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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호 Vol.14 - 유종인


[시로 읽는 노자 이야기]

 

노자(老子)와 시마(詩魔) 3

 

제16장 第十六章 歸根

 

致虛極

守靜篤

萬物並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비우고 비워 더 비울 것이 없는 텅 빈 경지에 이르러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두텁게 지키라

만물이 (바야흐로) 아울러 생겨날 때

나는 이미 만물이 도로 돌아갈 곳을 본다

무릇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나지만

저마다 제 뿌리(근원)로 다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감을 고요함이라 하고

이(고요함)를 일러 제 명(본성)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한다

제 명으로 돌아감을 덛덛함(늘 그러한 것)이라 하고

덛덛함을 아는 것을 밝음(큰 지혜)이라고 한다

덛덛함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한 일을 벌인다

늡늡함을 알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니 공평무사하고

공평무사하니 곧 왕이고 왕은 곧 하늘이고

하늘은 곧 도이고 도는 장구하니

죽도록 위태롭지 않으리라

 

[補註]

노자25장: 본디 도가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 또한 크다. 이 세상에 큰 것이 넷 있는데 왕도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노자52장: 다시 돌아가 그 어미 곧 도를 고수하라. (그리하면) 죽도록 위태롭지 않으리라.

 

[詩說]

늘 한결같음. 즉 늘 소박한 비움과 평화로운 고요의 마음을 돈후하게 하려니, 이는 허정의 밀지(密旨)다. 허정, 담담히 비움의 기운 속에 깃드는 고요함이란 자아(自我)가 무아(無我)로 갈마드는 그윽한 겨를이 있다. 이는 세속에서의 성정을 논박할 때, 흔히 한 사람을 몬존한 축으로 폄훼하는 이들의 편견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니 허정함이란 누구나 다 아는 그러나 모르는 밀지의 대명천지이다. 이 허정(虛靜)은, 말 그대로 비워둠과 고요함이 하나로 그윽해지는 지경이니 우주의 한 사람으로서는 그 몸과 맘의 겨를이요, 모든 사물의 겨를로서는 그 본래의 성정과 기능을 가만히 되새기는 순간이지 싶다. 사나움을 잠재우라, 그악함과 사악함을 뒤로 물려라, 뽐내고 패악을 부림을 스스로 두려워하라, 한다면 이건 그 숨탄것이 제 본래의 성정을 비운 듯이 고요함을 되돌아봄의 순간이다. 


밤하늘 위로 짐승 걸어가는 울음소리

그 아래 그들 똥을 받아

시를 쓰는 시인의 방


이런 날 밤

집 근처에 숨소리 가득 다가옴


하늘이 와서 몰래 글씨를 쓴다


풀잎을 동그랗게 먹은

벌레 입 자리가, 바로 그 상처가

하늘의 글씨다.

당신 계시는 블랙홀들


길 밖에 더 큰 길이 있다

-이성선,「하늘의 글씨」


무릇 일상의 크고 작은 일을 행함에 있어 지나침이 없이 자연스레 완급이 조절되는 서슬을 갖는 것, 이것은 그 몸과 맘의 행하는 바탕에 고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고요는 단순히 침묵과 적막의 외재적 요소만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심신의 들볶이거나 덧난 혼잡함이 없는 순일한 정돈 상태의 흐름을 이른다. 그래서 이 고요를 보고 있으면 예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더 늡늡하고 관대하게 대하지 못함을 가만히 헤아려 다솜과 자비의 여줄가리를 제 속종과 제 주변에서 헤아려 찾게 한다.

시인의 언술처럼 ‘하늘이 와서 몰래 글씨를 쓴다’라는 표현은 시적 표현에 앞서 누구나 외계의 기운이나 정감을 오롯한 정인이나 님으로 받아들이면 가능해지는 심사다. 무심한 듯 서린 하늘을 하나의 그윽한 대상으로 여기는 감각을 가지기 시작하면 그 순간에 자아라고 하는 에고(ego)와 천지자연이라는 주변의 것들과 가만한 넘나듦의 기운이 서린다. 이럴 때 시인은 아무 것도 아닌 듯 여기는 광막한 대기로부터 하늘의 인격화가 일어남을 보아낸다.

고요함을 체득하지 못한 맘은 분망하기만 하고 번민이 다가들며 고요함을 얻지 못한 공명심은 진정한 용기와 용력을 낼 때를 가늠하지 못하고 고요함을 얻지 못한 말은 시(詩)로써 수다스러운 요설에 그칠 경우가 왕왕 있다. 고요함을 지니는 몸과 맘은 결코 요즘 세태처럼 튀지 못해서 몬존한 것만은 아니고 그 자체로 굳이 뽐낼 일이 없이 자족하고 관계의 주변을 부드럽고 화락하게 하는 뉘앙스일 수 있다.

고요의 한가운데 머물러 보면 짐짓 ‘풀잎을 동그랗게 먹은/벌레 입 자리가, 바로 그 상처가/하늘의 글씨다’ 라고 다시 재장구치듯 무상(無常)의 상(常)함을 헤아린다. 벌레 먹은 자리의 공백으로 드러난 하늘의 무량함과 무상함을 도의 본래적 흐름과 귀결로 보면 어떠한가.

고요함의 미소를 들자면 나는 저 신라 적 입체인 불상을 언뜻 떠올린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의 무게가 고뇌와 번민으로 치우쳐 무거워진 반면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고요의 가운데 모든 생각의 번다함이 그치고 다만 시비분별을 종식한 그 평화로운 안색에 이미 법열이 반그늘로 환하고 잔잔하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좌측 국보 83호, 우측 7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83호), 상부(좌), 측면부(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가만히 마주하고 있으면 그 미소의 여운에 전염되듯 번져오는 기쁨이 있다. 이 기쁨은 아주 잔잔하고 고요하며 늡늡한 것이어서 어떤 사상이나 관념, 주의 주장에 묶여있지 않은 우주로 일탈되고 동조된 미소로부터 온다. 이 미소는 가리고 따져서 앎의 굴레로부터 얻어진 교양의 산물이 아니다.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로 그윽이 연결되고 하나의 본원적인 세계로 돌아가는 무상한 흐름의 존재를 똥기었을 때의 선정(禪定)을 아우르는 미소에 화답한다. 호객과 꾀임과 속임수의 미소나 웃음과는 그 근본적인 궤를 달리하는 위로하고 그윽이 다독이며 가만히 감싸듯 돋아주는 근원으로 돌아가 생각하게 하는 미소이다. 무겁지 않으나 경박하지 않고 고뇌를 모르지 않으나 이미 고뇌를 불식한 듯 밝게 번진 고요함, 그 낙락한 생면(生面)이다. 감은 듯 그러나 안팎을 두루 심안(心眼), 아니 영안(靈眼)이나 법안(法眼)으로 보는 듯한 가늘고 오똑한 콧매와 갸름한 턱선, 그리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입매와 두툼하고 길게 늘어진 귓불의 이 얼굴을 마주대하는 것으로 우리는 번다한 일상에서 잠시 본원적인 것으로 이끌리는 기분이 완연해진다. 

‘고요한 마음을 두텁게 지키라’라는 라오쯔의 전언은 똑똑하고 기발한 계책과 계략을 가지라는 말과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 고요한 마음을 돈독하게 하라하는 건 그 삶에 ‘망령되이 흉한 일[妄作凶]을 짓지 말게’ 사악함을 멀리 하려는 금언이다. 번다한 욕망과 지나침에 들뜬 마음자리에선 그간에 아무리 많은 소유와 축적이 있어도 그것이 가난한 마음의 호젓한 늡늡함을 이기지 못한다. 비워감이 상실해감이 아니라 또 다른 우주의 기율로 채워가는 도(道)의 여줄가리가 아닌가. 푸른 넝쿨의 줄기를 죽은 나뭇가지에 타고 올라가서 얹어줌이 아닌가.

 



제17장 第十七章 知有 (淳風)


 

太上下知有之 

其次親而譽之 

其次畏之 

其次侮之 

信不足 

焉有不信焉 [焉有不信] 

悠兮其貴言 [猷呵其貴言也]*1~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으뜸(가장 윗길)은 아래에서 그가 있는 줄은 안다

그 다음은 가까이 여기고 치켜세운다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은 그를 업신여긴다

믿음이 부족해서

불신이 있는 것이다

(그는) 유유히 말을 귀하게 여긴다

(그리하여도) 공과 일이 이루어지고

백성은 모두 제 스스로 이루었다고 말한다

 


[補註]

노자23장: 말을 적게 하여 스스로 이루도록 한다 ~본디 도를 따르고 섬기는 자는 도와 함께하게 되고 덕을 따르고 섬기는 자는 덕과 함께하게 되고 (도와 덕을) 상실(한 짓)을 좇는 자는 상실과 함께하게 된다.

- 노자72장: 백성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큰 두려움(심히 두려운 일)이 닥칠 것이다.

* 1: [백서본] 그는 망설이며 말을 아낀다.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루며 (이루어도) 백성은 제 스스로 이루었다고 말한다. (猷呵其貴言也 成功遂事而百姓胃我自然)

- 노자2장: 성인은 (인위적인 일을 배제하고) 무위의 일에 머무르며 (만물이 스스로 이루도록) 불언의 가르침을 행한다

 

[詩說]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 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땡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신동엽,산문시(散文詩) 1」전문 (월간문학 1968.11. 창간호 수록)


일찍이 정치라는 한자의 첫 글자는 요즘의 정(政)이 아니라 처음엔 바를 정(正)자 였다고 한다. 그 원래 함의(含意)는 세상사 모든 일을 그야말로 바르게 살피고 펴서 두루 모자람이 없고 두루 편중됨이 없이 고루 잘 살게 함이다 한다. 하긴 정치의 정(政)자로 언제 바뀌었는지 몰라도 그 원의(原意)에 있어서 고대나 지금이나 하등에 다를 바가 있으랴. 

공구(孔丘)의 <논어(論語)> 안연(顏淵)편 17장에 이런 대화가 있는 바 노(魯)나라 권력자인 계강자의 물음에 공자께서 대답한 말이다. 그 내용을 빌리자면, <계강자가 공자께 정치에 관하여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치란 바로잡는 것입니다. 선생이 바름으로써 본을 보인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습니까?”[季康子問「政」於孔子。孔子對曰:『政』者,正也。子帥以正,孰敢不正?]> 라는 원론적이면서도 항구한 정치의 아젠다(agenda)가 발원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구의 말씀도 장구한 정치 역사나 역정의 세계사를 보면 딱히 그대로 실현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치가 그 본래의 기능을 잃고 백성이나 국민을 억압하거나 핍박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을 파렴치한 정치의 행태를 보게도 된다. 백성이나 시민이 오히려 임금이나 대통령이나 위정자를 걱정하고 우려하는 경우가 옛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았다. 이런 역사 속 정치의 아이러니를 일찍이 간파했던 라오쯔의 정치와 위정자에 대한 분류는 자못 흥미롭기까지 하다. 정치체제와 상관없이 국민 대중을 위한다는 사람은 일찍이 어디에 자신이 처해야 하는가를 헤아리게 하는 대목이 본장(本章)에 스며있지 싶다. 

그 첫 구절이 자못 기가 막히게 명쾌하다. 다름 아닌 ‘으뜸(가장 윗길)은 아래에서 그가 있는 줄은 안다[太上下知有之]’ 라는 구절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상(像)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얼마나 이런 자연스럽고 능란하며 평화로움을 주는 위정자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원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너무 이상적인 통치자 상인지 몰라도 왠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리운 정치인이지 싶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성군(聖君)이자 좋은 대통령, 삼이웃 같은 총리의 반열이자 그 윗길이기도 하다. 이런 지도자 상은 신동엽의 시에서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라는 구절에서 본장의 라오쯔와 시편은 짝패를 이룬다. 시민 대중이 이만치 위정자의 정치를 논박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평안하고 분열과 갈등이 사라진 지경을 옛날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종요로운 것인가. 

 백성이나 시민이나 대중의 원성과 비난을 사는 그릇된 위정자를 어찌 고칠 것인가. 그들은 스스로 고쳐지지 않으면 스스로 어그러지게 되고 뭇 대중으로부터 버림받고 잊혀지게 된다. 스스로 바로잡아지지 않을 때 그런 임금을 흔히 혼군(昏君)이라 하는데 공구(孔丘)의 말대로 가납사니 같은 제 어둠을 똥기어 애써 밝힐 수 없이 어두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경이면 대중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그 신뢰가 바닥에 닿았을 때 그는 자신의 언행으로부터도 내쳐지기에 이른다. 어찌 그러한가. 그에게 라오쯔가 말한 본보기로 삼을 만한 도(道)가 없기 때문이며 널리 깊고 그윽하게 사랑할 마련이 드는 진정한 시민이며 백성이 다솜으로 이웃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더란다.’라는 구절은 절로 그리워지는 대통령을 갖게 싶게 만든다. 종요로운 정치인이 저만치 우리 곁에 이웃하여 즐거운 술주정이라도 부리면 싫지 않은 척 이웃들이 즐거운 통박을 놓는 지경이 아주 요원하기만 한 것인가. 

 신동엽의 시의 말미를 장식하는 이 구절은 그래서 현직이든 퇴임한 후이든 위정자가 가지는 소박한 그 인정미, 그 인간미로 시정(施政)의 방편으로 삼기를 새삼 바라게 된다. 무엇이나 노인에서 어린 아이한테까지 정치가 구렁텅이나 이전투구를 벗고 텃밭과 꽃밭 가꾸어 꽃과 채마 나누듯 그 인정의 번짐으로 세상이 거느려지고 다스려지는 것, 고대처럼 현대를 바라게 된다.




제18장 第十八章 四有 (俗薄)


大道廢 有仁義 [故大道廢 安有仁義]*1

智慧出 有大僞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2 


큰 도가 없어지자 인과 의가 생겨났고

지혜가 나가버리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부모형제가 불화하자 효와 사랑이 생겨났고

나라가 혼란해지자 충신이 생겨났다


[補註]

*1: [죽간본] (으뜸은 아래에서 그가 있는 줄은 안다. 그 다음은 그를 가까이 여기고 치켜세운다.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은 그를 경멸한다~) 그러므로 큰 도가 무너졌는데 어찌 인의가 있겠으며 육친이 불화한데 어찌 효성과 자애가 있겠으며 나라가 혼란해졌는데 어찌 바른 신하가 있겠는가.

- 노자64장: (나라는) 어지러워지기 전에 미리 다스려야 한다.

- 노자38장: 도를 잃고 난 뒤에 (낮은) 덕을 내세우고 덕을 잃고 난 뒤에 인을 내세우고 인를 잃고 난 뒤에 의를 내세우고 의를 잃고 난 뒤에 예를 세운다

* 2: [죽간본] 정직한 신하가 생겨났다. (有正臣)

       [백서본] 지조가 굳은 (한 마음으로 충절을 다하는) 신하가 생겨났다. (有貞臣)

       [왕필본] 임금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는 신하가 생겨났다. (有忠臣)

 

[詩說]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김종길,성탄제」(1969)-


본래적인 것으로서의 부모의 자식을 귀히 여기고 아까며 내리사랑하는 것은 라오쯔가 설파한 대도(大道)가 실종되고 무너진 뒤의 대체재(代替材)로서의 인간 심성만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자식의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봉양과 효성은 부모형제가 불화하기 때문에 정말 꼭 생겨난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대저 라오쯔가 말한 국가나 사회 공동체를 보는 시야, 그 관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부모를 향한 공경과 효성이 원시 사회에서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고 패악(悖惡)의 늪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면, 한두 개인의 가정을 넘어서서 공동체는 뭔가 윤리적인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사회 전반의 보편적이고 건전한 규율과 문화가 서지 않을 때 그 공동체는 일종의 강제력을 가진 윤리적 규범을 문화로 강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일종의 관습법이든 실정법이든 규율이고 문화적 관습을 통한 덕목(德目)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피력하는 도덕률이 될 수밖에 없지 싶다. 원래 있었던 것으로서의 자연스러운 실행과 실천의 무리없음이 사라진 자리에 대체재로서의 윤리적 덕목이 고매한 문화적 정서의 탈을 쓰고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오쯔는 이런 대체재로서의 덕목들이 가진 권위적인 강제력을 이미 간파하고 그 허상을 설파한 것이다. 나타나지 말아야 할 것이 나타날 때는 이미 그 앞에 근원적인 덕목이 사라졌다는 반증이다. 

성탄제」는 육친(六親)의 사랑과 화목이 대체되기 전에 그 사랑이 있음을 보여주고 자애가 있기 전에 자애가 ‘어두운 방안에/빠알간 숯불이 피’듯 넘실대는 자연스러운 다솜의 시공간을 연출한다.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놓인 인연들 속에 ‘붉은 알알이 아직도 혈액(血液)속에 녹아 흐르는’ 천연(天然)의 것으로 서로 버성김이 없다. 느꺼운 목숨의 연줄을 실로 아는 것이다. 자애로운 핏줄에 잇닿은 눈길이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듯 이 어린 목숨은 자라서 또 다른 어린 목숨을 보살핌에 삿됨이나 인위적인 거드름이 없는 것이다. 자연에서 나온 자연이다. 

라오쯔가 본장(本章)에서 언술한 대도(大道)와 부모자식 간의 인화(人和)의 정서는 그것이 자연스레 조성되거나 인간에 실행됐을 때 인의(仁義)나 효자(孝慈) 같은 부수적인 덕목이 불필요함을 드러낸다. 넓은 관점에서 대도(大道)와 인화(人和)의 실종은 인의(仁義)와 효자(孝慈) 같은 차선을 구축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자자하다. 대도가 세상에 널리 번져 빈틈이 없고 세속에 육친(六親) 간에 인화(人和)를 돈독히 가졌을 때 이걸 억지로 강제할 만한 대체재의 효용은 종요롭지 않은 것이다. 부작용과 부조리를 낳는 차선(次善)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2등이나 이인자의 개념이 아니라 어쩌면 대도와 인화가 사라진 뒤 그것들과 크게 대척되는 패악이 등장한다는 것이 라오쯔의 설파인 것이다. 그러니 무위(無爲)와 인위(人爲)의 차이나 간극만큼 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라오쯔(老子)는 인(仁)과 의(義)를 한껏 낮게 본 인물이다. 인(仁)에 대해서는 권면할 것은 못 되더라도 해롭지는 않다는 입장이나 의(義)에 대해서는 아주 언짢은 못난 것으로 내다봤다. 사람을 분발시켜 몸을 버리게 만드는 고약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의(義)을 필요로 하는 세상은 이미 도(道)가 땅에 떨어진 낙후된 세상으로 본 것인데 때문에 유가(儒家)의 덕목인 인의(仁義)는 큰 도(道)가 훼손됐기에 그 소용이 생긴 것이다. 하여 사람이 도(道)를 품어 살고 자연에 따라 산다면 인의의 덕목은 계륵을 넘어 무용한 것들이라 본 것이다.

[慧智出, 有大爲]는 역자(譯者)에 따라 ‘혜(慧)와 지(智)가 생겼기 때문에 큰 거짓이 있게 되었다.’ 고 옮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라오쯔(老子)가 여러 가지를 나열해 언술할 때는 반드시 같은 문법적(文法的) 구조(構造)를 반복하여 쓴다는 것을 상기하면 왜 이런 번역(飜譯)의 오류가 있는지 헤아릴 수 있다. 대도(大道)와 혜지(慧智), 육친(六親)과 국가(國家)는 지켜야 할 가치로서 열거된 것이고, 폐(廢), 출(出), 불화(不和), 혼란(昏亂)은 이 네 가지의 현실의 상태를 드러낸 말이다. 그러므로, 인의(仁義), 대위(大爲), 자효(慈孝), 충신(忠信)의 넷은 이 본래적 가치를 대치한 하위 개념으로 그 파국의 가치를 이른다. 그러므로 이 네 구절(句節)은 같은 구조(構造), 같은 성격(性格)으로 반복돼 그 해석상의 패턴을 일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또 혜지(慧智)가 생겨서[生/由] 큰 거짓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혜지(慧智)가 나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걸 대체하듯 큰 거짓이 들어오게 됨으로 읽어야 맞다고 본다.

이런 네 가지 노담(老聃)이 열거한 근원적인 가치와 관련된 중국 역사의 사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위(衛)나라의 선공(宣公)은 여색(女色)을 밝혀 사족을 못 쓰는 음탕한 인물이다. 자기 아들에게 출가하기로 한 제희공(齊僖公)의 딸 선강(宣姜)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이다. 앞서 위선공(衛宣公)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버지인 위장공(衛莊公)의 첩 서모(庶母) 이강(夷姜)을 건드려 아들을 출산했는데, 왕위에 오른 위선공은 이 아들을 세자로 삼았다. 선강(宣姜)은 바로 이 세자, 급(急)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하지만 며느리로 오게 될 제(齊)나라 공주가 천하절색이라는 말을 듣고 욕심이 생긴 위선공(衛宣公)이 세자를 송(宋)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뒤 며느리가 될 선강을 애첩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성품이 어진 세자는 돌아와 그 사실을 확인한 후에도 아버지를 증오하지 않았다. 또 서모인 선강(宣姜)에게도 어머니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선강(宣姜)에게서도 두 아들을 봤던 위선공(衛宣公)은 세자인 급(急) 대신 선강(宣姜)의 소생 중에서 제위를 물려주고픈 생각이 들었다. 한편 선강(宣姜)의 큰 아들인 수는 배다른 형인 급(急)과 마찬가지로 어질고 착한 사람이어서 급(急)을 친형처럼 따랐으며 대우하였다. 하지만 둘째인 삭(朔)은 이와 반대로 영악하고 이악스러웠다. 선강(宣姜)과 삭(朔)의 참소(讒訴)에 위선공(衛宣公)은 자신의 서모이자 애첩이었던 이강(夷姜)을 자진하게 만들었으며 세자 급(急)을 다시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볼모처럼 파견하였다. 이때 선강(宣姜)과 삭(朔)은 나루터에서 급(急)을 죽일 계획을 세워 자객들을 보냈다. 이 사실을 안 선강(宣姜)의 큰아들 수는 형을 따라가 작별의 회포를 푼다는 이유로 술을 먹여 재운 후 자신이 사신의 깃발을 꽂은 배를 타고 가다 어머니와 동생이 보낸 군사의 손에 대신 죽임을 당했다. 술에서 깬 급(急)은 동생 수의 편지를 읽고 몸을 피하는 대신 동생이 걱정되어 배를 타고 뒤를 쫓다가 자신도 수의 목을 벤 군사들을 만나 목숨을 잃었다. 이 두 왕자의 이야기는 라오쯔(老子) 이전의 역사에서 가장 심금을 울리는 그러나 자효(慈孝)의 막장 드라마다. 하지만 이런 극적이고 가슴 뭉클한 자효의 안타까움이 발생하게 된 것도 위선공(衛宣公)이나 선강(宣姜) 그리고 삭(朔)과 같이 불인자(不仁者)들이 저지른 육친(六親) 사이의 불화(不和)가 먼저 왕성했기 때문이다. 자효(慈孝)가 훌륭하고 끌밋한 것보다 그 불화(不和)의 가증스러움이 먼저일 것이니 없어도 될 일을 굳이 만들어 비극에 소용되는 가치를 드러내는 격이다. 라오쯔(老子)가 자효(慈孝)의 아름다움보다 육친(六親)의 불화(不和) 없음이 더욱 중요하다고 일갈하는 것은 이런 자효(慈孝)가 생기게된 이면사(裏面史)를 절절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 역사상 최고(最古)의 충신(忠臣)은 누구였을까. 은(殷)나라 삼인(三仁)이라 일컬어지는 미자(微子)와 비간(比干), 기자(箕子)가 이에 해당하는가 싶다.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王)인 주(紂)가 달기(妲己)에게 홀려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탐닉하며 향락에 빠졌다. 또 잔인한 포락형(炮烙刑)을 즐겨 백성의 원성을 사기에 이르렀다.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앞서 미자(微子)가 주왕(紂王)에게 간하다 이를 제대로 듣지 않자 산속에 숨어 은거하였다. 비간(比干)은 미자(微子)보다 집요하고 끈질기고 주왕에게 간하여 시정을 바로잡고자 주청하였다. 그런 읍소에 가까운 비간을 곱게 보지 못한 달기(妲己)가 주(紂)를 부추겨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구멍이 있다하오니 과연 그런지 한 번 보소서’ 하며 괴언(怪言)으로 꾀었다. 이에 주(紂)가 비간(比干)을 죽여서 심장의 구멍을 실제 세었다 한다. 기자(箕子)는 주(紂)의 숙부가 되는 왕실 인척이었다. 주(紂)의 포악한 폭정을 피하여 광인을 흉내 내고 남의 노복(奴僕)이 되기까지 하였으나 결국 유폐당하였다. 이렇듯 주(紂)의 폭정으로 은(殷)나라의 마지막이 문란하지 않았다면 어찌 은(殷)나라의 삼인(三仁)이 후세에 전승되었을가? 그러함에 충(忠)은 이름에 대한 보답이 참혹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비간(比干)은 왕(王)에게 충언으로 간하다 척살 당한 역사상 최초의 충신으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결국 한 여자의 심심풀이나 화풀이로 심장을 바쳤다. 기자(箕子)는 광인에 빠졌고 노예로 부역했으며 결국에는 죄인으로 고역의 삶을 자처한 경우였다. 미자(微子) 역시 일신의 영달은커녕 세상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하여 역사상 최고(最古)의 의인(義人)은 누구였겠는가? 은(殷)나라의 폭군 주(紂)를 폐출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 주무왕(周武王)의 앞길을 막아서며 그에게 간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라 할 수 있다. 둘은 형제지간으로, 고죽국(孤竹國)이란 나라의 족장 아들이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주무왕(周武王)이 아버지인 주문왕(周文王)의 위패를 수레에 얹고선 은(殷)나라 정벌의 장도(長途)에 오른 걸 목도하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전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효(孝)가 아니고, 폭군이라 하나 천자를 신하가 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고 충언하였다. 주무왕(周武王)의 측근들이 그들을 죽이려 함에 이들을 의인(義人)이라 하여 살려 방면한 것이 태공망(太公望)이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충(忠)과 효(孝)를 간하다가 결국 수양산에서 아사하였다. 은(殷)의 미자(微子)와 비간(比干)과 기자(箕子) 삼인과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인(仁)과 의(義)의 명성을 얻었으나 그 말로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더하여 이런 사람들 이래로 충신(忠臣)과 열사(烈士), 의사(義士)로서 자기 가족과 식솔들이 화평하고 안락하며 자기 몸에 끔찍한 해를 입지 않은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함에 라오쯔(老子)는 인의(仁義)라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허울뿐인 명분만을 분발시켜 그릇되게 몸을 훼손하며 또 그 가족에게 못할 짓의 고통을 드리운다 우려한 것이다. 




제19장 第十九章 樸素 (還淳)

 

 

絶聖棄智 民利百倍 *1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棄利 盜賊無有 

(此三者 以爲文不足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視素保樸] 

少私寡欲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은 백 배가 되고

인을 끊고 의를 버리면 백성은 효성과 자애를 회복하고

기교를 끊고 이익이 되는 것을 버리면 도둑이 사라진다

(혹자에게는) 이 세 가지 말만으로는 글이 부족하다고 여겨

덧붙이는 것이 있게 한다 (다음 말을 덧붙여 둔다)

(물들지 않은) 본바탕을 보고 (통나무의) 순박함을 지켜라

사사로움을 줄이고 바람(욕심)을 작게 하라

 


[補註]

* 1: [죽간본] 지혜를 끊고 교묘한 말솜씨를 버리면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면) 백성의 이득은 백배가 되고, 기교를 끊고 이익이 되는 것을 버리면 (교묘한 솜씨로 이득을 챙길 수 없는 세상을 만들면) (나라를 어지럽히고 해를 끼치면서 이득을 취하려는) 도둑이 사라지고, 거짓을 끊고 꾀를 버리면 (사기꾼이 꾀를 부릴 수 없는 세상을 만들면) 백성은 아이의 순진함으로 돌아간다 (그 나라 백성은 소박하게 살아도 즐거워하리라). (絶智棄辯 民利百倍 絶巧棄利 盜賊亡有 絶偽棄慮 民復季子)

※[노자80장] 적은 백성이 사는 작은 나라에서는 열사람 백사람 몫을 하는 그릇(기기, 인재)이 있어도 쓸 필요가 없고 ~ (소박한) 음식을 달게 먹고 (소박한) 옷을 멋스럽게 입고 (소박한 거처에) 편안히 기거하고 (소박한) 풍속을 즐거워한다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 노자18장: 지혜가 나타나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

- 노자81장:

선한 사람은 말을 잘하지 않고 말을 잘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 노자57장: 사람들의 재주와 솜씨(기교)가 늘어나면 기이한 것들이 더욱 생겨나고 법령이 더욱 뚜렷해질수록 도둑이 늘어난다.

 

[詩說]

희미한

풍금(風琴)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廣野)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김종삼,


소박함은 무지함이 아니고 소박함은 물불 안 가리는 영특함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특(邪慝)함을 멀리하며 하릴없이 사납게 발김쟁이처럼 나대고자함이 아니다. 본장(本章)에서 말하는 성스러움과 지혜를 버리라 함은 교조적인 관념으로 일반 시민 대중을 치대어 그들 본령의 소박함의 근실한 행보를 폄훼함이 아니다. 무턱대고 시기하고 방해하여 천성을 거스르게 하지 말라는 취지에 어린다. 

김종삼의 이 <물통>이란 시편을 읽으면 아스라하고 가만히 먹먹하고 으늑한 밟음과 미묘한 슬픔을 발등 위에 올린 듯하다. 가슴에 직격하는 열렬한 시편도 있지만 이 시는 발등에 올려놓은 새끼고양이처럼 어딘가 미묘하다. 크게 무엇을 말하는 것 같지 않은데 어딘가 광야로인듯 크게 열린 듯하고, 우렁찬 주장을 담은 것 같지도 않은데 고요한 깨우침이 서정을 물들이고 있다. 그러나 내가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소박한 듯 ‘다름 아닌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는 일의 소슬하고 담대한 결행이 있고, 그 모든 숨탄것을 살리는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는 겸손되이 정결한 생명수의 끌어댐이 있다. 또 우리가 사는 지구 땅별의 삶을 거시적으로 그리고 미시적으로 통합해 조망하는 듯한, ‘머나먼 광야(廣野) 한복판’에 선 듯한 그 인생의 소재와 이를 내려다보는 듯한 부감(俯瞰)의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의 서늘한 눈길이 서렸으니 말이다. 

라오쯔의 문장 전체를 관류하며 느껴지는 문장의 뉘앙스 중의 하나는, 완전히 없애고 금(禁)하라는 부분도 있지만, 어떤 주의 주장이나 물질의 추구에 있어 ‘적게 하고 줄이고 작게 하라’라는 다소 절중(折中)적인 유화적인 문장도 다소 등장한다. 완급조절의 뉘앙스가 든 구절도 서려있다. 완벽하게 통제하여 대상 사물에의 추구나 어떤 욕망을 일거에 삭제하듯 없애라는 말보다는 절충(折衷)의 입장을 취할 때가 있다. 이는 노담(老聃)의 문장이 갖는 일종의 현실주의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대척적인 두 양상이나 상관관계를 극단으로 몰고 가지 않고 하나의 완만한 몰입 속에 삶을 진행시키고 싶은 일종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물론 본장(本章) 전체를 아우르는 금지어들은 여전히 완강하고 철저한 단절을 요구한다. 성스러움과 지혜와 인의(仁義)와 기교와 이익추구를 ‘끊고[絶]’ 또 ‘버리는[棄]’ 완고한 결단의 뉘앙스를 유지하는 측면도 자자하다. 그런데 이러한 선언적인 금지에의 청유(請誘)나 권유의 문장은, 그러한 실행과 깨우침의 대가가 절대적인 무위자연의 상황과 결속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자임하기 때문일 때가 자자하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세간 속에서의 성스러움과 지혜와 인의와 기교와 이익의 추구는 너무나 자본주의적 성스러움과 불문율이 돼버린 지 오랜데 라오쯔는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이런 세속적 덕목들이 지닌 어두운 뒷배를 보았다 할까. 개결(介潔)한 무결점의 덕목들로 보이는 것들이 실상은 많은 패악과 분란을 내포하고 있다는 라오쯔의 혜안은 가히 본원적이고 무구하다.  




제20장 第二十章 食母 (異俗)

 

 

絕學無憂

唯之與阿 相去幾何

善之與惡 相去若何 *1

人之所畏 不可不畏 *2

荒兮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我獨怕(泊)兮 其未兆

如嬰兒之未孩(咳)

儽儽兮 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若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澹兮其若海 *3~

飂兮若無止

衆人皆有以 我獨頑似(以)鄙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예’와 ‘네에’하는 대답은 그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선함과 추악함은 그 차이가 어떠한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황량하기가 (아직도) 끝이 없구나.

뭇사람이 큰 잔칫상을 받은 듯 봄날 높은 대에 오른 듯 기뻐한다

나는 홀로 담담하여 아무런 조짐도 없는 것이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이와 같다

풀 죽은 모습은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듯하다

뭇사람 모두 남음이 있으나 나만 홀로 잃은 듯하고

나는 바보의 마음인가 흐리멍덩하여 갈피를 못 잡는다

세상사람은 밝지만 나만 홀로 어둡다

세상사람은 (낱낱이) 살피지만 나만 홀로 두루뭉술하다

알 수 없는 모습은 (출렁이는) 바다와 같고

(높이 부는 바람처럼 아득히) 떠가는 품은 멈출 데가 없는 듯하다

뭇사람 모두 쓸모가 있지만 나만 미련하고 너절하다

나만 홀로 남과 달리 젖어미를 소중히 여긴다 (여기련다)



[補註]

노자48장: 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날로 줄어든다.

* 1: [죽간본,백서본] 아름다움과 추악함은 그 차이가 어떠한가. (美與惡 (其)相去何若)

- 노자58 : 바른 것이 다시 기이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이 다시 요사한 것이 된다. 사람들의 미혹함이여 그 날들이 참으로 오래되었다.

* 2: [죽간본,백서본]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엄한 법으로 다스리는 통치자)도 역시 사람들(백성)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人之所畏,亦不可以不畏人。)

※ [죽간본乙] 구두점 위치에 따라 (1)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人, 寵辱若驚, 貴大患若身. (2)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 人寵辱若驚, 貴大患若身.

- 노자58장 :정치가 두루뭉술하면[悶悶=우매·무지·순박] 그 백성은 순박해지고 정치가 (속속들이) 살피면[察察=분명·명백·구별] 그 나라는 이지러진다.

* 3: [백서본] 어렴풋한 품은 바다와 같고 아스라한 품은 멈출 데가 없는 듯하다.(忽呵其若海 望呵其若無所止)

[하상공본] 어렴풋한 품은 바다와 같고 (바람 따라 물결 따라) 떠도는 품은 멈출 데가 없는 듯하다. (忽兮若海 漂兮若無所止)

[왕필본] 알 수 없는 모습은 (출렁이는) 바다와 같고 (높이 부는 바람처럼 아득히) 떠가는 품은 멈출 수 없는 듯하다. (附言; 澹=水波摇动的样子,)

 

 

[詩說]

그는 머리로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것에게는 그렇다고 하고

그는 선생에게는 아니라고 한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고

선생이 질문을 한다

별의별 질문을 다 한다

문득 그는 폭소를 터뜨린다

그는 모두를 지워 버린다

숫자도 단어도

날짜도 이름도

문장도 함정도

교사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

우등생 아이들의 야유도 모른다는 듯

모든 색깔의 분필을 들고

불행의 흑판에

행복의 얼굴을 그린다.

-쟈크 프레베르,열등생」


[詩說]

순우리말 중에 ‘받자하다(face unreasonableness with generosity)’ 라는 어휘가 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이 괴롭히거나 요구하는 것 따위를 잘 받아 주다’는 뜻풀이가 있다. 요즘의 영악하고 이악스러운 세태가 없지 않은 세간에서 보면 좀 바보스럽기 그지 없고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속이거나 사기치기 쉬운 타입일 수도 있다. 적당히 하수인 취급하기 쉽고 놀리거나 부려먹기 쉬운 경우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받자하다 라는 말을 모니터 화면에 띄워놓고 가만히 숨탄것처럼 들여다볼 때가 있다. 내 골똘한 마음에 이 모두를 거의 쓰고 가신 아니 살다 가신 분이 있다. 바로 어머니다. 당신 것을 거의 챙기지 않으셨고 당신 것을 불리려고 남의 것을 탐하거나 꾀를 내지 않으셨다. 언감생심 그럴 만한 심성이 아니었으니 부처님이 멀면 여기 보살님이고 하느님이 멀면 날개 잃은 이승의 고역을 마다않는 천사처럼 순정하신 어머니가 대역을 해도 큰 무리가 없다. 왜 당신은 그토록 당신의 삶을 살지 않으신듯 보였을까. 몇 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막내가 생각해 보니 조금 희미하게나마 당신은 그게 당신의 지당하고 그윽한 웅숭깊은 삶의 모토였고 그러해야만 삶이 삶 같아질 것을 아신 분이 아니었을까. 남들은 바보 같다고 하지만 그 바보 속에서야 발현되는 삶의 향기가 당신에겐 무엇보다 종요롭고 간절한 이승이었는지 모른다. 몇 번이나 원형탈모로 뻥 뚫린 머리를 주변 머리로 슬쩍 감추시는 심신의 고달픔 속에서도 당신은 늘 희미하게 웃으셨다. 그 웃음은 세상의 그 어떤 명쾌하고 득의양양한 웃음보다 더 드넓고 한순간 그지없이 맑은 이슬을 한낮에도 돋아낼 것만 같은 만연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에 스치기만 해도 나는 한없은 눈물이 돋아날 것만 같았다. 나도 얼마 전에 신경을 좀 쓴 일 때문인가 원형탈모가 와서 피부과에 주사를 몇 달 맞고 있는데, 주사를 맞고 와서 베란다에 나가 앉아 식물들을 무연히 바라봤다. 그럴 때 당신이, 당신의 그 무던하고 너름새 있는 마음이 어디선가 번져오는 것도 같다. 나의 원형탈모의 원인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알량한 속종과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면 당신의 그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던 원형탈모의 환하고 둥근 살갗은 자식들과 지극히 자기 바깥의 것을 챙기고자 노심초사했던 속종의 여파가 아니었을까. 다솜의 심신을 다 써먹고나서도 그 마음을 더 우려낼 것이 없나 고심했던 당신. 그 뒤끝만 같은 당신의 원형탈모는 내내 메워지지 않는 내 마음의 찬연한 블랙홀이다. 지구촌 모든 세상의 어머니가 당신과 멀지 않을 것이다. 

 


 <19세기 서당 사진 >

 


김홍도, <서당도(書堂圖)>, 수묵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당신은 처음 한글을 몰랐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그런 당신께 한글을 가르쳐드렸다. 어머니가 먼저 시작하고 나는 간간이 서포터즈 하는 수준의 것이었지만 거의 유일에게 궁금증이나 답답함을 해소한 것이 막내아들인 내게 닿아있는 모양새였다. 연필에 침을 묻히시면서 종이라면 어디에라도 필사하듯 글자를 쓰던 모습은 감히 어떻게 형언할 수 없는 고요한 긴장과 묘한 거룩이 배어 있었다. 어머니에게 배움은 근심을 무릅쓰고라도 가 닿아야 할 모종의 어떤 밝음의 바탕이었을 것이다. 그 한글이라는 갓밝음을 향해 한글의 모음과 자음, 받침을 구불구불 크게 베껴쓰시는 것에서 라오쯔가 말한 근심과 걱정의 전제라는 ‘학문(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絶學無憂]’라는 말은 그 결이 좀 다를지도 모른다. 당신, 어머니에게 학문이나 큰 배움이라는 세속적 틀거지가 있지는 않았지만 사랑과 모성의 받자하는 마음은 오히려 그 근심마저 기꺼이 받자하는 당신의 몸과 맘의 한 장기부속 같은 것이다. 물론 라오쯔는 해악에 가까운 근심의 폐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방편에서 극단적인 학문으로 대변되는 분별심의 체계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전언을 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인 쟈크 프레베르((Jacques Prévert, 1900년~1977년)의 <열등생>을 보고 있으면 우등생이라는 사회적 경쟁체재의 우월적 가치가 얼마나 협소하고 협량한 토대 위에서 사람들을 몰아세우는가를 바라보게 된다. 한끝 무엇이나 그렇다. 세계 도처의 여러 이념의 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도 무리한 경쟁과 서열 다툼과 계급과 계층의 분포 속에서 소위 우월집단에 속하지 못한 그룹은 늘 마음의 그늘과 분노의 감정 등의 열악한 신분적 대우를 감내하는 사회적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부라는 것의 소위 등수 매김이나 서열 집계는 그대로 사회로 나갔을 때의 또 다른 사회구성원의 계급이나 서열을 매기는 막강한 소스로 자리매김하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시험이나 각종 테스트나 능력검증 같은 것만으로 사회적 지위나 서열이 매겨지는 체계만 우월하고 절대적인가. 누구나 알다시피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선택은 고심을 품게하지만 고심이 진지하고 활달한 자유의 의미를 교섭한 것이라면 더 긍정적인 삶의 유민(流民)으로 자유롭게 낙락한 삶을 도모할 수도 있다. 앞서 어머니의 삶은 고되고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것이 얽매임에서 출발하거나 어떤 가치에 매몰된 억눌림의 삶은 아니었다. 사랑이나 부성애를 포함해 모성애는 자유로운 삶과 굳이 대척적이지만은 않다. 어머니라는 그 모성(母性, motherhood)은 분별적 가치가 아니라 근원적이고 포용적인 가치이기에 굳이 선택적일 수는 없다. 

 프레베르가 말하는 열등생은 점차 세속적 서열에서 밀려난 학습 부진아나 지진아나 사회적으로는 루저(loser)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고 솔직하고 활달한 자기 영역을 개척하는 그런 프론티어의 기미나 기질을 엿보게 한다. 열등생이 한없이 언제까지나 열등생이 아니라 협량한  윤똑똑이의 우등생을 품을 수 있는 열등생의 너름새를 기대하는 바는 이 시의 시안(詩眼)이다. 그런 용기있는 열등생의 준비랄까 자기 가치의 옹립에는 숫자도 단어도 남들의 체제나 기성화된 체계가 지어준 ‘날짜도 이름도/문장도 함정도/교사의 위협에도 아랑곳없이/우등생 아이들의 야유도 모른다는 듯’한 주관을 갖는 것, 그 냅뜰성을 품는 것인데 사실 교육이라면 이런 기본 소양을 먼저 부드럽고 드넓게 똥기게 해야 함이다. 등수나 서열을 매길 때 어쨌든 누구나 다 일등이 될 수 없고 누구나 다 꼴찌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럴 때 우월감과 열등감이 분별심에 기반해 일어나기 마련이다. 프레베르는 이런 서열의 드잡이질 같은 체제나 상황 속에서 그 구성원들이 지향할 수 있는 늡늡하고 낙락한 실존의 지향을 궁구한 듯 하다. 지식체계의 지나친 시비분별의 한계를 넘어 진정한 배움의 가치는 배움을 넘어서는 것, 좀 더 너름새 있게 인생을 즐겁게 하는 실존을 여는 것, 라오쯔식으로는 무위(無爲)을 길러내는 것. 어디 꽃을 가르쳐서 분별시켜서 피워내겠는가. 저 봐라, 빗속에 꽃이 마저 웃는다. 




제21장 第二十一章 從道 (虛心)


孔德之容 唯道是從 

道之爲物 唯恍唯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1~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真 其中有信 

自古及今 其名不去 

以閱衆甫 *2 

吾何以知衆甫之狀哉 

以此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만 따른다 (도로부터 말미암는다)

도라고 하는 것은 어슴푸레하고 어렴풋하기만 한 존재이지만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그 속에 현상이 있고

어슴푸레하고 어렴풋한 그 속에 물질이 있다

어스레하고 어두운 그 속에 (정령이 깃든) 알맹이가 있고

그 알맹이는 심히 참되어 그 속에 믿음(도의 증거)이 있다

예부터 이제껏 그 이름이 사라진 적이 없어

그로써 만물의 비롯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으로 만물의 비롯됨이 그러한지 알겠는가

이로써다



[補註]

노자14장: 이를 일러 형상이 없는 형상, 물질이 없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를 일러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것이라고 한다. ~(성인은) 옛날의 도를 파악하여 오늘날 있는 것을 제어하며 능히 옛날의 비롯됨을 안다.

* 1: [백서본] (숨은 듯 덮인 듯) 어둡지만 그 안에 실상(진리, 본성)이 있고 그 실상은 심히 참되어 그 속에 믿음(진실,확실함)이 있다 (그것의 실존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幼(幽)呵冥呵 其中有請 其請甚真 其中有信) ; 附言) 請=情,

* 2: [백서본] 만물을 따라 움직인다. (以順眾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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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說]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그 생각을 만든 것인가, 아니면 그 생각이 나를 맞아 내 안에 깃든 것인가. 아니면 그 둘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얽히듯 너나들이 상생하듯 갈마든 것인가. 그 생각의 말미암음은 나와 그대라고 하는 숨탄것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의식작용의 한 무성한 끄트머리 혹은 여줄가리의 일단인가. 아니면 나라고 하는 존재와 기운과 몸, 그 혼백(魂魄)에 부딪혀 일어나는 파장이며 현상을 주는 외계의 영향인가. 

도(道)라면 문득 어스름만 같다. 하루의 광명한 시간도 다 좋지만 그런 하루의 광명이 수그러들어가는 저녁의 시점만 같고 저녁의 너름새 같은 공간만 같다. 해가 쨍쨍한 날이나 비가 출출히 내리는 날이나 어스름은 단순히 숙어드는 빛의 분위기만이 아닌 듯하다. 어스름이 찾아들면 하루의 여러 끼 중에 마지막 끼니로 배고 고파온다. 배고픔은 숨탄것들이 자기 보존을 위한 생명의 마련이다. 어스름 속에서 술과 음식과 수다와 대화와 잠과 휴식을 위한 놀이, 즉 놀음이 번진다. 어스름은 하루의 돈벌이와 노동에서 풀려나는 좀 더 나른하고 홀가분한 뉘앙스가 감돈다. 어스름이 도(道)와 같은 것은 불분명한 너름새와 으늑한 뉘앙스와 무엇이나 받아안아 들일 것 같은 밤의 진면목을 여는 하루라는 우주의 그윽한 눈그늘처럼 여겨진다. 어스름은 그래서 본격적인 낮의 노동과 정색으로부터 넘겨받은 밤의 역사를 위한 시그널이다. 물론 도는 낮만의 것도 아니지만 밤만의 것도 아니다. 그런 도(道)를 하루라는 우주의 시공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런 낮과 밤의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것이 어스름이다. 이 어스름은 어느 한 국면을 허물면서 또 다른 한 국면을 이어주는 일종의 분해와 해체이자 연결과 수용의 중개자이다. 한낮의 저묾을 받아주고 한밤을 이끄는 어느 한편의 수용체가 아니라 모두의 연결과 매개의 수용체와도 같은 것이다. 어스름은 그래서 이끼와도 같다. 빛과 그늘을 이어주는 이끼와도 같으니 꽃에도 어울리고 바위에도 어울린다. 도(道)의 분위기로 본다면 이런 뉘앙스가 어스름과 이끼의 번짐에 있다. 황홀의 지경은 확연히 구분된 정체의 완성에서 비롯된다기 보다는 두루뭉수리하고 어렴풋한 그 번짐이 완연한 가운데 오히려 도저한 확장과 결속의 뉘앙스(nuance)의 변전이 드러나고 감춰지고 스민다. 황홀경은 단독자적인 완물(完物)이 아니라 새뜻하게 번지고 옛스럽게 되돌려 반추하는 신구(新舊)의 너나들이이며, 옛 시간과 미래 시간이 오늘에 갈마드는 그 무경계(無境界)의 합성과 해체인 동시에 생성과 소멸의 무한반복이며 변주인 셈이다.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개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인생이 된다

인생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 번 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장석남,수묵 정원9 -번짐」


‘큰 덕의 모습은 오직(오로지) 도를 따른다’는 구절에서 도라는 것이 덕성스러움의 뉘앙스를 품어 번져두고 있구나 싶다. 이 말, 즉 대덕(大德)이란 도의 실체적인 분위기를 두루 반영된 아우라와 같고 실물과 현상 등을 얼러내는 얼[魂魄] 같은 요체이며 그런 실물적인 반열의 정황이지 싶다. 그러니 앞서 말한 도(道)의 아우라를 볼 때, 우리는 그 사물이나 정황 속에 드리운 현황을 꼼꼼하게 그리고 드넓고 웅숭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라오쯔는 ‘어슴푸레하고 어슴푸레한 그 속에 물질(현상)이 있다[恍兮惚兮 其中有物(象)]’ 라고 했는데, 이 어슴푸레함이란 달리 보면 장석남의 시편에서는 '번짐'의 형용(形容)이지 싶다. 사물과 현상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그 모든 다채로운 '번짐' 속에 우리네 삶과 인생, 계절과 밤낮 일월성신의 변화가 도래하는 겨를를 갖는다. 번지지 않으면 지구 땅별의 모든 행사가 다 도루묵과 같고 정체된 것들로는 ‘삶은 번져 인생이 된다’ 고 할 수가 없다. 이러한 번짐의 너름새는 예술적 풍모와 스케일로 보면 ‘음악이 번져 그림이 되’는 영감과 영향의 반응으로서의 인드라망(因陀羅網)을 구성하게 된다. 홀로 독존하고 홀로 이루는 것은 없다. 서로 서로 상의상관(相依相關)을 도모하는 처지로 끝없다. 그러니 어떤 관계에 의지하고 어떤 관련에 자신을 연결지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사뭇 종요로운 일이다. 지향하는 덕성스러운 롤모델을 후덕하게 따르고자 하면 그 또한 덕성스러운 후처가 열리지 않겠는가.

아, 좋은 일이라면, 아니 좋은 일이 확연해지기 전에 기꺼운 마련이 드는 마음의 서슬을 가졌다면, 그 마음은 나 하나만의 것으로가 아니라 적어도 주변 이웃이나 곁의 숨탄것들에게 선사 받은 듯 번져온 것일 수도 있기 마련이다.

호사(好事)는 개인사일 수도 있지만 만사(萬事)로 갈 때 더 돈독해지고 더 드넓어지며 더 항구해질 마련이다. 옭죄서 혼자면 가지려면 그럴 수도 있으나 좀 더 속종을 넓혀 주변이나 이웃에게라도 나눈다면 그 호사는 덕성스러움으로 품을 키운다. 그런 냅뜰성이 있는 ‘삶은 번져 인생이 된다’는 언술, 즉 헌언(玄言)에는 자못 인생이라는 것이 장삼이사 시정잡배나 왈패들이 흔히 가지는 삶으로부터 좀 더 그윽하고 낙락하고 훤칠해질 가능성을 가진다. 그런 번짐, 다솜의 번짐이야말로 나를 더욱 키우고 용약하게 하는 도(道)의 덕성스러움의 현황과 같은 반열이지 싶다. 목백일홍나무의 붉은 꽃차례[花序]가 주변 허공마저 한낮인데 꽃 붉게 물들이고 있다. 맹탕의 허공에다 단장(丹粧)이 열렬하고 요염하니 물들인 식물인지라 그윽이 적막한 물의 꽃불이다. 이 번짐은 곁두리처럼 여름날의 호사로 저 혼자 가지지 않으니 도(道)의 마련이 이런 수생(樹生)에서도 열렬하다.  




제22장 第二十二章 執一 (益謙)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弊則新 [敝則新] 

少則得 

多則惑 

是以聖人抱一 爲天下式 *1 

不自見 故明 

不自是 故彰 

不自伐 故有功 

不自矜 故長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古之所謂曲則全者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굽으면 (오히려) 온전하고

휘면 (오히려) 곧아지고

패이면 (오히려) 채워지고

해지면 (오히려) 새로워지고

적으면 (오히려) 얻게 되고

많으면 (오히려) 미혹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안아 천하의 규범이 되면서도

스스로 내보이지 않으므로 (도리어) 밝혀지고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드러나고

스스로 뽐내지 않으므로 (도리어) 공이 있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오래 간다

무릇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하늘 아래 아무도 그와 다툴 수 없다

옛날에 굽으면 오히려 온전하다라고 한 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참으로 온전히 하여 그곳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補註]

노자36장: 장차 폐하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흥하게 했던 것이고 장차 빼앗으려 함은 반드시 예전에 주었던 것이다.

- 노자10장: 몸을 잘 가꾸고 지키며 하나[一]를 안아 분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와 하나가 된 다음, 도를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1 : [백서본] 성인은 하나[一]를 잡아 천하의 목자가 된다. (是以聖人執一以爲天下牧)

- 노자39장: 임금(후왕)은 하나[一]를 얻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다.

- 노자28장: [백서본] 성인이 (크게) 쓰이면 임금(백관의 장)이 된다. 무릇 큰 마름질(만듦, 도로써 천하를 제어함)은 가름(구별,차별)이 없다.

- 노자42장: 도는 하나[一]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 노자66장: 천하가 기꺼이 그를 추대할 뿐 싫어하지 않는다. 그는 (왕좌를 놓고) 다투지 않으므로 하늘 아래 아무도 그와 다툴 수 없다.

- 노자8장: (성인은) 무릇 (물처럼)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원망·원한을 사는 일)이 없다.

 

 

[詩說]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행복」


세속적인 사랑의 행위든 고결하고 고상한 사랑이든, 사랑은 누군가를 향해 뻗대는 게 아니라 굽는 것이다. 이 단순한 언행이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러 낡고 부패하지 않았다. 이 굽음은 비굴함이나 비열함이 아닌 다수굿한 지향이며 받듦이며 내어줌인다. 즉 으늑한 내어줌이자 가만한 품어안음에 가깝고 도탑다. 

우리나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도자기들은 보면 그 몸통을 받치는 높고 낮은 굽다리, 즉 기명(器皿)의 다리와도 같은 받침부분이 있다. 이 굽다리의 형태를 보고 있으면, 빼어난 도자(陶磁)의 주둥이며 몸통의 몸매가 지닌 전체적인 곡선이며 그 피부 살갗에 그려진 문양이나 그림이며 글씨의 빼어남을 묵묵히 뒷받침하는 부분이다. 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하단부일 때가 허다하다. 그런데 깨어진 도자기 파편을 살피다 보면 유난히 이 굽다리 부분에 눈길이 가고 어딘가 애정이 간다. 사금파리로 흩어진 예전의 몸체의 것들과는 달리 거의 대부분의 굽다리는 그 자체로 고스란하다. 왜일까. 그만치 성했을 때에 온갖 치장이나 신경쓴 부위와는 다르게 오로지 단단하게 자기 몸매를 받쳐줘야 하는 일종의 지지대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이 본래의 도자기나 막사발 그릇의 원래 형태를 가늠하긴 어려워도 그것을 나름 튼실하게 뒷받침하던 굽다리의 투박한 모습만은 어딘가 진솔한 사랑의 행위같다. 몸과 마음이 모두 투여된 굽다리가 받친 자기 몸의 실체로서의 도자기. 남의 눈에 띄거나 화려한 조명을 받지 못했어도 꼭 필요한 도자기의 부분이 아니었을까. 이렇듯 받자하니 자신과 자기 주변을 받드는 일의 종요로움은 가성(假聲)이 아닌 그대로 육성(肉聲)의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의 값어치를 지녔다.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에 있어 그 가장 밑바닥인 굽다리의 기능이나 그 심성은 마치,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다 라는 대전제를 마치 실현하고 있는 기명(器皿)의 하단부의 떠받치는 기능과 유사하다. 그걸 비유적으로든 기능적으로든 굽다리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은근하고 다솜에 잇닿은 부위로 체현된 것이라 바라볼 수도 있겠다.

스스로 가난을 마다하지 않음이니 영영 가난할 수만은 없는 도리이다. 그리움도 그렇다. 그리움은 이기적이고 에고(ego)가 강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적 풍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움이 습습한 사람은 그 염원하고 간원하는 가슴에 라오쯔의 행간처럼 ‘패이면 채워지’는 자연의 소박한 구덩이와 남을 향한 지향의 허심(虛心)을 밝힐 수 있다. 물론 본장은 도(道)가 가리키는 일종의 역리(逆理)나 역설(paradox)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 구체적인 비유는 그대로 실상에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다. 

크게 드러내지 않는 자족적인, 어딘가 슬픔이 어린 듯한 사랑조차도 유치환은 행복의 근원으로 가는 귀결의 포인트나 속종으로 삼는 듯하다. 사랑의 불가능성은 거의 없다라는 전망과 신뢰에 기초해 세계 내적 존재의 실존적 확장의 요소로서 사랑을 도(道)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볼 때 좀 더 끌밋해지지 않을까. 


1.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2.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5.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7.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8.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는 특권도 사라지고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도 끊어지고 지식도 사라질 것입니다.

9.우리가 아는 것도 불완전하고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도 불완전하지만

10.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12.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13.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출처] [공동번역 성경] 고린도전서 13장 1-13절 


원론적인 인용일 수도 있지만 성경에서 사랑에 관해 이렇듯 자상하고 확장적으로 사랑의 의미와 비전(vision)과 가치와 잠재성을 독점적으로 할애한 점은 특이할 만하다. 그만치 사랑의 전지전능(全知全能)의 가능성은 마치 본장(本章)에서 도(道)의 면모와 상당히 부합되는 분위기를 전적으로 내포한다. 하나 특이하고 재밌는 것은 바이블에서의 사랑은 그 자체의 실행적인 가치와 비전을 전달하고 있지만 본장에서의 도(道)는 자연적인 무위(無爲)의 경향을 두드러지게 띠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랑이든 도(道)이든 핵심적인 것은 훼손되거나 결손된 것, 미급한 것과 불의한 것, 갈등에 빠진 것과 미혹한 것 등등의 미완의 것을 채워주고 생동시키는 거대한 웅숭깊은 복원력(restitutive force)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본장에서 말미에 ‘참으로 온전히 하여 그곳으로 돌아가도록 하라[誠全而歸之]’라는 구절에 그 만물에 작용하고 번져있는 복원력의 뉘앙스를 참구할 수 있다. 사랑은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돼 있고 덕성스러움과 도(道)는 그 덕(德과) 도(道)에 이르게 번져있다. 




제23장 第二十三章 同道 (虛無)

 

 

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天地尚不能久 

而況於人乎 

故從事於道者 *1 

道者 同於道 

德者 同於德 

失者 同於失 

同於道者 道亦樂得之 

同於德者 德亦樂得之

同於失者 失亦樂得之 

信不足 焉有不信焉 *2 


말을 적게 하여 스스로 이루도록 한다

(학정 같은)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 내내 불지 않고

(폭정 같은) 소나기는 온종일 쏟아지지 않는다

누가 이런 일을 하는가? 바로 천지이다

천지가 하는 일도 오래 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 하는 일(포학한 정치)에 있어서랴

본디 도를 따르고 섬기는 자는

도와 함께하게 되고

덕을 따르고 섬기는 자는 덕과 함께하게 되고

(도와 덕을) 상실(한 짓)을 좇는 자는 상실과 함께하게 된다

도와 함께하면 도 역시 기꺼이 그(에 맞는)것을 얻게 하고

덕과 함께하면 덕 역시 기꺼이 그(에 맞는)것을 얻게 하고

상실과 함께하면 상실 역시 기꺼이 그(에 맞는)것을 얻게 한다

믿음이 부족하여 불신이 있는 것이다

 


[補註]

노자17장: 으뜸은 아래 백성이 (도를 따라 무위하는) 그(임금)가 있는 줄은 아는 정도이다. 그 다음은 (낮은 덕으로 다스리는) 그를 가까이 여기고 치켜세운다. 그 다음은 (도와 덕을 잃고 엄한 법으로 다스리는) 그를 두려워한다. 그 다음은 (도덕은 물론 법까지 다 잃고 다 무시하고 폭정을 일삼는) 그를 업신여긴다. (임금의) 믿음(정성스럽고 참됨)이 부족하여 (백성으로부터) 불신이 있는 것이다. (임금이) 망설이며 말을 아껴도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루고 (공과 일이 이루어지고) 백성은 저마다 내 스스로 이루었다고 말한다.

- 노자38장 :

도를 잃고 난 뒤에 (낮은) 덕을 내세우고 덕을 잃고 난 뒤에 인을 내세우고 인을 잃고 난 뒤에 의를 내세우고 의를 잃고 난 뒤에 예를 내세운다.

* 1: [백서본] 예로부터 (한결같이) 도를 따르고 섬기는 자는 도와 함께하게 되고 덕을 따르고 섬기는 자는 덕과 함께하게 되고 상실을 따르고 섬기는 자는 상실과 함께하게 된다. 덕과 함께하는 자는 도 역시 그를 얻고 (그에게 베풀고) 상실과 함께하는 자는 도 역시 그를 잃는다 (지나친다). (故從事而道者,同於道;德者,同於德;失者,同於失。同於德者,道亦德之;同於失者,道亦失之。)

* 2: 백서본에는 이 문구가 없음.

 

 

[詩說]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

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

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

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윤동주,별 헤는 밤」 


여기 실물과 실재에 동화(同化)됨이 있기 전에 동경(憧憬)의 아련한 지향의 눈빛이 어린 개결한 시인의 순정한 말들이 있다. 마치 동산 언덕에 노스탤지어에 사무쳐 멀리 눈빛이 가고 사무치는 고개를 가끔씩 떨구는 사슴들이 어른거리는 듯하다. 

시는 그 말부림에 있어 그지없이 순정하고 다소곳하며 말간 꽃대나 식물 줄기를 밀어올리듯 잡음이 없다. 마음의 푯대 위에 단 깃발이라는 것이 있다면 거기 그대로 습윤하듯 마음의 글자가 옮아가 그려지듯 흘려 써질 따름이다. 그리운 그곳에 가 닿고자 하는 그 간절함이 시에 풍경을 더하고 시에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마음 그대로의 순정한 감정을 돋아낸다. 윤동주의 거개의 시편이 다 그렇다. 

흔히 근묵자흑(近墨自黑)이라는 이염(移染)의 자연스러움도 있거니와 시인에게 자신이 유년시절을 더하여 살았던 시공간의 풍광과 가족들, 그리고 귀여운 숨탄것들인 가축들과의 교감은 거의 영원하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의 유난스러움이 아니라 기억을 뚫고나오는 생동하는 새뜻한 영혼의 활물(活物) 같은 것일 게다. 

흔들리고 막막할 때 우리는 무엇을 닮아갈 것인가. 무엇을 영육(靈肉)의 길라잡이나 사표(師表)로 삼아 자신을 조금씩 끌밋하게 틔여갈 것인가. 어둑하고 막연한 가운데 정신의 지표로 삼을 만한 그 무엇이 나한테 그리고 그대한테 어스름처럼 이끼의 푸름처럼 번져오는 순간은 있는 것인가. 빼닮음으로 가는 지난한 과정과 여정을 기꺼이 마중하고 너나들고 하나가 돼가는 과정에서 더 스스로를 먼동처럼 틔어가는 소슬한 순간은 없는가. 그걸 작정한 끝에 다다르려는 운명의 여줄가리라고 하면 안되겠는가. 

여기 젊은 나이에 요절한 순정한 시인의 <별 헤는 밤>이 이렇게 맑게 온 한반도의 자연을 맑고 순정한 동경의 무드로 읊었던 시대는 오히려 엄혹하고 가혹한 제국주의 만행이 만연하였다. 그럼에도 지구를 둘러싼 우주의 대기를 여전히 고장나지 않고 눈물의 종지를 매단 시의 인공위성은 여전히 돌고있는 것. 이것은 무엇인가 하고 일찍 세상을 뜬 시인의 시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것은 지극한 마음의 지향이 그 죽음을 넘어 고스란히 시간의 파괴력을 오히려 다독이며 살아나는 것. 마치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라고 말하는 저 순정한 바람 속에서처럼 동주(東柱)의 시적 지향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자신을 닮아갔고 그 시는 더불어 동주의 심중을 닮아 세상에 천연의 인공위성으로 우리의 지구 땅별의 대기를 돌고 있는 것. 

라오쯔가 말한 ‘도를 따르고 섬기는 자는/도와 함께 하게 되고/덕을 따르고 섬기는 자는 덕을 함께 하게 되는[道者 同於道 德者 同於德]’ 지경이 동주의 이 시편에서도 완연하고 순수하며 순정하게 번져있다. 동주에게 있어 도와 덕은 무엇보다도 그가 시를 쓰는 행위와 그 시 속에 갈마들며 피력하는 그 개결(介潔)하고 정감어린 평화의 세상에 대한 인간적 갈애(渴愛)의 눈물겨움이지 싶다. 순수한 지향과 그윽한 동경(憧憬), 심오한 흠숭의 선망은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일체화의 근간이 될 마련이다. 단순한 흉내가 아닌 그 지극한 도덕(道德)에의 지향은 그 안에 자유롭고 자연스런 만유일체(萬有一體)를 하나하나 이뤄가지 싶다. 살아서 삶으로 다 살아내지 못하고 시로써 다 피력하지 못한 동주의 삶은 미완이라기보다는 차차 후대가 채워나갈 맑고 순정한 여백(space)이지 싶다. 

 



제24장 第二十四章 弗居 (苦恩)

 

 

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其在道也 

曰餘食贅行 

物或惡之 

故有道者不處 [故有欲者弗居]*1 


까치발을 하면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가랑이를 벌리고) 황새걸음 하면 (오래) 가지 못한다

스스로 드러내면 (오히려) 밝게 빛나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면 (오히려) 두드러지지 않는다

스스로 뽐내면 (오히려) 공이 없게 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면 (오히려)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한 것들은 도에 있어서

먹다 남은 밥이나 쓸모없는 짓(혹)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러한 것을 싫어하므로

도를 지닌 사람은 그러한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補註]

노자22장: 스스로 내보이지 않으므로 도리어 밝게 빛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오래 간다.

* 1: [백서본] 따라서 욕심(바라며 구하는 것)이 있는 자라면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그러한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詩說]

왜가리가 물속에 두 다리를 담그고 멍청히 서 있다

냇물이 두 다리를 댕강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왜가리가 빤히 두 눈을 물속에 꽂는다

냇물이 두 눈알을 몽창 빼가는 줄도 모르고


왜가리가 첨벙 냇물 속에 긴 주둥이를 박는다

냇물이 주둥이를 싹둑 베어가는 줄도 모르고


두 다리가 잘리고 두 눈알이 빠지고 긴 주둥이가 잘린

왜가리가 퍼드득 날갯짓을 하며

하늘 높이 떠오른다


아주 가볍게 떠올라 하늘 깊이

온몸을 던져 넣는다

냇물도 놀라 퍼드득 하늘로 솟구치다

다시 흘러간다

―이나명,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


사람들 보기에 근사하고 큰 동물원의 조류 사육장에 있는 두루미나 홍학이나 맹금류를 보면 눈요기는 근사해도 그 안에 있는 날짐승들은 왠지 화려한 듯 해도 추레하고 멋진 듯 해도 어딘가 몬존하다. 너무나 자명하게도 그들에겐 자유와 야생의 활기가 많이 저물었기 때문이다. 아니 자유보다 자연이 없기 때문이다. 인공이 빚어놓은 자연의 분위기만 있을 따름이다. 생육에 필요한 사냥하지 않아도 되는 먹잇감과 여러 나름의 조건들이 있지만 여전히 그 숨탄것들에겐 자연의 하늘이 삭제돼 있다. 그저 철조망 밖으로 비춰지는 이미지의 하늘과 바람과 햇빛이 넘나들 따름이다. 

멀리 북한산이 보이는 서울 은평구의 외곽 한 복개(覆蓋)가 되지 않은 하천을 따라 걸은 적이 있다. 깊지 않은 하천을 내려다보니 그래도 생모래가 비치고 언뜻언뜻 작은 물고기들이 물풀 사이를 갈마들며 숨어들곤 한다. 저만치 댕기머리를 한 왜가리가 언제부터인가 골똘히 물 속을 노려보고 있다. 나 같았으면 모가지가 뻣뻣하다 못해 굳어질 정도인데 저 황새는 사뭇 긴장감과 묘한 즐거움이 갈마드는 몸짓으로 여전히 말없는 제 몸의 골몰을 즐기는 듯하다. 그렇게 길고 뾰족한 부리로 물고기를 찍거나 잡아올렸을 때의 그 긴 모가지의 휘두름 혹은 허공 중으로의 내두름의 순간은 저나 나나 희열이다. 생동하는 열락(悅樂)이란 저처럼 고된 기다림과 자연스러운 치열한 관망과 스스로 자처하는 본능의 자유가 있음이다. 

이나명 시인의 시편 첫연 첫줄에 들어있는 ‘멍청히’라는 부사어가 갖는 파급력이랄까 파생력은 자못 그윽하고 싱싱하고 돌올하다. 비난처럼 보이지만 저 멍청함이 어쩌면 도(道)가 지닌 뉘앙스에 가깝다 해야 하나. 냇물에 서서 반쯤 넋이 나간 듯 서 있는 왜가리에 대한 시인의 묘사는 처음엔 비난과 폄훼처럼 보이지만 그 궁극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면모에 대한 에두름의 표현이다. 날쌔고 명민하며 영악한 날짐승의 것이 아니라 어딘가 덜떨어진 듯한 어중간한 ‘냇물이 주둥이를 싹둑 베어가는 줄도 모르’는 그야말로 좀 멍청한 날짐승으로 겸손되이 표현될 때의 소박한 겸어(謙語)의 일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어딘가 모자란 듯한 왜가리가 ‘퍼드득 날갯짓을 하며/하늘 높이 떠오른다’ 는 대목에서 반전은 완연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새장이나 우리에 갇힌 새들의 허장성세에 가까운 걸음걸이와 여유로움도 이 대목과 견주어서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멍청하고 어딘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냇가의 물멍에 빠진 듯한 왜가리는 자신이 원하는 순간엔 지체없이 ‘하늘 높이’ 떠오를 수 있는 자족적이고 자유로운 짐승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볍게 떠올라 하늘 깊이/온몸을 던져 넣는’ 멋진 비행을 한다. 외부의 시선으로 보기엔 한때 멍청하고 어딘가 우둔한 듯한 지상의 숨탄것인 듯한데 꼭이 그렇지만은 아닌 것이다. 자신의 결심과 결행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던 것이다. 하고자 할 때 할 수 있고 하지 말고자 할 때 하지 않을 수 있는 자기 결행의 자유의 소속이었으며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숨탄것인 왜가리. 

그런 왜가리를 한없이 낮춰보고 갖은 장난을 지폈던 ‘냇물도 놀라 퍼드득 하늘로 솟구치다/다시 흘러’가는 것이다. 외부의 누군가의 시선이나 관념에 구애되지 않고 어떤 단편적인 험구에 놀아나지 않는 왜가리는 그야말로 도(道)의 일물(一物)이자 그 가만한 번짐이자 비상이다. 

 



제25장 第二十五章 昆成 (象元)


有物混成 [有狀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不改 

周行而不殆 *1

可以爲天下母 *2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強爲之名曰大 

大曰逝 *3

逝曰遠 

遠曰反 

故道大 天大 地大 王亦大

域中有四大而王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섞여 이루어진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이 홀로 서서 변하지 않고

두루 돌아다니며 잠시도 쉬지 않으니

가히 천하(천지,우주)의 어미라 하겠다

나는 (아직) 그 이름을 알지 못하여

자를 지어 도라고 하고 억지로 이름 지어 크다고 한다

크므로 (두루) 가고

(두루) 가므로 (아득히) 멀어지고

(아득히)멀어졌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본디 도가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왕 또한 크다

이 세상에 큰 것이 넷 있는데 왕도 그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補註]

* 1: [백서본] 에는 이 문구가 없음

[왕필본] (1) 두루 다녀도 해태하지 않는다. (附言; 殆=怠) (2) 지치지 않는다. (附言; 殆=疲憊) (3) 위태롭지 않다. (附言; 殆=危)

* 2: [백서본] 천지의 어미라 할 수 있다. (可以爲天地母)

[죽간본·왕필본] 천하의 어미라 할 수 있다. (可以爲天下母)

* 3: [죽간본] 크므로 휘어지고(구부러지고) 휘어지므로 돌고(회전하고) 돌므로 되돌아온다. (大曰折,折曰轉,轉曰返。)

[백서본] 크므로 (두루) 미치고 미치므로 (아주) 멀리 가고 멀리 가므로 되돌아 온다. (大曰筮 筮曰遠 遠曰反) ; 附言) 筮=遾=相及,

- 노자40장: [죽간본] 되돌아가는 것[返也者]이 도의 움직임(활동)이다.

[백서본·왕필본] 반하는 것[反者]이 도의 움직임(활동)이다. ※ 反=번복, 반복, 회귀, 상반.

※ 죽간본은 반(返)자만 사용(反자 미사용)했고 백서본과 왕필본은 반(反)자만 사용(返자 미사용)하였음.

- 노자65장: 유현한 덕은 깊다. 그리고 아득히 멀다. (아득히 멀어졌다가) 만물과 더불어 되돌아간[反] 다음, 크나큰 순리에 이른다.

 

 

[詩說]

시간은 시간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사물이 저마다의 시간을 갖고 있을 뿐.

나는 자전하면서 그것들 주위를 공전하고

지금 내 주파수는 온통 우라노스에게 맞춰져 있다.


가이아는 지금 온몸이 총체적 파장이다.


저 멀리서 네가 입은 무명 도포 자락

한끝이 하얗게 펄럭인다.

이제 우리의 첫아들,

한 마리의 어린 양이 깨어나리라.

세상의 진흙 꿈들을 헤치고

한 마리 어린 양이


푸른 눈을 뜨리라.

-최승자,시간은」


우리말 중에 ‘돌아가셨다’와 ‘돌아오셨다’라는 말이 있다. 과문(寡聞)한 탓인지도 모르지만, 서양 어법에는 저런 표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냥 가면 가는 것이고, 오면 오는 것이지, 굳이 ‘돌아서’라는 경위(經緯)를 덧붙이는 경우는 흔치 않아 보인다. 하나의 어휘 속에 배경과 경위가 여사여사하게는 아니더라도 행위의 궁국을 표현함에 있어 그 가리워진 전단계를 포함하는 경우란 드물어서 우리말의 말쓰임새가 가만히 신기하고 흥미로울 따름이다. 이 돌아감과 나아감이 혹은 이 돌아옴과 나아감이 하나의 움직씨[動詞]속에 짝패처럼 어깨를 겯고 있음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해야하지 않을까. 즉 전제된 것들과 내포된 것들, 그리고 추진되고 있는 것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움직씨의 기능이란 시간상으로 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 연동(連動)하는 기묘한 동숙(同宿)의 경우라 할 수 있다. 즉 공시적(共時的)이며 통시적(通時的)인 활물(活物)의 언어가 한글에는 작동하는 기미(機微)이다. 이런 우리말의 미세하지만 완연한 시공간적 뉘앙스를 아우르는 움직씨의 너름새를 도(道)의 일단이라 부르면 안 될까. 너르고 깊고 웅숭깊은 도(道)의 움직임과 그 숱한 뒤섞임[混成]의 여줄가리라 부르면 안 될까. 

최승자가 느낀 ‘모든 사물이 저마다의 시간을 갖고 있을 뿐’이라는 일갈 속에 도(道)가 자재(自在)하고 세상 사물과 현상 속에 두루 편재(遍在)하는 정황으로 불러도 좋으리라. 시간은 그렇게 사물이나 공간의 언어로 작동하는 각자의 시간으로 정체화되는 기미를 가지게 되는데, 홀로 자기 것이 없다라는 전언이 바로 ‘시간은 시간을 갖고 있지 않다’라는 놀라운 에피그람 속에 도달한 지경이 아닐까 싶다. 

일찍이 ‘두루 돌아다니며 잠시도 쉬지 않는[周行而不殆]’ 이런 지경이라면 이것은 전원과 엔진의 연료도 따로 없는 만연한 운행과 항구한 변화의 도출이니, 한 마디로 다함이 없다. 죽음도 하나의 변화의 도드라짐이자 꺼짐이며 생명도 하나의 눈뜸이자 매순간의 깨어남의 진작이다. 폐허라고 한들 그것이 어디까지 폐허이고 어디까지 건설인지 때로 그 알 수 없다. 폐허 속에 새로운 다스려 이룩함이 있고 또 그 이룩함 속에 스스로 허물어지는 소멸이 갈마들기도 한다. 그러니 심정적 폐허에만 묶일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폐허 속에 ‘이제 우리의 첫아들,/한 마리의 어린 양이 깨어나’듯 또 다른 생명의 마중을 고대해도 나쁘지 않으리라. 완벽한 도시에 풀과 나무가 적듯 그러나 폐허가 진행된 곳에서는 풀과 나무와 벌레와 이끼와 작은 동물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부여안고 꿈틀거린다. 죽음도 꿈틀거리고 삶도 꿈틀거린다. 시간은 일회용인 듯 싶어도 만회용이고 끝없이 접촉하고 갈마드는 가운데 번지듯 만물에 두루 편재(遍在)하는 즐거운 작당(作黨)만 같다. 그러니 쉬 어그러지고 좌절할 일만 있는 건 아닌 듯 싶다. 모종의 어리숙한 희망이라도 그에게 시간이 아주 없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시간의 눈길을 준다. 곧 그 시간은 ‘푸른 눈을 뜨리라.’ 한다.  




제26장 第二十六章 輜重 (重德)

 

 

重爲輕根 

靜爲躁君 

是以 

聖人終日行 

不離輜重 

雖有榮觀 

燕處超然 

奈何萬乘之主 [奈何萬乘之王]*1 

而以身輕天下 [而以身輕於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묵직한 이는 가벼운 이의 뿌리(줄기)가 되고

고요한 이는 조급한 이의 임금(지배자)이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묵직하여) 하루종일 길을 가도

무거운 짐수레와 떨어지지 않는다

군자는 (고요하여) 비록 화려한 경관이 있다 하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안에서 한가로이 머무른다

어찌 만 수레의 왕(천자)이면서

천하 만민 앞에서 몸(자신)을 가벼이 놀릴 수 있겠는가

가벼우면 뿌리(바탕)를 잃고

조급하면 임금의 자리를 잃는다

 

[補註]

노자45장: 맑고 고요해야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다.

* 1: [왕필본] 만 대의 싸움수레를 가진 주인(군주) (萬乘之主)

       [백서본] 만 대의 싸움수레를 동원할 수 있는 왕 곧 황제 (萬乘之王)

 

 

[詩說]


첫째 갈피


제왕은 때로 신민의 그늘이다.

경들이 용상에서

대하(臺下)에 엎드린 짐을 일으켜

모란 핀 뒤뜰로 인도할 때

짐은 보지 않으련다

조간도 석간도

천리경도

다만 뜰에 호젓이 핀 꽃 사이를 말없이 거닐 뿐.


왕도(王道)는 때로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을.

흉년에 스스로 불태워 죽는

추장 부자(父子)의 없는 외마디처럼

한숨도 병도 초가집도

초가집들이 둘러싼 조그만 낟가리도 없이

떠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을.

 

둘째 갈피


어느 바람의 갈피에선가

해변 한 끝 빛 다한 저녁에

물가의 모래를 잠시 쓸고

흩어진 바위의 아이들을 쓸고

바다를 향해

덧없이 떠 있는 무릎을 꿇었을 때

둥근 물금에 걸려 서서히 사라지는 섬세한 섬들.

누가 생각해 줄 것인가

짧은 저녁에 한없이 엎드린 이 외로움을,

우리 살고 있는 이 조그만 땅 위에

조심히 꺼진 등불들을,

서귀포에서 海州 가까운 末島까지

늦은 저녁 말도 콘세트 속에

조심히 타고 있는 없는 촛불을.

바깥은 달도 없이 천천히

천천히 짖는 바다

우리 願의 오랜 물결

사면에 바람은 분다.


바람은 분다

추억의 배면에서 사라지는 섬세한 섬들

그리고 이 땅,

누가 생각해 줄 것인가

광명도 없고

우리의 어려움을 지켜줄 우리도 없는 하루 이틀을,

우리의 무한을 등지고 선 불 없는 밤을,

없는 큰 성이 무너진

없는 폐허를,


없는 불행을, 없는 생을,

실로 아무도 생각할 때가 없을 것인가.

곡절 뒤에 뜬 소원을,

어두운 하늘에선 불빛 구름장

여기 쓰러진다 저기 쓰러진다

도처에 어둠이 온다.

조심히 무릎 꿇은 채로

쓰러져 쓰러져 아조아조 멀리 해빙기의 흙덩이마냥

동해 황해 다도해 거품처럼 떠다니다

어디엔가 넌지시 잡혀

온몸이 온통 황홀로......

바람은 분다.

-황동규,비망기」 


 근심의 다른 측면은 신중함이고 번민의 다른 면모는 궁리함이다. 근심과 번민을 어리석은 것으로만 치부해 멀리 내치려만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경박함과 치졸한 속단의 연속을 드러낼 소지가 있다. 자충수를 두는 것은 자신과 주변을 어지럽히고 고통에 연루되게 하기도 한다. 불필요한 근심과 염려, 잡념에 가까운 번민을 끌어안을 필요는 없지만 신중함과 침착한 고요함은 크고 작은 섭정(攝政)의 그윽한 마음자리이지 싶다. 

시편에서 ‘그리고 이 땅/ 누가 생각해 줄 것인가’ 라는 구절은 평범한 언술처럼 보이지만 그 내막은 그야말로 너르고 깊은 보살핌과 다스림에 대한 간원과 생각의 조망에 닿아 있다. 짐짓 시인된 자와 군림하려는 왕이 된 자는 너른 시야와 적확한 판단이 서는 고요한 눈썰미와 그윽한 생각의 함량을 지녀야 한다. 독창적이되 그릇됨이 섞이지 않고 자유롭되 경박함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도처에 어둠이 온’ 것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외면하지 않고 대처하는 생각의 너름새를 열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왕이 되는 자는, 혹은 왕이 되려는 자는 짐짓 ‘천하 만민 앞에서 몸을 가벼이 놀릴 수 있겠는가[而以身輕天下]’ 라는 신중함의 가치를 피력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모든 제왕이든 황제가 되는 위정자가 현실에서는 ‘제왕은 때로 신민의 그늘이’ 되는 지경도 없지 않다. 그들은 백성된 이들의 치하나 우러름은커녕 오히려 걱정거리의 태산이 되기도 하니 이는 그야말로 통치자의 큰 민폐가 아닐 수 없다. 활달한 것과 경솔한 것의 구분이 정치에 있어서 각별한 주의를 요하는 대목이다. 

통치자는 자기 삶을 돌아보기에 앞서 백성과 신민의 삶을 먼저 돌아봐 그들의 삶을 위한 자신의 삶의 지향으로 삼아야 한다. 백성을 살리는 길이 짐(朕)을 살리고 살아가야 할 길이요, 라고 말하고 행하는 군왕이 경박하지 않은 왕도의 일단이다. 그것은 마치 ‘해빙기의 흙덩이마냥’ 백성들의 삶과 풍속 안으로 통치의 영양분이 스미고 번지는 것, 그래야만 조촐하게나마 태평성대의 기미(機微)가 보이고 그 촉이 섰다 하지 않을까. 그런 소슬한 다스림의 기운이 있는 가운데 무참히 굶주리고 병들고 죽는 이가 없는 보살핌의 활성이 일어나니, 시르죽던 풀들조차 이슬을 받아 다시 허리를 펴는 새벽의 시공간은 무릇 황홀이다. 이런 도(道)의 어스름과 다스림이 황홀의 아우라(aura)속에 만물에 서려 깃든 듯하다 하지 않은가. 그럴 때 왕도 신민도 나라의 숨탄것들마저도 짐짓 ‘온몸이 온통 황홀로’ 물들어가는 기대의 지평을 갖는다.  




제27장 第二十七章 曳明 (巧用)

 


善行 無轍跡

善言 無瑕謫 

善數 不用籌策 *1 

善閉 無關楗而不可開 

善結 無繩約而不可解 

是以聖人 

常善救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故 

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不貴其師 不愛其資*2 

雖智大迷 

是謂要妙 [是謂眇要]


잘 가는 걸음은 자국을 남기지 않고

잘 하는 말은 흠이 없고

잘 하는 셈은 산가지를 쓰지 않는다

잘된 잠금은 문빗장을 걸지 않아도 열 수 없고

잘된 묶음은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 없다

이로써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하므로 버려지는 사람이 없고

항상 사물을 잘 구제하므로 버려지는 물건이 없다

이를 ‘빛을 가린 밝음’또는‘은은한 밝음’이라 한다

본디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도우미이다

그 스승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 도우미를 아끼지 않는다면

비록 지혜롭다고 해도 크게 미혹해질 것이다

이를 일러 묘한 요체라고 한다

 

[補註]

* 1: 가장 좋은 책략은 무책(꾀가 없음, 획책하지 않음)이다.

- 노자77장: 이처럼 성인은 자신의 (천하를 구제하려는 어진) 덕행을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 노자62장: 도라는 것은 ~ 선한 사람의 보배이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사람이 선하지 않다 해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 노자49장: 나는 선한 사람은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선하게 대하니 (나는) 선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 2: 그 밑천(도우미)을 아끼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詩說]

싸리꽃을 애무하는 山(산)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

-안도현,공양」


 ‘잘 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것은 라오쯔에게 있어 무척 애써서 고생 고생해서 몸과 마음을 헐어가듯 다쳐가면서 병들어가면서 부러 명예나 이재를 얻듯 얻어가고 소유해 쌓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런 것이라면 굳이 노자에게까지 구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 것이 아닌 듯하다. 라오쯔는 그렇게 ‘잘 하는 것’은 분명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다침이나 상처에 이름이 없이 그 자신과 그 주변과 그 주변 너머의 모두에게도 무리가 없는 자연스러움, 즉 자연스럽게 이루고 나누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라오쯔가 본장에서 ‘잘 하는 것’으로서의 비유랄까 견줌이 될 만한 것이 무어냐 하고 묻는다면 단연 자연을 참구하라 하지 않을까. 그러니 자연에는 잘잘못이 따로 없음이다. 왜냐면 편견이 애초에 개입되지 않았고 인간의 분별심에 기초한 여러 관념이 덧씌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인간은 잘잘못의 분별도 그렇지만 잘하는 것도 누구와 누구를 곧잘 비교하길 잘 한다. 사람을 사람에 비교하는 것은 그 좋은 결과보다 그 안 좋은 영향이 더 비등해지는 경우가 자자하다. 사람과 사람은 비교하게 되면 그 진정 잘하고 못함을 떠나 다른 몬존한 감정과 옥생각들이 끼어들 여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영향에 대상이 따로 있을까마는 그런 안 좋은 감정이 개입될 경우라면 차라리 그 자리에 자연(nature)을 두는 게 어떤가. 자연이 일으키는 변화와 흐름을 두고 비꼬는 감정이나 철없이 깎아내리고 폄훼하는 시기심이 그리 앞서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연만큼 좋은 끌밋한 대상이나 선생이 없음이니, 우선 배움과 끌밋한 선례를 느끼고 깨우침에 장애가 서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이 잘 한다, 라고 나는 애써 말한다.  

안도현의 시편은 그런 자연물과 자연현상을 소유의 형태가 아닌 나눔과 공유의 형태로 보는 끌밋한 시선을 지니고 있다.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벌의 날갯짓 소리’가 저 산벌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주변과 사람에 나누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은 구수하고 구순하다. 그러니 그런 날갯짓 소리도 도량형을 써서 ‘일곱 근’으로 실물화하였다. 또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도 어쩌면 모두의 공동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부분은 이런 향기의 진행이 ‘몰래’라는 부사어(副詞語)를 통해 더욱 극진해지고 늡늡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부러 뽐내듯이 생색을 내는 의도성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발성의 자연 행위라는 점이다. 이런 자연스러움의 행위와 연동은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이나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 구천 발’로 완연해지고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로 오히려 고요한 들끓음을 선사한다. 모든 자연물이나 자연의 숨탄것들이 보여주는 움직임과 변화의 스펙트럼은 그것이 시인에게는 우리네 생명을 받은 것들에 일종의 나눔의 양식으로 보아냈기 때문이다. 

공양(供養)이라는 말은 다 알다시피 부처님께 음식물과 재물 등속을 바치는 것이지만, 이것은 곧 모두의 살림으로 환원되는 선순환의 불교적 양식인 셈이다. 잘 하는 것은 혼자 잘 하는 것이 아니듯 불교의 공양의식은 모두의 살림으로 번져가는 공양(共養)의 마음바탕이다. 모두가 살고 모두가 잘 살아가도록 의기를 북돋는 겨를을 내어줌에 다름 아니다. 한 마디 말 속에 백 마디 천 마디 이상의 내어줌과 위로함이 있는 말이란 그 덕성스러움과 웅숭깊은 사랑을 품고 전제하였을 때이다. 어쩌면 말을 잘 한다, 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데 큰 무리가 없는 것이며, 그것은 곧 침묵을 잘 하기-잘 써먹기-때문이기도 하다. 




제28장 第二十八章 恆德 (反朴)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 

知其榮 守其辱 *1~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2 

故大制不割 


수컷(의 기질)을 알면서도 암컷(의 성품)을 지키면

천하의 냇물이 된다

천하의 냇물이 되면 항구한 덕이 떠나지 않아

(조화가 지극한) 갓난아이로 되돌아갈 수 있다

흰 것을 알면서도 검은 것을 지키면

천하의 본보기(법식)가 된다

천하의 본보기가 되면 항구한 덕과 어긋나지 않아

(흑백의 차별이 없는) 무극(본바탕)으로 복귀할 수 있다

영화로움을 알면서도 욕된 것을 (거두어)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항구한 덕이 가득 차게 되어

(영욕의 구별이 없는) 순박함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통나무가 흩어지면 그릇(만물)이 된다

성인은 이를 써(임용하여) 임금(백관의 장)이 된다

원래 큰 마름질(만듦)은 가르지(구별, 차별하지) 않는다

 


[補註]

노자61장: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고 천하의 암컷과 같다. 천하의 모든 것이 모여들어 섞이는 곳이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긴다. 고요함을 위하여 으레 아래가 된다 (아래에 자리한다).

- 노자55장: 갓난아이[赤子]는 ~뼈는 여리고 힘살은 부드럽지만 주먹을 굳게 쥔다. 아직 암수의 하나됨을 알지 못하면서도 불알이 성내니 (타고난) 정기(싱싱한 기운)가 지극한(충만한) 것이다. 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음조의) 조화(어울림)가 지극한 것이다.

- 노자10장: 기를 오로지하여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이[嬰兒]처럼 될 수 있겠는가.

* 1: [백서본乙] 깨끗함을 알면서도 더러운 것을 (거두어) 지키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항구한 덕이 가득 차게 되어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별·차별이 없는) 통나무의 소박함으로 돌아간다.(知其白,守其辱,爲天下浴。爲天下浴,恆德乃足。恆德乃足,復歸於樸.)

- 노자41장:지극히 깨끗한 것은 마치 더러운 듯 보인다.

* 2: [백서본] 성인이 (크게) 쓰이면 임금(백관의 장)이 된다. 무릇 큰 마름질(만듦)은 가름(구별,차별)이 없다. (聖人用 則爲官長 夫大制無割) ; ※ 大制=以大道治理天下<=以大道制御天下 by 河上公注.

- 노자22장: [백서본] 성인은 (가르거나 차별하지 않고) 하나를 잡아 (하나를 안아, 하나로 안아) 천하의 목자가 된다.

 

 

[詩說]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 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 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는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 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준다

-문태준,노모老母


여아(女兒) 계집애가 여학생을 지나 낭랑 처녀를 지나고 그 아가씨가 여인이 되어 한 남자를 만난다. 그 만남 이후에 제 뱃속에 새끼를 드리우면 그도 엄마의 반열에 봉긋해진다. 여자라고 다 엄마가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드넓고 웅숭깊은 모성은 그 작고 여리고 몬존한 몸과 맘을 가리지 않고 신축자재(伸縮自在)한 대지의 모신(母神)을 옹립하기에 이른다. 여인의 몸에 밴 새끼는 훗날 왕이나 크게는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극(極)하게는 세기의 연쇄살인범이 되기도 하며 장삼이사(張三李四)의 평범하고 선량한 이 땅의 시민으로 인지상정을 품는 이가 되기도 한다. 어떤 자식이든 그 자식을 버릴 수 없고 모른 체 할 수 없으며 지옥으로 내칠 수도 없다. 

늙은 어머니는 새색시 적 젊은 남편이란 사내를 거쳐 그와 낳은 새끼들의 장성한 품으로 이제 쪼글쪼글해지고 허리가 그윽이 굽기도 했다. 머리엔 눈발이 앉아 사철 떠나지 않는 잔설만 같고 더러 검버섯이 핀 몸매는 오랜 나무와도 같고 이끼가 번진 바위의 늡늡한 침묵도 서렸다. 그러나 그 눈에는 늘 자식이 서려 있어 눈부처처럼 떠나지 않는 마음이다. 

 참된 어머니에겐 따로이 옹립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없다. 어머니는 그 자체로 발현되는 사랑의 눈물 덩어리이기에 그저 눈물에서 벋어나온 팔과 다리와 손으로 그 자식을 위한 보탬과 말 없는 헤아림이 돋아날 따름이다. 다리가 굽고 손가락이 휘도록 논밭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주변 둘레에 새끼들에 도움이 될만한 일들을 끌어모아 자신의 나머지 노동을 불태운다. 무엇이나 그렇다. 신은 세상 곳곳에 당신을 둘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다고들 하는데, 그것이 신의 신탁(神託)이든 아니든 아주 적절한 말로 들린다. 

칼 세이건이란 우주 과학자가 ‘이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에 우리 인간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우주 공간에 대한 낭비’라고 했듯이 어머니는 이 광대무변한 세상에 내려진 새끼들에게 가장 가까운 신(神)의 반열이지 싶다. 젖을 물리고 미지근하고 때론 찬물에 밖에서 몸을 씻기며 용돈을 주고 유치원을 보내고 때로 등짝을 후려치기도 하는 왜장녀 같은 어머니가 그리울 때가 있다. 우렁우렁 큰 울음으로 악동의 속종에 격변의 천둥소리를 되살려낼 때가 있다. 당신은 왜소하고 작은 몸이지만 그 몸 안에는 천뢰(天籟)의 용마(龍馬)가 내달리고 있는 거나 아닌가. 

어머니는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 든 오무래미이지만 그 무엇이든 다 받아먹듯 다 받아안는 '큰 골짜기써 우리 맘에 죽지 않는다[谷神不死]' 병든 아들, 잘난 아들, 돈 많은 딸, 영특한 딸, 평범하기 그지없는 자식들 할거 없이 그 어머니는 자신의 골짜기에 품었다 세상에 다침없이 내놓고 살기를 걱정할 따름이다. 그것이 어머니라는 골짜기의 속으로 흐르는 하염없는 눈물만 같다. 

세상을 한때 쥐락펴락했거나 난세의 영웅과 호걸로 그리고 세계 정치사의 한 획을 굵게 그은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위정자, 그리고 문화와 예술 등 사회 각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면면들. 그런 남녀 인물들을 낳고 기르고 그 키워낸 것은 저 ‘수컷을 알면서도 암컷을 지켜낸[知其雄 守其雌]’ 바탕의 오롯함에서 비롯된다. 그런 여자의 몸이지만 어머니의 큰 계곡으로 거듭남[爲天下谿]이니 그 도량으로 졸렬한 성질을 똥기고 일깨워 나름 세상사에 일떠서는 인물을 돋아낸 것이다. 수컷과 암컷의 조화로움을 알고 협량한 치우침에 머물지 않는 도량을 세상의 어미라 부를 밖에 없다. 이런 모든 것의 모두를 위한 어미된 것들을 일러 라오쯔는 ‘원래 큰 마름질은 가르거나 차별하지 않는다[故大制不割]’는 것으로 본래 미립이 나듯 내다본 것인가. 




제29장 第 二十九章 自然(無爲)


 

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不可爲也 不可執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故物

或行或隨

或歔或吹 

或強或羸 

或挫或隳 

是以聖人 

去甚 

去奢 

去泰 


장차 천하를 얻어 마음대로 다루고자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천하는 신기한 그릇이라

빚을 수도 없고 움켜잡을 수도 없다

빚으려고 하면 망치고 움켜잡으려고 하면 놓친다

본디 천하 만물이란

어떤 것은 앞서 가고 어떤 것은 뒤따르며

어떤 것은 새근새근 숨 쉬고 어떤 것은 가뿐 숨을 내쉰다

어떤 것은 굳세고 어떤 것은 파리하며

어떤 것은 꺾이고 어떤 것은 무너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극단을 버리고

사치를 버리고

교만을 버린다

 


[補註]

노자57장: 천하를 얻는 일은 무사(아무 일도 벌이지 않음)로써 한다.

- 노자64장: 성인은 억지로 함이 없으므로 (무위하므로) 망가뜨리는 일이 없고 움켜잡으려고 함이 없으므로 잃는 일도 없다.

~그러한 까닭에 만물이 저절로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 이루도록) 도우며 감히 억지로 하지 않는다.

- 노자67장: 그러나 오늘에는 검소함을 버리고 넓히려고 한다. ~그리하면 다 사멸하고 만다.

- 노자30장: 전과를 거두었다고 으스대지 (교만을 떨지) 않도록 한다.

 

 

[詩說]

너무 많은 공장들

너무 많은 음식

너무 많은 맥주

너무 많은 담배


너무 많은 철학

너무 많은 주장

하지만 너무 부족한 공간

너무 부족한 나무


너무 많은 경찰

너무 많은 컴퓨터

너무 많은 가전제품

너무 많은 돼지고기


회색 슬레이트 지붕들 아래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연기

너무 많은 복종


너무 많은 불룩한 배

너무 많은 양복

너무 많은 서류

너무 많은 잡지


지하철에 탄 너무 많은

피곤한 얼굴들

하지만 너무 부족한 사과나무

너무 부족한 잣나무


너무 많은 살인

너무 많은 학생 폭력

너무 많은 돈

너무 많은 가난


너무 많은 금속물질

너무 많은 비만

너무 많은 헛소리

하지만 너무 부족한 침묵

-앨런 긴즈버그,너무 많은 것들」


소위 천하(天下)를 얻으려 하는 사람들, 그 위정자나 폭군이나 교주들이 하는 첫번째 방식은 무언가 많은 소유의 방편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래야 실제적인 다스림과 지배력의 바탕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지배력은 현실이고 현실적인 지배력은 이런 물질적 수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은 이런 세계 쟁취나 패권의 성향들은 크게 간과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그런 좌지우지의 통제력이 항구하지 않다는 점이다. 파시스트들의 패권주의는 그 쥐락펴락하는, 또는 쥐락펴락 하려는 맹주(孟主) 노릇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오쯔의 일갈처럼 천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며 한 마디로 ‘천하는 신기한 그릇[天下神器]’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과 그릇된 소유욕으로 제패되고 쉽게 다루어질 천하의 하찮은 기명(器皿)같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인간의 야심을 되짚어보게 하는 신묘한 기명(器皿)으로 인간의 헛됨과 덧없음을 담아 보일 요량인지도 모른다.

앨런 긴즈버그(1926~1997, Irwin Allen Ginsberg)는 이렇듯 무진장한 재력과 무력과 각종 권력의 막대한 소유를 통한 세계패권의 몰염치와 그 불가능성뿐만 아니라 세계 시민사회가 처한 문명의 현황으로는 진정한 세계 내적 평화의 통합도 요원하다는 메시지를 깔고 있다. 즉 천민자본주의의 팽배와 그것의 당연시(當然視) 속에서는 평화의 자연스러운 조합이나 순행, 그 천연의 흐름이 어그러진다는 경고를 두고 있다. 우리네 세계 문명의 흐름과 현황을 보는 앨런의 시각은 간명하고 단순하다. 너무 많은 것과 그러나 너무 부족한 것을 대별하며 나열하고 있는 것. 너무 많은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의 팽배가 앞으로 가져올 파국의 징조와 그 불안, 그리고 그걸 우려하는 시인의 언어는, 금지되어야 할 것들의 항목들이 불온하게 우리 세계 시민의 삶 도처에 만연해 가고 있다는 우려 섞인 경고음이다. 

‘너무 많은 철학/ 너무 많은 주장/하지만 너무 부족한 공간/너무 부족한 나무’라는 구절에서 넘쳐나는 것 대신에 우리가 채우고 심어야 할 것들에 대한 대책이 어느 새 자연스레 스며있다. 나무로 상징되는 자연의 부족함, 자연과 격리된 삶의 황폐함과 관념에 치우친 주의주장의 난무를 지적하는 시인은 ‘너무 많은’ 것과 ‘너무 부족한’ 것의 조화로움을 자연스레 촉구하는 듯하다. 오랜 타들어가는 듯한 가뭄이 비를 촉구하듯이 수사를 곁들이지 않는 간명하고 명징한 시어로 새삼 우리 문명사회를 질타하듯 촉구한다. 너무 많은 것을 줄이고 너무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상시적인 노력과 마음의 기울임이 얼마나 종요로운 것인가는 두말할 것이 없다. 이 커다란 지구촌 사회라는 생명 공동체의 유지와 활력을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이 결코 너무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없다. 왜냐면 그것들 각자는 대척되는 상대방을 채울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반되는 것들은 그 자체적인 자제와 결단에 의해 스스로 금지되고 자정이 돼야 하는 처지인 셈이다. ‘너무 많은 살인’은 너무도 많은 살의의 금지와 활인(活人)으로만 대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앨런 긴즈버그의 시가 그러는 것처럼 우리는 이 ‘너무 많은’ 것들과 ‘너무 부족한’ 것을 삭제하고 채워나가는 실행적인 몸짓과 맘짓이 있어야 한다. 이 시의 시행들은 전부 문장의 서술부가 없다. 그러나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구절들 속에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실행되어야 한다는 시인의 의지나 열정이 담겨있다. 이 내포된 각 시행의 서술부에 들어갈 동사(動詞), 그 움직씨를 우리 문명사회에 호출하고 공동의 연대로 실행해 나갈 일만 남아 보인다. 




제30장 第三十章 不強 (儉武)


 

以道佐人主者 

不以兵強天下 *1

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后 必有凶年

善者果而已 

不敢以取強 [不以取強]

果而勿矜

果而勿伐 

果而勿驕 

果而不得已 

果而勿強 [是謂果而不強] 

物壯則老 *2 

是謂不道 

不道早已


도로써 임금을 돕는 사람은

무력으로 천하를 강압하지 않는다

그런 일은 되갚아지기 마련이다

군대가 머문 곳에는 가시덤불이 자라나고

군사를 크게 일으킨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

잘 하는 사람은 전과를 거둘 뿐

그로써 감히 강함을 취하지 않는다

전과를 거두되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전과를 거두되 그것을 뽐내지 않고

전과를 거두되 그것을 두고 으스대지 않고

전과를 거두되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을 일러

전과를 거두되 강해지지 않음이라 한다

만물이 강해지면 곧 노쇠하니

이를 일러 도(리)에 어긋난 것(무도함)이라고 한다

도에 어긋난 것은 일찍 사라진다

 

[補註]

* 1: [백서본] 군사력을 사용하여 천하에서 강해지려고 (천하의 강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不欲以兵強於天下)

- 노자31장: 병기는 군자의 연장이 아니다. 마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쓰는 연장이다. ~ 전승을 찬미한다면 이는 살인을 즐기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 뜻을 얻을 수 없다.

- 노자76장: 단단하고 굳센 것(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여린 것은 삶의 무리이다. 이 때문에 무력이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강하면 부러진다. 억세고 단단한 것은 아래에, 부드럽고 여린 것은 위에 자리한다.

- 노자4장: 여리게 하는 것이 도의 쓰임새(작용)이다.

* 2: 만물은 더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곧 (더 빨리) 노쇠한다(죽는다) ; 附言) 壯=增强, 老=衰老 혹은 死去

노자에서 항용하는 성인은 도의 실천적 의지가 개진된 일종의 도의 페르소나로 보는 것도 일견 타당하다.

성인과 도가 얼마만큼 일치하여 두동지지 않고 조화로운가는 굳이 따지지 않아도 좋다.

도의 실체적 인물이 성인이고 성인의 실체적 행위(무위)가 도라고 등가의 공식을 적용할 수 있을까 싶지만, 도는 성인이라는 실체를 통해 그 웅숭깊고 보편한 경지를 문득문득 드러낼 뿐인 때도 있다.

 

 

[詩說]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그러면 몰래 감추어 둔 대포와 

대포 곁에서 잠드는 병사들의 숫자만 믿고 

함부로 날뛰던 나라들이 우습겠지요 

또한 몰래 감춘 대포를 위해 

눈 부릅뜨고 오래 견딘 병사에게 달아 주던 

훈장과 

훈장을 만들어 팔던 가게가 똑같이 우습겠지요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그러면 전 세계의 시민들이 

각자의 생일날 밤에 

멋대로 축포를 쏜다 한들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  


총구가 꽃의 중심을 겨누거나 

술잔의 손잡이를 향하거나 

나서서 말릴 사람이 없겠지요  


별을 포탄 삼아 쏘아댄다면 

세계는 밤에도 빛날 테고 

사람들은 모두 포탄이 되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세계의 각종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이세룡,세계의 포탄이 모두 별이 된다면」 


어떤 목적이나 이데올로기나 주의 주장에 의한 것이든 전쟁은 이룩함이 아니라 파괴함에 연결돼 있다. 새로운 달성과 구축이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어마어마한 살육과 엄청난 파괴의 도미노가 이뤄진다. 이 너무 당연한 얘기는 그러나 세계의 전장에서는 단 한 마디도 지켜지거나 숙고가 되지 않는다. 전쟁을 기획하고 전쟁을 지휘하며 전쟁을 승인한 사람이 그 전쟁을 통해 얻게 될 것들보다 오래 살지 못한다. 그 전쟁의 결과로 새로 소유하고 건설하고자 하는 세상의 국면보다 오래 살지 못한다. 아니 어느 전쟁광(戰爭狂)도 제대로 천수를 누리지도 못한다. 제대로 파괴 뒤에 새로 건설한 체제에 편입되기도 전에 스러지고 말지도 모른다. 

 전쟁은 명분을 가진 파괴일지는 모르나 그 전쟁의 참화를 보면 그 명분이 얼마나 궁색한 것인지는 세계 시민이 모르는 이가 없다. 그런데도 전쟁을 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근원으로 돌아가면 욕심 때문이다. 욕심보다 오래 사는 생명은 없는데도 욕심이 그리는 환상을 위해 제 생명의 유한(有限)을 까먹는다. 망각만큼 싫증을 모르는 것이 없는가.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이세룡 시인의 시편은 전쟁에 동원된 모든 것들을 가만한 우스개거리로 만드는 미소가 있다. 라오쯔가 세계 제패의 야망과 그 부작용과 폐해에 대해 당연히 말하는 것과 더불어 이세룡 시의 상상력은 전쟁의 수단을 이제 새로운 화해의 산물로 바꿔보고자 하는 놀라운 전환의 힘이 드리웠다. 여기엔 어김없이 ‘별’이 등장한다. 아 손 닿지 않는 막막한 저편에 반짝이는 저 별들을 아끼고 귀히 여김은 그것이 무용한 빛남, 그 무용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정화시키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무용한 것으로 ‘포탄’으로 대별되는 가혹한 수단을 대체하거나 무력화하는데 쓰이기를 간원한다. 급기야는 ‘세상의 각종 포탄이 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순정한 바람까지 들이댄다. 그야말로 별이 된 포탄으로 ‘ 세계의 시민들이/각자의 생일날 밤에/멋대로 축포를 쏜다’는 상상은 실현가능성의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를 평화의 무드 속으로 전입시킨다. 아무리 그럴 듯한 명분과 이데올로기를 가지고서도 궁색하기 그지없는 전쟁은 그 자체로 무도(無道)하다. 본장(本章)은 어떠한 전쟁의 성과나 성취도 내세울 거 없이 그 전에 그치고 그쳐야만 한다는 전언이 돌올하다. 전쟁에 쓰이는 모든 파괴의 추진력을 낙락한 여행의 에너지로 돌려쓰듯이 시는 가장 무력한 듯 간원(懇願)의 상상으로 파괴의 관념을 패퇴시키고자 한다. 죽임으로 이룩할 수 있고 덧보탤 수 있는 생명이란 없음이다. (다음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