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 에세이
  • 연재 에세이
  • 연재 에세이
  • HOME > 에세이 > 연재 에세이

2022년 11월호 Vol.16 - 유종인


[시로 읽는 노자 이야기]

 노자(老子)와 시마(詩魔) 5


제47장 第四十七章 知天下 (鑒遠)
 

不出戶 知天下 
不闚牖 見天道 
其出彌遠 
其知彌少 
是以聖人
不行而知 
不見而名
不爲而成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하늘 아래 온갖 것을 알고
창밖을 엿보지 않아도 하늘 위의 길을 본다
그 나감이 멀수록
그 앎은 더욱 적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지 않고서도 알고
보지 않고서도 이름하고
하지 않고서도 이룬다

 
[補註]
 - 노자33장 : 남을 아는 것은 지혜이고 나를 아는 것은 밝음이다.
 - 노자81장 : (도를) 아는 사람은 널리 듣고 많이 보지 않고 널리 듣고 많이 보는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한다.
-----------------------------------------------------------------------------
[詩說]

남루를 기우려고
그는 실을 바늘에 꿴다
그가 타고 앉은 섬이
기우뚱 몸서리를 쳤다
바늘귀에 들어간 그의 눈이
귀를 막는다
그는 귀가 멀었다
바늘귀는 낙타 눈만큼 열렸다
오관으로 꼬인 실이
거짓말처럼 꿰인다
매듭을 짓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
바느질뿐일까
그는 홈질이 마음에 들었다
말줄임표같이 점점점점…
그러면 쓸데없이 열린 것들이 닫혔다
때로 한눈을 파는 마음이
손목을 봉하고,
그가 앉은 섬에는
낙타가 바늘 속으로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이상희, 「바느질」


 남자가 무슨 바느질을 궁상맞게 하느냐, 고 핀잔과 통박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수선집에 맡기기도 뭐해서 혼자 양말이나 바짓단 터진데 혹은 바지나 점퍼의 안주머니의 밑이 타개져 그걸 꿰맬 때가 있었다. 물론 그런 나를 살뜰하고 구순한 누이나 어머니가 대신 바느질을 해주었다면 내 맘에도 어딘가 기꺼운 맘이 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내게 있어 바느질은 혼자만의 수단이었고 가끔은 얼굴도 어령칙한 증조할머니나 고조할머니의 바느질을 떠올리는 갑작스러운 옛생각의 발현이었다. 그렇듯 바느질은 침묵이 먼저 나보다 먼저 자지를 잡고 똬리를 틀며 혼자만의 쓸쓸하거나 쏠쏠한 궁상의 미학이었다.
 손맵씨 있게 꿰매는 것은 나중 문제였다. 우선은 타개지고 터지고 찢긴 부분을 임시방편으로라도 봉(封)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야말로 바늘과 실로 임하는 미봉책(彌封策)이었다. 완벽함보다는 임시방편이 먼저 종요로울 때가 있으니 삶의 일상이 그렇게 먼저 그렇게 조리차하기를 원하는 듯도 하다. 

 주(周)나라 환왕(桓王)은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천자의 명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송(宋)나라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장공의 정치상의 실권을 박탈했다. 장공은 이 조치에 분개해 조현(朝見)을 5년이나 중단했다. 국세가 약화되어 명목상의 천자국으로 전락한 주나라의 권위를 이번 기회에 회복시키기 위해 주환왕은 정나라를 치기로 하고 제후들에게 참전을 명했다. 정장공 역시 방어 태세로 나왔다. 왕명을 받고 괵(虢), 채(蔡), 위(衛), 진(陳)의 군사가 모였다. 주환왕이 총사령관이 되어 정나라를 징벌하러 나섰다. 이렇게 천자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간 일은 춘추 시대 240여 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양군은 정나라의 수갈(繡葛)에서 대치했다. 정나라의 공자 원(元)이 정장공에게 진언했다. “지금 좌군에 속해 있는 진나라 군대는 국내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전의가 없습니다. 먼저 진나라 군대부터 공격하면 반드시 패주할 것입니다. 그러면 환왕이 지휘하는 중군은 혼란에 빠질 것이며, 괵공이 이끄는 채나라와 위나라의 우군도 지탱하지 못하고 퇴각할 것입니다. 이때 중군을 치면 틀림없이 이길 수 있습니다.” 장공은 원의 진언에 따라 원형의 진을 짜고 전차를 앞머리에 세웠으며, 보병을 후진으로 하여 전차와 전차 사이를 미봉했다.(爲魚麗之陳. 先偏後伍, 伍承彌縫.)
이 전략은 적중하여 환왕의 연합군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환왕은 정나라 축담(祝聃)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고 부상을 당했다. 환왕은 군사를 수습하여 정나라에 대항했다. 축담이 환왕을 치겠다고 나서자 장공이 만류했다. “군자는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천자를 능멸해서야 되겠는가? 국가 사직을 지키려는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졌으니 됐다.” 장공은 제족(祭足)에게 선물을 주어 주환왕에게 가서 위로하게 한 뒤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 이야기는 《좌전(左傳) 〈환공(桓公) 5년〉》에 나온다. ‘미봉’이란 원래 군대를 배치할 때 전차 부대 사이의 간격을 보병으로 메운다는 뜻이었는데, 후에는 대충 눈가림을 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 『고사성어대사전』 '미봉책(彌封策)' 부분

 
 미봉이 늘 완봉(完封)보다 일상에 두루 행해질 때가 많다. 미봉책으로 모든 걸 처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때 상황들이 미봉책을 요구하듯 하여서 그리 대처하듯 응대할 경우가 많다. 미봉책으로라도 난처에 든 사람의 일을 거들 때의 기꺼움을 미미하지만 하나의 덕성스러움에 손을 대는 일만 같다. 미봉책과 완봉책이 서로 서열을 가리거나 우열을 다투는 것이 큰 의미를 지우지는 않는 듯 싶다. 어느 것이 어느 시기와 장소와 사태의 성격에 맞는 것인가라는 흐름을 읽는 것이 더 종요로울지도 모른다.
 거칠고 투박하게 임시방편으로 꿰맨 호주머니를 뒤집어 다시 원래로 집어넣고 점퍼를 한번 괜히 허공을 들어본다. 하나의 소소한 보람 같은 것이 들기도 한다. 터지고 구멍난 곳을 꿰매고 기우는 일이 궁색함이나 궁상을 넘어서 하나의 허우룩함을 메우는 소일(消日)일 때 그마저도 다솜의 여줄가리 중의 하나일까도 싶다. 
 난처에 든 자신을 비롯하여 누군가의 난처함을 한눈에 알아보는 눈썰미는 호들갑스러운 상대의 반응만으로 감지되는 것은 아니다. 라오쯔의 말씀대로 ‘창밖을 엿보지 않아도 하늘 위의 길을 본다[不闚牖 見天道]’는 것은 내 맘과 상대의 맘을 격절시키지 않고 내계(內界)와 외계(外界)를 두동지지 않게 연결해서 보려는 그윽한 눈썰미의 작용이지 싶다. 이상희는 ‘오관으로 꼬인 실이/거짓말처럼 꿰인다’하고 했으니 기능적인 몸짓 하나에도 온 마음과 감각이 도모하는 지경이라면 무릇 희미한 ‘바늘귀’ 속이 한순간 큰 동굴 입구처럼 환해질지도 모른다. 그런 전차대로라면 바느질처럼 ‘매듭을 짓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 큰 무리나 실패 없이 앞날의 결과를 담보하는 일과도 맞닿아 있음이다. 
 




제48장 第 四十八章 无爲 (忘知)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날로 줄어든다
줄어들고 줄어들어 무위(의 경지)에 이르면
함이 없이도 (무위로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장차) 천하를 얻으려는 자는 항상 일이 없음(무사)으로 해야 한다
일을 벌이기에 이르면 천하를 얻기에는 부족한 자이다
 

[補註]
 - 노자20장 : 배움(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 노자64장 : 성인은 ~배우지 않음을 배우고 뭇사람이 지나쳐 간 곳으로 되돌아간다.
 - 노자37장 : 도는 늘 함이 없이도 (무위로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 노자57장 :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음(무사)'으로써 천하를 얻는다. ~ 천하에 금기(금령)가 많아지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법령이 더욱 뚜렷해질수록 도둑이 늘어난다.
 - 노자29장 : 장차 천하를 얻어 억지로 하고자 (마음대로 다루고자)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천하는 신기한 그릇이라 빚을 수도 없고 움켜잡을 수도 없다. 빚으려고 하면 망치고 움켜잡으려고 하면 놓친다.
---------------------------------------------------------------------------
[詩說]

한 아이가 물었다, 풀잎이 뭐예요?
손안 가득 그것을 가져와 내밀면서.
내가 그 애에게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그것이 무엇인지 그 애가 알지 못하듯
나도 알지 못하는데.

어쩌면 그것은 푸른 실로 짜 만든 내 천성의 깃발인지도 몰라.
아니면 그것은 하느님의 손수건이리라.
어디엔가 은밀히 당신의 이름 아로새긴 향기로운 선물,
일부러 흘리시고는 우리가 그것을 주었을 때
누구의 것이냐고 묻는 것일지도 몰라.

아니면 풀잎 그 자체가 아이,
아니면 그것은 하나의 그림문자이리라.
넓은, 또는 좁은 곳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자라나면서,
흑인이나 백인, 캐나다 사람, 버지니아 사람, 국회의원, 노예,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자라나면서
똑같이 고루고루 나눠 주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리라.
무덤 위 풀은 아름답게 자란 머리카락인 듯도 하다.

보들보들한 풀, 나는 너를 정답게 맞으리라.
너는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 한가운데서 힘차게 나왔을 것이며,
내가 그 젊은이들을 알았더라면 그들을 사랑했으리라.
너는 늙은이들로부터, 아니 어머니의 무릎을 금방 떠난
갓난아기로부터 나와서,
지금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풀은 할머니의 백발로부터 나왔기에는 너무도 검고,
할아버지의 수염으로부터 나왔기에는 훨씬 더 검으며,
불그스레한 입 천장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검은 편이다.
오, 나는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풀은 무의미하게 입 천장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죽고 없는 젊은 남녀들이 보내는 암시나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과 그들의 무릎을 쉽게 떠난
갓난아기들이 주는 암시를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젊은이들과 할아버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할머니들과 갓난아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거요.
조그만 풀잎조차도 죽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소!
죽음은 있다고 해도 생명으로 인도해 갈 뿐,
생명을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니오.
생명이 나타나면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며,
만물은 앞으로 멀리까지 나아가고 종말은 없는 것이오.
그래서 죽음이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더 행복한 것이오.

-월트 휘트먼, 풀잎」


 편협한 나의 생각이지만 시인 월트 휘트먼의 <풀잎>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비유의 확장이나 너름새이겠으나 그 생각의 겨를이 지극히 동양적인 속종이어서 놀랍고 또 반갑다. 풀잎이라는 숨탄것의 여줄가리를 만유(萬有)속에 비겨넣는 그의 눈길은 어쩌면 그의 경륜이 세상을 늡늡하게 톺아가는 지경의 발산이지 싶다.
 ‘풀잎 그 자체가 아이,/아니면 그것은 하나의 그림문자이리라’ 한 휘트먼의 풀잎은 ‘(억지로) 함이 없어도 (무위로도)이루지 못함이 없다[無爲而無不爲]’라는 라오쯔의 언질과도 맞닿는 숨탄것으로서의 만유(萬有)를 아우르려는 기미가 완연하다. 그러기에 ‘넓은, 또는 좁은 곳 가리지 않고 자라나면서’ 모든 차별과 분별의 대상을 온유하고 품고 공평하게 숨결을 길러가는 초록의 상징이다. 그야말로 ‘보들보들한 풀’은 노담이 말한 부드러움[柔]의 성정을 가장 잘 발현한 자연의 한 여줄가리로서 드넓고 낙락하고 풋풋하고 소슬하다. 이러한 휘트먼의 풀잎은 그 자체의 자연의 숨탄것이기도 하지만 ‘풀은 할머니의 백발로 나왔기에는 너무나 검고,/할아버지의 수염으로부터 나왔기에는 훨씬 더 검으며/불그스레한 입 천장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검은 편’이라는 아주 기발하고 독특한 발상의 뿌리를 사람에게도 뻗어놓는다. 비근하고 비유적인 이 풀잎의 수사(修辭)는 그 넓고 웅숭깊은 비유의 오지랖를 통해 모든 생명과 사물에까지 견주게 되는 늡늡한 덕성스러움의 한 측면으로 시푸르고 오롯해진다. 
 흔히 ‘풀뿌리 민주주의’나 백성을 이를 때 ‘민초(民草)’라는 관습적인 비유 역시 풀이 매개하는 보편적이고 자연과 일상에 두루 편재(遍在)하는 풀의 속종과 속성을 그러안은 표현의 일단이다. 이러한 풀로부터 그리고 그 풀잎의 싱싱한 흔들림과 새뜻함으로부터 생명이 오롯이 인도해가는 활기와 그 끝에 닥칠 죽음이나 쇠락 또한 품어안는다. 그와 동시에 묻는다. ‘젊은이들과 할아버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혹은 ‘할머니들과 갓난아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라고 말이다. 이 남녀노소에 대한 동시적 물음은 삶을 일방적인 활동에만 묶어두지 않고 죽음을 통속적인 절멸(絶滅)에만 한정하지 않는 라오쯔의 유연한 사유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현상학적인 죽음이나 절멸 이후에도 ‘그들은 어디엔가 살아 있을 거요’라는 생명력의 순환과 윤회 혹은 유전(流轉)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멸과 쇠락 이후에도 ‘조그만 풀잎조차도 죽음은 있을 수없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소!’라고 보다 근원적인 생명력을 염두에 두고자 한다. 이러한 근원성에의 지향은 ‘도를 닦으면 날로 줄어든다[爲道日損]’라는 전언 속에 하고자 함이 없어도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라는 라오쯔의 무위자연의 전능(全能)이 풀잎처럼 어디에나 깃들고 눈밭 속에서도 쇠락한 듯 푸르게 되비춘다. 이러한 무위의 전능성은 지극히 위대하거나 지극히 미미하다거나 하는 어느 수사의 층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늡늡한 소박한 통속이나 탈속 그 어디에나 두루 드리워진다. 풀잎처럼 푸르게 누르게 생사를 한 자리에서 모두 곳에 모두 자신을 드리워 살 줄 알게되면 ‘죽음은 있다고 해도 생명으로 인도해 갈 뿐’이라는 시인의 영원에의 눈길이 그윽한 보랏빛 노을처럼 우리의 마음자리에 얼비치게 될까. 
 삶에 있어 맺음말이 있고 시작하는 말이 있지만 이 말들이란 필시 덕성스러움과 도를 배워 하루하루 줄여나가면 시인의 풀잎처럼 거처하지 않는 곳 없이 거처하지 않는 눈빛의 시간이 없이 존재의 풀잎은 만유의 풀잎으로 돋아난다 할 수 있을까. 하나의 푸른 풀잎이 무엇엔가 뜯겨 허공에 날릴 때 그마저도 천공에 심어진 것이라 할까. 어느 눈썰미 좋은 새가 그 풀잎을 낚아채듯 물고 다시 먼 강으로 먼 사막으로 풀잎의 영혼을 떠메고 간다 할까.  

 


제49장 第四十九章 德善 (任德)
 

聖人無常心 [聖人恆无心] 
以百姓心爲心
善者 吾善之 
不善者 吾亦善之 
德善 *1 
信者 吾信之
不信者 吾亦信之 
德信 
聖人在天下 歙歙 
爲天下渾其心 
百姓皆注其耳目 
聖人皆孩之 

성인은 언제나 (사사로운) 마음이 없다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나는 선한 사람에게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하니
(나는) 선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미더운 사람은 믿고
미덥지 않은 사람도 믿으니
(나는) 믿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인이 천하에 있으면 자신의 의욕을 줄이고
천하를 위해 그 마음을 (백성의 마음과) 합친다 (혼융한다)
(그리하면) 백성은 모두 귀와 눈을 (성인에게로) 모으게 되고
성인은 모든 백성을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


[補註]
 - 노자7장 : 성인은 자신을 뒤세우지만 (도리어) 자신이 앞서게 되고 자신을 벗어나 있기에 (자신을 세상의 공명 바깥에 두기에 도리어) 자신이 보존된다. 이는 성인에게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노자19장 : (백성은) 사사로움을 줄이고 바람(욕심)을 작게 하라.
 - 노자27장 : 본디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도우미이다. 그 스승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 도우미를 아끼지 않으면 비록 지혜롭다고 해도 크게 미혹해질 것이다.
 - 노자49장 : 사람이 선하지 않다고 해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 1 : 선을 획득한다 (나는 선한 사람에게만 선하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선함을 얻는 것이다). (附言; 德=得, 取得, 獲得,)
-----------------------------------------------------------------------------
[詩說]

나는 아침을 부처라 부르고 싶다
멀리 있는 산이 구름을 피워
길게 누운 몽유도원도가 펼쳐지고
들판은 벼가 익어 황금 정원을 만든다
세수하려고 받아놓은 물에
먼저 세수하고 가는 파란 하늘이 새파랗다
멀어질수록 아득한 수묵화가 되고
가까워질수록 선명한 거울이 되는
은현리 아침마다 나는 스스로 맑아진다
밤은 나를 삼으로 만들고
아침은 나를 시인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나는 밤마다 짐승처럼 잠이 들고
아침마다 사람으로 눈을 뜬다
가르침처럼 아침이 찾아온다는 것은 축복이다
나는 아침부처에게 절을 올린다


* 아침부처: 필자가 만든 합성어

-정일근, 아침부처」


  크게 들고[知之] 그것마저 마음 밖에 낸 사람은, 그리하여 성인이 어른대는 이는 뻗대고 우쭐하지 않고 자신을 그윽이 낮춘다는 언설[聖人在天下 歙歙]은 세상 세간이 보기엔 언뜻 몬존하고 추레한 인상의 사람을 다시금 그윽이 보게 된다. 흡흡(歙歙)하다는 의태어가 의성어를 포함하듯이 자신을 한껏 낮추고 줄임에 있어 오히려 몸짓의 소리와 그 목소리가 가만하고 부드러우며 앵도라진 맛이 잦아들어 밝고 고 누구나 밝고 고요할 것이다. 그 소박한 이에게 오히려 종국엔 끌리고 마음의 어깨를 겯게 된다.  
 시인은 새뜻하게도 ‘아침을 부처라 부르고 싶’은 사람이다. 우리가 살면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어쩌면 그 흔한 아침의 시공간을 시인은 ‘길게 누운 몽유도원도가 펼쳐지고/들판은 벼가 익어 황금 정원을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광명한 뒷배로 보는 듯하다. 이렇게 특별하고 남다른 의미의 아침은 시인에게 ‘아침마다 나는 스스로 맑아’지는 존재가 되게 하고 그러한 아침의 덕성은 ‘나를 시인으로 만든다’고까지 시인은 술회한다. 그러니 시인에게 있어 아침은 시간의 흐름에 의한 밤의 몰락에 이른 새벽에 잇닿은 시간의 아침만이 아니다. 그것은 각성하고 존재의 내면과 몸을 깨어있게 하는 부처의 아침인 것이다. 이러한 아침의 참된 기운은 시인 자신에게만 드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 공평히 아낌없이 주워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라오쯔가 말한 ‘나는 선한 사람에게 선하게 대하고/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하니, 지극한 선함을 얻게 된다[善者 吾善之 不善者 吾亦善之 德善]’는 말과 일맥 상통하는 
전언이지 싶다. 
 큰 자비는 날로 달로 시시각각 혹은 찰나의 공간에 있으면서 나를 몽둥이나 도리깨 삼아 남을 후려치기보다는 아직 까불러지지 않은 가을 곡식을 때려 훑어선 그 낱알들로 밥을 짓고 음식을 내게 한다. 흔히 무엇을 ‘낸다’는 말은 자비의 움직씨로 가장 너르게 쓰는 말이니 그 마음을 내는 사람은 편애의 곡절에 빠지지 않고 두루 큰 가림이 없이 내려고 한다. 그러니 턱지게 낸다는 것은 걸림이 없이 내려는 것이고 걸림이 없이 내려는 이는 선인과 악인의 구분이 지우고 오로지 그 사람들 모두를 선인으로 대하는 항상심의 여줄가리이지 싶다. 
 김홍도 말년의 작품으로 보이는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는 연꽃 문양의 구름에 앉은 듯한 스님이 서쪽의 그 서방정토를 향해 나아가는 진행을 보여준다. 단노(檀老)라는 서명과 자신의 자(字)인 사능(士能)과 아호(雅號)인 단원(檀園)이 새겨진 도장을 단정하게 화면 왼쪽 상단에 찍혀있다. 도교와 불교와 관계된 그림을 그린 말년의 취향을 보여주는 한 도식이라 할 수 있다. 


김홍도, <염불서승>, 모시에 수묵담채, 20.8×28.7㎝,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그가 말년에 이르러 극락정토에 왕생하기 위해 선근(善根)과 복덕(福德)으로 염불에 마음이 오롯했을 것이다. 서녁으로 가는 연화 구름 위에 앉은 노스님의 결곡한 자세와 때마침 그 스님의 머리가 지는 해의 가운데 들어 광배(光背)처럼 조화롭게 어울렸다. 진홍빛 연꽃과 푸른 연잎이 어울린 구름의 좌대 위에 앉아 좀 마른 듯한 몸매의 스님은 일체의 욕망을 거의 떨쳐내고 영육이 평화로운 경지에 들기를 염원하는 듯하다. 그러니 ‘염불서승’은 ‘걸음걸음 소리소리 생각생각마다 오직 나무아미타불(步步聲聲念念唯在南無阿彌陀佛)’이 오롯해졌을 것이다. 이런 스님의 경지라면 야차 같은 이에게도 미소로 대할 수 있고 선량한 장삼이사에게도 더없이 온후한 마음을 더해주었을 것이다. 무릇 인생의 말년이든 초년이든 중장년을 막론하고 삶의 당시(當時)에 처하여 더없이 지극한 평범성의 고귀함으로 모두를 늡늡하고 습습하게 대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어느 때나 보살이고 성인의 반열이지 싶다. 매순간 이런 보살과 성인의 마음가짐이 어그러지고 깨지며 비뚤어지더라도 다시금 뉘우쳐 그 지향으로 삼는 바는 단원의 그림에 드리운 노스님의 평생 지향과 크게 두동지지는 않을 성 싶다. 이렇게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백성을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로 돌아가게 함[聖人皆孩之]’이 하나의 도량이지 싶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무구해지는 순간에 모든 해코지의 삿됨과 협량한 옥생각이 스르르 사라지고 해맑게 어우러지려는 시인이 말한 ‘아침부처’의 마음이 순연한 햇살로 번지려니 싶다. 





제50장 第五十章 生死 (貴生)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 動之死地 十有三 *1 
[而民生生 動皆之死地之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以其生生也] *2 
蓋聞善攝生者 [蓋聞善執生者] 
陸行不遇兕虎 [陵行不辟兕虎]*3 
入軍不被甲兵 
兕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
夫何故
以其無死地*

이승에 나왔다가 저승으로 들어감에 있어
(천수를 누리는) 삶의 무리가 열에 셋이고
(요절하는) 죽음의 무리가 열에 셋인데
 백성 가운데 (오래) 살아남으려 애쓰다가
(자칫) 죽을 곳으로 (들어)가고야 마는 무리도 열에 셋이다
대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살아남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들은 바로 목숨을 잘 건사하는 이는
산언덕을 가도 코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을 입거나 무기를 들지 않는다
(그리하여도) 코뿔소가 그 뿔로 들이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으며
병기가 그 칼날을 들일 곳이 없다고 했다
왜 그러한가
그에게는 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補註]
 *1 : [왕필본] 사람이 태어나서 움직여 죽을 곳으로 가는 것도 열 사람 가운데 세 사람꼴이다.
[백서본] 백성이 (자신의) 삶을 살리려고 움직여 죽을 곳으로 가는 무리도 열에 셋이다.
 *2 : * [왕필본] (以其生生之厚) [왕필註] 뱀장어는 깊은 못이 얕다고 여겨 못 속에 구멍을 뚫고 사는데 어부의 그물이 그에 미치지 못하므로 죽을 일이 없는 곳(근본)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맛난 미끼에 살지 못할 곳으로 들어가고 만다면 (구하는 것 때문에 근본을 떠난다면) 이는 삶(목숨,생활)을 살리(려고 하)는 것이 두텁기 [生生之厚] 때문이 아니겠는가.
 * [하상공본] (以其求生之厚) [하상공註@노자75장] 사람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경솔하게 목숨을 거는 것)은 생활 방편을 구하는 것이 지나치게 두터워, 이익을 탐하다 스스로 위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경솔하게 죽을 곳으로 들어가고 만다.
 * [백서본] (以其生生也) 삶을 살리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살리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노자7장 :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살리(려고 하)지 않기 [不自生] 때문이다. 그러므로 길이 살 [長生] 수 있다.
 *3 : [백서본] 산언덕으로 가도 코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왕필본] 뭍길을 가도 코뿔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노자55장 : 덕을 두터이 품은 이는 갓난아이(타고난 자연의 기에 몸을 맡기고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룬 상태 ; 외물에 의해 해를 당하지 않음)에 견줄 수 있다. 독벌레도 쏘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움키지 않고 낚아채는 새도 치지 않는다. ~삶(수명)을 늘이는 것을 요사함(비정상인 것)이라 한다.
 *4 : [왕필註]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삶을 삶으로 여김이 없으므로 [無以生爲生, 생사를 잊음, 삶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그에게는 죽을 곳(목숨을 잃을 곳으로 들어갈 일)이 없다.
 ※ 노자38장의 표현을 빌리면, 삶을 의식하지 않으면 (삶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면) 오히려 (귀중한) 삶이 있게 되고, 삶을 잃지 않으려 애쓰면 오히려 삶이 없게 된다.
----------------------------------------------------------------------------
[詩說]

저녁 상가(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들이 구두들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상가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 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식구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북천(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유홍준, 상가에 모인 구두들」


 문상(問喪)은 궂긴 망자에 대한 마지막 안부 인사의 여쭘이며 그 망자를 여읜 유족에 대한 위로의 눈도장이다. 삶과 죽음의 격절을 가만한 응시와 위로로 고요히 미봉(彌縫)하듯 아우르는 산 자의 의식인 것이다. 죽음에 이르지 않을 수 없음은 모든 숨탄것들의 운명이면서 순리일 때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어찌 미리 내다보고 제 삶을 죽음에 건네줄 것인가를 항차 감안하게된다. 죽음을 잘 감안했을 때 삶이 모질지 않고 절멸을 잘 숙고했을 때 장차 소멸에 대해 큰 불안을 넉넉히 안을 수 있다. 이러한 삶과 죽음을 품어안는 시각은 ‘짓밟는 게 삶이다/밟히지 않는 건 망자의 신발뿐이다’ 라는 비관적인 인식 속에 역설적이게 삶을 되새기게 한다. 신발을 짓밟히듯 짓밟힐 일이 없으니 죽음이 좋으냐 묻는 것도 어리석지만 그 물음 속에 삶의 오롯한 비의(秘意)가 한순간 훤해지기도 한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게 죽음이고 죽음을 멀리 내다보게 하는 게 또한 삶이라면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서 보게 되는 ‘북천(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도 새삼 유의미한 조망으로 끌밋해진다. 취기와 혼몽 속에서도 생사를 다시 한번 톺아보게 하는 말은 누구의 말이 아니라 삶을 살고 있는 죽음이자 죽음을 살아가는 삶의 순간의 각성 속에서 새로 생긴 별자리를 보듯 똥기게 된다. 그러니 죽음이 삶의 패망만은 아니고 삶이 죽음의 윗길만도 아닌 우리 자신의 숨탄 목숨의 자연의 흐름이요 그 그윽한 경과라고 해두자. 여기의 궂긴 절멸이 저기의 새뜻한 별자리의 돋아남이라면 그리 서운한 것만도 아니지 싶다.  

오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으니
이 외롭고 깊고 모진 골짜기를 떠나 저 푸른 골짜기로

그는 다시 골짜기에 맑은 샘처럼 생겨나겠지
백일홍을 심고 석등을 세우고 산새를 따라 골안개의 은둔 속으로 들어가겠지
작은 산이 되었다가 더 큰 산이 되겠지
언젠가 그의 산호(山戶)에 들르면
햇밤을 내놓듯
쏟아져 떨어진 별들을 하얀 쟁반 위에 내놓겠지

-문태준, 골짜기」

 이채롭다. 문태준은 삶과 죽음의 흐름과 윤회는 단순한 차원의 이동만이 아니라 좀 더 그윽하고 웅숭깊은 생성의 비의를 내장한 시공간으로의 자리바꿈으로 내다보는 듯하다. 그곳이 어디냐면 골짜기다. 일찍이 노담(老聃)이 말했던 저 무한한 수용과 늡늡한 내어줌의 육화된 비유로서의 골짜기의 영원성을 설파했던 바이다. 즉 저 곡신불사(谷神不死)의 도저한 허기와 같고 무량한 내어줌의 보시와 같은 그 골짜기의 형상과 뉘앙스. 우리네 영육이 시르죽고 다시 돋아날 곳이 광대하고 으늑한 골짜기 속의 분지이자 평원이고 산악이자 계곡이라면 이런 골짜기의 너름새는 그만치 크고 작은 도시마저 품어 곡신(谷神)의 도량으로 펀더기로 혹은 꽃피고 열매 달리는 구릉마저도 품어볼 수 있으리라.
 삶에 오래 집착하는 이는 그 삶에 오래 빌붙어 살기보다는 그 삶에 부대끼어 고난만을 전수받기에 이른다. 우리가 또한 그런 전철을 밟아왔거나 그런 전철의 와중(渦中)에 있지나 않은가. 우선 나부터 돌아봄에 부끄러움과 그 전철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헤아리니 그곳으로부터 조금씩 놓여나는 스스로의 자유, 아니 스스로의 자연을 불러올 일이다. 마치 아등바등 치받고 얽매일 때를 무심결에 되돌아보듯 상갓집에서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신고/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서 문득 고개 쳐들고 보게 되는 ‘북천(北天)에 새로 생긴’ 듯한 별자리를 헤아리듯 선선해진 가슴을 지니는 일처럼 말이다. 
 무릇 사람이 오래 살고자 함에도 그 바라는 바대로 욕심껏 살 수 없음을 셋으로 분류해 내놓았으니, 이 분류 안에 우리의 삶의 거개가 다 담기고 만다. 무엇보다 우리가 무탈하게 오래 살고자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살아남으려 하기 때문이다[以其生生之厚]’이라 함이니 의도의 지나침 즉 인위적인 억지스러움이 스스로의 수명을 오히려 거스르고 있는 형국이다. 라오쯔의 이런 혜안과 통찰에 기대어 보면 지나친 욕심과 인위적인 추구에 사람의 목숨과 생활에 무리수가 가시처럼 돋는 듯하다. 무엇을 쟁취하듯 간구함도 절절한 대목이지만 누군가에게 ‘햇밤을 내놓듯/쏟아져 떨어진 별들을 하얀 쟁반에 내놓’는 소박한 나눔의 진척이 더 웅숭깊고 그윽한 골짜기의 영혼이지 싶다. 





제51장 第五十一章 尊貴 (養德)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 *
是以萬物 
莫不尊道而貴德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2 
故道生之 德畜之 
長之育之 
亭之毒之 [成之熟之]*3
養之覆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4 
長而不宰 
是謂玄德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만물은 꼴을 갖추고 형세(환경)는 이루게(성장하게) 한다
그러므로 만물은
도를 높이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다
도가 높고 덕이 귀한 것은
아무도 그것을 명하지 않아도 언제나 저절로 그러하다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자라나게 하고
여물게 하고
먹이고 덮어준다
낳고서도 제 것으로 삼지 않고
베풀고도 기대지 않으며
자라나게 하고도 채잡지 않는다
이를 그윽한 덕 (현덕)이라고 한다
 

[補註]
 * 1 : [백서본] 만물은 꼴을 갖추고 그릇은 저마다 완성된다. (物形之 器成之)
 * 2 : [백서본] 누가 도와 덕에게 작위를 내려서가 아니라 언제나 저절로(스스로) 그러하다. (夫莫之爵也,而恆自然也。)
 * 3 : [하상공본] 다 자라게 하여 여물게 하고
 * 4 : [백서본甲] 베풀고도 다스리지 (관리하지) 않고 (爲而弗寺也) ; 附言; 寺=治 or 官,
 - 노자2장 : 그러므로 성인은 만물이 일어나도 말(로써 교화)하지 않고 생장하여도 제 것으로 삼지 않고 베풀고도 의지하지 않고 (그것에 어떤 뜻을 담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
[詩說]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슬프고 늙은 세상은 기쁨을 빌려갈 뿐
자신의 문제를 돌보는 것도 힘겹다
노래하라, 언덕이 화답할 것이다
한숨쉬라, 덧없이 대기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메아리는 즐거운 소리만 되울려 낼 뿐
근심어린 목소리에는 뒷걸음친다

즐거워하라, 사람이 너를 따를 것이다
애통해하라, 등을 돌려 떠날 것이다
누구나 네 즐거움은 나누고 싶어 하지만
네 근심거리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뻐하라, 친구들이 몰려올 것이다
슬퍼하라, 모두 사라질 것이다
누구도 네가 내미는 달콤한 와인을 거부하지 않지만
삶의 쓰디 쓴 잔은 너 혼자 마셔야 한다

접대하라, 집이 미어 터질 것이다
단식하라, 세상이 그냥 지나칠 것이다
성공과 배려는 네 인생을 유지시켜주지만
너의 죽음을 도와줄 사람은 없다
크고 장대한 연회장에는
즐거움이 가득 차 있지만
우리는 각자가 홀로 되어
좁은 고통의 통로를 지나야 한다

-엘라 휠러 윌콕스, 고독」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道生之 德畜之]’, 이 말에 이르러 기댈 데 없이 광막한 우주의 사금파리로 울음을 빛냈던 나의 거처가 조금 틔여 온다. 이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 손에도 잡히는 도덕(道德)이 긴 한숨의 무한한 웅장한 용모를 드러내는 듯하여 또한 가만히 기꺼워질 마련이다. 이런 차원에서 현대를 되돌아보면 갖은 형태의 자본주의는 얼마나 많이 자연과 그 도(道)의 입성을 꺼려하고 백안시 했을까 싶기도 하다. 구획되고 분별된 계산과 셈평을 통해 현대 인류의 삶은 어지간히 저당 잡히고 채머리가 끌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살벌한 현장과 현황 속에 내몰리기도 한다. 
 현대는 그렇다. ‘즐거워하라, 사람이 너를 따를 것이다/애통해 하라, 등을 돌려 떠날 것’이 우리네 사회의 분위기라면 너무 강퍅하고 야멸차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지상정의 세속적 분위기라면 그것을 가만히 받아들여 보는 것도 지혜의 한 서슬이지 싶다. 그러나 또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는 ‘접대하라, 집이 미어터질 것이다/단식하라, 세상이 그냥 지나칠 것’이라 하니 이 또한 세상에 미만(彌滿)한 속내들이니 똥기듯 받아들이면 될 듯싶다. 어쩌면 시인의 이러한 세상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인상적 표현들은 ‘메아리는 즐거운 소리만 되울려 낼 뿐/근심어린 목소리에는 뒷걸음친다’라는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진술로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라오쯔가 설파한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는 작금의 세상 도처 어디에서 그 그윽한 마련을 찾을 것인가. 공허한 선지식만 메아리처럼 세상 빈 골짜기를 울렸단 말인가. 
 철저한 소유의 집중과 가난의 대물림이 왕성한 현대사회에서 덕성스럽게 도(道)가 낳아주는 바는 무엇이고 덕(德)이 길러주는 바는 무엇인가 바람 속에 흔들린다. 도무지 천민자본주의가 가난뱅이들한테 어떤 자비도 공공선(公共善)도 쉽게 내비치지 않는 시대에 라오쯔는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깨우치라는 것인가. 이런 회의가 들 때 우리는 가만히 회의하는 정신의 한 끄트머리에서 ‘삶의 쓰디쓴 잔은 너 혼자 마셔야 한다’라는 엘라의 전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깨우쳐 들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본주의나 강퍅한 사회분위기가 주는 것만을 보게 된다. 어디에나 ‘삶의 쓰디 쓴 잔’은 진설 돼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라오쯔의 도덕(道德)이 아주 멸실된 것은 아니다. 천민자본주의나 어떤 사회주의 체제가 인간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모든 체제와 사상과 시스템은 결코 이 커다란 지구 땅별과 우주 전체의 본질적인 흐름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 너름새 있는 시야 속에 아직도 면면히 그리고 그윽하게 두루 번져있는 모든 존재의 현황을 들여다보는 것이 종요롭다. 여전히 미미한 듯 장대하게 도가 낳고 덕이 기르고 있는 숨탄것들의 현황이 얼비쳐 오지 않겠는가. 그런 가운데 시인은 ‘우리는 각자가 홀로 되어/좁은 고통의 통로를 지나야’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홀로일 때 홀로만이 아닌 여럿을 느끼는 것, 고독일 때 연대와 연결의 우주를 아는 것, 여기에 생명의 활기찬 통로가 마련될 기미가 도사린다. 비록 ‘좁은 고통의 통로’ 속에 갇힌 듯한 단독자의 고독에 순간순간 매몰되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낳는다는 도를 다시 낳고 또 우리를 길러낸다는 덕(德)을 다시 길러서 그 덕성스러움을 나름 그윽이 살려볼 요량이고 마련이다. 





제 52 장 第五十二章 守母 (歸元)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知其母 [旣得其母] 
(復知其子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其不殆 [沒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強 
用其光 復其明 
無遺身殃 
是謂習常 [是謂襲常]

천하에 비롯이 있으니 그것을 천하의 어미라고 한다
이미 천하의 어미를 얻었으면
(그로써) 그 아들을 안다
이미 그 아들을 알았으면
다시 돌아가 그 어미를 지키라
(그리하면) 죽도록 위태롭지 않으리라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
몸이 다하는 날까지 지치지(소진되지) 않는다
그 구멍을 열고 그 일을 이루면
몸이 다하는 날까지 구제되지 않는다
작은 것(미세한 일)을 (꿰뚫어)보아야 밝은 지혜라 할 수 있고
부드러움을 지킬 수 있어야 굳세다(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빛을 쓰되 그 '밝음'으로 복귀한다면
자신에게 재앙을 남기는 일이 없다
이를 일러 '빛을 가린 도리' 또는 '은은한 도리'라 한다
 

[補註]
 - 노자1장 : 무는 천지(만물)의 비롯이라 이름하고 유는 만물의 어미[母]라 이름한다.
 - 노자25장 : (그것은) 가히 천지의 어미[母]라 하겠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자를 지어 도라고 한다.
 - 노자20장 : 뭇사람 모두 쓸모가 있지만 나만 미련하고 너절하다. 나만 홀로 남과 달리 젖어미[食母]를 소중히 여긴다(여기련다).
 - 노자59장 : 아무도 그 끝을 알 수 없으면 나라를 맡을 수 있고 나라의 어미(뿌리)[母]가 있으면 길고 오랠 수 있다.
 - 노자56장 : (도를 아는 이는)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빛을 부드럽게 줄인다.
-----------------------------------------------------------------------------
[詩說]

신사들은 잘 먹지를 않습니다.

일찌기 풍년제과의
과자가 되고 싶었던 밀가루와
스코틀랜드의 위스키가 될뻔 했던 물이

'불우한 환경 탓이겠지만'

냄비 속에서 만나
뜨거운 사이가 되었을 때
냄비 우동이라는 싸구려 이름은
밀가루 쪽에서나 물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망신입니다.

쩔쩔매며 끓는 모양이
정사 현장을 들킨 유부녀 꼴입니다.

만찬에 초대 받지 못합니다.

-이세룡, 냄비우동」

 가만 들여다보니, 음식은 그 무슨 음식이나 비롯됨이 있는 구성체이다. 어쩌면 이질적인 식재료들이 모여서 나름의 조화를 이룬 음식을 우리는 여럿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산해진미(山海珍味)라는 말 자체가 그 식재료의 숨탄것으로서의 본령이 생전엔 서로 만나거나 얽히지 않다가 음식이라는 조화 속에서 어우러지는 바의 기운이 여실하다. 그 단적인 예의 음식이 내가 즐겨 먹는 애호박볶음이다. 아내가 베트남산 도마에서 송송 써는 애호박 써는 소리는 언제나 경쾌하고 산뜻하다. 이렇게 썬 애호박은 푸라이팬에 볶아지고 여기에 간이 들어가는데 소금이나 간장이 아닌 이때만큼은 새우젓이 성큼 넣어진다. 다른 이들은 어찌 그리 당연한 얘기를 하느냐고 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 조합이 너무나 신기롭다. 밭이나 비닐하우스, 혹은 담장 울타리를 타고 자라는 뭍의 애호박이 바다에서 잡힌 새우의 절임과 만나 음식이 된다는 것은 여간 이채롭지가 않다. 이런 조합은 거의 내 눈에는 혁명적인 어울림이지 싶다. 즉 애호박볶음이라는 소박한 음식이 뭍의 애호박과 바다의 새우가 뒤섞이는 비롯됨이 없이는 간단함에도 그 간단한 입맛을 얼러내지 못한다. 물론 애호박이 출현하는 차원의 환경이나 터전은 새우젓이 비롯되는 환경과 마찬가지로 나름의 전차(前次)가 있기 마련이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애호박과 새우젓이 만나 이루어내는 나름의 음식 미각은 우리네 소박한 입맛과 마음의 상태를 돋아내는 바도 낙락하다. 
 이세룡의 냄비우동에 대한 시각은 자못 몬존하고 자기비하적이기는 하지만 그 한끝에는 시인의 냄비우동에 대한 편안한 사랑의 기미가 서려있다. 그러한 소박한 사랑은 일찍이 ‘풍년제과의/과자가 되고 싶었던 밀가루와/스코틀랜드의 위스키가 될뻔 했던 물이’ 이 냄비 속에서 만나는 음식의 기원이랄까 ‘천하에 비롯되는 것[天下有始]’으로서의 여줄가리인 음식을 보아낸 바가 있다. 흔전만전해서 ‘만찬에 초대받지 못’하는 음식인 냄비우동이지만 이렇게 세상 누구나 꼭 신사가 아니어도 먹을 수 있음이 오히려 이 음식을 만든 이의 너른 사랑이자 냅뜰성이지 않을까. 크게 무엇이 되어 우쭐해지는 것도 있지만 크게 무엇이 되지 않고 낮은 자리의 모두를 섬기는 음식으로 푼푼해져도 기꺼울 마련이다.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고 모두가 다가들어 먹을 수 있는 만만한 음식이라면 이는 흔전만전한 대덕(大德)의 말단이다. ‘싸구리 음식’이라는 폄하의 눈길도 있지만 이 싸구려 음식으로 시장기를 때우고 서둘러 어딘가로 가야 하는 이의 간편식으로 출출함을 채워줄 수 있음은 또한 덕성스러움이다. 너무 크게 책망하거나 호대하지 않음이 오히려 시인이 바라는 역설이지 싶다. 
 ‘만찬에 초대 받지 못’하지만 그 만찬이 행복은 아니다. 소박한 냄비우동에 기꺼이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박함의 개결함이자 만한전석(滿漢全席), 즉 5000년 중화요리의 끝판왕의 화려함이 부러울 것이 없다. 스스로 밝음[復其明]으로 돌아가 가만한 평화에 동석할 수 있다면 초대 받지 못함이야말로 스스로의 안분을 얻는 셈이다. 희고 슴슴하고 두터운 우동가락을 이빨의 저작(咀嚼)도 필요없이 목구멍으로 넘길 때의 그 구수하고 그득한 식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초대하는 시장기의 행복에 가까이 코를 박고 이마에 송글송글 땀을 낸다. 그럴 때 기차의 기적소리는 왜 우리를 그렇게 반가이 재촉하는 것만 같은가. 






제53장 第五十三章 盜桍 (益證)


使我介然有知 
行於大道 
唯施是畏 [唯他是畏] 
大道甚夷 而民好徑
朝甚除 *1
田甚蕪 倉甚虛 
服文采 帶利劍
厭飲食 財貨有餘 
是爲盜夸
非道也哉 

내가 좀 아는 게 있어 (조정에 들어가)
큰길(대도)로 나아가(도록 하는 자리에 있)게 된다면
오직 (큰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큰길(대도)은 아주 평탄하지만 백성(임금)은 샛길을 좋아한다
조정은 궁전을 아주 화려하게 새로 짓느라
(부역으로 백성의) 밭은 아주 거칠고 곳간은 텅 비었는데
화려한 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
물리도록 마시고 먹고 재화는 남아도니
이는 바로 큰 도둑(대도)이로다
이는 (참으로 가야할) 길(대도)이 아니다
 

[補註]
 - 노자70장 : 내 말은 아주 알기 쉽고 매우 행하기 쉽지만 하늘 아래 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 없고 행할 수 있는 이 없(도)다.
 - 노자75장 :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위에서 거둔 세금으로 즐기며 생활함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 1 : 조정은 궁전을 화려하게 새로 짓느라 ( 附言; 除=>殿陛=>去舊更新)
-----------------------------------------------------------------------------
[詩說]

살면서 남의 것을 훔치고 빼앗고 
남을 밟고 올라선 적 없는 나는 
세 가지 도둑질로 살아왔다 ​

민초들의 말씀 도둑질
독자들의 눈물 도둑질
계절마다 들꽃 도둑질 ​

나는 아침마다 산책 길에 꽃을 모시는 꽃도둑 ​

아는 집을 방문해서도 
어느 마을 길을 가다가도
내가 찾던 그 꽃 그 나무를 보면
그만 넋을 잃고 설레어서
땅에 엎드려 사진에 담고
눈으로 입맞추고 향기를 마신다

나는 왜 이러 꽃을 좋아할까
누구 하나 온 적 없는 내 작은 방
한 줌 햇살 창가에, 잠자리 머리맡에
테라스 책상 앞에, 작은 식탁 위에
갓핀 야생화나 들꽃을 놓아두고
한겨울엔 푸른 가지라도 꽂아두고
내 노트와 자주 보는 책갈피엔
철마다 끼워둔 마른 풀꽃들이
빛바랜 사진첩인 듯 놓여있다

전라도 고향땅에서 뿌리 뽑혀
도심의 시멘트 바닥과 공장 기름 바닥과
최루탄 가스 자욱한 군홧발의 거리와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독방 감옥 독방과
폭음 우리는 전쟁터의 길을 걸으며
불덩이 같은 마음은 늘 가슴이 시려서
나는 꽃도둑이라는 이 오래된
불치병을 가지게 된 걸까

오늘도 야산 언덕을 거닐다
보아주는 이 없는 눈부신 하늘매발톱 앞에
나직이 허리를 숙이고서 한 포기를 모셔와
이렇게 정원 틈에 심어가는 나는
다시 두손에 붉은 포승줄이 묶여 
유배당해도 싸다고 생각하느니
나는 산골 독방으로 집해 유예된
고독한 꽃도둑, 영원한 꽃도둑이니

이 야생의 꽃들처럼 나를 다 바치고
어느 날 시든 꽃처럼 나 사라질지라도
내 사랑을 여기 심어두고 갈테니
계절이 흐르는 길에서 피고 지는
그 꽃들과 키 큰 나무 사이를 거닐며
죽은 시인의 정원에서 한 번 웃어주시길

-박노해, 나는 꽃도둑이다」 



 백성의 곡간을 거널내는 가렴주구의 혼군(昏君)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을 천심으로 여기고 살펴 헤아리는 위정자는 궁궐 후원의 꽃밭을 거닐면서도 백성 생각에 시름이 깊고 구구하기 마련이다. 백성의 마음을 살펴 온전히 훔치는 이라야 시민이며 백성은 어느 날에 그런 국민에 대한 애호로 여윈 군왕을 느꺼워한다. 오로지 만백성을 하나의 부모처럼 모시고 보살핌은 그대로 천하가 태평을 열어가는 범박하지만 오롯한 대도(大道)의 여실함이다. 
 여기 꽃에 홀리고 꽃을 아끼며 꽃을 오롯이 보듬는 시인의 마음은 그리하여 독자의 마음을 헌걸차게 훔쳤던 <노동의 새벽>의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세상 열악한 노동의 현실을 질타하고 불같이 토해냈던 그 분노의 시어들은 당대의 노동자와 시민들을 풀꽃처럼 아껴 세상을 향한 사랑의 질정(叱正)이자 질타였다. 이제 구순하고 다감해지고 눈시울 습습해진 시인의 말은 노동의 현실을 회피해서가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향해 더 너름새를 넓혀가는 중이다. 언제나 당대의 열악하고 부조리한 노동의 현실이 엄존하기에 그가 싸웠던 시대의 당대의 노기어린 시어들은 새 세상의 꽃, 그 개화를 위한 마중물이지 싶다. 
 세상에는 그렇듯 많은 도둑이 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을 ‘꽃도둑’을 자처한다. 어떤 혐의로도 이 꽃도둑은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눈물에도 향기가 나는 이 꽃도둑을 자처함은 시인이 더 감성어리고 늡늡하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바탕이자 그 순연해진 속종의 드날림이지 싶다. 
 시인이 말하는 도둑질에는 처음엔 훔치는 것이나 그 나중은 내어줌이자 나눠줌이지 싶다. 이러한 도둑질은 ‘내 사랑을 여기 심어두고 갈테니’ 하는 순결한 고백 속에서 도드라진다. 훔쳤음에도 내어주고 나눠주는 도둑질이라니, 이런 도둑질이 사회에 만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니 이 어찌 도둑질을 도둑질이라고 할 수만 있는가.
 시인이 엄혹하고 강퍅했던 노동의 현실 속에서 걸어나와 천지자연이 내어주는 저 끌밋한 화훼(花卉)의 실체를 사진과 크고 작은 장소에 모시는 행위는 ‘하려한 옷을 입고 날카로운 칼을 차고 물리도록 마시고 먹고도 재화는 남아도는 이는 바로 큰 도둑이다[服文采 帶利劍 厭飲食 財貨有餘 是爲盜夸]’ 싶은 위정자들에 에둘러 건네는 소박함의 중시와 애민의 메시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제54장 第五十四章 善觀 (修觀)
 

善建不拔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修之於身 其德乃真 
修之於家 其德乃餘 
修之於鄉 其德乃長
修之於國 其德乃豐 
修之於天下 其德乃普
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鄉觀鄉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잘 세운 것은 뽑히지 않고
잘 품은 것은 벗어나지 않아
자손이 제사 지내기를 그치지 않는다
제 몸에 그것(잘 세우고 잘 품음)을 닦으면 그 덕(얻음)은 참됨이고
집안에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은 여유로움이고
고을에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은 오래감이고
나라에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은 풍요로움이고
천하에 그것을 닦으면 그 덕은 두루 미침이다
그러므로
몸(의 참됨)으로 몸을 보고
집안(의 여유로움)으로 집안을 보고
고을(의 장구함으)로 고을을 보고
나라(의 풍요로움으)로 나라를 보고
천하(에 두루 미침으)로 천하를 보아야 한다
내가 무엇으로 천하가 그러한 줄 알겠는가
이로써 (위와 같은 것으로써) 안다
 

[補註]
 - 노자27장 : 잘된 잠금은 문빗장을 걸지 않아도 열 수 없고 잘된 묶음은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 없다.
 - 노자57장 : 바로잡음(정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음(무사)'으로써 천하를 얻는다.
----------------------------------------------------------------------------
[詩說]

머위나 고들빼기 씀바귀는
그냥 먹으려면 너무 써서 못 먹지
쓴맛이 아주 다 빠지지는 않게 우려내야 먹지
쌉싸름하니 남아서
입맛이 없어 겨우내 까부라졌던 사람을
거뜬히 밥 한그릇 뚝딱 먹여 들로 내보내고
그 아내는 나물 치댄 이남박에 밥 비벼 먹고
뒤를 따라가게 하지 않는가 
 
봄밤도 맞춤하게 우려내야 앵두며 살구꽃은 피고
짝 찾는 새들은 갓밝이에 울며 날고
연두로 불쑥불쑥 풀들은 돋아나지 않는가
새벽은 우러나서 노랑나비 흰나비 쌍쌍 나는 대낮을 만들고
대낮은 또 우러나서 조팝꽃 으깨지는 밤은 오고
보름달은 우러나서 물 가둔 논마다 월인천강지곡를 부르고
번번하게 달빛은 우러나서 철럼하게
논둑에 넘실대지 않는가 
 
소쩍새 울음소린 또 우러나서
온 산에 두견화를 피우고
나는 또 우러나서 이제 쉰이 넘고
쉰두해 맞는 봄에 머위나물 얹어두고
쓴맛이나 더 우려내야 할랑가벼

-송진권, 우려내야」


 송진권 시인이 ‘우려내야 먹지’라고 말하는 순간, 고통을 우려먹는 게 삶이겠구나 뒤미처 따라드는 생각이 있다. '쓴맛이 아주 다 빠지지는 않게 우려내'는 ‘머위나 고들빼기, 씀바귀’는 애초에 못 먹을 것일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 쓴맛을 먹을 만치 남긴 채 우려내는 매력의 나물로 돌아온 것이다. 혀에 찰싹 달라붙은 달달한 맛만을 속속들이 지닌 음식이며 그 식재료가 다 어디 있겠는가. 내 맘 같은 맘을 지닌 사람이 흔치 않듯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들 속에는 우리가 오히려 마뜩지 않게 여기는 부분도 항시 포함하거나 내장하는 있는 것들이다.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그러니 라오쯔도 그것이 ‘제 몸’ 이든 ‘제 집안’이든 ‘제 고을’이든 또 ‘나라’이든 급기야 종내는 ‘천하’든 잘 ‘닦음[修]’으로써만 옹립되는 끌밋함의 결과를 이야기한다. 
 시인은 그런 체급과 종목을 달리하는 닦음과 옹립의 대상을 시인은 좀 더 그윽한 말로 ‘우려냄’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원래 우리 안에 없는 것을 있게 하려는 안간힘만이 아니라 원래 투박하고 거친 상태로 있는 그것을 잘 닦고 우려내는 일의 종요로움을 설파하는 듯하다. 참다이 우려내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으로 가는 참다운 헤매임이요 이 헤매임은 라오쯔 식으로 얘기하자면 인위(人爲)와 무불위(無不爲)를 넘어 무위(無爲)로 가는 도정(道程)이지 싶다. 
 나야말로 어둑하고 어리석고 어리보기인 사람임에도 그나마 근근히 삶에 깃들어 희미하게나마 도(道)를 헤아리고 덕(德)을 건너다볼 수 있음은 이 헤매임이 주는 보람이지 싶다. 나처럼 불민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헤매이지 않는다면 뒤늦게 늦깎이로나마 검불처럼이라도 도덕을 헤아릴 수 있는가. 오로지 헤매임과 그 헤매임 속에서 거친 두레박으로 건져올리듯 우려낸 후회 같은 혜윰이 아니고서야 무슨 넋두리라도 돋아낼 것인가. 이러한 지경에도 시인의 우러남은 남달라서 ‘소쩍새 울음소린 또 우러나서/온 산에 두견화를 피우’는 지경을 보아낸다. 아 우려내는 것과 우러나는 것이 한 경지에서 능놀고 있음을 바라나니, 여기의 삶이 ‘쓴맛을 더 우려내야 할랑가’보다고 말하는 시인의 속종은 늡늡하고 낙락하기 그지없다. 
 지금의 모든 나는 옛날로부터 늘 미욱하기 그지없었음으니 그윽한 사랑이여 나를 좀 더 우려내야 할까부다. 반복과 차이를 변주하며 나여, 나를 좀 더 우려내야 할까부다. 미물과 우주 사이에 끼인 숨탄것인 나를 어찌 아니 해볼까 싶게 자꾸 우려내는 일로 나를 길러낼까 보다. 
 



제55장 第五十五章 含德 (玄符)
 

含德之厚 比於赤子 
毒蟲不螫 
猛獸不據 
攫鳥不搏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 而全作[而朘怒] 
精之至也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
知和曰常 [和曰常]*1~ 
知常曰明 [知和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強
物壯則老 *2 
謂之不道 *3 
不道早已 

덕을 두터이 품은 이는 갓난아이에 견줄 수 있다
(벌이나 전갈 같은) 독벌레도 쏘지 않고
(독뱀도 물지 않고) 사나운 짐승도 움키지 않고
낚아채는 새도 (갓난아이를) 치지 않는다
뼈는 여리고 힘살은 부드럽지만 주먹을 굳게 쥔다
아직 암수의 하나 됨을 알지 못하면서도 불알이 성내니
(타고난) 정기(싱싱한 기운)가 지극(충만)한 것이다
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음조의) 조화(어울림)가 지극한 것이다
조화로움을 덛덛한 것(늘 그러한 것)이라 하고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밝음(큰 지혜)이라 한다
삶(수명)을 늘이는 것을 요사함(비정상인 것)이라 하고
마음이 기를 부리는 것을 굳셈(강함)이라 한다
만물은 강해지면 곧 노쇠하니
이를 일러 도(리)에 어긋난 것(무도함)이라고 한다
(부드러움과 조화로움을 버리고) 무도하면 일찍 죽는다


[補註]
 - 노자30장 : 전과를 거두되 강해지지 않는다. ~만물이 강건해지면 곧 노쇠하니 이를 일러 도(리)에 어긋난 것(무도함)이라고 한다. 무도하면 일찍 죽는다.
 - 노자16장 : 덛덛함(늘 그러함, 변함없이 같음)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한 일을 벌인다.
 * 1 : [죽간본, 백서교감판] 조화로움을 덛덛함(늘 그러한 것, 보통의 정상적인 것)이라 하고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밝다고 한다. (和曰常 知和曰明)
 [왕필본] 조화로움을 아는 것을 덛덛함(늘 그러함)이라 하고 덛덛함을 아는 것을 밝음(큰 지혜)이라고 한다 .
 * 2 : 만물은 강화되면 늙는다. 만물은 더 강해질수록 더 빨리 노쇠한다 ; 附言; 壯=增强,
 * 3 : 이를 일러 덛덛한(늘 그러한, 일상적인, 정상적인) 도리에 어긋난 짓이라 한다 ; 附言; 不道=無道=>违反常理或不近情理,
-----------------------------------------------------------------------------
[詩說]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느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 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아이들의 팽팽한 마음
튀어 오르는 몸
그 샘솟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김광규, 오래된 물음」


 무릇 그렇다. ‘아직 암수의 하나 됨을 알지 못하면서 불알(성기)이 성냄[未知牝牡之合 而全作[而朘怒] ]’이 먼저 생김은 무슨 조화인가. 앎, 즉 사전 지식보다 우리의 몸과 맘이 먼저 자연의 이법을 따라 생동생동하니 이는 사물과 숨탄것 모두에 미만(彌滿)해 있는 자연의 흐름이 자연스레 실체화된 따름이다. 무엇을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혼백이 드리운 모든 삼라만상이 자연이니 그 자연이 말 그대로 그러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앎, 즉 지식이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법, 도(道)의 두루 미치는 영향력이 덕(德)으로 길러냄이지 않은가. 알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앎을 포함하는 덕성스러운 자연이 그렇게 길러내고 그렇게 종내는 쇠락하게 하는 흐름을 웅숭깊게 펼쳐놓을 따름이다. 
 그러니 자연스레 일어나고 저무는 것들에 대한 물음이 온전하다는 것은 그 안에 도(道)가 서렸음을 똥기는 것이요 그 사물과 숨탄것이 불뚝 솟구쳤다 자물어지는 것을 미소로써 마주하는 것은 덕(德)이 종요롭게 흘러들어 길러냈음을 아는 바이다. 김광규는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아기의 고운 미소느 우리를/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고 해묵었음에도 새뜻한 물음을 새삼 시로써 길러내 우리들 가슴에 손등에 얼굴에 샘물로써 부어준다. 그 물음이 바로 신기한 자연과 무위에 대한 물음이지 싶다. 이 물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길러지는 우주의 모음(母音)과 자음(子音)의 조화를 슬며시 똥기게 되고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몬존하고 취약한 것만은 아니란 사실에 가만히 존재의 그윽한 고요를 맛보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쓰레기 터의 라일락이 해마다/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깊은 향기’의 매력과 아이러니와도 같은 미만(彌滿)한 즐거움의 여력 같은 것이다. 억지스러움의 구색 맞춤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의 조화의 낙락함이라 한다. 이러하니 우리는 여리고 약하고 부드럽고 하는 것들을 우열(優劣)의 차원에서 분별하는 눈길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좀 더 조화롭고 어울려 보합하는 자연의 기운에 좀 더 눈길을 줄 필요가 종요롭다. 
 이렇듯 가장 자연스럽고 근원적인 물음은 우리를 어리석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들의 깊은 오의(奧意)에 생각이 들리게 한다. 고정된 관념이 덜어지고 우주의 흐름에 잇닿은 이법(理法)의 여줄가리 한 가닥을 새삼 마음이 어루만지게 된다. 그러니 물음은 난처함을 거드는 것이 아니라 선처를 새삼 불러내는 일에 지척이다. ‘도대체/땅에 뿌리박지 않고/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뛰놀며 자라는/아이들의 팽팽한 마음/튀어오르는 몸/그 샘솟는 힘은/어디서 오는 것이냐’ 라고 묻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시인이 시를 쓰는 동력의 심법(心法)을 엿보게 된다. ‘도대체~’ 하면서 묻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소우주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물음과 활기 가득한 시편을 곁에 두는 기미가 있다. ‘도대체~’로 시작하는 물음이 ‘~어디서 오는 것이냐’라고 묻는 것 안에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공간의 많은 당위적(當爲的)인 물음의 대상을 밥처럼 솥 안칠 수 있다. 그 물음의 시작이 어쩌면 세상 인식의 개안, 그 혁명의 우리네 별칭인 의식의 밥솥을 새로 들이는 길, 즉 정혁(鼎革)의 시발점이지 싶다.
 




제56장 第五十六章 玄同 (玄德)
 

知者不言 [知之者弗言] 
言者不知 [言之者弗知] 
塞其兌 閉其門 *1 
挫其銳 解其分 *2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故 
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 

(그것을) 아는 이는 (그것을) 말하지 않고
(그것을) 말하는 이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아는 이는)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는다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엉킴을 풀고
그 빛을 부드럽게 줄이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어우러진다)
이를 일러 그윽한 하나됨(유현한 어우러짐)이라고 한다
그는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그와) 가까워질 수도 없고 멀어질 수도 없고
(그를)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고
(그를)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늘 아래 가장 귀한 존재가 된다


[補註]
 - 노자73장 : 하늘의 도는 ~말하지 않아도 잘 응한다.
 * 1 : [왕필본,백서본乙] 구멍(입)을 막고 문(귀)을 닫는다. (塞其兌 閉其門) ; ※ 兌=悅 or 口, 門=聞
[죽간본] 구멍(입)을 닫고 문(귀)을 막는다. (閉其兌 塞其門)
 - 노자52장 :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 평생 지치지(소진되지) 않는다. 그 구멍을 열고 그 일을 이루면 평생 구제(치유)되지 못한다. ~그 빛을 사용하되 그 밝음으로 복귀한다면 자신에게 재앙을 남기는 일이 없다. 이를 일러 '빛을 가린 은은한 밝음'이라 한다.
 * 2 : [왕필본] 날카로움(예기)을 꺾고 엉킴(분규,분란)을 푼다(해결한다). (挫其銳 解其分)@노자56장, (挫其銳, 解其紛)@노자4장
[백서본乙]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엉킴을 푼다. (銼其兌 而解其紛)@노자56장, (銼其兌 解其芬)@노자4장 ; 附言; 兌=銳, 芬=紛.
[죽간본] 날카로움(예기)을 모아두고(축적하고) 분노(원한, 원망, 증오)를 푼다. (畜其銳 解其忿) @노자56장
 - 노자51장 : [백서본] 도가 높고 덕이 귀한 것은 누가 도와 덕에게 작위를 내려서가 아니라 언제나 저절로(스스로) 그러하다.
-----------------------------------------------------------------------------
[詩說]

밥 먹으러 오슈
전화받고 아랫집 갔더니
빗소리 장단 맞춰 톡닥톡닥 도마질 소리
도란도란 둘러앉은 밥상 앞에 달작지근 말소리
늙도 젊도 않은 호박이라 맛나네,
흰소리도 되작이며
겉만 푸르죽죽하지 맘은 파릇파릇한 봄똥이쥬,
맞장구도 한 잎 싸 주며
밥맛 읎을 때 숟가락 맞드는 사램만 있어도 넘어가유,
단소리도 쭈욱 들이켜며
달 몇 번 윙크 하고 나믄 여든 살 되쥬?
애썼슈 나이 잡수시느라,
관 속 같이 어둑시근한 저녁
수런수런 벙그러지는 웃음소리
불러주셔서 고맙다고, 맛나게 자셔주니께 고맙다고
슬래브 지붕 위에 하냥 떨어지는 빗소리

-김해자, 언니들과의 저녁식사」


 삿된 얼크러짐을 풀고자 한다. 억하심정을 단순한 헤프닝으로 돌려세우고자 한다. 옥생각을 풀어 늡늡한 넉넉한 도량으로 한 발 다가서려 한다. 어디에 처하든 어느 순간에 놓이든 ‘그 빛을 부드럽게 품고 어울려서 티끌의 풍진세상과 하나되려 한다[和其光 同其塵]’니 무슨 대단한 엄포 같은 사상이 필요한 것만도 아니다. 
 딱딱한 지식을 말랑말랑하게 젤리처럼 만드는 것은 그러니까 유연한 마음이다. 지식을 책이나 인터넷 정보의 말단에 방치해 두는 것은 관념이지만 이걸 삶의 거리와 들과 산과 논밭과 강가와 바다로 데려가는 것은 끌밋한 덕성스러움이다. 이렇게 세상 도처로 번져내서 너나들이 부려주고 나눠주고 어울려 놀고먹음이 삿됨 없는 ‘그윽한 덕[玄德]’이라 부른다. 그 덕성스러움을 자꾸 우리의 비루한 삶의 도처로 초대하고 싶어지는 날들이 있다. 매냥 그렇게 살아야 함에도 매냥 그렇게 하지 못함을 똥기는 순간에 우리는 다시 ‘밥 먹으러 오슈/전화받고 아랫집’ 가듯이 구멍난 양발에 슬리퍼 꿰차고 질질 신발 끌리는 소리 데리고 가까운 이에게 정말 가까이 가려 한다. 
 우리네 삶의 어느 분위기가 마치 ‘관 속 같이 어둑시근한 저녁’이더라도 더더욱 그러하기에 사람이 사는 지구촌 어느 마을의 저녁이더라도 우리는 ‘수런수런 벙그러지는 웃음소리’로 새삼스레 도(道)를 열고 그 덕성스러움을 너나들이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모든 해악과 삿됨과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얽힘을 풀고, 그 빛을 부드럽게 줄이고 티끌과 하나가 되어 어우러진다[挫其銳 解其分 和其光 同其塵]’는 라오쯔의 언설에 같이 회동하게 된다. 
 그래 영악한 목적과 까탈스러움과 흉계를 버리고 바람이 머무는 적막한 그늘의 밝음처럼 만나자. 그 회동의 너나들이 속에서 ‘불러주셔서 고맙다고, 맛나게 자셔주니께 고맙다고’ 한솥밥의 뚜껑을 저만치 열어 내놓고 들바람을 쐬기도 쐬어봐도 좋겠다. 아마 그렇게 높고 낮음이 사라지고 있고 없음이 무력해지며 잘나고 못남이 무색해지는 지경에 이르러 한 번 빗소리처럼 웃어봐도 기꺼우리라. 





제57장 第五十七章 治邦 (淳風)

 
以正治國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吾何以知其然哉
以此 
天下多忌諱而民彌貧 *1~
民多利器 國家滋昏
人多伎巧 奇物滋起 
法令滋彰 盜賊多有 
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2

바로잡음(정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느닷없음(기책)으로써 군사를 부리지만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얻는다
내가 어떻게 그러한 줄 알겠는가
바로 이것(아래 월)으로써 아는 것이다
천하에 금기가 많아지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에게 이로운 기기가 많아지면 나라는 더욱 혼미해지고
사람들의 재주와 솜씨가 늘어나면 기이한 물건이 더욱 생겨나고
법령이 더욱 뚜렷해질수록 도둑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성인은 말했다
내가 하는 것이 없어도 백성이 스스로 자라나고 (화육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되고
내가 벌이는 일(사업)이 없어도 백성이 스스로 부유해지고
내가 바라는 것(욕심)이 없으니 백성이 스스로 순박해지더라


[補註]
 - 노자19장 : 기교를 끊고 이익이 되는 것을 버리면 도둑이 사라진다.
 - 노자58장 : 정치가 두루뭉술하면 그 백성은 순박해지고 정치가 (속속들이) 살피면 그 나라는 이지러진다.
 - 노자64장 : 성인은 욕심내지 않음을 욕심내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 1 : [죽간본] 하늘의(천자로부터) 금기가 많을수록 백성의 마음은 더욱 멀어져 돌아서고(이반되고) / 백성에게 이기(날카로운 무기, 병권, 편리한 도구, 뛰어난 재능)가 많을수록 나라는 더욱 혼미해지고 / 사람(임금)이 지혜가 많으면 기이한 물건들이 더욱 생겨나고 / 법령이 뚜렷해질수록 (말단만 다스리므로) 도적이 늘어난다. (夫天多忌諱而民彌叛。民多利器而邦滋昏。人多智而奇物滋起。法物滋章盜賊多有。)
 * 2 : [죽간본, 백서본] 내가 욕심내지 않으려고 하니 (욕심내지 않음을 욕심내니, 욕망하지 않기를 욕망하니,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자 하니) 백성이 스스로 순박해지더라. (我欲不欲而民自樸)
----------------------------------------------------------------------------
[詩說]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식구들 세워놓고
사내 하나 사진을 찍는다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들쳐업은 촌스러운 여편네는
생전 처음 일이 쑥스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을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붙어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차렷을 하고
눈만 떼굴떼굴 숨죽이고 섰는데
그 곁난간 틈으로는
웬 코스모스도 하나 고개 뽑고 내다보는데
짐을 맡아들고 장모인지 시어미인지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김사인, 공휴일」


 이렇게 순박하고 수더분하고 소박하니 늡늡한 심성들이 우리 이웃이란 게 때로 가만히 더없이 고맙다. 더러 저런 저런 사람들, 장삼이라고 하는데 저런 장삼이사(張三李四)라면 우리네 사는 처처(處處)에 그득그득 사셨으면 좋겠다. 감개무량한 저 순진무구한 마음씨가 백성과 국민과 시민 안에 도사린 천심(天心)이 도래샘을 대고 있는 듯하다. 무엇이나 저런 흔전만전한 우리네 심성의 원형이 흐리어가고 폄훼되는 세상이라면 그런 세상에 경을 쳐도 오래전에 숱하게 되알지게 경을 쳐도 무방하다. 돈 좀 운좋게 쌓았다고 우쭐대거나 뭐 그 정도는 아량으로 받아도 좋지만 사람 자체를 내리깔고 보는 안하무인의 무례한들이라면 크게 경을 쳐서 도로 순박한 사람의 힘에 다시금 놀라고 그런 속된 자신을 똥기게 됐으면 한다. 
 큰 마음이란 대체로 그럴 듯한 지식과 학력과 금력과 권력에 기반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작자들이 논밭의 피처럼 고개를 돋는 세상이기는 해도, 어찌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식구들 세워놓고’ 가족사진을 찍는 사내와 그 일가붙이의 순박한 속종만한 것이 있으랴. 천박하기로 따지면야 가장 학식 있다는 매관매직하는 학자와 돈푼깨나 있는 거로 사람을 능멸하는 졸부와 그 족속과 제 정신의 살림조차 못 바로잡는 정치꾼의 활개만 한 것이 더 있으랴. 
 공휴일 한낮에 벌어지는 이 순박하기 그지없는 졸박한 가족사진의 정경은 한 나라의 구성원들이 어찌 그 마음 살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정치는 야합이나 야차 같은 저들끼리의 짓거리를 먼저 단속할 것인가가 먼저이니, 국민은 시편 속에서처럼 저리 본래 가진 천심에 잇닿은 인심을 순박하니 열고 닫고 하는가 보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악행과는 상종을 모르는 저 ‘아이 들쳐업은 촌스러운 여편네’와 그 자식과 남편과 ‘짐을 맡아들고 장모인지 시어미인지’ 하는 노인은 라오쯔가 말한 순박(順樸)함의 여전한 우리네 삶의 근동이며 그 현황이지 싶다. 
 저들 ‘웬 코스모스도 하나 고개 뽑고 내다보는’ 다리 난간의 사진 찍는 가족의 수수한 속내를 누가 만들었을까. 큰 욕심에 놀라듯 멀리하고 작은 욕심에도 두런두런 남편은 아내와 상의하고 아내는 제 ‘장모인지 시어미인지’와 걱정을 했을 그 순정함에 ‘내가 바라는 바의 것이 없으니(적으니) 백성이 스스로 순박해지더라[我無欲而民自樸]’는 지경에 잇닿게 된다. 욕망의 크기와 그 갈급함이 크고 깊음을 헤아리는 것이 그 화근이며 재앙과의 거리를 두고 스스로 질박한 삶을 여투는 바가 있지 싶다. 큰 욕심과 욕망의 불안정한 발기 속에서 고통이 자라나고 순박함과 질박한 성정을 지켜나가는 겨를 속에서 행복은 매일 매 순간의 빛과 그늘처럼 버릴 것 없고 빼앗길 일 없이 번지게 됨이다.
 



제58장 第五十八章 爲正 (順化)

 
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孰知其極 
其無正也
正復爲奇 
善復爲妖
人之迷 其日固久 
是以聖人 
方而不割 
廉而不劌 
直而不肆 
光而不耀 

정치가 두루뭉술하면 그 백성은 순박해지고
정치가 (속속들이) 살피면 그 나라는 이지러진다
화라는 것은 그 속에서 복이 말미암기 마련이고
복이라는 것도 그 속에 화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화와 복이 갈마드니)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그것에는 (절대적인) 올바름이란 없다
바른 것이 다시 기이한 것이 되고
선한 것(좋은 것)이 다시 요사한 것(재앙)이 된다
사람들이 길을 잃고 헤맨 날들이 참으로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성인은
반듯하지만 (남을) 베(어 반듯하게 만들)지 않고
날카롭지만 (남을) 찌르지 않고
곧지만 (남을) 곧게 펴지 않고
빛나지만 (남을) 눈부시게 홀리지 않는다
 

[補註]
 - 노자56장 : 그것을 아는 이는 (득도한 이는)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엉크러짐을 풀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세상과 어우러진다.
-----------------------------------------------------------------------------
[詩說]

행복이란
사랑방에서
공부와는 담쌓은 지방 국립대생 오빠가
둥당거리던 기타 소리
우리보다 더 가난한 집 아들들이던 오빠 친구들이
엄마에게 받아 들여가던
고봉으로 보리밥 곁들인 푸짐한 라면 상차림  
 
행복이란
지금은 치매로 시립요양원에 계신 이모가
연기 매운 부엌에 서서 꽁치를 구우며
흥얼거리던 창가(唱歌)  
 
평화란
몸이 약해 한 번도 전장에 소집된 적 없는
아버지가 배 깔고 엎드려
여름내 읽던
태평양전쟁 전12권  
 
평화란
80의 어머니와 50의 딸이
손잡고 미는 농협마트의 카트
목욕하기 싫은 8살 난 강아지 녀석이
등을 대고 구르는 여름날의 서늘한 마룻바닥  
 
영원했으면… 하지만
지나가는 조용한 날들
조용한… 날들…  

-양애경, 조용한 날들」


 어디까지 갔다 왔느냐 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품격이나 스케일을 가늠하는 일이 때론 허망할 때가 있다. 전세계를 일주한 사람이 부럽다가도 한반도의 작은 시골마을을 십오 리 안팎을 다녀온 적이 없는 사람의 초로의 인생이 대단해 보일 때도 있다. 뻔질나게 해외를 나돌아다녀도 그 앎이 궁핍할 때도 있고 토박이를 넘어 한 고장에서 나 한 고장에서 목숨을 다하는 노인의 구순한 눈빛에서 드넓은 선처(善處)를 바랄 때도 있다. 
 세상을 주유(周遊)함에도 한 마디의 알심이 일천하고 한 고장의 소읍에 평생을 늙었음에도 그 몸짓과 말씀이 천하를 그윽이 품고 굽힐 만한 뉘앙스가 보일 때도 있다. 시대의 역행을 아니 시대의 악행이 왔을 때 그걸 온몸으로 받은 이가 있고 그걸 비키듯 피해 몬존한 욕을 듣는 이도 있다. 어느 쪽이 끌밋한 마련인가. 
 이러함에 우리가 행복의 여러 조건들이라는 것이 세속적인 관념의 똥막대기에 불과할 수도 있고 그런 생각들의 적바림이 쓰레기 종이쪼가리에 불과할 수도 있음에 가만히 소름이 돋는다. 무릇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이 과연 그러한가, 라는 물음에 조금만 골몰해져도 우리는 새로운 회의에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이는 라오쯔가 말한 ‘그것에는 절대적인 올바름이란 없다[其無正也]’에서 우리는 혁명적으로 맞닥뜨리게 될성싶다. 왜냐, 사람의 존재방식에 들어있는 절대적인 법칙이나 규정들이 사실은 자연의 흐름 속에서는 여전히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법칙이란 통틀어서 모든 것은 변화와 흐름만이 여전하고 닫닫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양애경은 그런 변동성이 강한 우리네 삶의 이모저모에서 캐낸 아이러니와 변전(變轉)의 상황들을 구성지게 불러내 놓는다. 즉 ‘행복이란/지금은 치매로 시립요양원에 계신 이모가/연기 매운 부엌에 서서 꽁치를 구우며/흥얼거리던 창가(唱歌)’ 대목이 전해주는 소박함과 흔전만전한 일상성이 주는 반전의 매력 같은 것이다. 거기다 생사가 크게 좌우되는 평화의 상황에 이르러서는 ‘몸이 약해 한 번도 전장에 소집된 적 없는/아버지가 배 깔고 엎드려/여름내 읽던/태평양전쟁 전12권’이라는 아이러니의 재미를 페이소스 있게 전해주기도 한다. 처음엔 고통의 그늘 속이었지만 나중엔 가만한 행복의 고요 속으로 스미는 이러한 시적 상황들이란 필시 유전과 변화를 거듭하는 우주 속의 인간의 삶의 가변성을 시적으로 돋아내는 끌밋한 대목이지 싶다. 





제59장 第五十九章 長生 (守道)


治人事天莫若嗇
夫唯嗇是謂早服 
早服謂之重積德
重積德則無不克 
無不克則莫知其極 
莫知其極可以有國 
有國之母可以長久 
是謂深根固柢
長生久視之道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
무릇 오직 아끼게 되면 이는 빨리 극복하게 되는 것이고
빨리 극복하면 이는 덕을 두텁게 쌓게 되는 것이다
덕을 두텁게 쌓으면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 없게 되고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 없으면 아무도 그 끝(한계)을 알 수 없다
아무도 그 끝을 알 수 없으면 나라를 맡을 수 있고
나라의 어미(뿌리)가 있으면 길고 오랠 수 있다
이를 일컬어 뿌리를 깊고 튼튼하게 하여
길이 살고 오래 살아남는 길(방법)이라고 한다
 

[補註]
 - 노자67장 : (내가 늘 간직하고 있는 세 가지 보배 중에) 둘째는 검소함이다 ~ 검소하므로 넓힐 수 (넉넉함, 마음이 넓음) 있다. ~(그러나 오늘에는) 검소함을 버리고 넓히려고만 (넉넉하려고만) 한다.
-----------------------------------------------------------------------------
[詩說]

금줄친 대문이 어둠을 낳습니다
대문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어진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납니다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안에 담긴 어린 내가
별을 닮아가는 밤, 할아버지는
저녁보다 먼 길을 나섭니다

눈 깊어 황소 같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던 해 봄날
강가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
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
자리 앉혔다는 징검돌
그 돌들이 오늘밤
별똥별 지는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별똥별 하나, 하늘을 가르자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금줄을 흔듭니다
미처 눈 못 뜬 송아지가 뒤척이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줍니다
내 볼이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하늘이 오래 된 청동거울처럼 깊습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볕 뜨는 곳으로 기울고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
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삼칠일도 안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
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십니다

-김병호,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


 아끼고 아끼는 것은 그 대상을 온전하게 품고 넉넉히 오래 곁에 두려는 다솜의 실행력, 그 덕성스러운 몸짓이자 맘짓이지 싶다. 스스로 재화가 넉넉하다고 하여 아낌이 없이 내던지듯 풀어버리는 것이 결코 호탕한 것만은 아니다. 아낌이 없는 마음은 깊음이 없고 깊음이 없는 속내는 처음 좋아하던 대상을 손쉽게 변해 외면하거나 등돌리게 된다. 아낌이란 단순히 인색(吝嗇)함만을 한정하지 않으니 더 깊이 옹호하듯 품어 그 끌밋한 상대와 오래고 곁을 주고 싶은 영원에의 향수 같은 것이다. 아낌이 없이 어느 대상의 사물과 숨탄것에 대해 나중에라도 그윽이 바라는 동경과 노스탤지어가 있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또 없음에 가깝다. 아낌은 인색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부히 품어 돋우려는 웅숭깊은 활기의 도모인지도 모른다. 
 섬김이라는 말이 있다. 이 섬김이라는 말에는 상업자본주의가 언제든 부가가치로 포장한 서비스와는 본래적인 결이 다른 지점의 마음과 몸의 지향이 서려있다. 섬김에는 바라는 바의 셈평에 따른 대가가 없고 목적을 바라는 수단의 내밀한 경쟁 같은 것이 돋쳐있지 않다. ‘미처 눈 못 뜬 송아지가 뒤척이자/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그 순연한 본능의 내리사랑 같은 것이 늡늡하게 번져있지 싶다.  
 사랑은, 그 은은하고 웅숭깊은 다솜은 그대로 덕성스러움이니 시인의 눈길처럼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니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내 볼이 덩달이 따뜻해’지는 마음과 감각의 온유한 감염이다. 악행과 해코지의 기척과 유혹을 덜어내고자 할 때 ‘내가 앉은 징검돌이/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르듯 현재의 자신과 주변을 찬찬히 헤아리고 품어보는 너름새 속에 지상의 반질하게 닳은 징검돌도 어느 순간 ‘별자리처럼’ 끌밋하고 고아한 대상의 반열에 오르곤 한다. 
 무엇이나 하찮고 고상한 것이 따로 있음이 아니고 그 상대를 진실로 아끼는 것이 그대로 섬김의 자세를 불러오고 그 섬김이 곧 상대를 사랑과 덕성스러움의 화신으로 전환시킨다. ‘삼칠일도 안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시는 것은 격절된 분별의 대상들을 순환하는 자연의 숨결로 회통(會通)하는 여지가 역력하다. 
 숨탄것들 상호간에 그 무엇이라도 ‘덕을 두텁게 쌓으면 (어떤 난관도)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음[重積德則無不克]’은 순정한 존재의 숨결을 서로 나누고 그 온정을 독식하지 않는 데서 번지기에 이른다. 라오쯔에게 있어 도(道)는 덕(德)과 크게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본연의 진상(眞相)을 진전시킨 상황을 그림에 있어 그 덕(德)의 촉매적 성격을 굳이 불러내지 않을 수 없다. 쌓고 후덕하게 베풀어도 그것이 사치가 되지 않음은 덕성스러움이 지닌 카오스적 생명력의 본산이기 때문이다.
 



제60장 第六十章 居位


治大國 
若烹小鮮 
以道蒞天下 
其鬼不神 
非其鬼不神 
其神不傷人 
非其神不傷人 
聖人亦不傷人 [聖人亦弗傷也]*1
夫兩不相傷 
故德交歸焉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온전하게) 익히는 것과 같다
도를 가지고 천하에 다다르면
귀신이 신통을 부리지 않는다
귀신이 신통을 부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신통력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그 신통력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성인 또한 (귀신을) 해치지 않는다
무릇 이 둘은 서로 해치지 않으므로
덕이 함께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그 나라에 돌아간다
 

[補註]
 * 1 : [백서본] 성인 또한 (귀신을) 해치지 않는다. [하상공본] 성인 또한 해치지 않는다.
[왕필본] 성인 또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
[詩說]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이육사, 광야」 


 역설적이게도 이육사의 이 시편은 큰 나라가 아닌 그악스런 나라가 우리 나라를 범했을 때를 온전하게 상기시켜 주는 반면교사의 그늘이 오롯이 서려있음이다. 지사적(志士的)인 풍모의 시인은 한반도의 상고적인 정체성을 폄훼하고 겁박하는 이웃 나라를 통해서 진정한 한 나라의 고유성을 오히려 절절하게 부각시키기에 이른다. 라오쯔는 ‘도를 가지고 천하를 다다르면 귓것이 신통을 부리지 않는다[以道蒞天下 其鬼不神]’고 했지만 정작 흉악한 신통이 아닌 심통을 부리는 것은 이웃나라의 제국주의자들 그 사람들이었다. 흉계를 지닌 사람이 선량한 이웃 사람을 겁박하고 약탈하려할 때 그들을 견대내고 내치는 것은 오롯이 그 선량한 저항의 웅숭깊음과 고매한 정신의 아우라일 때가 오롯하다. 
 침탈한 대상의 사람과 땅이 정신이 끄달릴 때도 시인의 지사적이고 선비정신은 ‘모든 산맥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는 굽힐 줄 모르는 자존의 줏대를 꿋꿋이 심지에 심어두었다. 침략과 수탈의 이웃 나라를 두는 것은 그들이 큰 나라여서가 아니라 근린(近隣)을 선린(善隣)으로 아우를 줄 모르는 협량한 신통력 때문이다. 산 것이든 죽은 자의 망령이든 선량을 돋아낼 줄 모르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망령되고 덕성스러움을 몰각했기 때문이다. 몰각한 제국주의자와 파시스트들에게 할 수 있는 저항이란 온전한 선근(善根)의 어찌할 수 없는 줏대의 발현이자 그 맞대거리이다. 불가피한 맞섬을 불러일으키는 상대를 향해 그 그릇됨을 보여주는 것도 저항의 꽃이자 열매의 시발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퍅하고 무례한 제국(帝國)은 항구하게 오래 널리 설 수 없고 비록 땅덩이가 작은 나라라도 그 선량이 깊은 국민은 한 나라의 깊은 연원을 다지며 오래 국가를 길러갈 수 있다.
 나라와 나라는 덩치가 크던 작던 서로를 보살피고 삼이웃과 벗으로 어울려야 한다. 이 이웃됨의 근기(根氣)는 폭압이나 침탈이 아니라 라오쯔가 말한 보살핌과 나눔과 헤아림의 상생이니 큰 나라일수록 외적인 규모나 스케일에만 탐닉해서는 곤란한 지경에 이를 수 있다. 크고 작은 ‘나라든 나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익히는 것과 같다[治大國 若烹小鮮]’는 전언에는 그 나라 안에 작은 생선을 굽듯 그윽이 살펴야할 백성들, 국경을 맞댄 모든 주변 나라의 국민들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큰 나라 다스림에 대한 말씀에 작은 생선 굽기의 비유를 들이댄 것은 그야말로 혁신적이고 끌밋하다. 쉽게 타기 쉬워서 불 조절을 잘 가늠해야 하고 그 작은 생선의 살이 금방 헤집어져 흩어질 수 있으니 더욱 조심히 뒤집어 익히듯이 조심을 담지해야 함을 이른 듯하다. 
 이는 이웃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대함에 있어서도 준용할 수 있는 국가의 외교적 품격이자 너름새여야 하지 않은가. 사악한 신통력과 현대 무력으로 이웃나라를 병합하거나 흡수하고 정벌하려는 야심은 국가의 자세가 아니라 장차 몰락의 형국을 그러안는 자충수에 불과하다. 이러니 큰 나라가 그 내치(內治)를 할 때나 혹은 이웃나라와 외교의 외치(外治)를 할 때도 그 본향은 선린(善隣)과 덕성스러움을 드리우는 일이지 싶다.  
 작금의 지구촌 국가 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갈등의 국면을 타개하는 것은 바로 오래된 처음인 듯 서로 새뜻한 국가 간의 인사를 새로 하는 것이다. 국민들 간의 이웃된 선린을 다시 돈독하게 함이다. 오래된 이웃을 파기해가는 오늘의 갈등과 반목의 정서를 깨치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함을 일깨워 스스로 똥기고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듯 선린의 도(道)와 그 덕성을 들어앉치는 일이다. 무릇 세계 시민들이 아무런 국경의 의미도 없는 ‘광야’에 홀로 된 각자들로 모여 다솜을 톺아가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제61장 第六十一章 處下 (謙德)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天下之牝 [天下之交] 
牝常 
以靜勝牡 
以靜爲下*1 
故 
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 
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所欲 
大者宜爲下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고
천하의 암컷과 같다
천하의 모든 것이 모여들어 섞이는 곳이다
암컷은 항상
고요하게 있음으로써 수컷을 이기고
고요하게 있음으로써 아래가 된다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하하면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겸하하면 큰 나라를 얻는다
따라서
어떤 것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포용하여) 얻고
어떤 것은 자신을 낮춰서 (굽히고 들어가) 얻는다
대국은 (소국을) 아울러 사람을 양성하고자 할 뿐이고
소국은 (대국 밑으로) 들어가 섬기(며 의존하)고자 할 뿐이다
무릇 이 둘이 각자 바라는 바를 얻으려면
큰 쪽이 마땅히 아래에 있어야 한다


[補註]
 * 1 : [백서본] (암컷은 늘) 고요함(안정)을 위하여 (고요하기 때문에) 으레 아래가 된다 (아래에 처한다).(爲其靜也 故宜爲下)
 * 2 : [백서본甲]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하하면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겸하하면 큰 나라에 받아들여진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자신을 낮춰서 (작은나라를) 얻고 어떤 것은 자신을 낮춰서 (큰나라에) 받아들여진다. (大邦以下小邦 則取小邦 小邦以下大邦 則取於大邦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
[詩說]

상 따위를 받는다는 건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다.
상대적으로 제 일을 한 것인데
거짓 겸손으로 나서서 나대다니.
사양하거나 환원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진정한 이름은 아니다.
아무리 헤아려보아도
스님이나 신부가 불쑥 나서서
상이나 받는다는 건 이상한 노릇.
그렇기에 나도 다 치우고
‘스님도 시인도’아닌
‘스치는 인간’‘스인’이 된 것이다.
최소한의 위안으로 쓸 뿐인 시.
정명주의나 무명주의는 같은 것.
식자우환의 소동파나
‘외눈박이 신사’를 그린 고흐도
어쩔 수 없이 동사무소에
등재된 이름일 뿐,
섞어 먹어 한 몸이 된
한 몸의 되풀이가 온 몸인 것을.

-마종하, 일러 이름-수상 사양 소감」


 여기에 이 시인에 이르러 드디어 세간에 난무하는 온갖 문학상 비롯한 수상의 욕심들이 덧없어지고 몽매함을 조금 트이게 된다 할까. 나를 비롯하여 덧없이 채우려 하고 자꾸 더 보태고자 하는 어리석음들이 이 마종하의 시편에 이르러 한끝 무색해지면 좋으리라. 잠시라도 쉬는 마음이 들고 고요를 한 수 배우면 어떨까 싶으리라. 그런 차제라면 이제껏 빼앗듯이 가지려는 맘도 이 즈음에 이르러는 짐짓 물리고 누군가에게 돌리고 싶은 마음도 잠시나마 새뜻하니 들리라. 겸양과 양보가 잠시 잠깐이더라도 이 마음이 자꾸 나중에라도 불편한 종기처럼 돋아서 나를 그리고 당신을 불편하게 해도 좋으리라.
 내가 더 가지느니 네가 더 가지는 게 이번에는 좋겠구나, 라는 맘들이 흔전만전해지는 세상은 요원하기만 한 걸까. 그래도 그걸 그리는 맘조차 없어져서는 안 되리라. 
 이것이 어찌 한 사람이나 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의 차원에만 국한한 것일까. 나라와 나라 사이의 갖은 이해득실과 강퍅한 셈평의 악다구니가 중뿔이 나는 세계사의 현황에 있어서 더 종요로운 국면이 아닐까 싶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겸하하면 작은 나라를 얻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겸하하면 큰 나라를 얻는다[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는 라오쯔의 언설은 하나의 이상론(理想論)에 불과한 것일까. 근현대의 세계사적 그리고 외교사적 경과를 관찰해 보면 그런 노담(老聃)의 말은 왜 자꾸 비켜나거나 정반대의 파국적 상황으로 종료되곤 하는 것일까. 그것은 라오쯔의 예언을 인간사나 국제사가 그 본질이나 본연의 취지대로 따르지 않고 엇나갔기에 이른 파국일 따름이다. 그것은 개인이나 국가나 선린(善隣)의 본바탕을 소홀히 여기고 당장의 위정자의 욕망에만 초점을 맞추기에 이른 상황의 도출이며 서로 ‘사양하거나 환원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진정한 이름은 아니’게 되는 허명의 세상을 드날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시인이든 ‘스님이든 스님도 시인도 아닌 ‘스치는 인간’ ‘스인’이 된 것’이라는 시인의 자조 섞인 전언은 본질로부터 자꾸 벗어나 쟁취에만 몰두하는 오늘 우리의 자화상과도 겹치는 바가 없지 않다. 
 대국과 소국이 서로 상생하고 서로 누구도 패하거나 주눅 들지 않고 화기애애하게 자라날 수 있는 배경은 ‘무릇 이 둘이 각자 바라는 바를 얻으려면/큰 쪽이 마땅히 아래에 있어야 함[夫兩者各得所欲 大者宜爲下]’이라는 대전제가 종요롭다. 그러나 지구촌 세상의 국가들이 과연 그러한가. 그러기는 여간 쉽지가 않고 더더욱 패권주의적인 힘의 논리만 앞세우는 경향이 강화되는 지경을 우리는 여러 시기에 목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섞어 먹어 한 몸이 된/한 몸의 되풀이가 온 몸인 것’을 지구촌 나라들과 국민들이 서로 은연중에 대기의 바람과 햇살처럼 구름 그림자와 눈비처럼 온몸과 온몸으로 맞아 체득하려 해야 한다. 그런 모든 살아있는 지구촌의 몸과 맘들이 체득한 바의 진정성을 우리는 곧 앎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 나라와 국민을 압제와 핍박과 복속으로 치닫지 않고 서로 똑같은 대자연의 숨탄것으로 동등함을 너나들이 갈마드는 속종을 지니는 것, 여기에 도덕의 앎이 핍진해지는 자연이다.  





제62장 第六十二章 道注 (爲道)


道者 萬物之奧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1 
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人 
人之不善 何棄之有 
故立天子 置三公 
雖有拱璧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古之所以貴此道者何 
不曰 以求得 有罪以免耶*2 
故爲天下貴

도는 만물의 깊숙한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사람의 보배요
선하지 않은 사람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아름다운 말로 장사를 할 수 있고
(존귀하지 않은 사람도) 고상한 행위로 남을 업신여길 수 있다
사람이 선하지 않다고 해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천자를 세우고 삼공을 둘 때
비록 사두마차와 그에 앞서 보내는 큰 구슬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보다 보배로운) 이 도를 (정중하게) 바치는 것이 낫다
예로부터 이 도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구하는 것이 얻어지고 죄가 있어도 면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므로 (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補註]
 * 1 : [백서본乙] 도는 ~선하지 않은 사람도 (덮인 채, 가려진 채) 지니고 있는 것이다. (不善人之所葆也) ; 附言; 葆=藏 or 蔽, ※ [옛;古字] 葆=保 or 寶
 - 노자81장 : 미더운 (거짓 없이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않다.
 - 노자27장 :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하므로 버려지는 사람이 없다. ~본디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도우미이다. 그 스승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 도우미를 아끼지 않는다면 비록 지혜롭다고 해도 크게 미혹해질 것이다.
 - 노자49장 : 나는 선한 사람에게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하니 (나는) 선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 노자79장 : 하늘의 도는 친함(사사로이 친애함)이 없다 . 항상 선한 사람에게 베푼다 (항상 선한 사람 편에 선다).
 * 2 : [백서본] 구하면 얻고 죄가 있어도 (그 죄를) 면한다고 하지 않던가? (不胃求以得, 有罪以免與?)
-----------------------------------------------------------------------------
[詩說]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정록, 의자」


  항차 내어줌이 있는 자가 가장 귀한 자로 후일 자리매김이 되지 않는가. 그 내어줌이란 무엇인가. 바로 의지가지가 되어주고 소소하고 미미하지만 소슬하게 베풂이 있는 자의 덕성스러움이 아닌가 싶다. 옛말에 흔히 콩 한 톨을 나눠먹는다 함은 그 뱃구레를 채우기보다는 그 마음의 속종을 늡늡하게 함이지 싶다. 
 라오쯔의 말대로 ‘사람이 선하지 않다고 해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人之不善 何棄之有]’라는 말 속에 수천 년을 넘나드는 인간사(人間史)를 무연히 되돌아보게 됨이 서린다. 정말 버리고 싶은 사람이 우리들 삶의 연대기 속에서 왜 한번이라도 없었겠는가, 정말 징치하고 싶은 사연과 악행들로 인해 떨쳐버리고 싶은 인연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살리는 그윽한 방편 속에 자기 하나만이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를 담아내야 살 수 있다. 그것은 종내 자기의 일부를 적막하게라도 내어주는 보시의 일환이며 또한 이정록의 표현대로 저마다 자기 식대로의 ‘좋은 의자를 내줘야지’하는 선의(善意, goodwill)에 기반하는 속종이지 싶다. 
 이렇듯 자신의 욕망의 일부를 잠시라도 비워 누군가에 내어주고자 하는 그 여백이 곧 의자의 발현이다. 무엇이나 내어주고자 하는 그 맘이 물질의 형태로 환원되고 변신(變身)하는 자리매김 속에서는 기꺼움이 자리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속에서는 저주와 뜻 모를 괴물의 괴로움과 황당함이 서려 있지만 일상 속에 내재하는 누군가의 고통에게 한 자리 쉼터를 드리우고자 할 때는 의자는 어디에서나 번져나와 하나의 앉을깨가 되어준다. 이걸 의자나 앉을깨의 도(道)라 하면 안 될까. 누군가의 쉼터이자 휴식의 자리가 되어주는 그 덕성의 사물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의자라면 의자라고 하는 고정된 관념의 것들만 의자일 수는 없고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호박에 똬리도 받쳐’주는 그 앉을깨도 의자의 너름새라 부를 수 있겠다. 이정록의 이런 너름새 있는 시선을 통해 우리는 의자라는 다양한 품새의 덕성스러움을 우리 안에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의자나 앉을깨들은 참 신기하기도 하다. 이것들은 모두다 누군가의 다리쉼과 허리쉼을 위한 것들인데 모두 비워서 내줘야 하는 기물이기 때문이다. 가득 채워서는 내주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니 비워진 상태의 구조물로 만들어지고 그런 구조물의 비움을 통해 누군가 어떤 숨탄것들이 다가와 앉아 끌밋한 휴식을 취하게 된다. 이런 의자 등속을 비롯한 앉을깨들을 우리는 도(道)의 기물이고 덕성스러움의 구조라 부르면 안될까.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의자며 앉을깨를 통해 어느 비루한 사람도 없이 거기에 앉혀 쉬게 함으로써 그를 한순간이나마 가장 고귀한 사람이며 숨탄것이 되게 하고 또 그런 기물(器物)인 의자를 통해 우리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는 것[故爲天下貴]’이 아니겠는가. 짐짓 그런 의자 같은 앉을깨라는 구조와 형식을 띤 ‘도와 더불어’ 그리고 ‘덕성스레 내어줌’을 통해서 말이다. (다음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