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 에세이
  • 연재 에세이
  • 연재 에세이
  • HOME > 에세이 > 연재 에세이

2022년 10월호 Vol.15 - 유종인


[시로 읽는 노자 이야기]

 

노자(老子)와 시마(詩魔) 4

 

제31장 第三十一章 貴左 (偃武)

 

夫佳兵者[夫兵者] 不祥之器 *1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兵者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而美之者 是樂殺人 

夫樂殺人者 則不可以得志於天下矣 

吉事尚左 凶事尚右[喪事上右] 

偏將軍居左 上將軍居右 

言以喪禮處之 [言以喪禮居之]

殺人之衆 以悲哀泣之 

戰勝以喪禮處之 


무릇 병기(군대)는 상서롭지 못한 연장이다

세상사람 모두가 그것을 싫어하므로

도를 지닌 사람은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군자는 평상시에 왼쪽을 높이지만

병기를 쓸 때(전시)에는 오른쪽을 높인다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연장이다

군자의 연장이 아니다

마지 못해 어쩔 수 없을 때 쓰는 연장이다

욕심 없이 담담하게 쓰는 것이 최상이고

승리해도 찬미하지 않아야 한다

(전승을) 찬미한다면 이는 살인을 즐기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 뜻을 얻을 수 없다

길사에는 왼쪽을 높이고 상사에는 오른쪽을 높인다

버금 장수가 왼쪽에 으뜸 장수가 오른쪽에 자리하는 것은

(전쟁을 상사로 보고) 상례에 따라 자리함을 말해 준다

많은 사람을 죽이니 슬픔으로 눈물짓고

싸움에서 이겨도 상례로 처리한다


 

[補註]

*1~: [백서본] 무릇 병기(군대)는 상서롭지 못한 기구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언제나, 누구라도) 그것을 싫어할 것이므로 욕심(바라며 구하는 것)이 있는 자라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그러한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夫兵者 不祥之器也 物或惡之 故有欲者弗居)

- 노자30장: 전과를 거두되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한다.

- 노자69장: 무기를 들고 맞싸울 때 전력이 서로 같으면 (싸우게 됨을) 슬퍼하는 이(방어하는 쪽)가 이긴다.

 

[詩說]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집정관 안토니우스를 맞아 꽃잎침대를 꾸몄다

백만 송이의 장미 꽃향기가 지중해를 건너

로마의 원로원 테라스를 뒤흔들었다

 

중무장 러시아 군대가 탱크를 몰고 키이우에 침입하자

저녁밥 굶은 우크라이나의 양민들은

날밤 새워가며 무엇을

준비하는가

 

깡 소주 대신에 몰로토프 칵테일 한 잔!

 

술안주로 뭐 좀 없느냐고?

멍청한 침략군이여 옜다, 볶지 않은 해바라기 씨앗

주둥이 가득 실컷 물고 꺼져라!

 

그대들 주검 위에 싹 튼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가

꽃 피어 환하게

전 세계의 교차로마다

인광corpse candle으로 블링블링

햇빛 터트릴 테니!


*몰로토프 칵테일Molotov Cocktail : 화염병. 구소련의 외무장관 몰로토프의 실언에서 유래. 러시아의 장갑차에 몰로토프 칵테일(화염병)을 한방 먹이면, 술 취한 탱크가 비실비실 화염에 불타버린다고 함,


-김영찬, 「몰로토프 칵테일Molotov Cocktail」 


반전(反戰, antiwar idea)은 지구상 모든 거개의 시인이 갖는 근원적인 저항의 알심이지 싶다. 즉물적인 생명의 반응이고 복무하듯 지켜야 할 시의 가장 근원적인 이타심이자 자구책이다. 이것은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본능적인 생명의 감각이며 갈등의 최종 잔혹극인 전쟁의 경과나 파국에 대한 터부시(taboo視)인 본능이다. 그럼에도 지구촌 숱한 역사에 전쟁의 유령은 참 자주 출몰하는 참을 수 없는 짐승이다. 마치 조급증에 걸린 인간의 역사가 목마름처럼 터뜨려 먹는 중독성 강한 사탄의 음식만 같다. 

김영찬의 침략 전쟁에 대한 시니컬하고 경쾌한 야유와 힐난(詰難)은 시인의 나름 유쾌한 복수극을 일구어낸다. 침략군에 대한 나름 유니크한 시적 활극이자 맞짱이다. 측면지원을 가능하게 하는 게릴라의 면모가 희희낙락하다. 그야말로 ‘깡 소주 대신에 몰로토프 칵테일 한 잔!’의 만만찮은 폭발력이다. 이 사제 화염병을 적의 탱크의 가슴골에 집어넣으면 술 취한 것마냥 비실비실 화염에 휩싸인다고 한다. 

침략을 지시한 위정자보다 침략에 동원된 자국의 병사들의 멍한 눈망울을 볼 때면 아연 이 전쟁이 일구어낼 것이 무엇인가 되묻게 된다. 탐욕의 갈고리를 부러뜨릴 수 없는 지도자는 그 권력을 야수의 폭정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그 발톱과 이빨을 들이댄다. 그럴 듯한 명분이란 때론 자신도 공명하지 않는 허울일 따름이다. 라오쯔가 본장에서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 뜻을 얻을 수 없다[夫樂殺人者 則不可以得志於天下矣]’는 간명하고 명쾌한 전언을 건너뛸 수 없다. 폭력과 죽음의 패권은 똑같이 그러한 피의 보복과 되풀이를 재생할 뿐이다. 악의 고리를 끊듯 악순환의 지속을 바위처럼 멈춰야 한다. 그리고 미련 없이 뒤돌아서야 한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시인의 마지막 복수의 해바라기 씨앗을 ‘주둥이 가득 실컷 물고 꺼져’버리게 될 침략자들이여. 항차 ‘그대들 주검 위에 싹 튼 우크라이나의 해바라기가’ 전쟁의 불모와 참화를 견디고 이겨내 ‘전 세계의 교차로마다/인광으로 블링블링/햇빛 터뜨릴’ 것이란 희망 섞인 전망을 환한 꽃 얼굴로 열어놓는다. 전쟁의 명분의 지평을 아무리 넓혀도 결국 하나의 죽음의 구덩이에 참혹하게 모아질 따름이다. 노담(老聃)은 ‘전쟁 싸움에 이겨도 (어느 편이든) 상례의 지극한 예로 대한다[戰勝以喪禮處之]’고 대인배의 천하지도(天下之道)를 펼치지만, 본의는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 전쟁이니 애초에 없는 싸움이면 족한 것이다. 지극한 예(禮)로 상례를 치를 것도 없이 전쟁을 경원시하는 위정자가 돋아나는 것이 더 종요롭다.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두루미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

기러기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폭탄에

도요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

굴뚝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포탄에

뻐꾸기를 발사합니다 모든 포탄에

비둘기를 발사합니다 정치꾼들한테

왜가리를 발사합니다 군사모험주의자들한테

뜸부기를 발사합니다 제국주의자들한테

까마귀를 발사합니다 승리 중독자들한테

발사합니다 먹황새 물오리 때까치 가마우지....


하여간 새들을 발사합니다 그 모오든 死神들한테


-정현종, 요격시 


세상 싸우기 전에 허물어져 서로 쌓아올려 줄 것이 없나 둘러보라. 천년 된 것을 무너뜨리긴 쉬워도 복기하듯 그걸 다시 쌓기는 어려워라. 세상의 모든 건축물과 숨탄 것은 전쟁이 해코지할 몫이 아니라 순연한 자연에 갈마든 풍상(風霜)이 유순하게 늙히게 놔둘 마련이다.  

요격(邀擊)이란 말 그대로 공격하여 날아오는 것을 되받아쳐 격퇴한다는 뜻이다. 시인에게 현실적인 물리력이란 요원하고 미약하니 그 언어의 저항이 먼저 요격의 빌미요 시의 육성은 전장의 미사일과는 또 다른 형태의 언어의 미사일을 상상한다. 발사의 주체와 요격의 목표는 매 행(行)마다 격렬하게 상충한다. 이러한 상충의 관계는 곧 시인의 평화와 전쟁광의 분쟁과 폭력이 마주하기 때문이다. 시편에서 모든 전장의 무기들에게 여러 종류의 새를 맞대응하듯 ‘쏘아올’리거나 ‘발사(發射)’하는 것은 그것이 그만치 전쟁의 폐해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도요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일견 불가능한 현실과 무기력한 대응의 현실을 언뜻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요격(邀擊)의 시적 발흥은 그대로 전쟁에 대한 세계 시민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고스란한 저항이자 화해를 위한 쟁투로 볼 수도 있다. 상상과 관념의 의식이라도 그것이 깊고 공고해지면 결국 현실 속에 반영되는 실제의 효과가 꼭지를 드러낼 마련이다.

라오쯔가 말한 전쟁과 그 전장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니 슬픔으로 눈물짓고/ 싸움에서 이겨도 상례로 처리한다[殺人之衆 以悲哀泣之 戰勝以喪禮處之]’한들 분쟁이 없는 이웃 같은 국경 마을의 황량한 한가함만 하랴. 그러니 다시 노담(老聃)이 그의 도덕경 전반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파하는 무위(無爲)로 분란을 잠재우기만 해도 당장 한낮의 졸음을 소나무 밑의 낮잠으로 데려올 수 있다. 할일 없는 사람이 전쟁터에 가야한다. 거기서 더 할 일 없는 병사로 전쟁에 염증과 주니가 들려야 한다. 피아(彼我) 가릴 거 없이 굳이 싸울 일 없는 순둥이들이 되어야 한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 일은 거개가 죽는 일밖에 없으니 그럴 일은 제물에 사라져야 한다. 서로 적군과 아군이 되어 상대방의 목숨을 세상의 풍경 속에서 지워버리는 일은 무참하고 어리석다. 이 당영한 일로 전쟁은 시작하자마자 파산이 나야 한다. 삶을 살리는 일도 부족한 판에 삶 속에서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후벼파내어 궂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불특정 다수의 상대 적을 향한 폭탄과 살생의 무기들은 지구상에서 모두 요격되어야 한다. 사람의 몸에 닿기 전에 모두 받아쳐져 공중폭발로 사라져야 한다. 아무 것도 이룩할 것이 없는 전쟁 곁에서 아이들과 엄마가 귀를 막고 울고 몸은 타들어가고 영혼은 일그러져 가는 일밖에 없는 전쟁은 아무리 생각해도 본전조차 찾을 길 없은 광기의 홀릭(holic)이다. 

전쟁의 무모함에 시적 상상의 무모함으로 대응하는 이 시는 한마디로 ‘하여간 새들을 발사합니다 그 모오든 사신(死神)들한테’ 건네는 서늘하고 유쾌한 시의 맞장이다. 결코 죽을 일밖에 없는 전장은 지구 땅별이 장수말벌에 쏘여 죽을 뚱 살 뚱한 겪는 부스럼 같은 시공간일 테니 말이다. 굳이 분쟁과 전쟁의 벌집을 쑤셔서 무엇하리. 아무리 주니가 들린 정신이라해도 전쟁은 미친 짓이다. 미치지 않았다 해도 미친 짓이니, 라오쯔 식으로 무위할 수 없다면 아예 전쟁을 치를 수 없이 쌍방이 무기력해도 좋으리라. 




제32장 第三十二章 知止 (聖德)

 

 

道常無名 *1~

天下莫能臣也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天地相合以降甘露 

民莫之令而自均 

始制有名 

名亦既有 *2~ 

夫亦將知止 

知止所以不殆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猶小谷之與江海] 


도는 항상 이름이 없지만 (이름도 없고 소박하고 작지만)

천하의 그 누구도 (도를) 신하로 삼지 못한다

임금(제후)이 이러한 도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손 오듯 찾아오고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하여 단 이슬을 (고루) 내리듯

백성은 명령 없이도 스스로 고르게 될 (균평해질) 것이다

마름질을 시작하면 (저마다) 이름을 갖게 된다

또한 이미 이름을 가졌으면

무릇 또한 장차 그칠 줄 알게 될 것이고

그칠 줄 알게 되면 위태롭지 않게 된다

도가 천하에 있음을 비유하자면 (강과 바다가 부르지 않아도)

작은 골짜기 물들이 (스스로)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

 


[補註]

- 노자34장: [백서본] 대도는 공과 일을 이루고도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 [왕필본] 대도는 공이 이루어져도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

*1: [죽간본] 도는 항상 이름이 없고 (갓 잘라낸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비록 아주 작지만[細] 천지(우주)도 (도를) 신하로 삼지 못한다.

[백서본] 도는 항상 이름이 없고 (갓 잘라낸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오직 작지만[小] 천하(의 그 누구)도 (도를) 신하로 삼지 못한다.

- 노자37장: 도는 늘 무위하지만 하지(이루지) 못함이 없다. 후왕이 만약 이러한 도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장차 저절로 자라날(화육될) 것이다.

- 노자35장: 아주 큰 형상 (대상)을 잡으면 천하가 그에게로 간다(모여든다). 그곳에 가면 해치는 이도 없고 편안하고 평화롭다(공평·균평하다).

*2 : [죽간본, 하상공본] 또한 이미 이름을 가졌으면 무릇 또한 그것(이름에 맞는 도리)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을 알게 되면 (그래서) 위태롭지 않으리라. (名亦既有 夫亦將知之 知之所以不殆)

- 노자44장 : 그칠 줄 알면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아 길이 오랠 수 있다.

- 노자28장 :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으면서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아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느슨해 보여도 잘 도모한다.

 

[詩說]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사랑의, 사랑의 속종인 상대를 ‘생각함’은 늘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니 이 사소함의 위대함을 우리는 존재의 곁에서 존재를 위함이기 때문이다. 존재를 존재 그대로 혹은 존재 그 이상으로 옹립하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도(道)를 또한 이처럼 은애(隱愛)하듯 하고자 함이면 우리는 그 도(道)의 아우라(aura) 속에서 뭇 삼라만상과 더불어 크게 그르칠 것이 없다. 여기에 더하여 사소하고 미천한 것들을 그 본래의 고유한 성정을 북돋아 자신과 주변을 돋는 우뚝함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그러나 무엇을 바라는 대가가 따르지 않으며 그 자체로 자족하는 그 자체로도 오롯하고 끌밋하고 충분한 것이니, 오늘에 이르러 이러한 사랑이 가물어진 이유는 그것이 사랑보다 못한 사랑의 탈을 썼기 때문이 아닌가. 그럼에도 황동규는 본래적 사랑의 에스프리를 무량한 자연의 것과 겹쳐놓는다. 즉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바꾸어버린 데’ 온 정신이 온전히 끌려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이루어놓은 사랑이기 이전에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 속에 사랑은 지연(遲延)되듯 오히려 그 지구력과 항상성(恒常性)으로 상대 속에 나를 염원하는 바이다. 그대와 내가 ‘한없이 잇닿은’ 그 지속성을 가지는 가열찬 열도(熱度)는 늘 미완성인 듯 항구해지려 한다. 

그러나 사랑의 지속성은 그것이 무모함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속성에만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내가 서로 반응하고 교감하는 가운데 변전(變轉)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데도 나름 유연하고 그윽해져야 한다. 배신과 변절의 의미가 아니라 어쩌면 변화된 존재의 현황을 순응하듯 따라주는 것을 우리는 달리 ‘사랑도 언제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 휴지(休止)의 너름새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도(道)의 입장에서라면 ‘이미 이름을 가진 (삼라만상의 존재들) 것들이면/무릇 장차 그칠 줄 알게 될 것이고/(종내) 그칠 줄 알게 되면 위태롭지 않게 되는[ 名亦既有 夫亦將知止 知止所以不殆]’ 숙명적인 흐름을 스스로 똥기는 일이다. 

미령(靡寧)한 사랑을 우리는 사랑하고 있음이지 싶다. 그런 사랑의 자연을 우리는 포기한 것이다 말할 수만은 없다.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하여 단 이슬을 내리듯[天地相合以降甘露]’ 우리의 세속적 사랑이 덧없는 것일지라도 그 속에 조화의 그늘과 꽃핌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사랑은 사랑 속에서 사랑으로 연명하고 사랑이 그르쳐지는 순간에 더없는 사랑의 속종과 그 덧없음을 자연의 흐름에 의탁한다 해야하지 않는가. 


 



제33장 第三十三章 盡己 (辯德)

 


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強

知足者富

強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1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나를 아는 사람은 밝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고

나를 이기는 사람은 굳세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넉넉하다

굳세게 가는 사람은 뜻이 있다

그 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가는 것이고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다



[補註]

*1: [백서본]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다. (死而不忘者壽也)

[왕필본]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 (死而不亡者壽) ; 附言; 亡=忘,

[왕필주] (자신은) 죽더라도 (도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래 산다.


[詩說]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 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성복, 서시(序詩)


무엇을 정처(定處)로 삼을 것인가. 우리네 인생에서 수억 금의 자본을 정처로 삼아 호위호식을 정처로 삼을 것인가, 웬만한 사람들은 입이 조금 벌어지고 고개가 사뭇 숙여지는 명예와 권력을 나름 인생의 정처로 삼을 것인가. 그런 것이 과연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는가. 그런 것들로 소위 호강하는 일의 당연지사를 탓하지 말라 목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으로 눈에 힘을 줄 것인가.

그러나 여기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올곧게 알아보는 일의 그 종요로움이란 새삼 사랑의 입문(入門)이요 언제까지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그 애심의 요체이지 싶다. 늘 상대방의 안정됨과 위태로움과 고요함과 혼란을 바라봐주는 묵묵한 나무처럼 그윽한 일이 어디 있으랴.

자기 자신의 정처 없음을 아는 것, 여기엔 세상에 흔히 말하는 영민하고 줏대 있어 보이고 이재에 밝은 것과는 사뭇 결이 다른 현자의 으늑함 같은 것이 서렸다. 시인이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그 너름새 속에 방황과 혼돈과 덧없음의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안기어 오는 역리(逆理)를 모른다 할 수 없다.  

이성복이 시에서 거듭 ‘나는 정처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제껏 우리가 누린 세속적 정처 있음을 그지없이 거둬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네 숨탄것들의 정처(定處)를 새삼 다시 기꺼이 고민하게 되고 그 정체의 속성과 정체와 정의를 다시 세워야 함을 또 즐거이 고민하게 된다. 이러니 시인이 말하는 정처 없음과 그 덧없음은 그대로 실연의 상대하고만 결부된 것이 아닌 좀 더 그 너름새를 넓혀갈 여지가 자자하다. 우리의 정처를 장차 어디로 그리고 무엇으로 더불어 어떤 영혼에 결부시킬 것인가에 그 속종이 웅숭깊어져 우주적인 시야를 조금 틔우게 된다. 

그대가 나를 알아봄이 없을 때는 당연히 그러하지만 어느 순간 혹은 궁극적으로 내가 나를 알아봄이 없다 여길 때, 우리는 그야말로 정처 없는 인생인 것이다. 내가 나를 알아봄이 협량한 자아에 한정된 것만이 아닌 나를 통해 매개되고 연결된 모든 관계와 사물과 숨탄것과 크고 작은 개인사와 소우주를 포옹하듯 안아봄이 아닐까. 이런 계제가 되니 나와 당신과 우주를 알아봄과 안아봄은 그 인식이 똥기는 바의 열림과 그 확장된 깨침의 순간을 몸으로 안아보는 듯한 실물감이 서로 너나들이 하는 순간이다. 이런 알아보듯 깨우침과 안아보는 포용의 순간이 영육간의 통섭(通攝)이지 싶다. 이런 알아봄과 안아봄의 뫔(몸+맘)의 순간이 황홀이다. 그런 황홀의 타이밍(timing)과 스페이스(space)의 랑데부를 잊지 않고 그렇게 똥긴 앎과 푼푼한 안음의 ‘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가는 것[不失其所者久]’이라 라오쯔는 말한다. 그 알아봄의 내용과 그 안아봄의 형식은 내외가 따로 있는 표리부동이 아니니 그 나와 당신의 운명은 서로를 이루어주려는 그 다솜에 있지 싶다. 헤어짐과 만남의 어느 한곳에 의미를 꽂지 않으니 그것은 사랑과 욕망과 상실 어디에도 크게 상심하지 않음이 그 속종이리라. 그리하여 삶은 그 잃고 얻음에 휘둘리지만 않고 굳세게 가는 의지의 한편에 소소함에도 만족할 줄 아는 대범함이 한 그릇을 지닌 숨탄것으로 담고 내주어야 하리라.  

그렇듯 세상 큰 그릇인 도의 그릇[器皿]으로 빚어지자면 어떤 번뇌도 받자하니 품어봄즉하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의 앎은 나의 빈 자리를 담아내고 있으니 그것이 곧 당신의 알아봄으로 내가 다 채워지는 것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당신이 나를 알아볼 때까지’ 정처 없음을 겪어야 한다. 이 정처 없음의 확장 속에서 우리는 더 큰 정처 없음의 소우주와 대우주 속으로 편입되는 즐거운 혼돈과 가만한 새벽빛의 깨우침을 동요 받고 선사 받는다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시인이 ‘정처 없습니다’라고 했을 때의 상실은 그대로 무한한 생성의 혼돈으로 돈후해진다. 그러함에 도는 나와 당신과 그밖에 것을 몰라보지 않으나 굳이 일러 손짓하고 알아보지만 않을 따름이다.

나를 돌아보자면, 그간 가난한 정처여, 정처들이여 이제 새 정처의 후문을 들었는가. 새 정처의 혼돈스런 부름을 기꺼이 돋아내고 있는 현황인가. 


 



제34장 第三十四章 成大 (任成)


 

大道汎兮

其可左右 

萬物恃之而生而不辭

功成不名有 

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以其終不自爲大 *1

故能成其大 


큰 도는 (넘쳐 흐르는 물처럼) 두루 퍼진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디에나 갈 수 있다

만물은 이에 의지하여 살지만 (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이름을 가지지 않는다

(도는) 만물을 입히고 기르지만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니

항상 욕심(바람)이 없어 작다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만물이 그에게 돌아가지만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니

(도는) 크다고 이름 지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성인도) 끝내 스스로 크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그렇게 크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補註]

- 노자25장: 나는 (아직)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자를 지어 도라고 하고 억지로 이름 지어 크다고 한다.

- 노자63장: 천하의 큰 일도 반드시 작은 데서 일어난다. 이에 따라 성인은 끝까지 (스스로) 크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그렇게 크게 이룰 수 있다.

*1: [백서본] 그러므로 성인이 크게 이룰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크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게 이룰 수 있다. ( 是以聖人之能成大也,以其不爲大也,故能成大。)

 

[詩說]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이육사 청포도


열어놓은 춤사위처럼 그러나 가만하고 고요한 숨결로서만 우리의 바람이 아주 먼데 그리고 아주 가까운데 더불어 기다림을 놓고 있다면 때로 삶이 살아있는 것같다. 그 설렘이 우리 가슴에 그리고 거기에 잇대어 우리의 감각과 정신에 부려놓는 존재감은 지금의 삶을 영원의 한 벽면에 자꾸 여린 손톱 끝으로라도 새겨놓고 싶게 만든다. 그렇듯 나와 당신, 그리고 그 모두를 그려내고 길러내는 바탕이 있어야겠다. 


상대가 보기엔 소소하고 미미한 것이라도 내 마주하여 그리고 더불어 내어줄 것이 있다는 그 가만한 생각의 종지가 나는 스스로 미쁘다. 

청마(靑馬)선생의 시편은 그래서 한없이 두려움 속에 생활이라는 누대(樓臺) 위에 큰 기쁨이라는 듬쑥한 북을 올려놓은 듯하다. 더불어 ‘고달픈 몸으로/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던 그이를 우리는 시대의 변이에 따라 달리 저마다 맞이해도 두동지거나 서먹할 것이 없다. 그이를 위해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힌 포도를 대접하는 건 그냥 과일을 대접하는데 그치지 않으니 그 또한 남모르는 큰 견지가 서렸다 해야하지 않는가. 우리는 모두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은 너나들이 속에 서로를 알아가고 그 맘을 알아가고 그 몸을 지닌 ‘만물을 입히고 기르지만 그 주인노릇을 물리는[衣養萬物而不爲主]’ 처지로서 사랑의 도(道)는 그리고 도의 사랑은 헌걸차고 도도록하다. 



이계호(李繼祜), 「포도도」, 17세기, 비단에 먹, 각 121.5×36.4cm, 국립중앙박물관


이계호의 포도그림 병풍은 화폭 가득 온전히 포도와 포도잎과 포도넝쿨의 판타지이자 퍼포먼스이다. 까만 농묵(濃墨)의 포도알과 농도를 조금씩 달리하는 담묵(淡墨)의 포도잎과 줄기는 온통 화면을 휘달리는 어떤 짐승의 궤적처럼 활달하기 그지없다. 포도넝쿨은 한자로 만대(蔓帶)라고 하는데 만대(萬代)와 동음이의어다. 즉 포도넝쿨은 다산의 상징인 포도송이와 더불어 자손이 끊이지 않고 번창하라는 장생(長生)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나 인물의 장수도 중요하지만 유교사회에서는 그 집안의 정체성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대대손손(代代孫孫)의 목숨의 대물림도 매우 종요로운 것이다. 포도잎과 포도넝쿨이 조금 과장되게 그려진 이유는 그런 축원의 사의(寫意)가 배어든 결과일 듯 싶다.   


용의 수염 구불구불 바람마저 움직이고

영롱한 주실은 이슬맞아 더 곱구나.

큰 잎은 농음하여 더욱 사랑스러웁고

날이 개일 때나 비올 때나 무더울 때나 다 좋구나.

( 叫髥屈曲迎風動  珠實玲瓏浥露姸


  大葉濃陰尤可愛  宜晴宜雨又炎天)


김천두가 쓴 <포도(葡萄)>라는 한시는 그런 휴옹(休翁) 이계호의 활달한 기운이 감도는 묵포도의 정취를 아로새기는데 보탬이 된다. ‘용의 수염’은 구불구불 무언가를 휘어감아 뻗어나가려는 포도의 가지 넝쿨이라 해도 좋으리라. 비유가 화려하고 큰 것은 그만큼 의미부여의 의도가 여실하다. 

소위 몰골법(沒骨法)을 바탕으로 농담(濃淡)을 잘 갈마들어 생기있고 입체감을 잘 살린 포도넝쿨은 죽음의 그늘을 휘감아 뛰어넘는 약동하는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번식의 도도함을 보여주는 그 활기(活氣) 속에 인간은 마치 영원의 자식으로 포도넝쿨을 대대손손 뻗어갈 요량이다. 뻗고 맺히고 또 뻗어서 죽음이 헤식어 놓은 목숨의 바탕을 이어갈 요량이다. 까맣고 윤기나는 포도송이를 따먹고 후 포도씨를 내뱉은 척박한 땅에서도 포도의 새순은 자라 연둣빛 넝쿨을 뻗을 것이다.

이렇게 자손만대의 번영과 창성을 기원하는 포도의 의미나 상징처럼 인간은 인간을 낳고 길러내고 북돋운다. 이런 것은 비단 인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계의 숨탄것들 짐승과 식물이 두동지지 않으니 이 길러냄의 터전은 그지없는 자연이다. 잘 길러내고도 주인 노릇이 없는 자연의 도(道)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실의에 빠지거나 심신이 병약해졌을 때 특히 그 의지처(依支處)가 된다. 자연과 그 도가 만물을 오롯이 잘 낳고 온갖 결실을 안받침하여 길러내고도 거기에 주인노릇과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 품에 깃들기를 바라고 거기서 도락(道樂)을 열어간다. 무얼 크게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스스로 똥기는 바대로 기쁨의 여생을 길러내는 것도 자연이니 그 대가가 없음으로 선생 중의 선생이 자연이지 싶다.  





제35장 第三十五章 大象 (仁德)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大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故道之出言也曰]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用之不可旣] *1 


아주 큰 형상(대상)을 잡으면

천하(만민)가 그에게로 간다 (모여든다)

(그곳에) 모여들어서도 서로 해치지 않고 편안하고 평화롭다

음악과 음식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멈추게 한다

(원래) 도는 입 밖에 내어 말해도

담백하여 아무런 맛이 없다

보아도 볼만한 것이 못되(어 보이)고

들어도 들을 만한 것이 못되(어 보이)지만

그 쓰임은 끝이 없다



[補註]

- 노자41장: 아주 큰 형상(대상)은 형체가 없다 (大象無形), 하늘 모습은 형체가 없다 (天象亡形)

- 노자61장: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다. ~ 천하의 모든 것이 모여들어 섞인다.

- 노자34장: 큰 도는 넘쳐 흘러 ~어디에나 벋친다 ~작다고도 이름지을 수 있고 ~크다고도 이름 지을 수 있다.

- 노자32장: 도는 항상 이름도 없고 (소박하고 작다) ~임금(제후)이 이러한 도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손 오듯 찾아오고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하여 단 이슬을 (고루) 내리듯 백성은 명령 없이도 스스로 고르게 될 (균평해질) 것이다. ~도가 천하에 있음을 비유하자면 (강과 바다가 부르지 않아도) 작은 골짜기 물들이 (스스로)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

- 노자12장: 다섯 가지 빛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다섯 가지 맛은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

- 노자63장: 맛이 없이 (무미로) 맛을 낸다.

- 노자6장: 아득하여 없는 듯 보이나 실재하며 그 쓰임(작용)은 끝이 없다 (소진되지 않는다).

* 1: [백서본] 아무리 써도 다할 수 없다. (用之不可旣) ; 부언; 旣=完了or 盡

 

[詩說]

1.

절정(絶頂)에 가까울수록 꽃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함경도(咸鏡道) 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팔월 한철엔 흩어진 성신(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산(山)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아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등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2.

암고란(巖古蘭), 환약((丸藥)같이 어여쁜 열매로 목을 축이고 살어 일어섰다.


3.

백화(白樺) 옆에서 백화(白樺)가 촉루(髑髏)가 되기까지 산다. 내가 죽어 백화(白樺)처럼 흴 것이 숨없지 않다.


4.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5.

바야흐로 해발(海拔) 육 천척(六千尺)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녀기고 산다. 말이 말끼리 소가 소끼리, 망아지가 어미소를 송아지가 어미말을 따르다가 이내 헤여진다.


6.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났다. 얼결에 산길 백리를 돌아 서귀포로 달아났다. 물도 마르기전에 어미를 여힌 송아지는 움매- 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登山客)을 보고도 마구 매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힌틔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7.

풍란(風蘭)이 풍기는 향기(香氣),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濟州) 회파람새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굴으는 소리, 먼 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솨-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측넌출 긔여간 흰돌바위 고부랑길로 나섰다. 문득 마조친 아롱점말이 피(避)하지 않는다.


8.

고비, 고사리, 더덕순 도라지꽃 취 삭갓나물 대풀 석용(石茸)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을 색이며 취하며 자며 한다. 백록담(白鹿潭) 조칠한 물을 그리여 산맥(山脈) 우에서 짓는 행렬(行列)이 구름보다 장엄(莊嚴)하다. 소나기 놋낫 맞으며 무지개에 말리우며 궁둥이에 꽃물 익여 붙인 채로 살이 붓는다.


9.

가재도 긔지 않는 백록담(白鹿潭) 푸른물에 하눌이 돈다. 불구(不具)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白鹿潭)은 흐리운다. 나의 얼골에 한나잘 포긴 백록담(白鹿潭)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정지용, 백록담(白鹿潭)


백록담이 있는 한라산은 영주산(瀛州山)이라고도 한다. 한라산의 뜻은 그 너름새가 자못 깊고 광활하다. 즉 한라의 한(漢)은 은하수를 뜻하니 은하계가 흩뿌려진 별과 성운들로 자자한 광대한 우주의 세계다. 나(拏)는 잡아당기다, 혹은 끌어잡는다는 당김[引]의 뜻이니 그 견인(牽引)의 의지를 드러낸 동사, 움직씨다. 이런 한라의 뜻을 모으면 은하수인 우주 저편을 탐라 섬의 우뚝한 산이 잡아당기는 것이니 그 의지나 욕망과 지향이 자못 스케일이 크다 할밖에 없다. 라오쯔의 말처럼 ‘큰 대상을 잡은[執大象]’ 형국이다. 잡히지 않은 듯한데 잡았다고 하니 그것은 이미 지향(志向)의 모션이요, 선망의 당대화이며 현실화이지 싶다.

호걸스럽고 호쾌한 호한(好漢)의 취지이기도 하다. 그런 한라산 우듬지 정상에서 보는 우주 저편의 은하수, 그 미리내를 온전히 다 담아내기는 벅찬 정도일 것이니 어느 날엔가 흔연히 올라볼 일이 종요롭다.

그런 한라산 백록담 어름을 답사한 듯한 정지용의 눈썰미는 미학적 구설이라기보다는 소소하고 장대한 것을 모두 아우르는 백록담 산간의 무한한 숨탄것들의 이모저모를 간과할 수 없음이다. 산마루를 오르다 문득 올려다 보면 한낮에도 은하수가 그윽이 굽어보고 있는 한라산 백록담, 자연의 어여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생동생동한 존재의 마련들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라오쯔가 ‘큰 형상을 잡으면/천하 만물이 그에게 간다[執大象 天下往]’는 언설이 은하수를 끌어당기듯 오롯한 탐라 한라산과 은하물[銀河水]의 관계의 형국으로 비겨도 크게 두동지지 않으리라. 필설로도 다 얘기할 수 없는 구구절절한 삼라만상의 축소판 같은 숨탄것들에 대한 눈여겨봄이야말로 시인된 당연한 감흥이자 그 끌밋하고 고아한 것들에 대한 시적 아회(雅會)의 소요록(逍遙錄) 같은 시편이다.

짐짓 백록담에 이르는 산마루 가까이 ‘바야흐로 해발(海拔) 육 천척(六千尺) 우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녀기고’ 사는 이 늡늡하고 자연스런 마소와 사람의 관계를 우리는 새삼 고칠 것이 없다. 

산정(山頂) 가까운 백록담 근동의 이런 자연물들의 구성진 그리고 여사여사한 생태를 말하려니 이것이 그대로 고스란한 도(道)의 여줄가리 같은 현황이지 싶다. 저 평탄하고 해발 고도가 낮은 곳에서의 생태와는 사뭇 달라진 숨탄것들의 품성이며 성정과 생태 등속이 이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에 이르도록 제 살림살이에 걸맞게 달라진 것을 또한 귀히 여긴다. 저 아랫녘의 현황과 이 윗녘의 살이가 어긋났다 여기지 않고 여기 있는 해발 고도의 산마루 등성의 요모조모 얼마간은 기이하고 기특한 숨탄것들의 낳고 살고 죽음이 한무리로 자연이 길러낸 진경(珍景)이라 다시 한 번 귀히 여긴다. 모두어 하나같이 사랑홉다 여긴다. 





제36장 第三十六章 微明


 

將欲歙之 必固(古)張之 *1~ 

將欲弱之 必固(古)強之 

將欲廢之 必固(古)興之 

將欲奪之 必固(古)與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強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장차 움츠러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펴 주어야 하고

장차 약화시키려 하면 먼저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장차 폐지하려 하려 하면 먼저 흥하게 해 주어야 한다.

장차 빼앗으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먼저 주어야 한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것을) 일러 미묘한 밝음(미명)이라 한다

부드럽고 여린 것이 억세고 굳센 것을 이긴다

물고기가 못에서 나와서는 안 된다

나라의 날카로운 도구로 대중들을 교화하려 하면 안 된다



[補註]

*1: [백서본] 장차 접게 하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폈음이고, 장차 약하게 하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강하게 했음이고, 장차 그를 떠나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친밀하게 사귀었음이고, 장차 빼앗으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주었음이다. (將欲翕之,必古張之;將欲弱之,必古強之;將欲去之,必古與之;將欲奪之,必古予之。)

- 노자22장: 굽으면 온전하고 휘면 곧아지고 패이면 채워지고 해지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오히려) 미혹해진다.

- 노자33장: 남을 아는 것은 지식·지혜[知,智]이고 나를 아는 것은 밝음[明]이다.

- 노자78장: 여린 것이 굳센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억센 것을 이긴다는 것을 하늘 아래 모르는 이 없으나 아무도 능히 행하지 못한다.

- 노자4장: 도는 못처럼 깊은 것이[淵兮] 마치 만물의 근원과 같다.

- 노자57장: 사람에게 이로운 기기가 많아지면 나라는 더욱 혼미해진다.

 

[詩說]

傷하는 것들 썩는

것들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쇠붙이에 녹이 스는 걸 보면

쇳덩이도 살아 있습니다


傷하는 것 썩는 것

은 운동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운동은

일종의 자리 바꿈, 위치의

변경, 힘의 이동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살아 있습니다 너무

생생하여 쉬이 절망 쪽으로 이동하는 희망과


십 년도 못 가서 발병 나는

民國의 이데올로기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 있으므로 썩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김치 같은 거 치즈 같은 거

금세 늙어 버리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싱싱한

육체를, 흔들리는 마음을


사랑합니다

위치 자주 바꾼 북쪽 국경을

수없이 傷한 우리나라 국경을 사랑

합니다 국경을 바꾼 세계사를

세계를 좌지우지한 인간들을, 상하기

쉬운 인간들의 생명을 사랑합니다 살아 있는

별인 지구를 물론 사랑합니다

지구 위의 생명을 사랑하고

사랑하므로 나는 오래오래 살아서

오래오래 썩고 싶습니다 술이 될 때까지


-이세룡, 썩기 위하여


죽은 나무는 안타까운 것이지만 그 썩음이 나무에게는 또 다른 삶의 후생을 예비하는 터전이다. 얼마간 살아있을 때도 그렇지만 나무가 본격적으로 썩기 시작하면 거기에 버섯이 돋기 시작한다. 나무의 껍질이라고 할 수 있는 수피(樹皮)가 들뜨듯 헐거워지고 어느 새 벌레에 의해 구멍이 나고 목질은 푸석푸석해지기도 한다. 더 시간이 흐르면 나무 목심과는 거의 간격이 생겨 어느 새 나무껍질로 동떨어질 때가 된다. 육탈이 오는 거다. 버섯은 부후(腐朽)해지기 시작한 초주검의 나무, 그 산송장의 나무에서 어찌 알았는가 알음알음으로 종균이 발아하기 시작한다. 일찍이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청평사(淸平寺)>라는 시에서 버섯을 ‘향균(香菌)’이라 했거니와 죽은 나무와 거기 덧붙어 기생하는 향기나는 버섯의 어울림이 묘하기만 하다. 

기꺼이 썩을 줄 아는 일은 그야말로 세속적인 몰락만을 한정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비가 있음이다. 또 다른 예비가 있음은 썩음 다음에 살림이 더불어 잇닿아 있음을 예견한다. 무엇이나 우리는 ‘傷(상)하는 것들 썩는/것들은 생명이 있기 때문’임을 때로 신령스럽게 마음에 붙잡아야 한다. 생명의 몰각만이 아니란 처지를 기꺼이 받자하듯 또 다른 흐름의 숨탄것으로 살아갈 전환을 생각에 붙잡아 두어야 한다. 

쉽지 않지만 어쩌면 아주 지난한 일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삶과 죽음과 영생과 소멸에 관해서 ‘일종의 자리 바꿈, 위치의 변경, 힘의 이동’임을 스스로 사유하는 정신에 심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변화 없는 영원이란 그 자체로 사멸이자 항구한 죽음일 수밖에 없음이다. 변화와 운동 속에 생명의 본령이 숨쉬고 ‘살아있는 별인 지구를 물론 사랑’하고 거기에 드넓고 깊게 감사할 때 우리는 모든 변화의 충격과 소멸의 징후 앞에서 소슬하니 조금은 다감해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생사의 여울목 앞에서 한 발을 내어 담근 채 소슬하니 초연(超然)해질 마련이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비로서 깨닫는 그것

우리는 늘 흔들리고 있음을.


-오규원, 만물은 흔들리면서


놀고 싶으면 먼저 일해야 하고, 사귀고 싶으면 먼저 공을 들여 관심과 애정을 담아주어야 한다. 제대로 맛있게 먹으려면 먼저 침이 담북 그 입 안에 고이게 해야 하고 잘 따르고 귀여움을 보이게 하려면 먹이를 잘 주고 절도있는 애정의 훈련을 해야 한다.애완(愛玩)에는 그만한 전제가 들어있다. 

오규원이 말하는 자연의 숨탄것들은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튼튼한 줄기를 얻’는 과정의 산물이며 그 흔들림은 ‘살아있는’ 존재의 ‘잎인 것을 증명’하는 불가피함이라 한다. 흔들림은 전적의 고통의 몫으로만 엮지 않으면 그 자체에 가만한 기꺼움도 스며있다 해야 않을까. 그러므로 생(生)이라는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과 ‘들판의 말똥’까지도 모두 흔들림을 받자하는 온전한 존재의 몫으로 종요롭다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흔들림이 지니는 냅뜰성을 우리가 스스로 똥길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피하지 마라/빈 들에 가서 비로서 깨닫는 그것’이 바로 만물과 하나되는 그리고 도(道) 속에 안거하듯 너나드는 전차가 되리라. 

라오쯔가 이 장에서 말하는 인과관계와도 같은 전제와 결과를 얻기 위한 언명(言命)을 설파한 것은 기계적인 논리를 펴고자 함만은 아닐 것이다. 궁극적으로 얻기 위한 것과 추구하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사전의 작업을 말하는 인과관계뿐만 아니라 삶에 패퇴한 자들에게 다시 활기를 도모할 마음자리 그 세상의 이법(理法)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도(道)가 지닌 희망의 여줄가리를 한 넝쿨 뻗어주는 것이 아닌가. 


 



제37장 第三十七章 无名 (爲政)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1 

無名之樸*2 

夫亦將無欲 

不欲以靜*3 

天下將自定 


도는 늘 함이 없이도 (무위로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임금(제후)이 이러한 도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자라날 (화육될) 것이다

만물이 자라나면서 욕심이 일어나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의 소박함으로 진정시킬 것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의 소박함으로 진정시키면

만물 또한 욕심 부리지 않게 될 것이다

욕심 부리지 않고 고요해지면

천하는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



[補註]

- 노자32장: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 갓 잘라낸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아주) 작지만 천하의 그 누구도 (천지도) 도를 신하로 삼지 못한다. ~후왕이 이러한 도 곧 무명의 소박함을 잘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스스로 손 오듯 찾아올 것이다.

- 노자57장: 성인이 말했다. 내가 하는 것이 없어도 (무위하여도) 백성이 스스로 자라나고 (화육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되고 ~내가 바라는 것이 없으니 (욕심이 없으니, 욕심내지 않고자 하니) 백성이 스스로 순박하게 되더라.

*1: [죽간본] 장차 이름 없는 통나무의 소박함으로 (그것을, 그들을) 바로잡을 것이다. (將正之以亡名之樸)

[백서본] 나는 장차 이름 없는 통나무의 소박함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울 것이다. (吾將闐之以無名之樸)

*2: [백서본] 이름 없는 통나무의 소박함으로 채우면 (闐之以無名之樸)

*3: [죽간본] 만족할 줄 알아서 고요해지면, (知足以靜)

- 노자33장: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넉넉하다.

- 노자46장: 그러므로 (밖에서 찾는 만족이 아닌)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서 만족하게 되는 것이 항구한 만족이다

 

[詩說]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들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눈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박용래, 울타리 안


왜 라오쯔는 소박함을 강조했을까. 앞선 이 물음은 그대로 욕망의 아수라 속에서 돋아 깨우친 투박한 회귀의 송가(頌歌)의 화답이다. 욕망이 너무 흥해지면 화(禍)가 미치므로 그걸 완충하고 본래의 기쁨으로 돌아가는 루틴이 바로 ‘통나무의(통나무같은) 소박함’으로 회귀하는 일이다. 여기서 라오쯔가 비유처럼 든 ‘통나무[樸]의 소박함’은 묘하게도 그 자체로 비유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실물적인 대안이기도 하다. 즉 육화(肉化)된 비유이자 실물화된 도(道)의 형상이며 구현된 사물이기도 하다. 비유와 실제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오묘한 실체적 비유 혹은 비유적 실체를 넘나드는 지경처럼 볼 수 없을까. 

박용래의 시에는 늘 질박하고 토속적인 향토 서정이 눈시울 촉촉하니 아른거린다. 이 향토성은 단순한 지역성이 아니라 어쩌면 소박함과 고졸한 심성의 시적 풍경화(風景化)의 원천이지 싶다. 이런 소박하고 질박한 아우라가 감도는 시공간은 사람을 크게 그르치지 않을 성 싶다. ‘울타리 밖에도 화초를 심는 마을’은 그런 소담스런 마을 사람을 길러내고 ‘오래오래 잔광이 눈부신 마을’은 순연하니 자연의 너름새를 여투는 그윽한 사람들이 살 것이며,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은 현세의 욕심에 치우지지 않고 우주로 열린 동경을 지닌 늡늡한 사람을 길러낼 것이다. 무엇이나 욕망에 꺼둘리는 일이 그리하여 그 욕심에 화를 당하고 다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다.   

노담은 욕망을 애초부터 부정하거나 억누르려고 하지는 않았다. 욕망도 인간의 자연이고 그것이 지니는 파국의 심성도 물론 인간이 초래한 후과(後果)로서의 자연이다. 이 자연이 부자연(不自然)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욕망이 불온하게 일어날 때라고 본 것인가. 왜냐면 인위적인 무리수가 따르는 임계점이 바로 욕망이 본래적 천성을 앞지르려 할 때이기 때문이다. 


들판에 차오르는 배추보러 가리

길이 언덕넘는 것

가다가 단풍

美柳나무버섯 따라가리.


-박용래, 엽서


이 단출한 4행의 시는 그야말로 모자람도 더 함도 없는 시의 엽서다. 화려한 꽃도 아니고 신기 묘기가 넘쳐나는 곡마단 서커스도 아닌 ‘들판에 차오르는 배추 보러 가’는 일의 소박한 행차이다. 이 소박한 행차야말로 ‘길이 언덕을 넘’듯이 그리고 가다가 ‘단풍’과 ‘미류나무버섯 따’는 일까지 연쇄적인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이끌어낸다. 감상(感賞)과 애완(愛玩)과 소득이 하나의 길로써 연행되어 나온다. 소박한 행차에 따른 소박한 마음의 진전과 소박한 일몰의 기꺼움이 없는 듯이 있는 생활은 도(道)를 구경하고 도를 먹고 마시며 도(道)와 어깨를 겯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토록 안정됨이니 무릇 욕심을 그르쳐 스스로 몸과 맘이 다칠 일이 사그러들 것이다. 

 




제38장 第三十八章 論德



上德不德 是以有德 *1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上仁爲之而無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扔之 

故 

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而愚之始

是以大丈夫 

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높은 덕은 (스스로) 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덕이 있고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므로 덕이 없다

높은 덕은 (무위하여) 일부러 베푸는 일도 없고 베푸는 까닭도 없다

낮은 덕은 베풀되 베푸는 까닭이 있다

높은 인(사랑)은 베풀되 베푸는 이유가 없고

높은 의는 행하되 행하는 이유가 있다

높은 예는 예를 갖추되 (남이) 응하지 않으면

소매를 걷어올리고 (성내며 억지로) 끌어당긴다

본래

도를 잃고 난 뒤에 (낮은) 덕을 내세우고

덕을 잃고 난 뒤에 인을 내세우고

인을 잃고 난 뒤에 의를 내세우고

의를 잃고 난 뒤에 예를 내세운다

무릇 예라는 것은 정성과 믿음을 옅어지게 하여 어지러움을 일으키고

남보다 앞선 지식이라는 것도 도를 겉치레하여 어리석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두터움에 머무르지 옅음에 머무르지 않고

실속에 머무르지 겉치레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補註]

*1: 매우 높은 덕을 갖춘 사람은 스스로 덕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덕이 있고 덕이 낮은 사람은 덕을 잃지 않으므로 덕이 없다 附言; 德=至德, 不德=不自以爲有德, 下德=德之下者,

[하상공註] 부덕(不德): 그는 덕으로써 백성을 교화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고 타고난 성품과 수명을 보양하고 그 덕이 드러나지 않으니 ‘부덕’이라 한다.

- 노자17장: 으뜸은 아래 백성이 (도를 따라 무위하는, 매우 높은 덕을 갖춘) 그(임금)가 있는 줄은 아는 정도이다. 그 다음은 (낮은 덕으로 다스리는) 그를 가까이 여기고 치켜세운다.

 

[詩說]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강은교,  사랑법


노담(老聃)이 말하는 그윽하고 무량한 도덕(道德)의 지경은 그것이 잃어질 일 없는 사랑의 속종과 겹춰둬도 무방하다. 사랑함에 ‘이유가 없는’ 이 무상(無償)의 것들을 가슴에 자꾸 껴묻거리로 심어 돋아내는 일이 사뭇 어여쁘고 고요함에도 몬존하지 않다. 

시인은 사랑에 일종의 메뉴얼을 주었으니, 그것이 짐짓 사랑이 사랑으로 가자면 가져야 할 일종의 방법론 즉 세속법처럼 법(法)을 세웠음에 강제함이 없이 유연하고 유장하게 흐르는 듯하다. 마른 듯하나 촉촉하고 덧없는 듯하나 나름 끌밋한 맺힘이 있고 막연한 듯하다 앙가슴에 진득하니 슬쩍 들일만 하다.  

강은교의 사랑법의 뉘앙스는 집착이나 소유의 형태를 자못 띠지 않으려 하기에 사랑홉다. 무리하여 사랑을 포악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니 물 같아도 바위 같을 수 있고 똥 같아도 꽃 같을 수 있겠다. 라오쯔가 말한 인위적인 모든 피셜이나 제스쳐를 지연시키고 오히려 자연의 흐름에 따른 주변의 것들에 ‘실눈으로 볼 것’을 고요히 이르고 아우른다. 성속을 아울러 볼 때 사랑을 소유의 형태로 포섭하지 않고 ‘그리고 남은 시간’처럼 여여(如如)하게 정인으로 삼이웃으로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사랑홉다 할것인가.

세속의 우리가 사랑을 증오와 한무리로 넘나드는 것은 그 무리(無理)함과 인위가 넘치기 때문인가. 애증(愛憎)이라는 말처럼 서로 근친으로 붙어있는 사랑은 늘 불안정함을 제 몸의 터럭처럼 거뭇하니 달고 다니고 그 손과 발의 손톱 발톱처럼 애써 기르지 않아도 그 근심과 번뇌가 함께 자란다. 그 근원적인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 무엇이든 ‘베풀되 베푸는 이유가 없이[爲之而無以爲]’ 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도(道)가 그렇다. 어디에든 만연하나 눈에 띄지 않는 도가 베풀되 베푸는 이유가 없이 번져있는 것을 사뭇 보아낼 때가 있는가. 인도 변 보도블록과 도로 경계석 사이에 핀 꽃대가 긴 서양민들레의 노란 꽃빛을 천지자연이 ‘베풀되 베푸는 이유가 없이’ 거기 옹립된 자연이자 도(道)이듯이 말이다. 시인의 사랑에 대한 심미안은 그런 자연의 흔연한 흐름의 한 자락을 혹은 한 가락을 서늘하고 웅숭깊게 받아안은 거나 아닌가.





제39장 第三十九章 得一 (法本)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正) 

其致之也 

天無以淸 將恐裂 *1

地無以寧 將恐發 

神無以靈 將恐歇 

谷無以盈 將恐竭 

萬物無以生 將恐滅

侯王無以貴高 將恐蹶 

故 

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是以侯王自稱孤寡不穀 

此非以賤爲本邪 

非乎 故致數譽無譽 

是故不欲琭琭如玉 

珞珞如石 


예로부터 하나를 얻은 것들은 다음과 같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 안정돼 있고

신은 하나를 얻어 영험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 충만하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 생장하고

임금은 하나를 얻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들은 그러한 경지에 이르러

하늘이 끝없이 맑으면 장차 갈라질까 (스스로) 두려워하고

땅이 끝없이 안정되면 장차 지각이 솟아날까 두려워하고

신이 끝없이 영험하면 장차 그칠까 두려워하고

골짜기가 끝없이 충만하면 장차 마를까 두려워하고

만물이 끝없이 생장하면 장차 멸망할까 두려워하고

임금이 끝없이 귀하고 높으면 장차 거꾸러질까 두려워한다

본래 (그러므로 반드시)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토대로 삼는다

이 때문에 임금은 고·과·불곡이라 스스로 낮춰 부른다

이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따라서 명예롭기만을 바라면 도리어 명예가 없다

그런고로 욕심을 내지 않으면 옥돌처럼 고아해지고

돌처럼 소박해지는 것이다



[補註]

- 노자22장: [백서본] 굽으면 온전하고 ~해지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해진다. 따라서 성인은 하나를 잡아 천하의 목자가 된다.

*1: [백서본] 이들은 그러한 경지에 이르러 / 하늘이 끝없이(쉼 없이, 줄곧) 맑으면 장차 갈라질까 두렵다 하고 / 땅이 끝없이 안정되면 장차 솟아날까 두렵다 하고 / 신이 끝없이 영험하면 장차 그칠까 두렵다 하고 / 골짜기가 끝없이 충만하면 장차 마를까 두렵다 하고 / 임금이 끝없이 귀하고 높으면 장차 거꾸러질까 두렵다 한다. (其至之也 謂天毋已淸將恐裂 謂地毋已寧將恐發 謂神毋已靈將恐歇 謂浴毋已盈將恐竭 謂侯王毋已貴以高將恐蹶) ; 附言; 毋已=不休止,

*[왕필본] (해석1) 이들은 그러한 경지에 이르러 / 하늘이 맑을 이유가 없으면 장차 갈라질까 두려워하고 / ...... / 임금이 귀하고 높을 이유가 없으면 장차 거꾸러질까 두려워한다. (附言; 以=原因, 緣故) (해석2) 이들은 그러한 경지에 이르러 / 하늘이 끝없이(주야장천) 맑으면 장차 갈라질까 (스스로) 두려워하고 / ...... / 임금이 끝없이(쉼 없이, 한없이) 귀하고 높으면 장차 거꾸러질까 (스스로) 두려워한다 (염려·조심한다). (附言; 無以=無已=>不停止, 不止, 没有休止,)

- 노자56장: (그를)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 아래 가장 귀한 존재가 된다

 

[詩說]

본장(本章)의 라오쯔가 말하는 ‘하나를 얻음[得一]’의 주체나 그 대상은 바로 ‘하늘과 땅과 신과 골짜기와 만물과 임금[天與地與神與谷與萬物與王侯也]’이다. 이 대상 주체들이 얻은 하나는 단순히 단품의 수효처럼 단수(單數)의 하나가 아니라 어느 정도 일체가 구비된 복수(複數)화된 하나일 듯하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을 보면 이 하나를 얻음[得一]은 완비되고 완벽하게 구성된 한 마디로 뒤탈이 없는 일체화된 하나만을 얻음만은 아닌 듯하다. 왜냐면 그야말로 뒤탈이 따라는 듯하기 때문이다. 천지만물과 골짜기와 임금과 신명함이 나름 극명한 하나의 경지를 얻었다 해도 그 뒤탈이 따름은 어쩌면 당연하여 그 도(道)의 만연한 흐름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완벽에 가까운 하나를 얻어다손 치더라도 그것도 하나의 흐름의 일부라는 것, 여기에 도의 공평무사함이 서렸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全琫準) 


군왕이 다스림을 크게 그르치면 백성이 심히 울게 된다. 그리하여 그르치고 그르치는 군왕은 혼군(昏君)이니 백성이 거듭 가슴을 치며 흉을 보며 울게 된다. 그러니 백성 중에서 군왕을 똥기어 천지간의 민초를 다시 깨우려는 군왕의 필적이 나서게 되는 것이다. 굳이 군왕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군왕의 도리를 바로잡으려 하는 피끓는 원성이 알심처럼 철학처럼 투철해질 마련이다. 순정한 뜻이든 불순한 역심이든 그 바로잡음의 기치는 쉬 사그러들지 않는다. ‘우리 봉준이’도 그러한 순정한 백성 중의 하나였으리라. 도(道)에 가깝게 하나가 되는 것[ 昔之得一者]으로 떨쳐 일어나는 무리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도를 그르친 혼군(昏君)인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고 싶은 ‘우리 봉준이’ 같은 마음이 돌올해지는 것이다. 민심이 곧 천심으로 하나되려는 것이 도(道)의 순행(順行)이지 싶다. 

무엇을 잘못하여 우주와 우리 주변의 온갖 기라성 같은 대상 주체들이 ‘장차 두려움[將恐]’에 빠질 수 있다고 노담(老聃)은 말하는 걸까. 가만 바라보고 들여다보면 무엇을 꼭 잘못하여 장차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훤칠한 나름의 우주 주체들이 어떤 득의(得意)의 경지를 얻었음에도 그 정상이나 절정에만 머물 수 없다는 미래 내다봄의 불안(anxiety)을 기꺼이 받자하는 것이 세상 흐름에 대한 감득과 이해이고 도(道)의 여줄가리라 할 수 있다. 하늘이 언제까지나 맑을 수만은 없고 구름도 끼고 더하여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번득이는 것이다. 하나의 절정은 하나의 꺾임의 꼭짓점이자 변곡점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인간계의 대상들은 그 득의한 득일(得一)의 단계를 오래 유지하고 싶은 어떤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에 대한 바람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할 때 큰 욕심을 낮추고 그 끌밋한 현황을 오래 유지하는 길에 대한 라오쯔의 눈썰미가 새삼 처세(處世)로 돋아나는데, 그게 ‘귀한 것은 천한 것을 바탕으로 삼고/높은 것은 낮은 것을 토대로 삼는다[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는 순행적이며 상호보완적인 너나들이의 속종을 우주의 기틀로 내다보는 일이다. 영고성쇠(榮枯盛衰)의 그 자연을 멈추어 어느 한 지점만을 최고의 쾌락과 목적으로 취하는 것은 위험하다.

내 새삼 말하게 되거니와, 도(道)는 흐름의 악기(樂器, instrument)이다. 하나의 음색만 가질 수는 없고 하나의 리듬과 가락만을 붙박이로 불러내게 할 수는 없다. 가뭄의 겨울을 지난 봄 시냇물 소리는 잔잔하고 몬존하여 애잔하기까지 하지만 여름 큰물 속에는 천둥이 뒹굴고 있다. 마블 영화에 나오는 토르가 각진 쇠망치를 들고 날뛰고 있는 듯하다.

악재를 호재로 삼을 수 있어야 하고 호재를 악재의 다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돌고돎을 보는 혜안이 악재를 말타기처럼 타 넘어가고 혹여 타 넘다 고꾸라지지 말어라. 





제40장 第四十章 反復 (去用)


 

反者道之動 [返也者 道動也] *1

弱者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2

有生於無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활동)이요

여리게 하는 것이 도의 쓰임새(작용)이다

천하 만물은 유에서 살고

유는 무에서 산다



[補註]

*1: [죽간본] 되돌아가는 것[返也者]이 도의 움직임(활동)이다.

[백서본·왕필본] 반하는 것[反者]이 도의 움직임(활동)이다. ※ 反=번복, 반복, 회귀, 상반...

- 노자25장: [왕필본] 도는 크므로 (두루) 가고 가므로 (아득히) 멀어지고 멀어졌다가 (다시) 되돌아온다[反].

[죽간본] 크므로 휘어지고 휘어지므로 돌고 돌므로 되돌아온다[返].

- 노자65장: 유현한 덕은 깊다. 아득히 멀리 간다. (그리고) 만물과 더불어 되돌아온다 [反]. 그런 뒤에 크나큰 순리에 이른다.

- 노자76장: 단단하고 억센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여린 것은 삶의 무리이다.

*2~: [왕필본] 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 (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

[죽간본] 천하의 모든 것은 유에서 나오고 무에서 나온다. ( 天下之物生於有 生於亡 )

- 노자1장: 무는 만물(천지)의 비롯이라 이름하고 유는 만물의 어미라 이름한다.

- 노자25장: (그것은) 가히 천하(천지)의 어미라 하겠다. 나는 (아직)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자를 지어 도라고 한다.

 

[詩說]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 묵화(墨畵)


 이 여섯 줄의 간명한 시편에도 모자람은 없다. 해질녘의 소와 할머니는 서로 동물의 연리지(連理枝)처럼 손과 목덜미가 맞닿아 있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어스름의 시간을 되새김질하듯 잠시 오래도록 묵연히 서로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지긋이 느끼며 다독이고 있다. 하루의 수고와 피곤과 보람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분명 내일을 위한 하나의 으늑한 감정의 여울 같은 거다. ‘서로 발잔등이 부었’음에도 우리는 이걸 전적인 고통의 아람치로 여기지만은 않는다. 여기엔 보람도 있고 가만한 소소한 깨달음도 갈마들어 있으며 모종의 희망의 기운도 너나든다. 하루의 소진과 하루의 회복이 이 어스름녘의 저녁에 묵화(墨畵)처럼 번져있다. 그리하여 시간의 회복은 하루라는 단위로 잇닿아 있는 거나 아닌가. 하루 해의 저묾과 하루 해의 밝음은 ‘서로 적막’한 가운데 정신과 육신의 피곤함 속에 그 쉼을 매개로 또다시 회복의 사이클링(cycling)을 갖는 것이다. 

 하루의 저녁에 이르러 세상 모든 숨탄것들은 모두 제 둥지로 돌아온다. 멀리 나갔다가 집에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문득 여수(旅愁)에 빠지는 것도 그 돌아갈 집을 놓쳤거나 그 돌아감이 유예돼 있기 때문이다. 삼라만상(all nature)의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작용[返也者 道動也]’임을 아는 저녁은 ‘서로 발잔등이’ 붓고 ‘서로 적막하다’고 하는 순간에 모종의 깨달음은 숙연히 그리고 피곤의 뿌듯함 속에 갈마들어 온다. 생의 어느 한 저녁에 갖는 피곤함이란 때로 경직돼 있는 모든 주장이나 이념이나 아집을 풀고 서로를 무연히 느끼는 순간에 부드러운 속종이 찾아든다. 고립과 독불장군의 독선을 풀고 할머니와 물 먹는 소처럼 말없는 공감의 순간에 하나의 부드러운 숙성과 유연한 정서를 번져낸다. 번져라, 부드러움이여. 부드러우면 공룡의 포악함도 한순간 어리둥절하여 그 이빨이 얼마간 다물어지지 않으랴. 경직된 강함을 달래고 다독이는 부드러움의 바람 앞에 오래 전에 절멸한 그날 공룡의 눈꺼풀이 봄 춘수(春瘦)처럼 눈이 스르르 감기기도 한다. 본래로 돌아가는 일은 차츰 차츰 영원의 입문처럼 변화의 반복과 반복의 변화 속에 제 부드러움으로 존재와 회복의 푸른 넝쿨을 늘씬하게 뻗는다. 



 


제41장 第四十一章 聞道 (同異)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太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偷

質真若渝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器免成]*1 

大音希聲 

大象無形 *2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3


상급 선비는 도를 들으면 힘써서 행하고

중급 선비는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고

하급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나니

(크게) 웃지 않는다면 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 속담에 이러한 말이 있는 것이다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서는 듯하고

판판한 도는 울퉁불퉁한 듯하다

높은 덕은 (낮은) 골짜기처럼 보이고

아주 깨끗한 것은 더러운 듯 보이고

광대한 덕은 모자라는 듯 보이고

건실한 덕은 게으른 듯 보이고

꾸밈없이 참된 것은 금세 바뀔 듯 보인다

아주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고

아주 큰 그릇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주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아주 큰 꼴은 보이지 않는다

도는 숨어 있어 이름이 없지만

오직 도는 잘 베풀고 잘 이룬다

 

 

[補註]

*1: [죽간본] (1) 아주 큰 그릇은 더디 만들어진다 (大器曼成 ; 附言; 曼=長,) (2) 아주 큰 그릇은 만들어짐이 없다 (附言; 曼=无,)

[백서본] 아주 큰 그릇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大器免成)

[왕필본] 아주 큰 그릇은 더디 만들어진다. (大器晩成)

*2: [죽간본] 하늘 모습은 형체가 없다 (별들의 움직임 같은 하늘의 현상이 뜻하는 바는 잘 알아낼 수 없다). (天象亡形)

[백서본] (1) 하늘 모습은 형체가 없다. (天象無刑 ; 附言; 刑=形,) (2) 하늘 모습은 틀(모델)이 없다. (附言; 刑=型,)

*3: [백서본] (1) 무릇 오직 도는 잘 시작해서 잘 완성한다. (夫唯道 善始且善成) (2) 오직 도는 잘 낳고 (살리고) 잘 이룬다. (附言; 始=滋生 or 生,)

[왕필본] (1) 무릇 오직 도는 잘 베풀고 잘 이룬다. (附言; 貸=施,) (2) 무릇 오직 도는 잘 빌려주고 잘 이룬다. (附言; 貸=借出,)


[詩說]

기원전 이천년쯤의 수메르 서사시‘길가메시’에는

주인공께서

불사의 비결을 찾아나서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하늘에서 내려온

터무니없는 황소도 때려잡고

땅끝까지 가고 갔는데


그 땅끝에

하필이면 선술집 하나 있나니!


그 선술집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비결은 무슨 비결

술이나 한잔 더 드시룰랑은 돌아가셔라오


정작 그 땅끝에서

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냐


-고은, 선술집


길가메시[Gilgamesh Epoth]는 고대의 서사시다. BC 3000년대 전반기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우루크 지역을 통치했던 왕으로 추정이 된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가장 완결한 판본은 니네베에서 발견된 대목이다. 판 12개에 아카드어로 쓰여 있으며 누락되거나 결손된 부분이 존재한다. 이 부분은 메소포타미아나 아나톨리아 등 다른 곳에서 발견된 여러 자료들을 참고하여 보강했다. BC 2000년대 전반기에 쓰여진 수메르어로 된 짧은 단시도 5편이 들어있다.

사상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는 기원전(BC) 2000년 경의 단편적인 파편화된 수메르 판본과 기원전(BC) 1800년 무렵의 고대 바빌로니아 판본이 구성돼 있다. 이어 기원전(BC) 1595년부터 기원전(BC) 1155년까지 고대 바빌로니아를 지배한 카시트 왕조 시대의 서기관으로 추정되는 인물 (신 레키 운닌니-Sîn lēqi unninni)가 새롭게 엮은 판본이 있다. 

서사시는 길가메시가 세운 도시 우루크의 성벽을 배경으로 나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길가메시와 친구인 엔키두의 흥미로운 공적에 대한 서사(敍事)인데 이들의 모험 중 압권은 거인 훔바바를 섬멸한 일이다. 엔키두가 죽은 뒤 길가메시는 영생을 얻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다 대홍수 때 살아남아 영생을 얻은 우트나피시팀을 만나게 된다. 그는 3번이나 목적을 이룰 뻔했으나 종내는 실패고 말았다.

앞서 길가메시(gilgamesh)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고은이 시편 속에서 인물됨이 지닌 인생론적 혹은 철학적 파격의 행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한 마디로 영속적인 삶에 대한 희구(希求)는 시대의 멀고 가까움을 떠나 존재의 본능적인 지향이나 추구인데 여기에 기원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했던 한 왕의 이야기가 부합되는 얘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고은 시인은 기원적 20세기 어름에 그토록 찾아헤맸던 방황과 모색의 서사를 단숨에 지나쳐버릴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불사의 비결을 찾아나서’는 지극히 원천적이고 당연한 욕망의 전개를 통해서 우리는 라오쯔가 본장(本章)에서 말한 비교할 수 없는 스케일의 의미를 방증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즉 우리가 세속에서 통용하듯 말하는 일반적인 척도(尺度)와는 그 크기나 무게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스케일을 마주할 때 우리네 일반적인 관념을 깨는 라오쯔 식의 형용모순(形容矛盾, oxymoron)의 말맛의 묘미에 감득되기도 한다. 예로 ‘아주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다[大方無隅]’ 같은 구절이 주는 일견 오문(誤文)의 패턴이 주는 묘한 이질적 표현의 깊이와 너름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은 역시 이러한 우주적인 스케일이 지닌 일상화법의 파괴와 거기에 따른 새로운 각성의 출현이 주는 낯선 반가움 같은 것이다. 

무엇보다 라오쯔가 본장에서 말하는 크고 광대하며 심원한 스케일과 고인의 시 속에 등장하는 ‘선술집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의 길가메시에 대한 심드렁한 대응의 상관성이 갖는 의미연관이지 싶다. 즉 라오쯔가 말하는 너무 크고 광대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부림과 길가메시의 영생불사의 물음에 대한 ‘주모 씨두리 가라사대’가 갖는 심드렁한 화법(話法)은 묘하게 하나의 유의미한 맥락을 갖는 듯하다. 그 공통점은 바로 여러모로 스케일 큰 것들, 즉 대물(大物)로 통칭되는 아주 장대한 대상들은 기존의 우리 일상적 관념을 해체하고 불식시킨다는 점이다. 큰 것을 큰 것으로 그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지경을 통해 범속한 척도로는 헤아릴 수 없음은 라오쯔는 형용모순의 문법으로 갈파하려 했고 시인 고은은 ‘비결은 무슨 비결’이냐며 ‘손님 술이나 한잔 드셔라오’ 하는 식의 불가지론의 선문답(禪問答)으로 에두르는 화법이었다. 이렇듯 범인(凡人)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거나 누릴 수 없는 스케일이나 영생불멸의 비결은 모두 불가지론(不可知論)이나 형용모순 속에 그럼에도 두루 세상에 편재(遍在)한다는 점이다. 크고 넓고 깊은 것은 그것 대로 작고 미미하고 소소한 것은 그것 그대로 도(道)의 연관 속에 연속되고 연결돼 있다. 즉 도의 이룸과 도의 흐름이 끝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것은 인간에 의해 밝혀져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항시 ‘도는 잘 베풀고 잘 이루어지는[夫唯道 善貸且成]’ 과정을 항시 누리고 있다. 

도를 밝히든 도에 아둔하든 모든 도는 ‘그 땅끝에서/바다는 아령칙하게 시작하’듯 인간의 무지와 몽매(蒙昧)속에서도 늘 여실하고 늡늡하고 망망(茫茫)하며 창대하다. 이 '아령칙함'으로 알아가는 도(道)라면 상급의 선비든 오늘의 재야 처사든 무관하게 도(道)를 일방적으로 규정하거나 속단하지 않을 겨를이니, 섣불리 도를 앎으로 보지 않는 늡늡함이여. 도를 모른다, 자처하는 순간에 드넓어지고 웅숭깊어질 마련이니. 맑은 영혼이여, 혼돈에 눈뜬 얼과 알의 도드라짐이 쏠쏠하다. 


 



제42장 第四十二章 中和 (道化)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1 

人之所惡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

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強梁者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업고 양을 안고 있으며

그 기를 흔들어서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는 이 고·과·불곡이라

(고귀한) 왕들은 그러한 (낮춤)말로 칭호를 삼는다

본디 일이라는 것이

때로는 덜어내어 보태지고

때로는 보태어 덜어진다

남들이 가르치는 바를 나도 가르치겠다

굳세고 사나운 사람은 곱게 죽지 못한다

나도 이 말을 가르침의 맨 처음(시작)으로 삼겠다

 


[補註]

- 노자14장 : 빛깔도 없고~소리도 없고~꼴도 없는~이들 셋은 알려고 해도 알아낼 수 없으니 뭉뚱그려 하나라고 한다.

*1: 음과 양의 두 기운을 격동시켜 중화의 기운을 발생시킨다. (附言; 沖氣=陰陽兩氣互相激蕩 or 陰陽二氣互相冲擊而産生的中和之氣)

- 노자39장: [백서본] 예로부터 하나를 얻은 것들은 다음과 같다. ~임금은 하나를 얻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러) 임금이 끝없이 귀하고 높으면 장차 거꾸러질까 두렵다 한다. ~(이 때문에) 임금은 고·과·불곡이라 스스로 낮춰 부른다. ~ 명예롭기만을 바라면 도리어 명예가 없다.

 

[詩說]

명절날 나는 엄매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로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고무 고무의 딸 이녀 작은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 고무 고무의 딸 승녀 아들 승동이


육십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횐 옷이 정하든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작은홍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려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츰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홍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 여우난골족 


* 여우난골족 : 여우가 나오는 마을(여우난골) 부근에 사는 일가친척들

* 진할아버지 진할머니 :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예전에‘진이라는 말을 붙이면 할머니 쪽 친척을 말했습니다. 예) 진증조할머니 : 할머니의 어머니)

* 이녀 : 평북지방에서 아이들을 지칭할 때 쓰는 애칭

* 벌 : 매우 넓고 평평한 땅                         

* 고무 : 고모, 아버지의 누이

* 토방돌 : 집채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 안간 : 안방.                                           

* 저녁술 : 저녁밥. 저녁숟갈.

* 별자국 : 천연두의 증상으로 남은 다발성 흉터. 곰보자국

* 포족족 : 빛깔이 고르지 않고 푸른 기운이 돎

* 매감탕 : 엿을 고아 내거나 메주를 쑤어 낸 솥에 남은 진한 갈색의 물

* 오리치 : 평북 지역에서 오리를 잡는 데 쓰는 올가미

* 반디젓 : 밴댕이젓                                 

* 삼촌 엄매 : 숙모(삼춘의 엄마, 다시 말해서 할머니가 아니랍니다)

* 숨굴막질 : 숨바꼭질                               

* 아르간 : 아랫간, 온돌방에서 아궁이 쪽이 가까운 부분

* 조아질 : 부질어벗이 이것저것 집적거리며 해찰을 부리는 일. 평안도에서는 아이들의 공기놀이를 이렇게 부르기도 함.

* 쌈방이 : 주사위  

* 바리깨돌림, 호박떼기, 제비손이구손이 : 아이들 놀이의 일종 (바리깨돌림 : 주발 뚜껑을 돌리며 노는 아동들의 유희. / 호박떼기 : 아이들의 놀이. / 제비손이구손이 : 다리를 마주끼고 손으로 다리를 차례로 세며, ‘한알 때 두알 때 상사네 네비 오드득 뽀드득 제빈손이구손이 종제비 빠땅’ 이라 부르는 유희.)

* 화디 : 등잔을 얹는 기구. 나무나 놋쇠 같은 것으로 촛대 비슷하게 만든 등잔을 얹어 놓은 기구.

* 사기방등 : 사기로 만든 방에 쓰는 등       

 * 홍게닭 : 토종닭                     

* 텅납새 : 처마의 안쪽 지붕, 다른 말로 추녀

* 동세 : 동서(同壻)               

 * 무이징게국 : 새우에 무를 썰어 넣어 끓인 국


일가붙이와 친척이란, 혈연의 가까움으로 하나로 묶어두는 바의 친밀성이다. 이 친밀성은 이질적인 형제지간이나 정서적 거리가 있는 친척의 사이라도 묘하게 하나로 묶어 친해지는 계제를 엮어내고자 한다. 백석(白石)의 <여우난골족(族)>은 이러구러 여사여사한 사연을 품은 친촉지간의 여러 사람들을 벌려 놓은데도 모두가 하나같이 품 안에 안겨든다. 너르게 흩어놓은 듯 하나로 모았으니 이 지경은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처럼 다양한 구성들임에도 여전히 하나의 안채에 들어찬 사람들의 모두의 하나된 숨결처럼 그리고 너른 대나무 소쿠리 채반에 얹은 고사리 고비나물이며 부침개나 전 같은 한 무리의 맛깔나는 등속에 오감이  갈마든다.

어찌 이렇게 부산하고 다복하고 북적북적 서로 다른 심보와 제나름의 꼴들을 하고 모였는데 무릇 하나같이 정겹고 여지없이 다감한 기분이 완연하느냐. 절로 미소가 본연인 것처럼 서로 갈마드는 화락(和樂)한 크고 작은 혈연공동체의 서정시이자 서사시의 출연진들로 늡늡하고 낙락하다. 사람냄새는 이렇게 음식냄새와 놀이의 흥취가 어울려 이것 저것 따로 뽑아 버릴 거 없는 하나된 어울림의 터전이 ‘여우난골족’에 드리웠다.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나는 이 고장은 지금 어디로 줄행랑을 놓았나. 그런 이웃들 곁눈질로라도 보고픈데 과문한 탓인가 어령칙하다.  

‘때로는 덜어내어 보태지고 때로는 보태어 덜어지는 지경[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이 여우난골족의 인간사 혈연지간에 갈마들듯 번졌으니 그 물건을 나누어 더 푸짐해지는 훗날이 있을 터이고 그 푼푼한 속종들은 그 마음을 보태어 궂기고 어려운 마음이 조금 덜어지기도 할 것이다. ‘굳세고 사나운 사람’으로 살지 않으려니 스스로 부드러운 터전[柔址]을 가지는 이에게 자연스러운 끌밋한 복됨이 봄날 돌틈의 돌나무처럼 파릇파릇 협소함을 모르고 돋아날 것이다. 

 




제43장 第四十三章 至柔 (徧用)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馳騁於天下之致堅] 

無有入無間 [無有入於無閒]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教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天下希能及之矣] 


천하에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에 가장 단단한 것 속으로 내달린다

꼴(형상)이 없는 것이 틈이 없는 것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로써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불언의 교화와 무위의 이로움

천하에 이를 따라갈 만한 것이 드물다



[補註]

- 노자2장: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의 일에 머무르며 불언의 가르침을 행한다.

 

[詩說]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오규원, 빈자리가 필요하다


빈자리는 결손의 자리나 부재의 자리가 아니라 모든 삼라만상이 번지고 생동할 수 있은 싹틈을 위한 비워둠의 자리이다. 있을 수 있는 것들을 위한 예비의 자리이며 끼쳐오는 것들을 착생(着生)케 하는 너름새의 빈 터이다. 

 모종의 공교육이나 사교육, 혹은 자본을 매개로 하는 천민자본주의적 교육은 무언가를 기계적으로 혹은 흥미적인 요소를 당의정처럼 만들어 채워주는 방식을 추구한다. 이 채워줌은 실상 깨우침과는 모종의 거리가 멀다. 야생의 깨우침이든 일상의 소소한 알음이든 본래적인 성찰, 즉 헤아림을 동반한 궁리나 탐구는 채움의 방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해방의 방식, 탁 트이는 새뜻한 열림에 공감하고 목탁조 딱따구리 소리에 주변 허공이 공명(共鳴)과 같다. 그러므로 지식의 축적은 그 쓰임보다는 그 드러냄의 권위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고 깨우침의 공명은 맘과 몸의 열림에 잇닿는 확장에 맞닿아 있다. 

오규원이 말하는 ‘빈자리’는 지식이나 앎과 물질이 들어찰 축적의 자리가 아니라 자연의 속성과 존재의 아우리가 숨쉬고 번질 수 있는 여유와 확장이 가능한 시공간이지 싶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빈자리가 필요’하듯이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빈자리가 필요’함을 시인은 종요롭게 바라본다. 그래서 시인의 빈자리는 공허와 황폐함 같은 상실의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든 그윽이 숨쉬며 자연스레 너나들 수 있고 시르죽던 것이 다시 되살아날 여지를 갖는 회복과 갱생(更生)의 여백이자 그 너름새이지 싶다. 그래서 사람이 너무 똑똑한 체 하는 윤똑똑이나 무엇이나 해코지하고자 하는 가납사니처럼 되면 사람들은 그를 자연 멀리하게 된다. 소위 ‘빈 구석’이 있어 보이는 사람의 끌림이나 매력은 그에게서 인간미가 나고 같이 어울릴 요소들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흔히 ‘딱딱한 주입식 교육’이라는 말은 이제 재미없는 진부한 관용적인 표현이 돼서 오히려 그런 주입식 교육을 배제하지 않는 집단이나 기관에서조차 잘 쓰지 않는 표현이 되어 버렸다. 지식이 딱히 나쁠 것도 천박할 것도 없는 요량이지만 이 지식만으로 공명되지 않는 게 사람의 인성이고 보면 느껴지는 체험이나 앎이라면 곧 주관적 변화의 단초가 되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든 딱딱함이 느껴지는 매질(媒質)은 그 자체로 전달력보다는 반발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그러기에 부드러움이란 모종의 호감(favor)의 상태를 내장한다. 부드러움은 유동성을 근거로 하며 그 자신의 일정한 상태를 고집하지 않는 관계로 상대방과 굳이 맞서거나 뻗세게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비굴하거나 몬존하거나 굳이 연약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상태를 자족적인 본질로 삼고 있음이 아닌가. 그러니 이 부드러움은 만물을 받아들이는 매우 종요로운 매질(媒質)의 성격이면서 관계적 융화를 도모하는 모종의 유무형(有無形)의 형질로서 완연한 것이다. 그리하여 비워둠과 부드러움은 서로 갈마들며 살림과 궂김의 길 위에 있는 만상(萬象)들을 숨쉬게 한다. 숨통이 트이게 하고 제 깜냥껏 흔쾌히 꼴값을 하게 한다. 이것을 일러 라오쯔는 ‘무위의 이로움[無爲之有益]’이라 하지 않았나. 창공은 바위로 막혀 있지 않고 강물은 얼음의 뼈로 굳어있지 않음처럼 말이다. 

 




제44장 第 四十四章 立戒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 

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故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이름(명예)과 몸(생명)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사랑하는가

몸과 재화(재물)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중히 여기는가

하나를 얻고 다른 하나를 잃는다면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운가

그러므로

(명예를) 지나치게 좋아하면 반드시 크게 소비하게 되고

(재물을)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게 된다

 따라서

(명예를 지나치게 좋아하지 말고)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보지 않고

(재물을 많이 쌓아두기를) 그칠 줄 알면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아

(명리 때문에 자신의 몸을 해치는 일 없이) 길이 오래갈 수 있다 



[補註]

- 노자 9장: (이미) 가지고서 (가득) 채우려 하는 짓은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금과 옥을 집에 가득 채워놓아도 그것을 지켜낼 수 없다. 가멸고 높이 되었다고 으스대면 스스로 허물(재앙)을 남기게 된다.

 

詩說)


청천(晴天) 하늘 아래

목마른 자의 풀은 끝없이 시들어지고

한순간의 불볕 위에

모지라진 긴 소멸의 시간.


하늘 기울고

목숨을 겁(劫)이라 이름하여도

숯불에 삭은 뼈 하나로

누구의 한 목숨을 다 비취볼 수 있으랴.


잔등(殘燈) 높이 돋우고

젊은 날 내 불면을 밝혀주던

능금나무 열매의 능금 향기와

소매 끝을 적시던 눈물의 홍옥(紅玉).


기울어진 가지 끝에서

다만 간직한 귀로 듣던

수정(水晶)의 푸른 씨앗조차 사그라지고

돌아가는 물소리에 물이 어리어

꿈길 같은 꿈길 같은 길이 흐를 뿐.

한 평의 땅도 가진 것 없이

삭은 뼈도 삭아서

맑은 햇볕 속

흔들리는 바람같이 민들레처럼.


-박정만, 풍장(風藏) 1 


오직 이름 하나의 눈물의 향기로 남는 시인이 있다. 박정만은 그런 오롯한 서정시인의 반열이지 싶다. 그에게 가난은 물질을 넘어선 존재의 깊이와 넓이로 사랑과 서정의 우주로 나아가려는 서정의 발원지였다. 그에게 가난은 더욱더 절절하고 순도 높은 시의 고갱이를 낳게 하고 그에게 가난은 순정한 사랑과 풍정을 낳는 시안(詩眼)의 백지 같은 바탕이다. 푸득이는 파랑새의 눈초리와 퍼득거리는 은어(銀魚)의 말간 수박향이 그의 시편의 말간 서러움을 아우르고 있다. 

신군부 독재치하 시절 가난하고 맑고 순수했던 시인의 육신을 쥐어짜듯 고문했던 후유증 탓에 시인은 그 정신적 외상과 스트레스를 폭음의 술로 풀어내다 그만 세상을 등졌다. 평소 강골의 그였지만 피폐해진 정신과 너덜거리는 몸으로 그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술과 시뿐이었다. 그러나 이 술과 시만으로도 시인은 온전히 시인으로 살다 갔다. 그 외의 것은 모두 하찮은 것이었다. 시인이 보기에 우리가 이 세상 세속에서 추구하는 무수한 것들은 모두 풍장(風葬)하듯 어느 날에게는 스러지고 썩고 사라져버릴 것들이다. 세속의 명예와 치부와 물질들은 언젠가 모래알처럼 하찮고 소소한 것이며 덧없는 것으로 그 주인 곁에 온전치 않을 것들이다. 그런 진정한 허무의 심연(深淵)을 아는 술과 시의 뮤즈는 ‘청천 하늘 아래/목마른 자의 풀은 끝없이 시들어’지는 존재의 덧없는 행간을 노래하기에 이른다. 세상살이 그 어느 누가 찬란하고 영화롭다 하여도 그마저도 ‘모지라진 그 소멸의 시간’에서 예외일 수 없음이니 오로지 소멸을 노래하고 그 생명의 뒷받침을 예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럴리도 없지만 시인이 ‘목숨을 겁(劫)이라 이름하여도’ 할 때 ‘숯불에 삭은 뼈 하나로/누구의 한 목숨을 다 비춰볼 수’ 없음에 지극한 슬픔이 도래한다. 지리멸렬한 삶으로도 또 다른 한 목숨의 길을 헤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시인은 슬픔의 도량석을 돌 듯 헤아리는 듯하다. 이런 겁(劫)의 시간을 잠시 살펴보자면 초로(草露)같은 목숨에 비해 너무나 무극무량(無極無量)하다.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겁(劫)은 [kalpa(산스크리트어), kappa(팔리어)]은 겁파(劫波)라고도 불리운다. 고대 인도 및 불가에서 우주의 무량한 시간을 재는 척도로서 제한된 숫자로 표기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호칭한다. 보편적으로 세계·우주가 천지개벽한 때로부터 다음에 개벽을 이룰 때까지의 시간을 함의한다. 북전 불교(北傳佛敎)의 우주생성론에 전하기를, 우주의 삼라만상은 성장[成]·지속[住]·무너짐[壞]·사라짐[空]의 네 단계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는데, 이러한 개별적 단계에 상당하는 시간을 겁으로 통칭한다고 한다. 그런 이 네 개의 겁들이 모이면 대겁(大劫)이 된다고도 한다. 북전(北傳) 불교의 『잡아함경(雜阿含經)』과 남전 불교(南傳佛敎)의 『상윳타 니카야(Saṁyutta-Nikāya)』는 두 차례의 비유를 들어 겁의 너름새를 이야기한다. 첫 번째 비유에 따르면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의 큰 바위를 1백년마다 한 번씩 비단 옷자락으로 닦아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져도 겁은 다 소멸되지 않는다고 한다. 두 번째 비유에 이르기를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이 되는 철로 된 성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백년마다 한 알씩 꺼내어 겨자씨를 모두 다 꺼냈어도 겁은 다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렇듯 시인이 말한 겁(劫)의 시간 속에 우리네 지구 땅별의 목숨은 미미하기 그지없는데 박정만이 지어내는 시의 슬픔은 역설적이게도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또 소슬할 따름이다.

세상 ‘누구의 한 목숨을 다 비춰볼 수 없’는 실존의 한계를 ‘기울어진 가지 끝에서/다만 간직한 귀로 듣던’ 시인은 ‘돌아가는 물소리에 물이 어리어/꿈길 같은 꿈길 같은 길이 흐를 뿐’인 이승의 덧없는 유전(流轉)을 구름처럼 올려다보고 바람처럼 휩싸여 보며 하얀 계곡물처럼 내려다볼 뿐이다. 그리하여 박정만(朴正萬)에게는 덧없음을 꽃 피워가고 덧없음을 맑게 흘려가며 덧없음을 사랑의 등에 업고가는 습습한 눈물의 노래가 도도록해질 일이다. 비록 그의 가난이 ‘한 평의 땅도 가진 것 없이/삭은 뼈도 삭아서/맑은 햇볕 속’에 서 있는 것일지라도 그는 시를 택하여 시를 살다 갔다. 

 그대와 나는 그리고 세상은 무엇을 택하여 살 것인가. 무엇을 끌어안아 온전한 사랑의 반열 위에 올려놓으려 꿈 속에서도 가만히 웃고 그윽이 울어볼 것인가. ‘흔들리는 바람처럼 민들레같이’ 온전히 삶을 우주적인 밤낮의 빛남으로 갈 수 있게 온몸을 흔들어 말간 울음의 아니 울림의 시편을 짓고 갈 것인가. 





제45장 第四十五章 請靚 (洪德)



大成若缺 

其用不弊[其用不敝] 

大盈若沖 [大盈若盅]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燥勝凔/趮勝寒] 

靜勝熱 [清勝熱/靚勝炅] 

清靜爲天下正 


큰 이룸은 이지러진 듯하지만

아무리 써도 해지지 않고

큰 충만은 텅 빈 듯하지만

아무리 써도 끝이 없다

큰 곧음은 (오히려) 굽은 듯하고

큰 기교는 (오히려) 보잘것없는 듯하고

큰 말솜씨는 (오히려) 떠듬거리는 듯하다

조급함(불로 말림)은 차가움을 이기고

고요함(맑음)은 뜨거움을 이긴다

맑고 고요한 자가 (오히려)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다



[補註]

- 노자4장: 도는 텅 빈 그릇과 같지만 그것이 쓰일 때 (아무리 써도) 가득 차서 넘치는 일이 없다.

- 노자26장: 고요함은 조급함의 임금이다. (허정한 이는 조급한 이를 부리는 임금과 같다.)

- 노자15장: 누가 흐리면서 고요한 자를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겠는가 ? (누가 흐린 것을 고요하게 하여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겠는가 ?)

- 노자57장: 성인이 말하기를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이 저절로 바르게[自正] 되더라.

- 노자37장: (만물이) 욕심을 내지 않게 되어 고요한 상태에 이르면 천하는 스스로 안정[自定]될 것이다.

- 노자39장: 후왕은 하나를 얻어 천하의 우두머리[天下正]가 된다.

 

[詩說]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흔해빠지고 하찮은 듯해도 세상의 모든 풀들은 그 안에 질박한 순정의 알갱이와 질박한 생명력의 본령이 오롯하다. 풀은 허수룩한 듯해도 가장 먼저 겨울을 물리고 봄을 알리는 선견지명이 육화된 지구의 풋것, 숨탄것이고 초록 지구의 터럭이다. 모르는 이에게는 마구 죄책감도 없이 마구 밟히지만 그를 탓하지 않고 스스로 자구하고 스스로 구휼(救恤)하는 생명력이 여실하다. 

김수영의 ‘풀’은 흔히 자아동일성(自我同一性)의 의인화된 ‘동풍에 나부껴’서는 땅에 ‘눕고’는 드디어 ‘울’어버리는 풀[草]이지만 자연의 만연한 숨탄것들 중의 하나로도 어쩌면 진귀하고 자자하다. 이런 실체적 풀과 비유의 풀은 한 몸으로 뒹구는 듯이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라보다 먼저 일어나’는 의지의 산물이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 희망의 숨탄것이다. 여기서 ‘눕는다’라는 것은 단순한 실제의 몸짓이면서 세간의 패배나 좌절의 뉘앙스가 아니라 외부의 그리고 내부의 영향을 온전히 진솔하게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이기도 하다. 잔꾀를 부리거나 모략을 도모하지 않는 이런 풀의 진솔한 성정은 어쩌면 라오쯔가 설파한 ‘큰 기교는 오히려 보잘 것 없는 듯함[大巧若拙]’과 크게 두동진 것은 아닌 듯하다. 

세간의 사람들이 크고 이목을 끌 만큼 대단하며 무릇 미혹을 일으킬 만큼 욕망에 부합하는 것들이 세상 만물에 견주어 진실로 크고 고개를 끄덕여질 만큼 대단하며 미혹을 감수할 만큼 인간에게 모두 요물(要物)인 것만은 아니다. 치우침에 깃들어 보면 풀들만큼 하찮고 불필요하며 흔전만전한 여줄가리가 없다. 그러나 황막한 도시 풍경의 귀퉁이에서 이름도 채 모른 채 계절의 소슬한 시위처럼 돋는 저 풀들의 은은한 구성은 풍경을 입체적으로 완미하게 한다. 무릇 내세우며 꽃과 열매로 세상의 구미를 유혹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의 푸르름으로 다른 어떤 목적성을 뛰어넘어 우리네 주변의 늡늡한 여백에 슬어있다. 세속에선 당장의 쓸모와 금전적 가치로부터 거리가 있음에도 그 초록을 내는 것만으로도 어떤 위로의 계승이 해마다 봄볕에 자연은 풀을 내듯 풀을 뽑아내고 돋아낸다. 그러니 이 협량한 인간의 가치를 넘어서는 담대한 가치의 ‘고요함이 뜨거움을 이기듯[靜勝熱]’ 세상에 번져있음을 풍미하게 한다. 

 




제46장 第四十六章 儉欲 (知足)


 

天下有道 卻走馬以糞 *1

天下無道 戎馬生於郊 

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 

知足之足 常足矣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잘 닫는 말을 (싸움터에서) 물러 밭을 갈게 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군마가 들에서 새끼를 낳는다

(끝없이)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가 없고

(끝없이) 얻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큰 허물(재앙)이 없다

그러므로 (밖에서 찾는 만족이 아닌)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서 만족하게 되는 것이 오래가는 만족이다



[補註]

- 노자30장: 도로써 임금을 돕는 사람은 무력으로 천하를 강압하지 않는다. ~군대가 머문 곳에는 가시덤불이 자라나고 군사를 크게 일으킨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

*1: 밭에 똥거름을 준다 (군마가 똥거름 수레를 끄는 밭일에 쓰인다). ; 附言; 糞=糞田

 

[詩說]

꽃 피는 아침에는 절을 하여라

피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걸어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서서 

부처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여라


꽃 지는 저녁에도 절을 하여라 

지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돌아가던 모든 길을 멈추고 

헤어졌던 사람과 나란히 서서 

와불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여라 


-정호승, 운주사에서


절을 왜 하는가. 절을 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내 자신의 만족과 기쁨과 감사함을 드러내는 몸짓이다. 몸이 맘에 연계를 짓는다. 절을 할 수 있음은 절을 하지 않은 마음을 넘어선 지극한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절로 절을 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자연스러운 만족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기꺼운 속종도 없을 것이다. 

무슨 대단한 성취에 대한 감사나 만족의 절이 아니어도 좋다. 시인은 그저 일상의 우리 주변에 흔전만전 서려 있는 숨탄것들의 새삼스러움에 대해 감사의 ‘절을 하여라’라고 말을 건넨다. ‘피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하고 또 ‘지는 꽃을 보고 절을 하여라’ 하니 권한다. 이 일상의 생명 현상에 대해 새삼 절로 절을 할 수 있는 마음이란 곧 세상 삼라만상에 깃든 아름다움과 고마움을 아는 것이기에 그 드넓고 웅숭깊은 존재들과 더불어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감사이기도 하다. 이런 감사의 절은 ‘부처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는 정도의 심도있고 공이 서린 절이다. 이심전심으로 나를 당신께 건네는 절이니 이 절은 상대방을 흠숭하는 사랑의 여줄가리이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너그럽고 그윽하게 존숭하는 자존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것이든 세상사에 감사가 사라지고 격렬한 복속의 욕망이 분쟁과 전쟁을 야기시킨다. 그럴 때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과 잇닿은 짐승들도 제 본래의 생태를 벗어나 엉뚱한 모습을 보이니, ‘천하에 도가 없으면 군마가 들에서 새끼를 낳는[天下無道 戎馬生於郊]’다는 언설은 비유라기보다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상의 한 단면처럼 오롯하다. 세상은 잠시의 불만족과 욕망의 불충분에만 기울 것인가 그 여러 부족분(不足分)들을 잘 다스리고 잘 길러내듯 메꾸어 나누려는 갱생(更生)의 방편에 방점을 둘 것인가. 불충분과 불만족에 대한 당장의 만족은 어렵고 쉽지 않다. 그러나 불충분과 불만족을 잘 들여다보면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만족과 충분의 여줄가리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걸 길러내는 일은 삶을 귀히 여기고 ‘헤어졌던 사람과 나란히 서서/와불님께 절을 하듯 절을 하’는 긍정을 헤아리는 마음의 권속이다. 

감사의 절은 스스로 만족을 체화하는 일이니 어떤 고매한 앎보다 더 고매하다. 감사의 맘 자체가 하나의 너름새와 냅뜰성 있는 정신적 수용체(受容體)로 건립된다. 이렇듯 범사(凡事)에 만족하려는 시도나 깨우침은 상대방과 내가 넘나들듯이 만족의 푸른 펀더기에서 능노는 일이다. 소소한 것에서도 만족을 아는 것은 행복을 멀리서 찾지 않음이니 멀고 가까운 것 상관 없이 크고 작은 것 상관없이 비싸고 싼 것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의 본래대로 기꺼움으로 살 수 있게 된다. (다음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