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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호 Vol.17 - 유종인


[시로 읽는 노자 이야기]

 노자(老子)와 시마(詩魔) 6



 제63第六十三章 无難 (恩始)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1

 報怨以德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天下大事必作於細

 是以聖人終不爲大

 故 能成其大

 夫

 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是以聖人 猶難之

 故終無難矣

 

 함이 없이 (무위로) 하고

 일이 없이 (무사로) 일하며

 맛이 없이 (무미로) 맛을 낸다

 큰 것을 얕보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

 원한을 (앙갚음하지 않고 도리어) 은덕으로 갚는다

 어려운 일도 쉬운 데서부터 손을 쓰고

 큰 일도 아주 작은 데서부터 해 나간다

 천하의 어려운 일도 반드시 쉬운 데서 일어나고

 천하의 큰 일도 반드시 자잘한 데서 일어난다

 이 때문에 성인은 끝까지 (스스로) 크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렇게 크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무릇

 가볍게 승낙한 사람은 반드시 믿음이 적고

 너무 쉽게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이 때문에 성인도 (모든 일을) 어렵게 여긴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없는 가운데 (무난히) 마친다

 

[補註]

 * 1 : [죽간본]  것을 작게 여기니 (경시하니) 너무 쉽게 여기면 반드시 심한 어려움을 겪는다. ( 小之多易必多難)

 - 노자79큰 원망을 푼다고 해도 반드시 앙금이 남기 마련이니 어찌 잘 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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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푸르디푸른 종이는 구겨지지 않는다

 구겨지지 않으면 종이가 아니다

 구겨지지도 않고 접혀지지도 않는 것이

 하늘에 펼쳐져 있다

 새들은 시간을 가로질러 나는 법을 모른다

 아무도 새들에게 천문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것도 자유롭다

 읽을 수 없는 서책이 하늘에 가득하다

 종이도 아닌 것이 필묵도 아닌 것이

 사계를 편찬하고 우주를 기록한다

 누가 하늘 끝에 별들을 식자植字해놓았나

 최고의 천문서는 점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가장 멀고 깊은 것은 마음 밖에 있는 것

 나는 어둠을 더듬어 당신을 읽는다

 당신의 푸르디푸른 눈빛을 뚫어야만

 구김살 없는 죽음에 도달하리라

 이 무람한 천기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새들은 밤에도 점자를 남기며 날아간다

 - 이용헌, 「점자로 기록한 천문서

 

 이용헌의 시적 시야(視野)는 그야말로 하늘의 문장, 즉 천문(天文)의 펼침과 그 광활한 책을 읽어내는 데서 어둠 속에 눈이 밝아진다. 하늘의 종이는 구겨지지도 않고 접혀지지도 않는 것으로서의 불가능이 없는 무한성(無限性)이다. 이러한 영겁(永劫)의 시간을 거느리거나 드리운 천체라야 눈비에 젖어 흐려지고 찢어지고 주름이 잡히는 법 없는 늘 그러한 낟낟한 천문(天文)이 별과 달과 온갖 행성들로 도드라지듯 새겨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천체의 일단을 시간을 가로질러 나는 법을 모른채 새들이 날아간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리고 이런 새들의 비상과 활공(滑空)아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것도 자유롭다라는 언술 속에서 앎이라는 인간의 지식체계가 지닌 한계성과 무지(無知)가 함의하는 포괄적이고 웅숭깊은 도()의 확장성을 동시적으로 드러낸다. 앎이 편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얽매임을 드리우고 오히려 조악한 지식이 없음으로 자유로운 활공을 여는 자연의 세계를 새를 통해 드러내니 호활(浩闊)하다

 그러므로 천문을 가로지르는 저 새들의 자유로운 날갯짓은 함이 없이 (무위로) 하고 일이 없이 (무사로) 하는[爲無爲 事無事]’ 라오쯔의 언명과 갈마드는 구석이 있다그래서 협량한 지식체계가 아닌 이 우주의 너름새 속에는 읽은 수 없는 서책이가득한 것이며 종이도 아닌 것이 필묵도 아닌 것이/사계를 편찬하고 우주를 기록하는 자연의 흐름과 웅숭깊은 혼돈의 풀무질이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랑호에서 낚시를 한다
 나는 사람이 호수에 빠져 죽으면 조개가 그 살을 먹고
 자신의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물조개는 먹지 않았다
 영랑호에서 낚시를 한다
 물풀들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조용한 바람을 타고 번져가는 들풀처럼
 부드럽게 휘감아오는 저 죽음의 춤
 아직도 내가 은근한 부름에 소스라치게 놀래는 건 그 때문이다
 영랑호에서 낚시를 한다
 그러다 밤이 깊으면, 東宮靑龍七宿를 타고 三垣 28수를 여행한다
 자미성으로 칠살성의 악함을 제압시키고, 거문성의 폭력성을 잠재운다
 내가 영랑호에서 낚시를 하는 이유는
 간절히 고래 고기가 먹고 싶기 때문이다
 봉황은 미끼만 따먹고, 남쪽 하늘로 날아가고
 큰 암소가 거북의 껍질을 쓰고 나타났다
 나는 영랑호에서 민물낚시를 하며, 이게 무슨 뜻인가
 생각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태양성과 타라성이 같이 입질하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다
 매년 동지의 밤마다
 누군가 노새를 끌고 영랑호에 와서
 환생을 읽고 가는 것은, 좀더 이상한 일이다
 나는 영랑호에서 낚시를 던져놓고
 식구들이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부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낚싯대가 썩어 있고
 기다리는 짐승이 왔지만 누군지 알지 못한 채
 비늘 한 장만 달랑, 수수께끼처럼 남겨져 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식구들이 내 새끼, 저 새끼 한다
 비늘의 첫 페이지를 연다
 - 함성호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천상열차분야지도〉,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 돌에 새긴 천문도. 조선 태조 4(1395)에 흑요암에 새긴 것과 숙종 13(1687)에 대리석에 새긴 것이 있다. 흑요암에 새긴 것은 국보 제228.

 

 시인은 영랑호에서 민물낚시를 하며 고래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고, ‘태양성과 타라성이 같이 입질하는 것을 목도하기도 한다. 더하여 봉황은 미끼만 따먹고, 남쪽하늘로줄행랑을 치고 뜬금없이 참으로 우연인양 큰 암소가 거북의 껍질을 쓰고 나타나기도 한다. 또 매년 동지의 밤마다/누군가 노새를 끌고 영랑호에 와서/환생을 읽고 가는 것은 또 어떤가. 모두가 이상하고 이상한 일들만 곡두처럼 들고 난다. 그런데 시인은 한 술 더 떠서 식구들이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그 사이 낚싯대가 썩어있기까지 하다. 그리고 수수께끼처럼 비늘 한 장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건 또 무엇인가. 아마도 세속의 범상한 사람들이 가늠할 수 없는 우주적 흐름의 실체가 일반인들한테는 그저 이상하기 그지없고 환()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아마도 저 비늘 한 장<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자수(刺繡)처럼 수놓은 뭇 별들의 징표 같은 것은 아닌가. 저 숱한 헤아릴 길 없는 별들의 운행을 시인은 잠시 지상의 각박한 일상 속에 여투어 놓고 지상과 천상을 잇는 호활한 스케일을 여는 계기로 삼고자 함이 아닌가. 그럴 때 마침 무수한 시간의 곡절들이 영랑호 물가에 희귀한 우주의 변성(變聲)처럼 다채로운 이적(異蹟)을 잠시 현현해 보이는 것은 아닌가. 범박한 속인의 생각으로는 감히 가늠하기 어려운 온누리의 조화를 우리는 저 별자리 지도를 통해 조감하는 순간의 광휘에 휩싸여 볼 수도 있지 않은가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 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문장>(1941. 4)-

 - 백석(白石)국수

 

 국수다. 나는 국수를 좋아한다. 그래서 국수와 관련된 음식이 있는 나라를 탐방하는데 내 일생의 얼마간은 즐거이 탕진해도 좋으리라 여긴 적이 있다. 술술 넘어간다. 국수의 종류, 즉 누들(noodle)은 나라와 지역과 사람마다 천차만별로 다양하게 번져 빚어진다. 그 차별이 아닌 차이가 너무나 기꺼이 마주하고 싶은 입맛이고 풍미의 계절을 사철 벌여놓는다

 그래서 국수는 후르륵 후르륵 잘도 목넘김이 좋다. 물은 아니지만 물의 형상과 성정을 지녔고 밥은 아니지만 곡기의 여줄가리를 길게 지녔다. 청치짐한 국수가락을 보면 왠지 인생이 억지스러움을 덜고 슬픔의 여린 서슬로도 곁에 두고 먹고 살만한 계제를 가지라 하는 것만 같다

 국수는 아직 영구치가 나지 않은 어린 아이가 앞접시에 옮겨 담아 포크로 말아올려 가볍게 뚝뚝 봄비철럼 끊어 먹기도 하고 중장년의 건강한 남녀가 앉은 자리에서 후르륵 후르륵 멸치육수에 흰 수염발 같은 국수를 크게 호흡하듯 들이켜 먹기도 한다. 더하여 이빨이 거의 빠져 뺨이 움푹하니 합죽이 같은 오무래미 노인도 새삼 보조개가 패이듯 미소 짓다가 입안 가득 흰 국수가닥을 품고 뺨이 탱탱하니 빵빵해지며 거침없이 먹기도 한다. 남녀노소 누구라도 쉽게 부대낌이 없이 술술 잘 넘겨 먹는다. 성질 급한 나나 당신이 많이 씹지 않아 선똥을 눌 만한 질긴 음식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선선하고 낙락한 가락을 지닌 국수의 풍미와 매력을 도()의 속성이라 견주어봐도 크게 두동진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국수는 사람이 만들면서도 그리고 그렇게 고명을 얹어 빚으면서도 시인은 왠지 이것은 오는 것이다라고 한다. 음식과의 만남, 국수와의 마주함은 은근한 기억이나 추억의 전차(前次)를 시원스레 그리고 담담하니 떠올려가며 먹는 음식으로  낙락하지 않을까. 때로 이마에 땀을 송골송골 맺게도 하고 또 때로 이마의 돋은 땀방울을 식혀 들어가게도 하는 국수는 옛 선인들이나 스님이나 거리의 노숙자나 가난한 시인이나 그런 것 필요없이 장삼이사 우리 삼이웃들이 어느 때고 소박함으로 한 끼 들이는 것이다. 그러니 국수를 먹는 것은 하나의 도락(道樂)이다. 마주하고 먹어도 좋고 홀로 유리창 너머를 가끔 흘끔거리며 풍경을 내다보며 먹어도 좋다. 비오는 날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노포(路鋪)에 앉아 비바람 소리를 겨드랑이에 끼고 먹어도 쓸쓸하니 좋다. 겉은 한기에 소름이 돋아도 속은 뜨끈하니 슬픔이 알싸하게 아랫목에 똬리를 틀고 앉아 세상 한구석은 따뜻하게 품는다그러면서 라오쯔 선생의 말을 되새기느니, ‘맛이 없이 맛을 내며[味無味]’ 세상 어려운 일도 쉬운 데서 손을 씀[圖難於其易]’을 괜히 국숫발을 목에 넘기며 떠올리게 된다. 거창한 일과 자질구레한 일, 귀찮은 것과 그럴 듯한 것이 서로 나뉘어 우리의 맘을 번거롭게 재우칠 때 가만히 이마를 맞댈 듯이 마주 앉아 국수 한 그릇을 놓을 일이다. 그리고 그 방금 놓인 국수그릇에서 피어오르는 허연 김의 필체를 잠시 허공에 두고 헤아려볼 일이다. 이럴 때 침묵은 참 담백하면서도 그윽하고 한낮에도 고즈넉하지 싶다. 내 국숫발 넘기는 땀이 돋은 이마와 정수리 저 위의 천공에 낮별이 돋아 그런 나를 가만히 침을 삼키며 내려다보고 있다 생각해 보는 것이다.

 

 

64第六十四章 輔物 (守微)

 

 其安易持

 其未兆易謀

 其脆易泮

 其微易散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

 合抱之木生於毫末

 九層之臺起於累土

 千里之行始於足下

 爲者敗之 執者失之

 是以聖人

 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慎終如始 則無敗事

 是以聖人

 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안정돼 있을 때 유지하기 쉽고

 아직 낌새가 없을 때 (그것을 다룰) 꾀를 내기 쉽다

 무를 때 녹아 풀어지게 하기 쉽고

 미약할 때 흩뜨리기 쉽다

 (일은) 터지기 전에 미리 (처리)해야 하고

 (나라는) 어지러워지기 전에 미리 다스려야 한다

 아름드리나무도 털끝 같은 싹에서 자라나고

 구층 높은 대도 한줌 흙에서 일어서고

 천 리 갈 길도 발아래 (한 걸음)에서 비롯한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망치고 움켜잡으려고 하면 놓친다

 이 때문에 성인은

 억지로 함이 없으므로 (무위하므로) 망가뜨리는 일이 없고

 움켜잡으려고 함이 없으므로 놓치는 일도 없다

 백성(사람들)이 일을 할 때 늘 거의 다 될 무렵에 망친다

 끝 무렵에도 처음처럼 삼가면 일을 망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욕심내지 않음을 욕심내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배우지 않음을 배우고 뭇사람이 지나쳐 간 곳으로 되돌아간다

 (능히) 만물이 스스로 이루도록 도우며 감히 억지로 하지 않는다

 

[補註]
 - 노자29천하는 신기한 그릇이라 빚을 수도 없고 움켜잡을 수도 없다. 빚으려고 하면 망치고 움켜잡으려고 하면 놓친다.

 - 노자20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뭇사람 모두 쓸모가 있지만 나만 미련하고 너절하다. 나만 홀로 남과 달리 젖어미를 소중히 여긴다.

 - 노자48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날로 줄어든다. 줄어들고 줄어들어 무위(의 경지)에 이르면 함이 없이도 (무위로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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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감자를 묻고 나서

 삽등으로 구덩이를 다지면

 뒷산이 꽝꽝 울리던 별

 겨울은 해마다 닥나무 글거리에 몸을 다치며

 짐승처럼 와서는

 헛간이나 덕석가리 아래 자리를 잡았는데

 천방 너머 개울은 물고기들 다친다고

 두터운 얼음옷 꺼내 입히고는

 달빛 아래 먼길을 떠나고는 했다

 어떤 날은 잠이 안 와

 입김으로 봉창 유리를 닦고 내다보면

 별의 가장자리에 매달려 봄을 기다리던 마을의 어른들이

 별똥이 되어 더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하늘에서는 다른 별도 반짝였지만

 우리 별처럼 부지런한 별도 없었다

 그래도 소한만 지나면 벌써 거름지게 세워놓고

 아버지는 별이 빨리 돌지 않는다며

 가래를 돋워대고는 했는데

 그런 날 새벽 여물 끓이는 아랫목에서

 지게 작대기처럼 빳빳한 자지를 주물럭거리다 나가보면

 마당에 눈이 가득했다

 나는 그 별에서 소년으로 살았다

 - 이상국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요즘은 도시에 살면서도 가끔 별을 살핀다. 저녁을 먹고 티브이를 습관적으로 틀어 보다가도 뭔가 무연한 느낌에 이끌려 베란다로 나간다. 그리곤 거기 드리운 어스름한테 가 드디어는 통유리창을 두어 뼘 열고 다시 방충망까지 열어 자라목처럼 허공으로 머리를 내민다. 그리고 고개를 틀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모가지를 이리저리 틀어대느라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없을 것이라 여긴 하늘에서 별을 보았을 땐 작은 횡재를 한 듯 가만히 기꺼워지곤 한다

 헤아릴 수 없이 멀리 있는 저 별들만이 온전히 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국의 시편은 우리네 사는 이 지구를 실물적이고 감각적으로 모두가 발 딛고 있는 별로 인식시킨다. 무슨 대단한 거사를 벌여서가 아니라, ‘감자를 묻고 나서/삽등으로 구덩이를 다지면/뒷산이 꽝꽝 울리던 별로 우리도 이 지구 땅별에 발 딛고 사는 숨탄것이란 실제감을 선사한다. 몇 억광 년인지도 모르게 아득하게 떨어져 있는 별들한테서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 행성(行星)도 거기 외계인한테는 초록별로 느껴질 마련이다. 거기 정말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 별에 선량한 누군가 살아서 어느 날엔가 서로 도우며 살 일이 대가없이 이뤄질 날도 라오쯔가 말한 덕성스러움의 여줄가리가 아닐까.

  이런 우주적인 친목(親睦)을 우리는 어느 날에 소박하고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마주할지는 몰라도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가 sf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거대한 공포의 미래와는 다른 것임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자연스러운 만남의 앞날은 시인의 농가의 겨울이 와서 천방 너머 개울은 물고기들 다친다고/두터운 얼음옷 꺼내 입히고는/달빛 아래 먼길을 떠나는 것처럼 흔연하고 늡늡한 마음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이었으면 한다. 사랑의 시작과 끝은 이처럼 처음이든 그 나중이든 서로를 억지로 함이 없으므로 (무위하므로) 망가뜨리는 일이 없고/움켜잡으려고 함이 없으므로 놓치는 일도 없음[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상대를 잡아채고 억눌러 자신의 우위를 돋보이려 하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혹은 주변의 약한 자들을 통해 추켜세우려 하지 않으므로 너나없이 가만한 평화의 속종을 번져두려는 것도 이 지구 땅별에 종요로운 바가 아닌가. 어느 별이든 간에 거기 숨탄것들이 있다면 알든 모르든 새벽 여물 끓이는 아랫목에서/지게 작대기처럼 빳빳한 자지를 주물럭거리다 나가보면/마당에 눈이 가득'한 것을 보는 일의 흔전만전하듯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풍광이지만 그렇듯 평화로운 존재의 여건을 드리워주는 일이 아닌가. 일러한 마음바탕의 한 모서리엔 욕심내지 않음을 욕심내는 일[欲不欲]’이 자주 번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먼저 그런 노력을 경주해야 하고 그런 내가 본받고 싶은 이들이 많아 나를 늘 부끄럽고 용렬하다 깨우치는 존재들이 많은 별이 나는 덧없이 그립기도 하는 것이다.

 

 

65第六十五章 玄德 (淳德)

 

 古之善爲道者

 非以明民 將以愚之

 民之難治 以其智多

 故以智治國 國之賊 *1

 不以智治國 國之福

 知此兩者 亦稽式 *2

 常知稽式

 是謂玄德

 玄德深矣 遠矣

 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옛날에 도를 잘 닦은 사람은

 백성을 똑똑하게 만들지 않고 어리석게(우직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백성이 지혜(지략)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림은 나라의 해악이요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함은 나라의 복덕이다

 (항상) 이 둘을 알고 있는 것은 또한 (다스림의) 본보기이다

 항상 (다스림의) 본보기를 알고 있는 것을

 일러 그윽한 덕이라고 한다

 그윽한 덕은 깊고도 멀다(원대하다)

 (그윽한 덕은) 만물과 더불어 돌아온 다음

 큰 따름(스스로 그러함)에 이른다

 

[補註]
 - 노자20나만 지쳐서(피곤하여) 돌아갈 곳이 없는 듯하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을 가진 듯 흐리멍덩하다. 세상사람은 밝지만(명석하지만) 나만 홀로 어둡고(우매하고) 세상사람은 낱낱이 살피지만(명백히 구별하지만) 나만 홀로 두루뭉술하다. ~뭇사람 모두 쓸모가 있지만 (유위하지만) 나만 미련하고 너절하다 (고루하다). 나만 홀로 남과 달리 젖어미를 소중히 여기고자 한다.

 - 노자75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위에서 유위로 하기 때문이다.

 - 노자40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앎을 내세우지 (지식·지혜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밝고 환하게 사방에 통달해도 앎을 내세우지 (지식·지혜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1 : () : 나라에 어지러움을 일으키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 2 : [백서본] '항상' 이 둘을 (잊지 않고) 알고 있는 것도, 표준으로 삼아 따를 바(본보기, 본받을 바)이다. 附言; 稽式=法式 or 取法,

 

 ※ 되돌아감에 대하여

 - 노자51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 노자42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 노자14이 하나[]~그 끝을 가늠할 수 없어서 이름 붙일 수 없고 '아무런 물상이 없음'으로 다시 돌아간다 [復歸].

 - 노자40되돌아가는(되돌아오는) [反者, 返也者]이 도의 움직임(활동)이다.

 - 노자16무릇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나지만 저마다 제 뿌리(근원)로 다시 돌아간다[復歸].

 - 노자34큰 도[大道]는 넘쳐 흘러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디에나 벋친다. ~만물(萬物)이 그에게 돌아오지만[]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니 크다[]고 이름지을 수 있다.

- 노자25나는 아직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자를 지어 도()라고 하고 억지로 이름 지어 크다[]고 한다. 크므로 (두루) 가고 (두루) 가므로 (아득히) 멀어지고 (아득히) 멀어졌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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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저녁에는 양들을 이끌고 돌아가야 한다

 

 희지는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생활도 오래되었다

 

 무사히 양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희지는 만족스럽다

 

 기도를 올리고

 짧게 사랑을 나눈 뒤

 

 희지는 저녁을 먹는다

 

 초원의 고요가 초원의 어둠을 두드릴 때마다

 양들은 아무 일 없어도 메메메 운다

 

 풍경이 흔들리는 밤이 올 때

 목양견 미주는 희지의 하얀 배 위에 머리를 누인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 황인찬희지의 세계

 

 시인이 말한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온다는 언술에는 지극히 당연한 목장 풍경의 순연하고 순정한 평화의 모드가 배어있다. 그러나 이토록 자연스러운 순행이 이뤄지는 차원은 결코 방목(放牧)의 당연한 결과만이 아니라 목장주 '희지''목양견 미주'와 그들의 목양(牧羊) 대상들이 서로 잘 거느리고 서로 잘 수용하고 서로 남모르게 이끌고 섬기는 숨탄것으로서의 조화로운 천분(天分)의 살아감에 있다. 서로를 같이 살아가도록 자연 속에 순치(馴致)시키는 다스림이 있으나 어거지의 되바라진 통솔은 거의 없다. 이는 상대방이 사람이건 짐승이건 풋것의 식물이든 상관없이 억지스럽게 요행이나 꼼수를 통해 맞서 살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억지스러움을 통해 인위적인 부자연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서로의 성정을 헤아려 같이 살아가려 한다. 라오쯔가 설파한 백성을 똑똑하게 만들려 하지 않고 어리석게 만들려 한다[非以明民 將以愚之 ]’는 언설과 어느 정도 의식의 결을 같이 한다

 지혜나 기술이란 노담(老聃)이 보기에 '목양견 미주'의 똥보다 못한 것이다. 헤살을 부리거나 갖은 살()을 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의 진행을 몸과 맘에 들이려 한다. 그런데 이 장()에서 라오쯔는 사람과 사람이 다스림에 있어서나 사람과 다른 숨탄것들이나 자연물을 다스리고 통솔함에 있어서 아주 획기적인 아젠다(agenda)를 펼친다. 그것은 바로 '옛날에 도를 잘 닦은 사람은/백성을 똑똑하게 만들지 않고 어리석게(우직하게) 만들려고'한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시대착오적인 우민정치(愚民政治)의 일환이라는 말인가. 위정자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손쉽고 욕망의 입맛대로 써먹기 위한 방편으로 백성이나 시민을 정치적 사각지대로 몰과 오락과 쾌락과 천민자본에 중독(holic)되도록 한다는 의도일까. 아마 적어도 라오쯔는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어리석게 함이라는 정치적 발언의 함의는 좀 더 근원적인 데 있다. 그것은 간교할 정도의 이권이나 세간의 사람들로 하여금 시비분별이 철저하고 갖은 욕망에 똥파리처럼 달겨드는 예민한 탐닉자(耽溺者)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일 성 싶다. 본문에도 나와있듯이 소박하고 우직한 백성이나 시민으로 스스로 도탑고 지나친 욕망에 따른 고통의 굴레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함이지 싶다. 황인찬이 드리워주는 시적 전언처럼 초원의 고요가 초원의 어둠을 두드릴 때마다/양들은 아무 일 없어도 메메메울고 또 풍경이 흔들리는 밤이 올 때/목양견 미주는 희지의 하얀 배 위에 머리를 누이는 평화로운 너나들이의 정경들, 그리고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는 사물들의 세계를 참다운 시민 백성의 선처(善處)로 대유(代喩)하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이런 평화로운 정경의 제시를 통해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라고 선언적으로 말하는데 소박한 과장됨이 오히려 가만한 울림이 있다. 그러면서 끝말이 묘하다. 자연 속의 관계적인 분위기를 끌밋하게 보여주던 시적 화자가 희지는 혼자 산다라고 좀 엉뚱한 얘기를 하는 듯하다. 그런데 곰곰이 짚어보면 이러한 세계는 희지가 혼자 사는 것처럼 시인은 말하지만 결코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연결된 삶이고 평화로이 존재의 숨결과 정서를 나누는 연대의 삶이다. 그런데도 굳이 혼자 산다라고 하는 것은 혼자 사는 삶이 지니는 단독자적인 자유와 걸림없는 삶의 결행(決行)이 주변의 자연과 숨탄것들과 같이 살아도 온전하게 확보되고 여유롭게 번지는 지경을 드러냄이 아닐까. 이는 마치 ‘(그윽한 덕은) 만물과 더불어 돌아온 다음/큰 따름(스스로 그러함)에 이른[與物反矣 然後乃至大順]’ 상황처럼 혼자 사나 여럿이 더불어 자연과 낙락히 부대끼며 살아가나 별 차이가 없음의 경지를 내다봄이 아닐까.

  

 

66第六十六章 江海 (後己)

 

 江海之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1

 故能爲百谷王

 是以聖人

 欲上民 必以言下之 *2~

 欲先民 必以身後之

 是以聖人

 處上而民不重

 處前而民不害

 是以天下樂推而不厭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성인도

 백성 위에 오르고자 할 때 반드시 말로써 자신을 낮추고

 백성 앞에 나서고자 할 때 반드시 자신을 뒤세운다

 그러므로 성인이

 위에 자리해도 백성은 버겁다 여기지 않고

 앞에 자리해도 백성은 해롭다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가 기꺼이 그를 추대할 뿐 싫어하지 않는다

 그는 (왕좌나 공명을 놓고)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 아래 아무도 그와 다툴 수 없다

 

[補註]
 * 1 : [죽간본] 강과 바다가 뭇 골짜기의 아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以其能爲百谷下)

 * 2 : [죽간본] 성인이 백성 앞에 있을 때는 자신을 뒤세우고 (함부로 나서지 않고 머뭇거리고) 성인이 백성 위에 있을 때는 말로써 자신을 낮춘다.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은 그를 무거워하지 않고 성인이 백성 앞에 있어도 백성은 그를 해롭다 여기지 않는다. (聖人之在民前也以身後之其在民上也以言下之其在民上也民弗厚也其在民前也民弗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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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어머니는 지붕에

 호박과 무를 썰어 말렸다

 고추와 콩 꼬투리를 널어 말렸다

 지붕은 태양과 떠도는 바람이

 배불리 먹고 가는 밥상이었다

 저녁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초승달과 서쪽에 뜨는

 첫 별이 먹고 나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날씨가 맑은 사나흘

 태양과 떠도는 바람

 초승달과 첫 별을

 다 먹이고 나서

 성자의 마른 영혼처럼

 알맞게 마르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반찬으로 만들었다

 우리들 생의 반찬으로!

 - 이준관어머니의 지붕

 

 어머니는 슬하(膝下)의 자식과 천상의 것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다란 지붕에도 오르신다. 지붕 위에 호박과 무고추와 콩 꼬투리등속을 얹어 말리는 것은 첫째로 '태양과 떠도는 바람'을 먹이는 행위며 초승달과 첫 별의 허기를 채워주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올린 나물류 등은 잠시 몸피가 마를 뿐 아주 없어지지 않고 꾸둑꾸둑하니 더 마르게 여문 것이다. 그러니 앞서 일월성신(日月星辰)에게 습습한 먹잇감을 내주고 다음으로 지상의 자식들에게 천지자연의 기운이 밴 것을 마련해 내어준다

 자식들에게 내어줄 것을 장만하기 위해 당신은 무릎을 땅에 붙이고 허리를 꺾으며 머릿수건에 싸인 머리를 조아려 숙인다. 생채류를 나물로 만들기 위해 바닥에 오체투지 하듯 낮아질 때 당신은 가장 성스럽고 그윽해진다. 그때만큼 대지 모신의 땅에 가장 가까이 심장이 내려닿는 순간이다. 가장 낮게 조아리고 무릎걸음마저 마다하지 않음에도 당신은 다시 없이 천지간의 모신(母神)으로 고요하고 풍성한 생의 현빈(玄牝)으로 숨탄것들을 낳고 기른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을 것을 길러내고 힘을 북돋우며 그 조무래기들을 세상의 줏대 있는 역량으로 키워낸다. 이 키워냄이 곧 세상 다스림의 궁극적 원천이요 천혜의 마음바탕이요 훤칠한 몸을 조리차하는 너름새이다

 실제로 생체의 풋것들보다 그것을 말린 것의 영양가와 풍미와 식감이 더하다고 한다. 이렇듯 생채류를 말리는 일은 단순히 수분을 빼거나 저장을 위한 것도 있지만 성자의 마른 영혼처럼/알맞게 마르게 함으로써 천지간의 자식된 모든 것들을 힘써 길러내는 다솜의 영양을 배가시키는 슬기가 배어있다. ‘우리들 생의 반찬으로!’로 내어주는 어머니와 같은 덕()의 번짐을 놓고 우리는 그런 도덕이 있는 자를 앞에 자리해도 백성은 해롭게 여기지 않음[處前而民不害]’이니 이는 그가 잡아채려 하지 않고 무엇이든 무엇이나 그 몸과 맘의 영육을 먹여 살리려 하기 때문이다.

천지자연의 일월성신을 먹여 살림은 다름 아닌 하나의 생채류 하나에 배어든 물의 정체(停滯)를 터서 다시 자연으로 돌려주는 순환과 환류(還流)의 숨은 과정이 갈마들어 있다

 

 

67第六十七章 三寶

 

 天下皆謂

 我道大 似不肖 *1~

 夫唯大 故似不肖

 若肖 久矣其細也夫

 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慈故能勇

 儉故能廣

 不敢爲天下先 故能成器長

 今

 舍慈且勇

 舍儉且廣

 舍後且先

 死矣

 夫慈以戰則勝 以守則固

 天將救之 以慈衛之 *2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말한다

 나는 너무 커서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라고

 무릇 오직 크므로 닮은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만약 (그 무엇을) 닮았다면 오래전에 아주 작아졌으리라

 내가 () 간직하고 있는 세 가지 보배가 있다

 첫째는 자애로움이고

 둘째는 검소함이고

 셋째는 감히 천하의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자애로우므로 용감할 수 있고

 검소하므로 넓힐 수 (넉넉해질 수) 있고

 감히 천하의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으므로 만물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나 오늘에는

 자애로움을 버리고 용감하려고 하고

 검소함을 버리고 넓히려고 하고

 뒤처질 줄은 모르고 앞서려고 한다

 그리하면 다 사멸하고 만다

 무릇 자애로움으로 싸우면 이기고 자애로움으로 지키면 공고하다

 하늘이 장차 그를 구하면 (도우면) 자애로움으로 그를 지켜라

 

[補註]

 * 1 : [왕필본] 내 도는 너무 커서 ~

 [백서본] 나는 너무 커서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라고. 무릇 오직 크므로 닮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 무엇과) 닮았다면 작아진지 오래되었으리라. (我大 不宵 夫唯大 故不宵 若宵 細久矣 )

 - 노자32[죽간본] 도는 이름도 없고 질박하고 아주 작지만[] 천지(우주)(도를) 신하로 삼지 못한다.

 [하상공본·백서본] 도는 이름도 없고 질박하고 작지만[] 천하의 그 누구도 도를 신하로 삼지 못한다.

 [왕필본] 도는 항상 이름이 없지만 천하의 그 누구도 (도를) 신하로 삼지 못한다.

  ※ 왕필본(노자32) 본문에는 '질박하다[], 작다[], 잘다[]'라는 표현이 없고 주석에는 '작다[], 잘다[]'라는 문구가 없음. 노자67장에서 '내 도는 크다''나는 크다'로 바꾸면 왕필본 노자32장 본문에서 ',,'라는 표현을 굳이 삭제할 필요는 없었을 것임.

 - 노자34: 큰 도는 넘쳐 흘러 ~어디에나 벋친다 ~따라서 작다고도 이름지을 수 있고 ~크다고도 이름 지을 수 있다.

 - 노자69: 병기를 들고 맞싸울 때는 (싸우게 됨을) 슬퍼하는 쪽에서 이기기 마련이다.

 * 2 : [백서본] 하늘이 장차 그를 세우(고자 하)면 그대는 자애로움(의 담장)으로 그를 둘러쳐라. (天將建之 女以茲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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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박목월가정」(청담晴曇』, 일조각, 1964)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그 본보기는 가정(家庭)으로 견주어봄은 크게 어긋남이 없을 듯하다. 복잡다단한 여러 관계망이나 시스템으로 보자면 그지없이 덩치가 크고 복잡한 것이 나라의 스케일이지만 그 본질과 구조나 통치의 다스림의 근간은 한 가정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도 크게 두동지지만은 않다

 라오쯔가 설파한 천하나 큰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세 가지의 덕목(virtue)은 결국 사람과 같은 숨탄것들을 보듬고 그윽이 부대끼며 다솜을 번지는 웅숭깊은 속종이니 그것은 한껏 뽐내거나 짓누르거나 허세를 떠는 방향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지극히 소박하고 검박(儉朴)하며 늡늡하니 자애로우며 중뿔나지 않게 짐짓 뒤로 물린 듯 드러냄이 없다. 가정(home)이라는 소국(小國)의 왕인 아비는 누구보다도 소탈하고 자애로워서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할 만큼 그 낙락하고 구순한 맘이 그대로 얼굴과 몸에 아우라로 돋아날 지경이다. 이런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알전등이 켜질 무렵을/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이 모여 있다. 시인의 가정이고, 그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 시인인 아비이니 무릇 물질로서 풍요롭다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핵가족이 아닌 다복한 가정에 보배로운 아이들이 순정하게 지상에 이끌려나와 모여있다. 풍요는 인적이든 물적이든 자산에 의해 불어나는 것만도 아닌 아비와 어미의 도타운 금슬 속에서도 풍요의 또다른 일가를 이룬다. 이러한 가정을 이끄는 아비는 눈이 황소 눈망울처럼 크고 유순하며 그 목소리는 경상도 사내의 굵고 통나무 같은 울림으로 정정하며 그 마음씀은 거짓을 부리기 어려워 늘 하늘의 순정한 성정(性情)이 그대로 투박하니 몸과 맘으로 벼려져 나오곤 한다. 이런 가장은 가난하나 그 가난을 빌미로 식구들을 궁지로 내몰려 하지 않고 그 가난을 핑계삼아 세간에 나아가 삿된 수작을 도모할 사기(邪氣)가 등등하지 않다. 제 새끼들을 지긋이 헤아려 봄에 함함하니 눈시울이 그렁그렁해져 사랑스럽고 또 제 내처(內妻)를 봄에 안쓰럽고 측은한 맘이 수정 같은 슬픔을 돋아내기도 한다. 한 가정의 소국(小國)을 다스리는 아비는 그렇게 제 모든 자식들이 귀염둥아, 귀염둥아속으로 밖으로 부를 만치 아름다움 이전의 생래적인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것을 라오쯔는 천하의 백성을 다스리는 자애로움으로 능히 용감할 수 있음[慈故能勇]이라 부른다

 가난한 아비가 제 자신이 아닌 처자를 위해 용감할 수 있음은 그 자애로운 심성이라는 원천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늘 검박하니 그 검박함은 능히 사물과 사람을 능히 아끼어 필요 없는 소모(消耗)를 줄여 조리차함으로써 나중에 베품과 나눔으로 환원하는 넓고 웅숭깊음으로 되살려내는 계기이다. 이렇듯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온 시인의 가장은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을 지닌 사내는 짐짓 세상에 대해 거짓된 허장성세로 나서거나 뽐냄이 없이 제 품성을 오롯이 세상에 품어주고 보태준다. 드러냄 없이 제 직분으로 세상에 일조(一助)함으로써 드러내듯이 나서는 일의 수고스러움을 덜고 덧없이 나대는 일의 허망함을 애초에 간직하지 않는다. 나서지 않음에도 이 질박한 가장의 사내를 몬존하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조용한 덕의 가만한 실현이지 싶다

 

 

68第六十八章 不爭 (配天)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之下

 是謂不爭之德

 是謂用人之力

 是謂配天

 古之極

 

 훌륭한 싸울아비는 (함부로) 무예를 드러내지 않는다

 잘 싸우는 사람은 (싸울 때) 성내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사람은 (함부로) 겨루지 않는다

 남을 잘 부리는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를 낮춘다

 이를 일러 다투지 않는 덕이라 하고

 이를 일러 사람을 부리는 힘이라 한다

 이를 일러 (덕이) 하늘과 짝할(견줄) 만하다고 하였으니

 예부터 내려오는 지극한 도리이다

 

[補註]
 - 노자73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으면서도 잘 이긴다.

 - 노자81하늘의 도는 이로울 뿐 해롭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이룰 뿐 다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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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 함민복소스라치다

 

 발김쟁이처럼 도처를 돌아다니며 싸울아비가 된 사람은 그 말년이 추레하게 시든다. 몬존한 듯 비겁한 듯 비켜나 있는 사람의 싸움은 그윽함이고 말없는 수긍이며 받자 하니 견뎌주는 덕목에 치중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흔히 겁이 많은 것을 두고 곧잘 비겁함으로 연결지어 그 사람을 몬존하거나 낮춰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겁이 많음을 사람의 또 다른 본성으로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이 겁이 많은 속종 한가운데는 생명의 숨탄것으로서의 자기 목숨에 대한 아낌의 본능적 방어기제의 심리인 동시에 상대방에 대해서도 공격적인 도발성이나 해코지를 할 의향이 없는 성향을 띠기도 한다. 그리하여 겁이 많다는 것은 그 심저에 평화로운 관계의 세상을 보듬고 아끼려는 일종의 자기 경계의 심리가 배어있음이다

 함민복이 보는 뱀에 대한 소스라침과 뱀이나 다른 생명들/무생명들의 소스라침도 마찬가지로 자기보존과 그로 인한 자기보호본능의 감각적 발현인 셈인 듯하다. 일반적으로 뱀은 먼저 공격하는 사납고 사악한 짐승처럼 여기지만 사람이 흔히 생각하는 것만치 뱀들이 먼저 증오와 혐오의 공격성을 먼저 드러낼 이유가 몇 가지나 될까 되짚어 보게도 된다. 무엇이나 그렇다. 호전적인 상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자신의 두려움과 방어를 위한 성급한 판단이 상대에 대한 공격으로 비춰질 가능성은 없는가

  우리는 굳이 싸운다면 어떻게 싸워야 할까.  평범한 물음이 갑자기 깊어질 때가 있다. 만약에 싸우기 싫고 싸울 상대를 굳이 해치거나 이겨먹을 의도가 없을 때 피치 못하게 싸워야 한다면 말이다. 난처함 속에 선처가 있을까. 라오쯔는 말한다. ‘훌륭한 싸울아비는 (함부로) 무예를 드러내지 않[善爲士者不武]’는 것으로 시작하고 그 그 싸움에서 성내지 않고[不怒] 결국 이기는 싸움의 사람은 기꺼이 겨루지 않는다[不與]하니 그 이는 파괴자와 정복자의 정서가 아니라 최소한으로 싸워 공존 상생하려는 자의 겸허(謙虛)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싸우려 하지 않음으로 이기려 하는 자는 늘 자신을 낮추고 그 상대든 주변이 따르게 하는 도()와 덕성스러움을 펼친다. 이러한 평화주의자의 싸움이라면 우리는 모두 이 싸움을 대하는 라오쯔의 지략의 속종과 근기(根氣)를 더불어 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덕성은 싸움에 임하되 싸움을 하지 않는 덕[不爭之德]으로 돌아간다. 어떻게든 싸워 이기고 압제하려는 방식에서 물러나 모든 분란과 반목과 갈등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은 늘 아이러니하게도 싸움에 무력하다. 세속에서 보면 패배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라오쯔의 평화는 모든 숨탄것들을 향해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그 경계심과 함께 경외감(敬畏感)이 합작하는 지경이 아닐까 싶다. 경계와 거부만 있고 경외가 없다는 인간은 모두 무뢰한이고 아무리 그럴듯해도 야차와 같은 무리가 아닌가. 스스로 생명들/무생명들을 가만히 입시울에 올려 보라. 그렇게 말하는 이는 모두 그 생명과 무생명의 아우라 속에 품어져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니 선험적으로든 진관적으로 봤을 때 서로 싸울 일이 앞서는가 고요히 다감하게 그윽해질 일이 번지는가.   

 

 

69第六十九章 用兵 (玄用)

 

 用兵有言

 吾不敢爲主而爲客

 不敢進寸而退尺

 是謂

 行無行 *1~

 攘無臂

 扔無敵

 執無兵

 禍莫大於輕敵

 輕敵幾喪吾寶

 故抗兵相加 *2

 哀者勝矣

 

 병법에 이러한 말이 있다

 나는 구태여 쥔(치는 쪽)이 되지 않고 손(지키는 쪽)이 된다

 (나는) 한 치라도 나아가지 않고 도리어 한 자를 물러선다

 이를 일러

 행군할 수 있어도 진칠 병사가 없(다고 여기)

 화가 치밀어도 소매를 걷어올릴 팔이 없(다고 여기)

 물리칠 수 있어도 물리칠 적이 없(다고 여기)

 무장할 수 있어도 집어들 병기가 없(다고 여긴)다고 한다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싸움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큰 화가 없다

 적을 가벼이 여기다가는 내 보배를 거의 잃고 만다

 그러므로 병기를 들고 맞싸울 때는

 (싸우게 됨을) 슬퍼하는 쪽이 이기기 마련이다

 

[補註]
 - 노자68: 훌륭한 싸울아비는 사납지 않고 (함부로 무예를 보이지 않고) 잘 싸우는 사람은 성내지 않는다.

 - 노자31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연장이다.~마지 못해 어쩔 수 없을 때 쓰는 연장이다. ~많은 사람을 죽이니 슬픔으로 눈물짓고...

 * 1 : [백서본] 이를 두고 전투대형을 펼치지 않고 행군하고 / 팔뚝 없이 팔뚝을 걷어 붙이고 / 무기 없이 무기를 든다고 한다. / 이는 곧 적이 없는 것이다 / 천하무적보다 더 큰 화가 없으니 / 천하에 적수가 없으면 (마구 싸움을 벌여) 내 보배(군사)를 거의 잃고 만다. (是謂行无行 攘无臂 執无兵 乃无敵矣 禍莫大於無敵 無敵近亡吾葆矣) ; 附言; 無敵輕敵

附言; 無行=沒有行陣, 行陣=軍隊行列 or 布陣勢, 攘臂= 捋起袖子or 露出胳膊表示振奮 or 常形容激奮貌, =牵引 or 摧殘 or 残害

 * 2 : [백서본] 그러므로 군사를 일으킴이(거병·출병시 전력이) 엇비슷하면 (싸우게 됨을) 슬퍼하는 쪽 (지키는 쪽)에서 이기기 마련이다. (故稱兵相若 哀者勝矣)

 - 노자30: 도로써 임금을 돕는 사람은 무력으로 천하를 강압하지 않는다 (천하의 강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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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거기 그냥 계시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땅위에 남아 있으리라

 땅은 때때로 이토록 아름다우니
 뉴욕의 신비도 있고
 파리의 신비도 있어
 삼위일체의 신비에 못지 아니하니

 우르크의 작은 운하며
 중국의 거대한 만리장성이며
 모를레의 강이며
 캉브레의 박하사탕도 있고
 태평양과 튈르리 공원의 두 분수도,
 귀여운 아이들과 못된 신민도

 세상의 모든 신기한 것들과 함께
 여기 그냥 땅위에 널려 있어,
 그토록 제가 신기한 존재란 점이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지만
 옷 벗은 처녀가 감히 제 몸 못 보이듯
 저의 그 신기함을 알지도 못하고

 이 세상에 흔한 끔찍한 불행은
 그의 용병들과 그의 고문자들과
 이 세상 나으리들로 그득하고
 나으리들은 그들의 신부, 그들의 배신자,
 그들의 용병들 더불어 그득하고

 사철도 있고 해()도 있고
 어여쁜 처녀들도 늙은 병신들도 있고
 대포의 무쇠 강철 속에서 썩어가는
 가난의 지푸라기도 있습니다.

 - 쟈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하느님 아버지

 

 전쟁이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 싸움이란 먼저 건 사람이 있고 거기에 맞대응한 사람이 있듯이 서로 상대가 되는 욕망의 양보가 없다는 것이다. 양보가 없는 포기가 진정되지 않는 욕망이란 결국 극단으로 치닫는 파괴와 파멸의 다름이 아니다. 물론 이 욕망의 게임에서 이기는 자가 있으나 그 또한 많은 손실과 상실의 감정과 그 역사를 슬픈 전리품으로 떠안아야 한다

 전쟁에 있어서도 먼저 침범한 상대에게 늘 평화의 분위기를 내주지만 그가 이를 무릅쓰고 침략할 때는 내재된 힘과 반격의 일사불란한 저항으로 격퇴할 줄 아는 내공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굳이 이렇게 맞받아 싸울 수밖에 없는 불가피함을 서글퍼할 줄 아는 도량과 너름새를 가진 쪽이 전쟁의 불화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故抗兵相加 哀者勝矣] 라오쯔는 일갈한다. 여기엔 전쟁을 원하지는 않지만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의 평화주의자가 갖는 도량 속에는 국민과 군인과 위정자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전쟁에 대한 일체화된 감정과 정신적 우위가 있다. 즉 모든 국민들의 사기진작이 증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애석함으로부터 시작된 웅숭깊은 저항의 수순이라는 점이다.  

 언제나 지구 땅별 한켠에는 이런 욕망의 크고 작은 분투가 이어지고 이는 삶을 위한 욕망인 척 하는 거대한 죽음의 맘모스가 움직이는 음험한 멸절의 시험운행만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을 이 세상에 흔한 끔찍한 불행은/그의 용병들과 그의 고문자들과/이 세상 나으리들로 그득하고/나으리들은 그들의 신부, 그들의 배신자,/그들의 용병들 더불어 그득하다고 새삼 알아간다. 시인의 이러한 비관적인 그리고 어쩌면 적실한 지적의 진술은 오늘날의 지구촌 인간 문명의 현황과 환경을 그대로 목도하는 참담함을 가눌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들의 간악한 사술(邪術)의 게임은 결국 아무 것도 제대로 얻을 수 없는 몽매한 욕망의 사주에 의한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가 사악해지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처럼 전쟁을 통해서 사악해질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 어느 편이어도 우리에겐 참다운 욕망의 성취와 기쁨을 이루기는 요원하다

 쟈크 프레베르는 대포의 무쇠 강철 속에서 썩어가는/가난의 지푸라기도 있음을 대비적으로 보여준다. 대포로 비유되는 전쟁이 큰 담론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 전장의 한켠에 가난의 지푸라기와도 같은 작고 미미하지만 생명의 굳세고 여린 듯 유연한 여줄가리들의 현장성을 담보하는 실존, 그 끌밋한 숨탄것들이 전장의 참화 속에 함께 있음을 부조화스런 짝패처럼 보여준다

그러니 작금의 세계는 평화의 안식과 평화의 도구로써 우리의 욕망을 통크게 그리고 소소하게 써야 한다. 평화를 위한 욕망은 결코 빼앗는 방식이 아니라 내주는 방식, 나눠주고 보태주는 방식으로 더 충일(充溢)한 인간성에 한 단계 도달할 수 있음이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의 오랜 풍경에 마음의 눈길을 건네도 좋다

 

 

70第七十章 懷玉 (知難)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言有宗

 事有君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知我者希 則我者貴 *1

 是以聖人

 被褐懷玉

 

 내 말은 아주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쉽지만

 천하에 알아들을 수 있는 이도 없고 실행할 수 있는 이도 없다

 () 말에는 종지(근본)가 있고

 (내가 말하는) 일에는 임금(의 격)이 있다

 무릇 오직 (이를) 알지 못하니 나를 알지 못한다

 나를 아는 이가 드문즉 나라는 존재가 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겉에는 거친 베옷을 입고 속에는 (귀한) 옥을 품고 있(는 격이로)

 

[補註]
 - 노자41중급 선비는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고 하급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나니 (크게) 웃지 않는다면 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 노자67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나는 (내 도는) 너무 커서 (그 무엇과도) 닮지 않았다고 말한다.

 * 1 : [백서본] (이를) 아는 사람이 드문즉 내가 귀하다. (知者希則我貴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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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나 일어나 이제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욋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빛
 한낮엔 보랏빛 환한 기색
 저녁엔 홍방울새의 날개 소리 가득한 그 곳.

 나 일어나 이제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鋪道)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

 

 세속 세간에서 누군가 나[]를 참다이 알아봐줌이 적고 소홀하다 여길 때 우리는 그 자리에서 다른 곳을 떠올리게 된다. 나라는 자아의 귀함을 아무도 푸른 나뭇가지처럼 때로 흔들어 거기 깃든 맑은 빗방울들을 후득이며 주변에 보여줄 여건이 희박할 때 우리는 적이 청처짐한 속종이 들기 마련이다. 세속은 세간의 방식으로 모든 것들을 시비곡직(是非曲直)하며 우열을 두어 가려 보려고 하니 이는 도를 설파한 라오쯔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 싶다

 ()에 관한 천명(闡明)은 백가쟁명(百家爭鳴) 중에 하나의 휘파람새 소리 정도의 소슬함으로 그쳐 보였을 지도 모른다. 나를 알아줌이 결코 나 하나의 이기(利己)에 머물지 않았음에도 그 의도만이 오롯할 때 노담(老聃)도 새삼 긴 한숨이 고요히 번질 때가 있음이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누군가의 참다운 공명이 그리울 때 우리는 인간 속에서 자연을 새삼 재장구쳐 떠올리게 된다. 세상이 알아줌과 알아주지 않음의 분별을 떠나 참다이 나의 고요를 되찾는 것, 아마 그런 곳에서 우리는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라오쯔는 그야말로 자연와 무위 속에서 늘 안개처럼 그칠 줄 모르는 들려오는 아슴아슴한 여울물 소리처럼 평화주의자의 배음(背音)과 배색(背色)을 드리웠다고 여겨짐이다(다음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