 두 번째로는 단계인 샤오캉 시대는 국민의 생활 수준을 중산층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회을 뜻하며 기존의 주거 안정과 경제적 여유를 어느 정도 구가하는 나름의 여유를 포함하는 상태를 이른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의 다퉁 시대는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실현하는 궁극적인 모델의 이상향을 지향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2002년 중국 정부는 중국이 샤오캉 사회에 진입했다고 선언했다. 당시 장쩌민(江澤民) 주석은 2020년까지 경제적 불평등과 소외를 보편적으로 해소해 ‘보편적 소강사회’를 만들겠다는 새로운 기대치를 드러냈다. 2013년 취임한 습근평 주석은 기조 연설에서 ‘중국의 꿈(中國夢)’을 구현하기 위해 전면적 샤오캉 사회를 건설을 피력하기에 이른다. 시진핑 정권은 202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2010년 대비 두 배로 늘려 모든 국민이 풍족한 샤오캉 상태를 이루겠다고 공언한다. 또한, 공산당 창건 100주년인 2021년부터 신중국 성립 100주년인 2049년까지 다퉁 시대를 확립한다는 비전을 대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2015년 5중전회를 통해 전면적 샤오캉 시대를 위한 2016~2020년까지의 경제 계획 사항들을 다각도로 챙기기에 이른다.

중국 정부의 장기적 정책목표와 비전을 통해 모든 인민이 안정되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는 상태로 1인당 국민소득 3천 달러에서 1만 달러 정도의 중산층 소득을 지향하기에 이른다.

샤오캉은 본래 유교의 경전인 《예기(禮記)》의 〈예운(禮運)〉 편에 등장하는 어휘이다. 공자는 시대구분을 통해 혼란스러운 난세(亂世)와 다소 안정된 소강(小康, 샤오캉), 유토피아적 이상사회에 근접한 대동(大同, 다퉁)사회로 구분했다. 소강(샤오캉)은 사람들이 자기 집안을 위하는 천하위가(天下爲家) 사회로 공공을 위한 사회는 아니지만 패밀리와 정치적 공동체의 서열에 대한 예를 갖춘 사회 커뮤니티를 지향한다. 대동사회는 큰 도가 행해지는 이상사회로 천하가 한 집인 것처럼 공공의 복리를 위해 위한다고 해서 천하위공(天下爲公) 사회를 지칭한다. 그러나 보라, 과연 소득과 외형적인 성장만으로 한 국가 한 사회 또는 여러 공동체의 구성원인 사람의 행복이 보장되는 지수들인가. 

 소월(素月) 김정식의 <엄마야 누나야>는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본원적인 행복의 근원이 물질적 소요의 채움만으로 이뤄지지 않고 소국과민(小國寡民) 속의 가족 구성원의 혈연적 연대와 사랑 속에서 샘솟을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에 근거하기에 이른다. 절박한 생존을 지키는 것도 언제까지나 인간에 대한 모든 숨탄것들에 대한 덕성스러움이자 자비의 번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제81장 第八十一章 不積 (顯質)

 

 信言不美

 美言不信

 善者不辯

 辯者不善

 知者不博

 博者不知

 聖人不積

 既以爲人己愈有

 既以與人己愈多

 天之道 利而不害

 聖人之道 爲而不爭


 미더운(거짓 없이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

 선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않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도를) 아는 사람은 널리 듣고 많이 보지 않고

 널리 듣고 많이 보는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한다

 성인은 쌓아 두지 않는다

 이미 그로써 남을 위했기에 자신은 더욱 많이 가지게 되고

 이미 그것을 남에게 주었기에 자신은 더욱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로울 뿐 해롭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이룰 뿐 다투지 않는다

 


[補註]

 - 노자47장 :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 온갖 것을 알고 창밖을 엿보지 않아도 하늘 위의 길을 본다. 그 나감이 멀수록 그 앎은 더욱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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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황인숙,「말의 힘


 말이 머릿속이나 관념에 어리는 어릿광대가 아니라 실존의 느낌으로 생동할 때의 기분은 우리를 조그맣게 깨어있게 한다. 황인숙이 ‘비!’ 라고 외치듯 실토하며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느낌표를 밟아보’는 순간은 말을 관념의 예속이 아니라 그야말로 말[言語]을 몸과 맘으로살아보는 실존의 순간이다. 

 겉만 좋은 말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키우는 말로 가자는 것.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음[信言不美]’이니 이러한 패러독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말을 살려야 한다. 세상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고 세상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겠는가. 스스로 자신에게 건네는 말 중에 우리는 어느 말을 살려 쓰고 어느 말을 멀리해야 하는가. 말씀의 도(道)와 말씀의 덕성스러움은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어둡게 고통의 굴레를 쓰게도 한다. 그러니 돈독한 말로 세상의 미만(彌滿)한 미숙한 심신들을 깨우고 다독이는 말로 가자는 것, 그렇듯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는 것. 새로 깨어나지는 것, 매순간 도(道)의 흐름과 덕성스러움의 나무그늘로 번져보자는 것. 


 그대가 오는 것도 한 그늘이라 했다 

 그늘 속에 

 꽃도 열매도 늦춘 걸음은 

 그늘의 한 축이라 했다 

 

 늦춘 걸음은 그늘을 맛보며 오래 번지는 중이라 했다 

 

 번진다는 말이 가슴에 슬었다 

 번지는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옛날이 아직도 머뭇거리며 번지고 있는 

 아직 사랑을 모르는사랑의 옛말, 

 아직도 청맹과니의 손처럼 그늘을 더듬어 

 번지고 있다 

 

 한끝 걸음을 얻으면 그늘이 

 없는 사랑이라는 재촉들, 

 너무 멀리 

 키를 세울까 두려운 그늘의 다솜, 

 

 다솜은 옛말이지만 

 사랑이라는 옷을 아직 입어보지 않은 

 축축한 옛말이지만 

 -졸시,「이끼


 이끼 같은 말, 습습하고 졸박할 뿐 허장성세가 없고 담담한 반그늘이 어린 말을 가져보자. 

말의 힘은 미사여구의 수사(修辭)에서 나오지 않고 그 담담하고 진솔한 자기 신뢰의 마음바탕에서 돋아나 번진다. 라오쯔는 이 장(章)에서 순박하고 무구한 말의 너름새에서 진정성의 힘과 그 말이 지닌 감화력(感化力, influence)을 설파한다. 말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을 진솔하게 하는 것의 순정함을 역설한다. 순박함과 투박함을 일찍이 강조해온 노담의 인식은 통나무 같은 꾸밈없음[拙樸]이 그대로 자연의 속종이며 그 무위(無爲)로 사는 한 방편의 여줄가리인 셈이다. 

 사랑의, ‘다솜은 옛말이지만’ 말이다. 그걸 다시 살리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미래나 할 것도 없이 도(道)는 녹슬지 않고 생동하며 그 후덕(厚德)한 발흥은 세상의 모든 불민함들과 어리석음을 똥기어 훈육하고 허약한 심신을 생육한다니, 여기 소슬히 번져가는 것이 어디 이끼뿐이랴. 이끼처럼 꽃도 열매도 없이도 그 푸르름은 때로 꽃을 대신하고 그 으늑한 듯 소슬한 빛깔은 세속의 온갖 재화의 열매를 대신하고도 남음이 있다. 

 다솜, 미더운 말 한 마디로 우리는 끌밋한 도를 얻어가려 하고 그 도를 품어서 부족하지만 덕성스러운 최소한의 인류가 돼 가고자 한다.(끝)



<연재를 마치며>

 여기 그간 반 년여를 어울려 놓은 글을 내려놓는다. 베란다 너머 느티나무에 오른 매미가 목청을 트던 날부터 이즈음 희끗거리며 눈발이 허공에 비칠 때까지 쓰는 일은 쫓기고 좇음을 갈마들었다. 처음 이 글을 쓰려 했을 때부터 이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애써보려 했고 여러 매체에 부러 의도를 내며 여러 해 동안 연재의 징검돌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지면과 분량의 문제부터 크고 소소한 제약들이 적지 않았다. 내 스스로에겐 이런 취지의 글에 대한 선망이 회의감으로 바뀐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 돌이 놓이고나니 한없이 아쉽고 또 기껍기도 하다.

 불민하고 용렬하기 그지없는 글이 이나마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격절을 뛰어넘는 노담 스승의 넓고 웅숭깊고 호활한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고 거기에 빗댈 수 있는 시편을 써낸 시인 제현(諸賢)들 덕분이다. 나는 그저 소슬히 기대어 사족의 말을 겨우 보탤 따름이었다. 심오하고 현량한 고전에 어리석은 말을 보탰더라도 라오쯔의 선지식이 오늘날 지구 문명에 다시 회자되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무엇보다 난망한 글에 지면을 할애해준 만해학회의 배려와 이용헌 주간의 도움에 감사를 전한다. 모두의 겨울 속에 모두의 봄이 있음을 다시 되새긴다. 

-유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