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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호 Vol.13 - 유종인


[시로 읽는 노자 이야기]

 

노자(老子)와 시마(詩魔) 2

 

제6장 第六章 浴神 (成象)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縣縣呵其若存]*1          
   用之不勤                             

 

골짜기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그윽한 암컷(현묘한 여신)이라 한다
   그윽한 암컷(현묘한 여신)의 문을 일컬어
   하늘과 땅의 뿌리(우주의 근원)라고 한다
   아득하여 있는 듯 없는 듯하나
   그 쓰임(작용)은 끝이 없다 (소진되지 않는다)

 

[補註]
   - 노자39장 : 신은 하나를 얻어 영험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 충만하다.
   - 노자25장 : (도는)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이 ~가히 하늘과 땅(우주)의 어미라 하겠다.
   - 노자1장 :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게 된다) ~더욱 그윽하고 아득한[玄] 곳에 이르면 온갖 묘함이 나오는 문[門]이 있다.
  *1 : [백서본] 까마득하고 아스라하여 있는 듯 없는 듯하나. (縣縣呵其若存) ; 縣縣=遥远貌,
     [왕필본] (1) 끊기지 않고 이어지며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綿綿若存) ; 綿綿=连续不断貌,
  (2) 미세하여 (미묘하고 은미하여)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 綿綿=微细 微弱, 

 

[詩說]
   ‘그윽한 암컷’을 일컫는 현빈(玄牝)은 삼라만상을 돋아내고 주재하는 것을 지칭한다. 염소나 양의 암컷처럼 다산성(多産性)의 짐승 어미를 비유적으로 거느리기도 한다. 
   무한한 암컷, 무성한 암컷, 무량한 암컷을 여는 상징어가 노담에게 있어 곡신(谷神)이다. 산꼭대기나 산마루도 아니고 골짜기 신이라니. 이 절묘한 비어있음의 채움이라는 공간성의 비유야말로 작금을 물론 앞으로도 무수한 내용을 채우고 만족시킬 구조의 이미지로서의 큰 상징어로 오롯하다. 그러므로 현빈(玄牝)과 곡신(谷神)은 천지간에 벌려있는 숨탄것과 시공간의 것들 중에 도(道)의 작용을 일컫는 메타포(metaphor)이자 그 비유의 짝패이다.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하늘이 죽어서 조금씩 가루가 떨어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나는 아직 내 이름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피뢰침 위에는 헐렁한 살 껍데기가 걸려 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암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손톱이 빠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누군가 나의 성기를 잘라버렸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목에는 칼이 꽂혀서 안 빠지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펄떡거리는 심장을 도려냈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담벼락의 비가 마르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정재학, 「어머니는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어머니를 단순히 여성성이니 위대한 암컷이니 라고 말하기는 불경스럽다. 인간에게만 어머니만 있지 않고 자연 숨탄것에도 어미되는 것은 다양한 생태로 있다. 그것들은 포태(胞胎)하고 포란(抱卵)하고 잉태(孕胎)하며 포육(哺育)한다. 이것은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보다 우선하는 넓고 깊은 혼돈적 본성의 문제만 같다. 본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본래적인 성향이나 성정, 성격으로 모든 창출의 밑바탕의 분위기를 품었다 함이 아닐까.
 어머니와 촛불의 절묘한 결합은 정재학의 시편에서 어떤 간난고초 속에서도 그 모성적 본능, 즉 그 본성의 절대성과 파워를 단번에 육박해 보여준다. 세속의 절대적 권력이나 재력이나 체력이 아닌데도 ‘어머니’는 여전히 그 ‘밥’을 ‘촛불’로 ‘지으시’는 소슬하고 늠연한 존재다. 어머니라는 주체의 행위는 과거의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앞으로도 여러 앞날 미래에도 항존할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의 모든 자식들, 그야말로 크나 작으나 앳되거나 젊거나 늙거나 그 슬하의 새끼들의 ‘밥’을 조리차하는 일은 늘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현재가 주재하는 일로 시간의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새끼를 기르고 먹이는 일의 한정 없음은 시공간의 제약을 최소화한다. 그것이 어미된 자의 마음씀과 육체적 조력, 즉 걱정이고 노파심이고 버릴 수 없는 자식 생각의 내리사랑이다. 어미된 모든 이는 이 번민을 받자하니 해소하려 않고 최소화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들수록 그 자발적 근심이 강화되고 그윽해진다. 현묘하다. 세속의 숱한 스트레스와는 다른 차원의 기꺼운 고통의 연장선상이다. 어머니는 그래서 현세적으로 궂겨 돌아가셔도 여전히 그 웅숭깊은 근심과 노심초사로 인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자식들 보기엔 안달복달하는 어미와 아비의 모습에 그 자체로 환멸스러울 때가 있지만 그것이 다솜을 엮어가는 몸과 맘의 프로세스다. 세련되고 고고한 클리셰가 있는 드라마적인 사랑만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 안달복달하는 다솜의 모색은, 자식들 마음과 몸 속에서 다시 그 강화된 모성의 간곡함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몸은 궂겨도 그 다만 형상의 사라짐이 있을 따름이다. 그 자식된 자의 마음과 몸에 여전히 유전하는 다솜의 포용과 포육과 산출의 곡신(谷神)으로 살아난다, 되살린다. 어머니는 애틋하게 추억만 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식된 것들 숨결 그 숨탄것의 몸과 맘 속에서 여전히 실행되고 변주되고 주변과 이웃으로 번질 영육의 유전자로 불사(不死)를 조금씩 돋아낸다. 죽어서도 살리는 바가 있고 아파서도 이쁜 여지가 있으며 쪼들려서도 호활하게 활짝 펴는 긍지의 방편이 있다. 참된 어미는 그래서 겉으로는 가난의 권속을 거느렸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들을 그윽이 품어 너르고 깊게 내어주는 코스모 우주를 지녔다. 그러니 세상 모든 어미는 웅숭깊은 곡신(穀神/谷神)이자 다솜이다. 다함없는 다솜, 그 사랑의 소슬한 옛말이 어찌 오늘의 말이 아닐까. 
   시인이 보는 어머니는 어떤 극한의 세리머니가 일어나도 그 상황에 주눅들지 않고 몬존해지지 않는다. 오롯이 ‘촛불로 밥을 지으’시는 그 한 가닥 여리게 흔들리는 가는 불길의 미미함 속에서 굴하지 않는 되살림의 근기(根氣)를 불러내 밥을 지어내신다. 끝없이, 여전히, 건너뛰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무슨 대가나 보상도 없이, 오로지 그것이 어미의 새끼라는 것으로 무엇이나 지어낸다. 촛불로 지어내는 밥은 무엇이나 되고 될 마련의 무한한 곡신의 가능태이며 생활과 우주의 교감적 잉태의 전조(前兆)인 것이다.

 

 


   제7장 第七章 无私 (韜光)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                                             
   後其身而身先 [退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耶                       
   故能成其私           

 

하늘과 땅은 장구하다
   하늘과 땅이 길고 오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살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길이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도
   자신을 뒤로 물리지만 (오히려) 자신이 앞서게 되고
   자신을 (세상의 공명) 밖에 두기에 자신이 항구히 보존된다
   이는 성인에게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럼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루(게 되)는 것이리라

 

 [補註]
   - 노자66장 : [왕필본] 성인은 백성 위에 오르고자 할 때 반드시 말로써 자신을 낮추고 백성 앞에 나서고자 할 때 반드시 자신을 뒤세운다.
  [죽간본] 성인이 백성 앞에 있을 때는 자신을 뒤로 세우고 (함부로 나서지 않고 머뭇거리며) 성인이 백성 위에 올랐을 때는 말로써 자신을 낮춘다.
   - 노자49장 : 성인은 언제나 (사사로운) 마음이 없다.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 노자19장 : (백성은)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바람)을 작게 하도록 하라
   - 노자77장 : 하늘(자연)의 도는 남는 것에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데에다 보태준다. (하지만) 사람의 도인 즉슨 그렇지 않다. 모자라는 데에서 덜어내어 남는 데에다 바친다. 누가 능히 남는 것을 가져다 천하에 바치겠는가. 오직 도를 터득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베풀고도 제 것으로 삼지 않고 공을 세우고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처럼) 성인은 자신의 (천하만민을 구제하려는) 덕행을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詩說]

고통은 짧기를 바라고 기쁨과 쾌락은 오래 가기를 바란다. 내 안에서보다는 나와 나를 둘러싼 것에서 본인에게 그것이 오기를 바란다. 또 그렇게 기꺼이 주워지는 기쁨의 원천이기를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욕망한다. 그러나 이것은 쉽게 이뤄지지 않고 오히려 갖은 욕망에 따른 괴로움과 기대치와 초조함과 불안을 야기시키곤 한다. 희망에 따른 기대치의 기쁨과 욕망의 성과를 내고 싶은데 그것은 쉽사리 나와 그대 앞에 척하니 당도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래서 기쁨을 추구하고 그에 걸맞는 노력을 했음에도 오히려 기쁨에 따른 긍정적인 현상은 도래하지 않고 오히려 아득한 쪽으로 되고 말았다. 왜 그럴까. 근본적으로는 채우려는 형식의 의식구조와 행동 패턴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다 못 채워지는 것도 아니고 다 안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완결된 듯이 완벽하게 충만하게 채워지는 기쁨이나 즐거움이 지극한 쾌락의 전형을 완충하지도 못한다. 왜 그런가. 그것도 역시 같은 대답과 질문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일부든 전체적인 것이든 채워지는 형식의 기쁨에 대한 의식구조와 거기에 반응하는 행동 패턴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양동이나 커다란 독에 물이나 술이나 곡물을 채우는 방식으로의 우리 마음과 육체의 항아리는 늘상 허기를 면치 못한다. 왜 안 채워지지, 왜 이만큼만 채워도 기쁨이 그닥 마뜩하지 않을까. 남들에 비하면 크게 뒤처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항용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여러 형태의 쾌락은 비교 수치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 주관의 수치 속에서 자재(自在)하는 대상일 따름이다.
 만족의 형식과 패턴을 바꿔야 한다. 노자는 그렇게 말했다. 채우지 말고 채워주라. 이 단순한 말의 커다란 함의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죽비(竹篦)의 서늘함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엔 커다란 음험한 밑그림이 들어있다. 적어도 이천 여년의 격절과 간극의 전지구적인 대부분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말이다. 그 한 예가 경쟁 위주의 서열화된 계층과 계급의 자본의 편중을 들 수가 있다. 자본주의며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지구촌 거의 모든 나라나 지역이나 공동체에서는 거의 그렇다. 승자독식에 가까운 경제력의 편중을 시장의 물신(物神)은 능력과 공정한 경쟁의 대가라고, 그 정당한 경쟁 속에서의 창의적인 획득의 결과라고 말한다. 물론 그런 부분이 상당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말 자체가 기반이 된 연결된 존재의 구성이다. 독식과 잠식의 구조 속에서 경쟁에 낙오하거나 저조한 성과를 낸 구성원은 철저하게 외면하고 북돋우지 않으면서 더 루저(loser)의 잠재적 집단에 내몬다. 불행하고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는 인간의 형식과는 대척적이면서도 인류는 이 시스템을 크게 바꾸지 못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한마디로 이기심과 탐욕 때문이다. 소유의 편중이 주는 우월감과 다른 사람의 박탈감을 기반으로 한 독식의 쾌감에 중독돼 있고 점차 이 중독을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일등한 자를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일등한 자들만이 잘 살게하는 시스템의 구조를 재고하고 회의(懷疑)해야 함이다. 분노하지 않으면 그 대상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더 교활하게 업그레이드된 채 고착화가 된다. 이런 지구촌 사회 전반의 소유와 경제와 경쟁의 룰 속에서는 오직 욕망의 성과만이 그리고 그 실질적인 획득의 결과만이 우선시하게 된다. 과정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목적이라는 천민자본주의의 교주(敎主)가 내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경쟁과 목적달성의 숭배의 수단만이 팽배하게 된다. 철저하게 자기 것, 자기 위치, 자기 능력, 자기 소유를 바탕으로 획득적 쟁탈전의 야차(夜叉)가 되길 은연중에 중용한다. 다양한 쟁취의 메뉴얼과 폭압의 테크니션이 개발이 되고 상대를 찍어 누리기 위한 여러 모멸의 방식들이 개발된다. 인간이라는 관계의 숨결이 점점 무색해지고 무참해진다. 이런 방식의 승자나 기득권층들에게 존재의 깊은 열락(悅樂)은 소유와 획득, 과시와 허장성세의 사치로서는 쉽게 가 닿을 수 없다. 움켜쥐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존재의 과시 앞에 나는, 스스로 채우지 말고 채워주라, 는 노담(老聃)의 말 건넴은 서늘하고 그윽하다. 한 나무 아래 빈 그늘의 공간을 어찌 소유의 유무나 획득의 정서로만 가늠할 수 있으랴.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 만은 살려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조금씩 내어주고 하나씩 나눠주고 얼마씩 내려놓는 경우라면 어떤가. 일반적인 선행의 방법에 기초한다. 무언가를 채우는 방식에서라면 이것은 어마어마한 어리석음의 대방출이고 퇴행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메이저 그룹의 물질적 세속적 사회적 대우나 생활과 비교해 보면 마이너 그룹을 단숨에 무시하고 폄하하기 딱 좋은 인류 문명 시스템 상의 우열관계로 고착화시켜 놓았다. 그러나 다시금 살펴보면 마이너 그룹이 메이저 그룹을 높여주고 마이너 그룹이 메이저 그룹의 명예를 돋워주며 마이너 그룹이 메이저 그룹을 풍족히 먹여 살린다. 세속에서야 대척적(對蹠的)인 관계로 보지만 그 근원을 노장적인 관점에서 헤아리면 상보적인 겨를이 서려있다. 
   다시금 들여다보면 마이너 그룹이 메이저 그룹을 길러낸다. 못 하니까 덜 떨어졌으니까 덜 아름다우니까 덜 능숙하니까 마이너 그룹은 이 지구촌 사회에서 부족한 대우를 받는 것이라는 기본 전제만 인정하고 해체하면 그들은 메이저 그룹의 기반이며 둥지이고 터전이기도 한 것이다. 마이너 그룹의 근원적인 희생과 양보와 양해와 수긍 속에서 메이저 그룹은 더불어 사는 대상이 된 것이다. 메이저가 끌고 가는 것 같아도 마이너가 안받침하며 끌어주는 희생의 견인차인지도 모른다. 
   시편에서는 그 각 연(聯)의 문장 말미에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로 반복 재생된다. 무엇을 가졌는가 묻는 것인데, 그 가짐의 내용물은 한마디로 자신의 에고(ego)를 앞세워 욕망과 욕구를 채우는데 매몰되지 말고 자신의 소중한 것마저 내어주라는 것이다. 이 자기 것을 내어줌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홀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장구하게 하는 우주적 이법의 체현인 셈이다.
 인생의 마이너리거에게 포기와 체념과 실력의 열등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채워가는 소유적 욕망의 패턴과 다른 비움의 형식이다. 이 비움의 형식을 과감하게 넓혀가고 깊이 번져가면 나눔과 기꺼이 내어줌의 숭고한 만족이 찾아든다. 채우지 못하고 오히려 비웠는데도 채우는 것 이상의 만족이 두둑해질 때가 있다. 풍족해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든 물질이든 나눔으로써 차오르는 낙락한 속종이 있다. 하늘과 땅의 천지자연이 장구(長久)함은 노자는 스스로 채우지 않음의 역설에 있음이다. 채우지 않고 오히려 채워주려는 저 비움의 충일함 속에 함석헌 옹이 말한 스스로 ‘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니, 그 사람을 라오쯔 식으로 성인이라고 한들 무슨 큰 두동지는 면이 있으랴.   

 

 

 

제8장 第八章 治水 (易性)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予善天] *1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가장 훌륭한 덕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할 뿐 다투지 않는다
   물은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무르니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삶에 있어 낮은 땅에 처하길 잘하고
   마음 씀은 연못처럼 깊고도 그윽하길 잘하고,
   베풀 때 천도처럼 하기를 잘하고,
   말할 때는 그 믿음직함이 넘친다
   정치를 할 때는 그 바로잡음을 잘하고
   일할 때는 능력과 능률에 맞게 잘 하며
   거동할 때는 때를 잘 살펴 한다.
   무릇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원망)이 없다


  [補註]
   - 노자66장 : 강과 바다가 수많은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천하가 기꺼이 성인을 (왕으로) 추대할 뿐 싫어하지 않는다. 성인은 (왕좌나 공명을 놓고) 다투지 않으므로 하늘 아래 아무도 그와 다툴 수 없다.
   * 1 : [백서본乙] 줄 때의 선은 (사사로움 없이 베푸는 맑은) 하늘을 본받는 것이고

 

[詩說]
   ‘바로잡을 때의 잘함은 잘 다스리는 것’이라는 구절에 있어, 정치의 원류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한자 상의 바를 정(正)과 정치를 행한다 할 때의 다스릴 정(政)은 그 근원이 같다고 한다. 정치의 표면적이고 근본적인 지향이 세상을 바르게 하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그 정치 행위를 통해 일어나는 세상에 대한 다스림이 또한 물의 흐름과 같다. 옛부터 제왕이나 황제의 통치행위의 가장 기본은 현실 속에서 치수(治水)가 가장 먼저였다. 정치의 잘함에 대한 비유로서의 물의 이미지일 뿐만 아니라 실제 통치행위의 가장 주안점 또한 물을 잘 다스리는 치수정책과 실행이 치세(治世)의 으뜸이었다. 물을 잘 다스리는 군주나 제왕만이 백성들의 아낌과 존경을 받았다. 그들 자신의 통치 재위의 순탄함과 장수 여부도 여기에서 기원했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나는 이 시를 처음 어렸을 때 시골 국민학교 사택 허름한 다락방에서 보았던 것 같다. 무슨 여성잡지 한켠에서 화보와 함께 보았던 것 같은데 왠지 서늘한 끌림이 있었다. 시를 알지도 못했고 시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시기에 여성지 속의 세미 누드나 혹시 볼 수 있을까 호기심을 여는 찰나의 일종의 곁불 아니 곁물의 시였던 셈이다. 시를 몰랐음에도 이 서늘한 시의 물길은 줄곧 내 팍팍하고 우울한 정서에 청수가 되곤 하였다. 이상하게 물이라면, 물에 관한 어쩌면 최초로 대면한 시편에서 장차 내가 나아가 살아갈 세상의 팍팍함과 간난과 불모성을 감성적으로 예감하게 해준 시편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결코 녹록하지 않은 세상에 물이라는 이미지가 갖는 근원적인 해갈과 해결의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갈마들었던 것이다. 그 우울한 듯 그러나 환한 즐거움의 원천이자 천성 같은 동경과 풍경 같은 실제의 아우름이 있다. 물과 관련한 정서는 이렇듯 크고 작은 물의 너름새와 거기에 관련된 기억 그리고 그 물로 연관된 몸의 실질, 정신과 기분을 길러낸 숱한 자연의 풍치와 풍운(風韻)에 원천적인 도래샘을 대고 있다.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 또한 물이 아니면 바삭!하고 한순간 흙먼지로 돌아갈 미이라의 편일 수 있지만 피를 돌리고 검고 영롱한 눈빛을 반짝이고 섬섬한 손가락의 가만한 떨림과 붉은 입술의 요염을 지어내고 있는 것이 물이다.
어렸을 적 두 번이나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음에도 현실 속의 물은 공포의 것일 때도 시원한 해갈과 환희와 오락의 매개이자 그 여줄가리일 때도 있다. 범박하게 생명과 죽음이 같이 하고 공포와 환락이 갈마들며 생활과 풍류가 같이 일어나는 곳이 물이다.

  

  

강희언,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종이에 수묵, 23.5×15.7cm, 국립중앙박물관

 

인재 (仁齋) 강희안(姜希顔, 1419∼1464)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바위 위에 엎드린 선비가 물을 내려다 보는 그림이다. 아호가 인재(仁齋)는 왕족의 일원이면서 시서화 삼절에 모두 수승(殊勝)했다고 한다. 단종 복위의 혐의를 받고 세조한테 고초를 겪다가 풀려났다. 벼슬을 내려놓고 재야에 은거하며 풍류적인 화필에 소요한 문인화가의 반열이라 볼 수 있다. 이 화폭은 어딘가 거칠게 대상을 묘파해내는 이런 스타일은 당대 절파화풍(浙派畵風)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굳고 굳은 바위 위에서 유연하고 부드러운 물의 흐름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 마디로 물구경이 그윽하고 완연하다. 물은 여러 근원적인 생각과 뉘앙스를 촉발한다. 물 흐름을 내려다 봄에 망연한 무아(無我)에 가까이 갈마들며 세속의 번다함을 몰각하는 가만한 열락을 열어주기도 한다. 여울물은 일반적인 번뇌와 망상과 잡념을 씻어주는 고요의 물질로 맴돌며 가만히 휘돌아 유유히 흐른다. 머리에 바람을 쐰다는 것을 나는 물을 본다는 것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고금의 모든 풍류는 물과 시공간으로 낙락하니 인접해 있다. 바위 위에 턱을 괴듯 엎드린 선비의 물 구경은 뭔가 다른 새뜻한 존재의 마련이 구상되는 듯한 늠연한 여백을 던져준다. 
   물의 흐름이나 속성을 가만히 헤아려보면 죽음과 생성이 하나로 거기에서 일어나고 또 가라앉는다. 물 자체가 무엇을 담았는가 싶으면 스스로 일정한 형태를 허물어 흐름으로 스스로를 풀어헤쳐 놓는다. 물에는 첨단과 고답이 같이 어울린다. 높은 곳에 자신을 두었다 싶으면 격차를 이용해 세차게 자신을 쏟아낸다. 고정된 형태 속에 잘 적응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궁극적인 형상으로 확정 짓지 않는다. 아집에 사로잡힌 거푸집 같은 물이 아니라 무엇이나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유연성의 ‘아직 처녀인/부끄러운 바다’로 지향하듯 열려 있는 물길이다. 그래서 그것은 화근이 아니라 맛이 좋고 살과 물이 많은 복숭아인 수밀도(水蜜桃)처럼 관계적 대상의 호평을 받는다. 불지르지 않고 위무하듯 적셔준다. 상대방을 증오의 불로 불태워버리지 않고 가만한 물기로 적시며 습습한 도량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물은 궁극에는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를 수 있는 활달한 수용력과 유전(流轉)하는 전개력을 가졌다. 하늘에 오를 때는 가벼움을 탈 줄 알고 땅에 바다에 내릴 때는 진중한 착지력의 무게를 겸할 줄 안다. 환난의 불을 지긋이 눌러 꺼서 고요와 재생을 위한 생명의 환생을 꾀하게 할 줄 안다. 그것이 물의 수용력이자 되살림의 여력이다.

 

물에 담근 가지가 
   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 
   물푸레 나무라지요 
   가지가 물을 파라스름 물들이는 건지 
   물이 가지를 파라스름 물 올리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 
   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 
   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푸레나무, 그 파라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 
   물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 
   그 파라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 
   또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인 것만 같아 
   어쩌면 나에게 
   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가 물을 파라스름 물들이며 잔잔히 
   물이 가지를 파라스름 물 올리며 잔잔히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 
   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 
   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 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김태정, 「물푸레나무」

 

우리의 순정한 시인 김태정이 첫손에 꼽은 나무 노래가 물푸레나무라는 건 어쩌면 선험적인 예감이나 예시에 가깝다. 모든 나무들이 그렇겠지만 물에 대한 친화력이 남다른 물푸레나무에 대한 끌림과 선망이 이런 시편에 물들었음도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 자신 나무와 물의 너나들이가 만들어내는 그 수묵(水墨) 같은 번짐의 교호를 끌밋하고 아름다운 생태로 보았을 것이다. 물이 그렇고 그 물 곁에 있는 나무가 그렇다. 물푸레하면 마치 서로 퍼주듯 그윽이 넘겨주고 그윽이 넘겨받는 베풂의 번짐이 있어 보인다. 사랑이 이러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을 고정된 확고부동한 존재로 여기고 그것을 항구불변의 것으로만 유지하려는 아집은 이 시편에선 적어도 불온한 것이다. 물푸레나무 ‘가지가 물을 파라스름 물들이’ 고 동시에 ‘물이 가지를 파라스름 물 올리는’ 동시적 관계의 뉘앙스는 ‘가난한 연인들이/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하고 끌밋한 다솜의 존재를 여는 일이다. 우리가 흔히 남녀 한 쌍에 대해 ‘서로 잘한다’ 라는 말을 쓸 때가 있는데, 이 말은 대단히 우주적인 형언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은 빛깔은 어디서 왔는가. 시인은 바로 물푸레나무가 삼투압으로 걷어올린 바로 물에서 왔다. 물과 숨탄 것이 서로 잘하는 것이다. 선남선녀가 서로에게 천지간에 낯설게 처음 만났어도 그예 서로에게 거리낌없이 잘 하고 잘 어울리는 것은 그 두 물[兩水]이 잘 만나 어울려 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고 다방면으로 서로 잘 교섭하는 것, 라오쯔의 천지자연은 이런 것에 큰 방점을 찍고나 있지 않은가.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

-장석남, 「물맛」

 

물에 관한 비유이거나 물 그 자체의 너름새 있는 효용이거나 물이 자아내는 수려한 풍광이거나 하나같이 그악스러운 것이 없이 평온하다. 무슨 큰물이 나서 쓰나미로 해안가 마을을 덮칠 때도 있고 역류한 물로 침수에 빠진 마을의 황망한 지경도 있으며 그 풍랑에 좌초한 선박의 참사도 그냥 넘겨볼 수만은 없다. 크고 작은 물난리의 관점에서 보면 물이 마냥 마뜩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물과 아주 멀리 동떨어져 사막의 모래알처럼 버석버석하게 메마름으로 안전한 듯 살 수도 없음이다. 그것은 안전함이 아니라 또 다른 환란의 경우이지 싶다. 그러니 그 정도를 가늠하며 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의 자연스러움이 정도껏 너나들이할 때가 기껍다. 물소리가 자장가처럼 주위를 맴도는 것이면 거기 새소리와 바람소리와 어떤 나무나 산그늘이 드리우는 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물과 함께 생명의 여울이 휘감아돈다. 그만그만하게 기운이 굽이치는 기원이다. 시인의 물맛은 그렇게 한 잔의 해갈이면서 ‘영원으로 이어지는/맨발인’ 물에 대한 오래된 첫만남 같은 육성이지 싶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은 이렇게 물로부터 모두의 시작이자 끝나지 않는 순행의 전말을 허공에 물소리로 걸어두었다. 
   물이 있으면 죽음도 있었지만 다시 태어남도 있고 있어왔다. 이 영원의 덧신을 신지 않는 맨발 도보승 같은 물에게 물맛은 어느 때고 새로 엮어낸 현생과 영원이 서로 똬리를 튼 듯 더불어 풀려있다. ‘사랑에도 죽음에도/써먹어야 할’ 이 물의 풍미를 인간세의 여러 장르로 벤치마킹한 것이 라오쯔의 물에 대한 비유와 실제이다. 그러니 이 물맛은 그 가장됨 없이 그 첨가된 연유 없이 홀로 비추고 홀로 더불어 흐르고 홀로 모두를 받아들이고 낮게 처한다. 그 안에 어디든 수평선이 남모르게 작렬한다. 이러하니 물에 대한 비유이건 실제이건 이 물로부터 숨탄것들이 받는 그 첫맛은 오래된 처음의 연애처럼 무엇이나 기를 듯이 받아안을 듯이 구태연한 것을 씻어낼 듯이 새로이 더불어 들일 듯이 그 물빛 소란과 침묵이 ‘훤칠한’ 것이다.

 

 


   제9장 第 九章 身退 (運夷)


   持而盈之 不如其已        
   揣而銳之 不可長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     

 

가지고 더 가득 채우려 하는 것은 그것을 버리느니만 못하다.
   따지고 더 날카롭게 헤아리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집안에 금과 옥이 가득 차 있어도 그것을 능히 지켜낼 수는 없다.
   부귀를 갖추고 거기다 교만까지 더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길 수밖에 없다.
   공을 이루고 이름을 얻었으면 그만 몸을 뒤로 빼는 것이 하늘의 도니라.

 

[詩說]

아침길 광화문에서 ‘눈물의 여왕’그녀의 장례행진을 본다. 만장이 나부끼고, 악대가 붕붕거리고, 여러 대의 차와 군중이 길을 메웠다. 나는 곰
곰히 생각해 보았다. 죽은 내 아버지도 ‘눈물의여왕’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댔지......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문인들 장례식도 예총 광장에서
더러 있었다. 만장도 없고, 악대는 커녕 행진은커녕아주 형편 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임이었다. 그 초라함을 위해서만이 그들은 ‘시’를 썼다.

-천상병, 「광화문에서」

 

시의 생명력은 풍요와 권력, ‘집안에 금과 옥이 가득 차 있’음[金玉滿堂]의 풍족함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 ‘만장(輓章)도 없’는 죽음의 선친과 ‘문인들 장례식’처럼 ‘악대는 커녕 행진은커녕 아주 형편 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임’ 의 후계를 남김에도 그들의 생은 시를 향해서는 가열차고 올곧으며 그지없이 순정했다. 그 시를 위한 분노는 맑았다. 참 맑은 분노는 세간의 분별심과 증오과 옥생각에 마음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서 어느 순간에 맑고 고요한 계곡물처럼 가만히 우러르게 된다. 
   이것들을 무엇에 쓸 것인가, 라는 세간의 물음은 처음에 분노와 짜증을 자아냈다. 하지만 나중은 아주 재밌고 쏠쏠한 슬픔과 눅지고 다시 말라 바삭해진 과자처럼 마음의 고소한 입맛을 돋게도 한다. 그래 시와 시인을 무엇에 쓸 것인가, 라고 백 번 천 번 물어보는 자여, 그대도 스스로 물어보라. 
   흔한 시정(市井)의 말로 따지고 자실 것도 없이 그들은 시가 좋아 시를 썼으며 그래서 가난했으며 가난한 삶과 명예를 기꺼이 받자하니 했으며 그걸로 가난조차 족하다 하였다. 그런 뒤 자본의 쓸모와는 다른 방편으로 일말의 쓰임이 세상에 번져있음을 아는 독자 제현도 있다. 밥과 권력과 돈으로 계산되는 것과 마음의 어느 허기지고 그윽한 눈길로 가늠되는 것이 종요로운 지점도 있다. 
   시인이 무슨 세속적 명예나 타이틀이 아니라 그 삶 자체의 겨를인 사람에게 있어서 가난은 때로 삶을 깊이 길러낸다. 실존을 깊고 명징하게 터득하게 한다. 아니 시를 길러낸다 해야 할까. 요즘처럼 천민자본주의가 언젠가부터 득세하고 만연한 세상에 가난으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고 지탄의 눈길을 주는 이들에게도 가난에겐 정녕 가난밖에 없겠는가. 감히 가난하므로 그 가난의 드넓은 허한 마음의 그릇으로 세상의 진상을 담아보고 이 소우주의 지구 땅별의 사람 살이를 가만히 떠보는 것은 어떤가. 가득 채운 듯한 욕심의 일시적 충족 상태는 오래 가지 못하고 오히려 담담히 반그늘 드리운 듯 비운 마음일 때 오히려 평온함과 낙락한 기분이 갈마든다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천상 시인의 또 다른 시편은 그런 가난으로 길러낸 의미심장한 생사관이 간명한 역설(paradox)로 가을바람처럼 소슬하니 마음에 감기고 잠기게 한다.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천상병, 「소릉조 -70년 추석에」

 

 

▲천상병(千祥炳, 1930~1993)시인의 생전 탁주 드시는 모습

 

제목이 <소릉조(小陵調)>이다. 소릉은 두보(杜甫)의 아호이니, 두보풍으로 고음(苦吟)으로 지어 읊었다 해야 하나. 고음이라고는 하지만 맑고 쓸쓸한 고음이니 어딘가 화사한 귀퉁이도 잠든 바람처럼 반절의 눈썹이 보일 듯하다.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여비가 없’는 가난이지만 시는 생사를 넘나드는 시인의 축지법으로 생사(生死)를 가붓하니 쥐락펴락하는 호젓함마저 깃든다. ‘부귀를 갖추고 거기다 교만함까지 더하는’ 이들에게 이런 맑은 심성이 인생에 단 며칠이라도 아니 단 몇 시간 반나절이라도 깃들 수 있을까 싶다. 
   이악스럽게 그리고 가멸차게 날카롭게 따지고 경계를 분명히 함은 명민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리 평온한 사람일 겨를은 많지 않다. 소의 하늘의 도[天之道]는 여전히 내어주는 것이요 그 보상을 바라는 의도를 갖지 않으려 함이며 나를 기르듯 남을 더불어 내 것처럼 내 것 같이 아끼려 함이다.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여기서부터 다시 나아가는 고매한 숨결인지도 모른다. 
   시의 공(功)을 이루어 유명세가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세상의 허명으로 물려두고 그 몸과 맘을 소슬하니 지닌 시인은 늘 작고 보잘 것 없는 것과 허우룩한 허기 옆에 사랑과 그리움을 짝패처럼 두었다. 죽을 때까지 라오쯔 식으로 자신을 앞세우지 않으면서 자신을 달리 마음을 비워감에 있어서 동시에 채워지는 시의 겨를이 어찌 가난이라고만 할 수 있으랴.

 

 


   제10장 第十章 无不爲 (能爲)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爲乎*1     
   天門開闔 能爲雌乎                 
   明白四達 能無知乎*2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3 長而不宰             
   是謂玄德                                 

 

몸을 잘 가꾸고 (지키며) 하나를 안아 분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를 오로지하여 부드러움을 이루어 갓난아이처럼 될 수 있겠는가
   우주를 비추는 마음의 거울을 씻고 닦아 티가 없도록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보살피고 나라를 다스림에 무위자연으로 할 수 있겠는가
   천문(콧구멍 또는 마음)이 열리고 닫힘에 능히 암컷처럼 할 수 있겠는가
   밝고 환하게 사방에 통달해도 앎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낳고서도 기르고 키워냄에도 제 것으로 삼지 않고
   베풀고도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고도 채잡지 않음을
   이를 일러 그윽한 덕이라 한다

 

[補註]
   * 1 : [백서본] 백성을 소중히 여겨 보살피고 나라를 바로잡을 때, 앎(지식, 지혜, 지략)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愛民栝國,能毋以知乎) ; 小註) 栝=檃 or 矯正.
   * 2 : [백서본] 밝고 사방에 통달해도 앎(지식, 지혜, 지략)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明白四達 能毋以知乎)
   * 3 : 백서본에는 이 문구가 없음
   - 노자51장 :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생장 발육시키고 무르익게 하고 먹이고 덮어준다. 낳고서도 제 것으로 삼지 않고 베풀고도 기대지 (관리하지) 않으며 자라나게 하고도 채잡지 않는다. 이를 그윽한 덕(현덕(玄德))이라 한다.
   - 노자2장 : [죽간본] 성인은~하고도 (베풀고도) 그것에 어떤 뜻을 두지 않고 이루고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詩說]

우선 문이 열린
   새장 하나를 그리세요
   그 다음에
   무언가 예쁜 것을
   무언가 쓸만한 것을 그리세요
   새를 위해
   그러고 나서 그 그림을 나무에 걸어 놓으세요
   정원에 있는
   또는 산 속에 있는
   어느 나무 뒤에 숨겨 놓으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꼼짝도 하지 말고…

때로 새가 빨리 오기도 하지만 마음을 먹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기도 하죠
   용기를 잃지 마세요
   기다리세요
   그래야 한다면 몇 년이라도 기다려야 해요
   새가 빨리 오고 늦게 오는 건
   그림이 잘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새가 날아올 때엔
   혹 새가 날아온다면
   가장 깊은 침묵을 지켜야 해요
   새가 새장 안에 들어가기를 기다리세요
   그리고 새가 들어갔을 때
   붓으로 살며시 그 문을 닫으세요

그 다음
   모든 창살을 하나씩 지우세요
   새의 깃털 한 끝도 다치지 않게 말이죠
   그러고 나서 가장 아름다운 나뭇가지를 골라
   나무의 모습을 그리세요
   새를 위해
   푸른 잎새와 싱그러운 바람과
   햇빛의 반짝이는 금빛 부스러기까지도 그리세요
   그리고 여름날 뜨거운 풀숲 벌레들의 소리를
   그리세요

이제 새가 마음먹고 노래하기를 기다리세요
   혹 새가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건 나쁜 징조예요
   하지만 새가 노래한다면 그건 좋은 징조예요
   그러면 당신은 살며시 살며시
   새의 깃털을 하나 뽑으세요
   그리고 그림 한구석에 당신의 이름을 쓰세요

-자크 프레베르 (1900~1977),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우리나라 여름에 찾아드는 철새 중에 그 외모가 독특하고 남다른 새인 후투티라는 새가 있다. 흔히 추장새라고 일컬어지는 이 새는 머리의 깃모양이 이색적이고 화려해서 그렇게 별명이 붙여진 듯하다. 그런데 이 후투티를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는데, 마침 그 부리엔 새가 특히나 좋아한다는 땅강아지가 물려 있었다. 어렸을 적엔 여름 저녁 백열등 불빛에 수시로 날아와 부딪히던 녀석들인데, 요즘은 여간해서는 보기가 어렵다. 가끔 호수공원 같은 데서 후투티 녀석을 볼 때면 반가운 마음에 한참을 조심스레 침묵으로 지켜본다.
어렸을 적엔 야생의 새를 우연히 줍거나 포획해서 가축처럼 기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변변한 새장도 없는 마당에 소쿠리 같은 데 일단 모셔놓고 지렁이며 작은 벌레들을 무던히 잡아다 주곤했다. 더러 먹기도 하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단식투쟁을 벌이다 시르죽는 녀석도 종종 보았다. 그 후부터는 기르고 싶어도 그냥 모른 채 지나치곤 하는 경우가 생겼다. 새끼 새 같은 경우는 울음소리를 듣고 어미가 다시 찾아오거나 제 스스로 살길을 모색하느라 숲그늘로 사라지는 경우를 차라리 고대했다.

 

  

 후투티, 여름 철새. (촬영지: 일산 호수공원)

 

곁에 두고 싶고 애완으로 기르고 싶은 욕심에 가두면 쉬 길들여지지 않는 날짐승들은 얼마 못 가 죽고마는 신세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웬만한 야생은 집에 들여 기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르는 일과 같다. 마음의 오지랖을 넓혀 저 나무와 숲과 산 계곡이 녀석들을 대신 길러주는 거라 여기면 마음이 더불어 한갓지다. 나보다 유능하고 치밀하며 자연스럽고 늡늡한 자연의 어미 아비가 있는데 내가 그걸 자처하는 것은 그 숨탄것들에게 죽음을 앞당긴다는 것을 똥기게 된다.
   억지 춘향으로 상대를 길들이려는 생각은 뻣뻣하고 줄곧 저항을 부른다. 내 기준과 관념 속에서만 행사하길 바라는 자식이나 친구나 상대방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놔두고 봐야 그 본모습이 고스란하고 여사여사하다. 나와 똑같을 필요도 없고 나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필요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이런 당위론만큼 행하기 어렵거나 잘 안 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거기 그대로 한철 능놀다 가는 여름 철새를 가을까지 겨울까지 잡아둘 수는 없다. 설사 그렇다치면 그 추장새는 아마 시르죽고 말 것이다.
   좀 더 넓게 한반도라는 여름 새장만이 아니라 동남아 혹은 아시아 전체로 확장된 새장 속에 후투티의 행려(行旅)와 그 살이[生]를 지켜봐 줄 일이다. 내 곁에 없어도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때론 허망함이나 소유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아니라 마음의 배포나 냅뜰성을 차차 낙락하게 길러준다. 내가 직접 간섭하고 기르고 통제하지 않는 어떤 것이 오히려 나를 존재의 영육(靈肉)을 웅숭깊게 할 마련이라는 믿음은 나름 지난한 인내와 관심이 따른다. 
    쟈크 프레베르의 <새의 초상>은 비단 새를 기르거나 새에 대한 자유의 관념을 실천하는 일에 한정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나의 주변 그리고 내가 관계를 맺는 대상을 어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인생 그림의 매뉴얼 같다는 생각이다. ‘나쁜 징조’를 불식시키고 ‘새가 노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상대에게 놓인 ‘창살을 하나씩 지’워주고 ‘새의 깃털 하나도 다치지 않게’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 여기엔 여러 세세한 마음씀의 공력이 자연스레 들게 마련이다. 
   ‘좋은 징조’를 향한 나쁜 징조의 감내가 우리 일상과 삶에는 부지기수로 많고 많다. 내가 조급하거나 일방적인 욕망에 휘둘리고 있거나 노력보다는 지나친 바람이 우선한다는 거 스스로 알아채리는 것도 종요롭다. 그래서 ‘우주를 비추는 마음의 거울을 씻는[滌除玄覽]’ 내면의 고요와 심적 거리가 있어야 할 때가 있다. 용기를 잃지 말고 기다림을 나름의 덕목으로 마음에 두는 일이 자기가 바라는 한 그림을 그려내는 완수의 마음바탕임은 여지없다. 
   본문에서는 백성이지만 무위자연으로 나와 주변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음이란 그야말로 진솔(眞率)을 행함일 것이다. 진솔함은 거칠고 투박해도 결국에는 상대방의 감응을 일으킬 마음의 곡진한 바탕이 된다. 시문(詩文)으로 치면 레토릭(rethoric)이나 클리셰(cliche)의 겉 단장이나 미사여구(美辭麗句)가 진솔의 문장을 이길 수가 없음이다. 
   자크 프레베르가 노래한 새의 초상화도 그림을 통해 자유의 사생(寫生)에 이르는 남다른 우여곡절을 피력한다. 새의 초상을 그림 속에 잘 불러내고 잘 길러냄은 그래서 지난하면서도 억지스러움이 없어야 함이다. 억지스러움은 엇나가게 하는 방향인바 자연의 흐름이 아니고 덕(德)의 지향이 아닐 테다. 그림 속에 새를 불러 그릴 때 ‘새가 날아올 때/가장 깊은 침묵을 지켜야 해요’ 라는 대목에서 허다한 말의 수다스러움이 그치고 고요한 바라봄이 얼마나 종요로운 길러냄[生之畜之]인지를 알아간다. 
   시의 대목마다 무수한 기다림이 마치 후렴처럼 깃들어 있다. 이 기다림은 속도의 미덕으로 어찌할 수 없는 여백의 시간이며 숙성과 발효와 변형의 뜸들이는 시간이다. 뜸들인다는 말이 세간에서 부정적으로 쓰이는 바가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냥 길러질 리 없고 그냥 완결되고 번성할리 없다. 기다림이 스승이고 기다림이 심안(心眼)의 여명인 셈이다. 그러고도 다 길러진 그 대상은 ‘자라고도 채잡지 않는 것[長而不宰]’이 라오쯔가 말한 덕(德)의 마련이지 싶다. 그 심덕(深德)은 그러나 몸소 행하고 마음 먹는 가짐에 따라 가볍기도 하고 연습 없이 능란하기도 하구나. 

 

 

제11장 第十一章 玄中 (無用)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 
   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꽂혀 있으나
   바퀴통 속이 비어 있어야 수레에 쓸모가 있다
   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 안이 비어 있어야 그릇으로서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들지만
   그 안이 비어 있어야 방으로서 쓸모가 있다
   그러므로
   유(有)가 이로운 까닭은
   무(無)의 쓸모됨 때문이다
 

[補註]

   - 노자43장 : 그러므로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詩說]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검은 와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 없이 고개를 갸우뚱해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형도, 「어느 푸른 저녁」

 

지구 땅별 위에 모든 숨탄것들은 대기(大氣)의 크고 작은 순례자들마냥 아무 거리낌 없이 꼼지락거리며 활보하는 존재들이다. 대기는 무엇으로 이루어졌지? 라고 묻는 사이 물리적으로 그걸 세세히 밝힌 전문가는 따로이 있어 왔다. 그러나 내게는 그저 무엇으로 있기 이전에 ‘서로를 통과해 가는’ 비어 있는 관습의 통로로서의 ‘없음[無]’의 현존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관습적으로 통과해 가는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는 순간까지도 품는 현존하는 ‘없음으로서의 있음’의 어디에나 배어있는 통로인 것이다. 새들은 하늘의 통로를 쓰고 뭍 짐승들은 땅 위의 통로를 쓰면서 그 비어 있음을 당연한 없음의 번짐으로 왕래하는 것이다.
   기형도의 「어느 푸른 저녁」은 일상의 비일상성을 보아내는 시인의 섬세하고 유니크한 감수성의 국면을 감득하게 한다. 도시적 일상의 무의미성을 깔고 있으면서도 그 일상의 저녁에서 유의미한 감성을 돋아내고 있다. 특히나 ‘통로(通路)’로 상징되는 공간적 특수성에 대한 시인의 입장은 사뭇 섬려하고 어딘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공간과 대기에 대한 시인의 활물화된 감각과 인식은 우리들의 일상적 주변과 환경에 대한 선입견을 새롭게 닦아세운다. 즉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같은 구절에 이르러선 차라리 우리의 지난 일상적 시간이 거의 무감각에 가까웠다는 점을 새삼 상기시킨다. 우리가 활보하는 일상적 시공간이 사실은 이런 ‘푸른 유리병’ 같은 공기로 채워졌다 곧 투명해지는 일이며 ‘대기는/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무수히 내장한 구성적인 환경일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발견을 전해준다. 그러기에 시인은 실제적인 공간이든 심리적인 공간이든 그 존재의 활보(活步)를 위해서는 애써 무엇인가를 향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름의 결단과 결행이 필요한 부분임을 드러낸다. 공기와 대기로 표현되는 우리 일상의 공간들도 사실 따지고 보면 무수한 공간적 입지와 건축물들을 드러내는 무(無)의 다른 상관물이지 싶다. 
   라오쯔가 말하는 없음[無]의 유용성은, 이 장에서는 비어있음 즉 공간적 여유(餘有)의 뉘앙스로 그 비유적 이미지를 수레바퀴 바퀴통의 간극(間隙)에서 유추하듯 빌려오고 있다. 즉 비어있음을 통해 수레바퀴가 땅의 지면을 밝아나가면서 전진할 수 있는 기능적인 활성을 갖는다. 그런 차원에서 수레바퀴의 바퀴통 속의 굴대와 바퀴통 사이의 이격(離隔)의 비어있음을 통해 수레가 전진하고 후퇴하고 멈추는 일체의 유동성, 그 활성(活性)의 기능을 보존한다는 것. 즉 아무 것도 없음으로 치부되는 비어있음의 간극(間隙)이 사물의 움직임을 위한 윤활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 그런 농담을 한다. 만약 하늘이나 빈 들처럼 그곳이 비어있지 않고 바위속처럼 꽉 차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늘이고 빈 들[野]일 수 있느냐고 말이다. 하늘이나 허공이 비어 있음으로 새들이 날고 그대로부터 간절한 부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시장과 언론의 악다구니와 시비분별의 듣그러운 수다들이 건너오는 것이다. 물론 청아한 새벽 새소리가 고요 속에 새뜻한 목청을 달고 새벽잠의 귓등을 건드리기도 한다.
 하늘, 저 창공은 특 트였기 때문에 무한한 것들을 품고 통과시키고 흘러가게 하며 멈춰 쉬게도 한다. 이 비어있음으로서의 없음[無]의 활성으로 꽉 찬 형상의 사물들이 거기 돌올하게 존재할 마련을 갖는다. 그러니 텅 빈 것과 빈한 것들한테 너무 핀잔을 주거나 모멸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비어있음은 뭔가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활성을 촉발하고 그걸 애써 기쁘게 이뤄낼 창출의 바탕을 열어준다. 
   창고는 그 휑한 비어있음으로 뭔가 꽉 채우고 뭔가 작업을 할 마련의 기능적 품성을 유지하게 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그림에서 이 없음[無]이 안받침하는 있음[有]의 실제는 어떤가. 단원(檀園)의 풍속도첩 중에서 <기와 이기>라는 그림은 공간의 구성을 위한 집짓기의 한 과정을 통해 그 소박한 실체적 비유를 목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김홍도, <기와 이기[즙와(葺瓦))>《檀園風俗圖帖》, 수묵 담채,27*22.7cm, 조선 시대

 

단원의 이 그림은 집의 건축 과정에서 기와 이기, 즉 기와 얹는 세목에 치중한 감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집이라는 공간이 확보되는 프로세스를 구성지게 내다보게 된다. 
   기와를 이어나가는 풍속의 화폭은 원근법을 써서 여러 일꾼들의 모습을 구성지게 배치했다. 땅에서 던진 기와를 맨손으로 받아내고 진흙 반죽덩이를 달아 올리는 모습, 먹줄을 늘어뜨린 목공이 한 눈을 감고 기둥의 쏠림을 가늠하고 있는 장면은 재미있고 목수가 대패질하는 순간의 대패밥이 날아 떨어지는 장면은 쏠쏠한 현장감을 준다. 또 기둥의 수평을 정교하게 맞추고 있는 사람, 진흙덩이를 개어서 올려주는 사람, 기와를 올려주는 사람, 개판 위에 진흙을 잘 깔고 기와를 얹는 개장(蓋匠) 등은 노동의 고됨보다는 집짓기의 신명 쪽에 분위기가 기울어 활기를 얻고 있다.
한쪽에는 이 집의 주인인 듯한 사람이 그러나 이 사람은 주인이라기 보다는 집짓기의 요즘으로 치면 감리자처럼 보인다. 이 사람은 지팡이라기엔 그 지닌 품세로 보아 척도를 이용해 집의 전체적인 기울기나 쏠림을 가늠하는 관리자 같다. 사방관을 쓴 것으로 봐서 중인 이상의 신분인 듯 싶다. 밑에서 올린 기왓장을 받으려는 지붕 위의 사람 머리 위에 기와가 떠 있는 장면은 단원의 재치있는 눈썰미와 화필에서 비롯됐다. 그 공중에 뜬 기왓장조차 비어있음으로서의 무의 공간이 내주는 묘미가 아닌가 싶다.
   집이나 그 집이 포함하고 있는 방이든, 그것의 궁극은 어떻게 비어있음으로서의 무[無]를 효용에 닿게 품어 간직하느냐 하는 관점이지 싶다.
 더불어 마음에, 그 마음살이에 비움의 여줄가리를 둔 사람은 무언가로 꽉 채워 몸부림치는 사람보다 늡늡하다. 비움의 시간과 공간을 마음에 들이는 것은 자못 종요롭고 쏠쏠하다. 마음에 비움의 여지를 두는 것에 인색하지 말자. 무언가에 대한 채움으로 답답하고 거북해지고 더부룩해진 마음엔 시흥조차 잘 들지 않는다. 헛헛하고 뭔가 이악스럽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열어둘 때 그 마음에 가만가만 천재가 든다. 천재가 서린다. 누구나 천재지만 누구나 천재가 아닌 것일 때는 그것이 비움의 간극을 마련하는데 인색함을 슬며시 돌아볼 마련이다. 큰 그릇은 큰 채움의 막힘, 그 폐색이 아니라 큰 비움의 여지를 이리저리 비워서 담고 또 내주듯 나누려 할 때에 효용, 즉 쓸모가 돋아난다. 어렵지만 이런 내력이 가을볕처럼 순연하게 도사린다.

 

 


   제12장 第 十二章 爲腹 (檢欲)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畋獵 令人心發狂 
   難得之貨 令人行妨 
   是以聖人 
   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다섯 가지 빛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다섯 가지 맛은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하고
   말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에 장애를 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저것(눈을 위함)을 버리고 이것(배를 위함)을 취한다


[補註]
   - 노자35장 :
음악과 음식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멈추게 한다. (원래) 도는 입 밖에 내어 말해도 담백하여 아무런 맛이 없다. 보아도 볼만한 것이 못되(어 보이)고 들어도 들을 만한 것이 못되(어 보이)지만 그 쓰임은 끝이 없다.
   - 노자46장 :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잘 달리는 말을 (싸움터에서) 물러 밭일에 쓴다. ~(끝없이)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가 없고 (끝없이) 얻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큰 허물(재앙)이 없다.
- 노자46장 :
도로써 임금을 돕는 사람은 무력으로 천하의 강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무력으로 천하를 손에 넣으려 하지 않는다).
- 노자3장 :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의지를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

 

[詩說] 

가을의 시(詩)에서는 어딘가 들깻단 마른 뒤척임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그 잔향(殘香)같은 들깨 내음도 번지는 듯하다. 또 햇빛의 타는 내음새 같은 또는 그 그을린 빛깔 같은 이중의 삼중의 햇빛의 몸 내음 같은 것이 들리기도 한다. 우주가 단번에 내 팔뚝에 가만한 투명한 살갗을 유리처럼 닿아오는 것만 같다. 그것은 바람처럼 자유자재의 말캉말캉한 휘어지는 유리일 수도 있고 온통 그 모든 것을 휩싸고 돌면서 이내 한없이 아득한 곳으로 현재를 잇게 하는 영혼의 갓맑음일 수도 있다.
   가을에 든 것들은 무엇 하나 명료한 듯도 한데 명료한 가운데 여럿의 뉘앙스를 배고 있는 듯도 하다. 딱 한 가지로 특정해 버리면 너무 좀 아쉬움과 아련함, 그리고 아득함마저 갈마든다. 이런 가운데 가을에는 종내 일상의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아득히 먼 곳을 향해 귀와 눈과 가슴이 열리곤 한다. 하나의 음악만을 가질 수 없다. 하나의 맛만을 편애할 수 없고 하나의 대상에만 천지간(天地間)의 광활함을 온전히 할애할 수가 없다. 무한히 열리고 닫힌다.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 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 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내, 잘 늙은 사람내 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 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정진규, <마른 들깻단>

 

이 장에서 다루는 다섯 가지의 빛깔과 소리와 맛은 오직 그 다섯 가지가 사람의 눈과 귀와 입만을 상하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간에서 말하는 규범화된 그리고 고정관념화된 미의식이 사람들의 정서와 몸과 정신을 그릇되게 호도한다는 의미에서의 ‘다섯 가지’ 상투화된 세속적 범주를 아우르는 상징에 가깝다. 식상한 것들에 물려 더 이상 아무 감흥의 갱신이 없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그 다섯 가지 패턴의 유행이나 명품이라는 메이커의 관념에 길들여져 그것들만 추켜세우는 경향이 있다. 자기 것을 외부의 시장의 물신(物神)의 권위에 내준 자기모순에 빠진 경우다. 물론 이런 경우는 소위 유명세의 대중적 혹은 천민자본주의적 인지도에 의탁하는 정서에 편승하는 일이다. 우리는 정말 ‘자기(自己)’라는 순수하게 느끼고 감미하며 생각하는 소슬한 자아의 겨를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정진규의 <마른 들깻단>의 좋음은 세상의 일반적인 미의식이나 자본주의적 시각에서는 몰각된 감각이다. 채움의 맛과 획득의 쾌감을 주로 하는 일반적 기호(嗜好) 한켠에 이런 호젓한 비어있음의 맛과 멋이 도도록이 서리는 것이다. 비어있음의 가치를 가난과 궁핍으로만 치부하는 일반적 관념에게 여기서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 의 비어있는 충만의 열락(悅樂)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나희덕,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기쁨과 즐거움의 대상은 너무 한정해 버리면 그것은 세속의 그만그만한 유행의 관념에 그만 얽매인 자아만을 지닐 따름일 수 있다. 그안에 유행하는 것으로 나를 한정하고 유행의 척도로만 자신의 가치나 기분을 재단하는 고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다름 아니다. ‘여러 겹’의 맛과 멋이 세상에 무수히 무한하게 열리고 겹쳐 있음을 아는 것, 그러니 세상의 고정화된 다섯 가지 떠벌림에 목매지 말고 속지 않아도 된다는 전갈인 쏠쏠하다. 한마디로 자기 취향의 결을 가지는 것으로 행복과 즐거움의 산탄(散彈)이 허공을 넓게 쏘아대며 아무 것도 해코지하지 않고 있음을 보라는 것이지요. 내 안엔 너무 많은 내가 광맥처럼 들어있지 싶어요. 그것은 인간을 둘러싼 온갖 사물과 풍물에 대한 견해에서도 자유로운 생각의 ‘여러 겹’을 가지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내가 아니라 내 스스로 고민하듯 얼러낸 나를 밝힐 필요가 있겠지요. 그러니 그윽이 나를 밝혀내야겠다는 뜻은 복숭아나무 꽃빛처럼 여러 층위인 것이다. 그야말로 광맥이자 무궁하고 매력적인 혼돈의 빛깔과 맛인 듯하다.
   나희덕의 ‘그 복숭아나무’는 욕망과 지향과 탐미(耽美)는 있을 지언정 사회적 고정관념에 얽매여 자기 색깔이 없는 숨탄것은 아닌 순연한 자연의 실상이다. 오히려 나에겐 더 많은 꽃빛이 숨었고 그만그만 잠재돼 있기에 그걸 피워내려는 생동하는 의지의 소산을 지닌 나무 인간인 것이다. 그러기에 화자조차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깨우친 봉숭아나무를 보아낸 것이다. 어찌 세간이 정한 다섯 가지 관념의 빛깔만 아름다움의 전부이겠습니까. 그러니 그 빛깔에 오래 눈을 쐬면 눈이 즐거워지지 않고 어느 순간부터 눈이 진무르고 아파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자기 빛깔을 아는 사람은 세속이 정한 빛깔도 그렇다 인정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발견한 빛깔의 아름다움을 가만히 만끽하는 눈썰미를 버리지 않습니다. 여름날 솔수펑이의 솔가리가 깔린 데 피어난 꾀꼬리버섯의 빛깔을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그 꾀꼬리버섯의 빛깔을 쉬 잊을 수 없고 세상이 정한 빛깔의 범주에 없다 하여 도외시하지만은 않습니다. 
   나에게 오월의 경주 외곽의 어느 시골 마을 입구에 핀 백여 년 된 개오동나무꽃 빛깔을 일러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빛깔은 달리 세상이 정한 규격화된 빛깔로 알려달라고 하면 자신은 도저히 그런 딱딱한 말로는 그 연보랏빛 개오동나무 빛깔을 전해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시인된 나로서도 야코가 죽는 순간이었습니다. 같은 백여년 된 개오동나무꽃 빛깔이라고 하더라도 오월에 핀 개오동꽃 빛깔과 유월 초순에 끝물에 핀 개오동나무꽃 빛깔은 다르다고까지 하였다. 한 나무의 여러 꽃빛을 두루 바라봐 주고 두루 인정해 주면 거기 이것 저것이 역시 두루 번져있는 것을 보아내듯 그 감식의 빛깔이 우리네 마음에 살게 되는 듯합니다.

 

창문을 여는데 죽은 새를 만져 본 것 같았다
   이건 누구의 기분이지?
   나는 기분을 사러 갔던 최초의 기분을 생각했다
   사방이 유리인 가게에서나는 갓 태어난 아이의 기분을 샀다 연애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의 기분을 샀다
   정확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지만기분은 언제나 다른 기분과 조금씩 섞여 있었다
   안개 + 레몬 = 깜짝 선물에 대한 기분냉장고 + 인형 + 시체 = 심야 택시를 기다리는 기분미용실 + 아스파라거스 + 돌 + 향신료 =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다 읽은 기분
   어떤 기분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들었다 나는 자주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그럴 땐 서랍을 열어 달리고 있는 개의 기분을 삼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개의 기분은 근육으로 만들어졌다주인으로부터 출발했다자꾸 밖에 나가자고 졸랐다
   불안과 볼링핀이 쓰러지기 전에 집을 나왔다도로 한복판에서 비둘기가 움직이지 않았다죽음을 수행하려는 걸까?
   나는 손끝이 베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엄지손가락을 빨자 비릿하게 피 맛이 났다
   기분일 뿐이었는데 단지 기분일 뿐이었는데어떤 기분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들었다나는 자주 그런 기분에 휩싸였다

-임지은, 「기분상점」

 

임지은의 시적 눈썰미는 상당히 감성적이며 그걸 사물화할 수 있는 감각적 미메시스(mimesis)가 새뜻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통상적으로 규정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기분의 상태를 통해 우리는 얼마나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감정이나 기분의 차꼬를 차고 자신은 남처럼 부리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여지를 건넨다. 자의적인 것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는 아닌 마음의 주변부 혹은 그 중심부의 분위기를 기분이라고 범박하게 정의한다면 이를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마음의 정원에 들여놓을 수 있을까. 잡풀이라고 여겼던 것을 잠시 뉘우치고 되돌려 화단 귀퉁이에 심었더니 그 자잘한 꽃과 잎새가 소소하니 쏠쏠하니 귀엽고 앙증맞은 눈길을 주는 것이다. 소박한 눈 호강이 파릇하니 여러 날이고 어느 가을날의 소소한 갈변(褐變)의 흩날림이 또한 쓸쓸한대로 눈길을 끄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자기 마음의 화단 안팎에 그간에 돋아난 기분을 심듯이 ‘샀다’라고 한다. 소외되거나 도외시됐던 소슬하고 소소한 감정과 뉘앙스(nuance)의 시적 천명이라니, 새뜻하다. 간과했거나 버려졌던 자기 자신 안의 미의식을 다시 추수하는 일의 상쾌함과 뿌듯함이여. 
   라오쯔는 이 장에서 상투적인 것에 목매달지 말라고 한다. 그것이 세간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파워의 미적 권위를 누리고 있는 듯해도 거기에 휩쓸려 자기 미의식을 매몰시키고 자신의 ㅗ롯한 천성을 거스르지 말라는 듯하다. 자기 기분은 자기가 잘 눈썰미 있게 알아채 자기가 잘 받아 쓰고 누리라는 천명이다. 세상에 환호작약하듯이 혹은 내노라 하듯이 등록되지 않은 기분이라고 기분이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살아가는 숨탄것들의 고유한 보물이다.
   또한 이러한 견해는 어떤가 싶어요. 만해(卍海) 식의 엇박자나 삐딱선(船)을 영혼의 바다 위에 띄우는 것이죠. 여느 사랑의 너름새가 그렇습니다만 만해가 띄우는 사랑노래의 심중(心中)은 계산과 이해타산이 따르는 세속적 사랑과는 좀 더 다른 결을 보여줍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

 

정신의 여러 맛 중에 굴종만이 아닌 ‘복종’의 이렇듯 세속에서의 굴욕의 일반적인 정서를 뛰어넘습니다. 만해선사가 말하는 함의는 이렇듯 복종과 사랑과 자비를 하나로 잇닿아 오롯하게 연결시킵니다. 사랑의 맛은 다섯 가지 세속의 감정만으로 속단할 수 없는 심오함, 그 사랑의 포월(包越)의 너름새가 자자합니다. 라오쯔의 본문에는 거론이 없습니다만 그 다섯 가지 사람의 감정의 범박한 항목이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 감정에 맹종하기 쉬웠기에 거기에 다솜의 깊은 오의(奧義)를 더해 심신을 상하는 일을 경계하듯 똥기고 치유해 보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구태의 방식을 훌쩍 벗어버립니다. 피상적인 관념이나 항간의 부박한 인심으로는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의 진의(眞意)가 내린 것이라면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라고 선언하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피상에 물들지 말고 진부한 상투성에 길들지 말며 안일한 도락에 삶의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듯합니다. 복종하십시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콤’하기도 하려니와 사랑의 견실함은 고통과 굴욕의 실제를 감내하기 때문입니다.   

 

 

제13장 第十三章 寵辱 (厭恥)

 
   寵辱若驚 
   貴大患若身
   何謂寵辱若驚 
   寵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何謂貴大患若身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1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

 

총애를 얻거나 굴욕을 당하거나 다같이 놀라는 듯이 하라
   큰 환난이 오면 내 몸처럼 소중히 여겨라
   총애나 굴욕에 다같이 놀라는 듯이 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총애는 낮은 것이다
   이를 얻어도 놀란 듯이 하고 이를 잃어도 놀란 듯이 하는 것을 일러
   총애나 굴욕에 다같이 놀라는 듯이 한다고 하는 것이다
   큰 환난을 내 몸처럼 소중히 여기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나에게 큰 환난이 있는 것은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몸이 없게 되면 나에게 무슨 환난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제 몸을 소중히 여기듯이 천하를 위한다면 천하를 맡길 수 있다
   제 몸을 아끼듯이 천하를 위한다면 천하를 맡길 수 있다
 

[補註]
   - 노자44장 : 이름과 몸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친애하는가 ? 몸과 재화 가운데 어느 쪽을 더 중히 여기는가 ? 하나를 얻고 다른 하나를 잃는다면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운가 ?
   * 1 : [백서본] 천하를 위하는 일보다 제 몸 위하는 일을 중히 여긴다면 (그에게) 천하를 부탁해 볼 (천하를 건네겠다고 말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제 몸을 아끼듯이 천하를 위한다면 (그에게) 천하를 맡길 수 (줄 수) 있다. (貴爲身於爲天下 若可以託天下矣 愛以身爲天下 女可以寄天下矣)
   - 노자78장 : 나라의 치욕을 감수하는 자를 사직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흉조를 감수하는 자를 천하의 왕이라 한다.

 

[詩說]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10전 균일상(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김종삼, <장편(掌篇) 2>

 

식당 주인의 박대와 몰인정에도 거지소녀의 최대 무기는 바로 '태연'함이다. 이 태연함은 자신이 홀대를 받는 처지를 몰라서도 아니고 그런 하대에 무감각해져서도 아니다. 어쩌면 소녀에게는 거대한 꿈과 웅숭깊고 올곧은 사랑이 있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이 거지 소녀의 행실에 각별한 관심과 애호를 보낸다해도 이 소녀는 크게 괘념치 않을지도 모른다. 용하다고 하고 기특하다고 하는 행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지소녀는 어디에 영합해서 자신을 내두르는 경우가 아니다. 환대와 홀대의 극단에 처하더라도 거지소녀의 자세는 ‘태연하였다’이다. 이 태연함은 즉물적인 분노와 화냄을 품고 넘어선 경지에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거지 소녀’가 태연함으로 똘똘 뭉친 당찬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멘탈이 국대급인 어린이였을까. 모르긴 몰라도 꼭 그렇지만은 않을 듯 싶다. 
   미당 서정주는 <자화상>이란 시편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고 일갈을 했지만, 그만치 강퍅한 세파가 사람을 모질게 그리고 종내는 강하게 키웠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전부만은 아닐 터이다. 무수한 상처와 놀람과 질시와 박대가 왜 그 전에 없었을까. 주는 거 없이 몰아대는 세파에 흔들리고 불쾌하고 모욕과 모멸을 느끼고 열패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한마디로 상처의 현신(顯身)인 순간이 왜 없었겠는가.
 이 짧은 시편에는 ‘거지소녀’라는 호칭도 나오지만 ‘어린 소녀’라는 호칭도 한 대상에게 더불어 등장한다. 단순히 수사(修辭)의 차원일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교묘한 큰 차이가 존재한다. 즉 화자인 시인의 눈에 ‘거지소녀’는 사회적 신분의 등장이고 세속적 품평이 들어있는 하층민의 이미지라면 ‘어린 소녀’는 소녀 본래의 순정함과 세파에 물들지 않은 무구(無垢)함과 영아(嬰兒)에 가까운 부드러운 천성을 품은 천상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별칭인 것이다.
   세상의 무례함과 겁박과 하대와 멸시를 올곧게 이겨내고 견뎌내기 전에 내심 무수한 굴욕과 놀림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거지소녀’는 그렇게 세간의 유무형의 폭력을 견디고 견뎌냈을 것이다. 자신을 그러는 사이 자신을 올곧게 다지고 다졌을 것이다. 그런 나쁘게 비뚤어지지 않은 소녀는 ‘거지장님 어버이를/이끌고 와 서’는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지르건 말건 더없이 평온하게 ‘태연하였다’ 할 수 있었다. 이 태연함은 그래서 라오쯔가 말한 세상의 ‘총애나 굴욕에 놀란듯이 한다’라는 것을 어지간히 품고 넘어선 태도인 것이다. 태연자약한 이 소녀를 이렇게 튼튼하게 심지를 돋워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거지 소녀’이자 ‘어린 소녀’ 안에 순정하게 든 ‘거지장님 어버이’에 대한 사랑의 웅숭깊음 때문이다.    거지 소녀의 사랑은 결코 거지이기 때문에 훼손될 수 없는 원형의 가치이자 실물인 것이었고 어린 소녀는 그것을 모진 세파 속에서도 실질로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질시와 폭력에 꿋꿋이 견디고 헤쳐나가는 견딤을 얻어낸 듯하다. 이 시의 울림은 현란한 시적 기교나 고매한 장식적 사상의 나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의 생일이라고/10전짜리 두 개를 보’이는 소녀의 그 모진 견딤과 다솜에서 비롯된 울림이지 싶다.  
   라오쯔가 세상의 총애와 굴욕과 멸시 등에 놀란 듯이 대응하라는 조언을 이 시의 어린 소녀는 한 수 더 떠서 태연함으로 받았으니, 아마 라오쯔가 임장(臨場)을 하셨다면 적이 놀라고 갸륵해 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이렇듯 자신을 아끼듯 부모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천하를 맡겨볼 수 있다는 말이 돋아난다. 그야말로 자기 자신만을 아끼는 이에게 어찌 천하를 아낄 것이냐고 즉물적으로 묻고 따질 이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자기 자신을 세상에 먼저 충실히 아낄 수 있는 이야말로, 세상을 맡겨볼 수 있다는 나름의 큰 전제가 있는 듯싶다. 흔히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자는 주변과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말과 일견 상통하는 전제일 듯하다. 
   무엇보다 어려서부터 세상의 모진 밑바닥을 견디고 훑으며 자신을 나쁜 쪽으로 망치지 않은 그 견딤과 어려움을 감수한 내력으로 ‘거지 소녀’는 위대한 사람으로 번질 수 있고 도(道)의 역량이 될 수 있다. 그는 모진 학대의 세상을 감수할 수 있음으로 쉽게 포기하는 고매한 사랑에 들어설 수 있었다. 더불어 거지 소녀는 드넓고 무량한 도의 덕성스러움에 몸과 맘이 번져있는 실존인 것이다. 사랑하는 ‘거지장님 어버이’를 위해 기꺼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외부의 모멸과 멸시와 천대를 감수할 수 있는 자는, 장차 크고 작은 공동체를 위해 누군가의 선임이 쇄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랑을 위한 아낌 앞에 자신을 아끼지 않음은 무릇 큰 것이다. 무릇 소박한 듯 하나 모두를 위한 하나처럼, 그 하나의 모두인 것처럼 광대하고 도타운 것이다.  

 

 

제14장 第十四章 道紀 (讚玄)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1 
   復歸於無物 
   是謂 
   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2~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보려고 해도 볼 수 없으니 이름하여 ‘빛 없음’이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으니 이름하여 ‘말 없음’이라 하며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으니 이름하여 ‘꼴 없음’이라 한다
   이들 셋은 알려고 해도 알아낼 수 없으니 뭉뚱그려 하나라고 한다
   이 하나는 그 위가 밝지 않고
   그 아래가 어둡지 않으며
   아스라하고 아득하여 이름 붙일 수 없었고
   ‘아무런 물상이 없음’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를 일러
   형상이 없는 형상
   물질 없(이 일어나는)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를 일러 (오직)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하다고 하니
   맞이해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쫓아도 그 뒷모습을 볼 수 없다
   (성인은) 옛날의 도를 파악하여
   오늘날 있는 것을 제어하며
   능히 옛날의 비롯됨을 안다
   이를 두고 (내 도를) 도의 벼리라고 하는 것이다
 

[補註]
   - 노자41장 : 아주 큰 소리는 울리지 않고 아주 큰 형상은 모양이 없고 도는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
   - 노자25장 : 섞여 이루어진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
   - 노자42장 :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 노자21장 : 도라고 하는 것은 어슴푸레하고 어렴풋하기만 한 존재이이다. 어슴푸레하고 어렴풋하지만 그 가운데에 현상이 있고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하지만 그 가운데에 물질이 있다
   * 1 : [백서본甲]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어서 이름 붙일 수 없고 (尋尋呵不可名也) ; if 尋尋=无边无际(無邊無際),
[왕필본] 끊기지 않고 이어져 왔으나 이름 붙일 수 없었고 (繩繩不可名)
   * 2 : [백서본乙] (성인은) 오늘날의 도를 파악하여 (오늘날의 길을 잡아) 오늘날 있는 것을 제어하면서도 (오늘날 있는 것을 그 길로 몰아가면서도) 옛날의 비롯됨(길이 비롯된 곳)을 알고 있으므로 이를 두고 (내 도는) 도의 벼리 곧 모든 도를 망라하여 코를 꿴 도 (모든 길의 첫머리)라고 하는 것이다. (執今之道 以御今之有 以知古始 是胃道紀)

 

[詩說]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
   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詩說]

알 수 있음이란 얼마나 알 수 없음인가. 그 알 수 있음이란 것은, 거대하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무지(無知) 속에 드리운 티끌 같은 잔 터럭이나 잔발 같은 언뜻 빛남에 그치는 별똥별 같은 스침의 앎일 수 있다. 무지(無知)에 대한 앎을 그 바탕으로 삼고 외계를 대하면 윤똑똑이들의 허장성세가 그야말로 허세와 몰지각함의 발로임을 절로 알아갈 때가 있다. 
   도(道)를 향한 세간의 앎이란, 대개 윤똑똑이나 사악한 술수에 기대고자 하는 자들의 방편인 사술(邪術)일 때가 있다. 무지몽매보다 못한 왜곡으로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는 이들의 영업용 간판이 진정 천도(天道)일 수는 없다. 그러할진대 한두 마디로 규정하여 도의 수괴(首魁)나 교주가 되고자 하는 자들의 앎이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의 궤변도 아까울 지경이다. 절대화시킨 어떤 명제나 불순한 도그마(dogma)의 그늘에 빠진 이들에게 도는 참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도구이자 간악한 소리이니 곁을 줄 일도 아니다. 우선은 도에 대한 무지(無知)의 자세를 갖춘 겸손 속에서만이 그 참다운 도의 너름새와 웅숭깊음을 어령칙하게나마 헤아릴 수 있다. 
   동네 공터 한켠에서 공깃돌 놀이를 아이들에게 천문(天門)이 있는 바위산, 즉 거대 악산(岳山)의 지경을 다 일러 단숨에 똥기게 할 순 없다. 공깃돌과 악산의 큰 바위와 광야의 모래알의 관계를 일거에 연결 짓는 시공간의 흐름을 깨우치기도 쉽지 않다. 물론 그 둘 사이의 시공간의 흐름과 역사를 상상하거나 관계지어 생각할 수 있다면, 동네 조무래기들의 놀잇감 공깃돌과 악산의 거대한 바위와 광막한 광야의 흙모래는 모두 천지간의 저마다 이웃한 피조물일 따름이다. 저마다 다른 시간의 격절과 격랑, 숱한 흐름의 세례를 받아 지금의 형상을 살고 누리고 변해갈 실존의 표상 같은 것이다.
 보통 바위가 바닷가 백사장의 모래알로 변신하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아는가. 들을 얘기로는 보통 5만년이 족히 걸린다고 한다. 그간의 숱한 풍상(風霜)과 격변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지각변동 같은 것들을 포함하면 바위와 모래알의 관계와 그 흐름의 과정엔 숱한 천지자연의 내력이 여사여사하게 갈마들어 있다. 
   오만 년이 너무 거창하고 크면 조금 더 인간세 가까이 들여다보자. 식생(植生)인 조선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의 한 가지가 처음에는 하늘로 들려서 바람이 불면 널을 뛰듯이 건들거렸다. 그런데 여러 가지 내외적인 요인에 의해 이 솔가지가 팔이 아픈 듯 가만히 아래로 처지는 대는 얼마나 걸리겠는가. 사람으로 치면 달을 가리키듯 아니면 공원 상공의 연(鳶)이나 드론을 가리키던 팔을 들어 다시 연못 가에 나온 민물 거북이를 가리키는 아래로 처지는 것, 그러나 솔가지의 경우는 한 번 그렇게 처지면 내내 더 이상 애초의 하늘로 치켜졌던 솔가지의 상태로는 옮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렇게 처진 솔가지가 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모르긴 몰라도 들은 얘기로는 삼십 년은 족히 걸린다 한다. 동물과 식물의 신체적 혹은 기관적 운동과 변이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참으로 묘한 느낌이 드는 시간이다.
 만해(萬海)의 시편은, 앎의 시가 아니라 모름의 시(詩)이다. 아니 모름에 대한 앎의 오롯한 헤매임이자, 모름에 대한 오롯한 앎에의 의지와 사랑의 시편이다. 어찌 이리 모를 수 있는가, 하고 그 무지의 앎을 알아채가는 시의 도정이다. 세간에서야 무지함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통박을 주고 멸시를 하기 다반사다. 그렇게 폄하를 하는 자신도 그 앎이 미미하기는 매한가지인데도 말이다. 무지함을 무지함으로만 받아들여 단순히 열등함으로 치부해버리니 생기는 시비지심의 일단이다. 
   이 천지간 숱한 오묘한 현상에 대한 모름에 대한 앎의 헤매임은 그럼에도 아니 그러므로 오히려 끌밋하고 섬려하다. 어찌 이리 모름의 대상에 대한 천연덕스러운 앎의 헤매임이 여실하고 오롯할 수 있는가.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는 ‘오동잎’ 한 장의 궤적이 ‘누구의 발자취’인가 라고 물을 때, 그 물음은 그대로 무궁무진한 대답이 되어 우리를 감싸고 돈다. 어쩌면 이런 물음은 시비(是非)가 없는 대답을 우리 내면을 비롯 천지사방으로 궁구할 따름이다.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한다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냐고 물을 때, 이 물음은 그대로 대답과 근친의 짝패를 이룬다. 우리를 이렇게 아름다움과 신묘(神妙)함에 가둬놓듯 살게 하고 느끼게 하고 궁구하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모름과 앎을 하나로 주재하는 도(道)의 황홀(恍惚)이지 싶다. 도가 창출하는 혹은 도가 배어있는 무량한 세상의 것들 앞에 우리는 질문만을 가져다 놓고 끝없이 막막해 할 따름이다. 이 막막함을 오롯이 받아안는 근원적인 출발은 어쩌면 전방위적 우주론적 무지(無知)에 대한 앎의 시작이지 싶다. ‘형상 없는 형상[無狀之狀]’의 도의 내재와 ‘물질 없는 물질(이 일어나는) 형상[無物之象]’이라는 도의 실제는 무궁무진하다. 어디다 쉽게 빗댈 수 없음인데, 이 빗댈 수 없음을 통해 우리는 모두에 빗댈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품게 된다. 
   골목 그늘에 쪼그려트리고 앉아 공깃돌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흙때가 낀 손톱에도 도는 있다. 가만한 느낌과 고슬고슬한 숨결의 아이들 눈망울 속에 들어난 눈부처의 어여쁨 같은 도의 아우리(aura)는 초롱초롱한 눈매로 어른거린다. 
   현상에 대한 즉물적인 물음이기도 하지만 실존적 깨달음의 질문이자 화두(話頭)이기 때문이다. 오묘한 자연의 신비에 대한 그 기원과 생성의 비의(秘意)를 궁구하는 사이 ‘가이 없는’ 그 무량한 삼라만상을 가늠하는 척도라면, 더 이상 도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오지(奧旨)를 알아가는 궁구의 자세는 바로 무지함에 대한 배척이 아니라 지금 내 앎의 일천(日淺)함을 소슬히 받아드는 겸허에 있다. 정원이나 산야에 핀 한두 가지의 풀꽃 이름과 그 생태를 조금 안다 한들 그들 순탄것들 모두의 생태계를 다 아는 것이 아니 듯 사람의 인식이란 그만그만한 알음알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크고 작은 우주에 속한 인간의 처지를 스스로 똥길 때 무지의 수용을 통한 궁극적인 앎에의 입문이 트여감이지 싶다. 
 

 

 

제15장 第十五章 不盈 (顯德)
 

古之善爲士者 [古之屳爲道者]*1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強爲之容 
   豫兮 若冬涉川 
   猶兮 若畏四鄰 
   儼兮 其若容(客) 
   渙兮 若冰之將釋 
   敦兮 其若樸 
   曠兮 其若谷 
   混兮 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清 
   [孰能濁以靜者將徐清] *2~ 
   孰能安以久動之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夫唯不欲盈] 
   故能蔽不新成 [是以能敝而不成]

 

옛적에 도를 잘 닦은 사람은
   야릇하고 그윽하게 통달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무릇 오직 알 수 없으므로 그 모습을 억지로 그릴작시면
   머뭇거리는 품은 겨울에 내를 건너듯하고
   망설이는 품은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듯하고
   삼가는 품은 (큰) 손님인 듯하고
   풀어지는 품은 (봄이 다가와) 얼음이 녹으려는 듯하고
   꾸밈없고 도타운 품은 (산에서) 갓 잘라낸 통나무와 같고
   텅 비고 넓은 품은 골짜기와 같고
   (어울려) 섞이는 품은 흐린 물과 같다
   누가 흐린 것을 고요하게 하여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안정된 것을 오래 움직여 서서히 살아나게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도를 간직한 사람은 가득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무릇 오직 가득 채우지 (차서 넘치기를 바라지) 않으므로
   해져도 새로이 이루(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補註]
   * 1 : [백서본] 옛적에 도를 잘 닦은 사람은 (古之屳爲道者)
[죽간본,왕필본] 옛적 잘 된 선비는 (옛날에 아주 '좋은 품성과 도덕을 갖춘 사람'의 됨됨이는) (古之善爲士者)
   - 노자56장 : (도를 아는 이는) 빛을 부드럽게 줄이고 티끌세상과 하나가 된다 (어우러진다). 이를 그윽한 하나됨(유현한 어우러짐)이라고 한다.
   * 2 :
   * [죽간본] 누가 흐리면서 고요한 자가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겠는가 ? 누가 암컷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면서 주인(왕) 노릇 하는 자가 서서히 살아나게 할 수 있겠는가 ? (성인이다. 하지만) 위와 같이 도를 (드러내지 않은 채) 간직한 사람은 오히려 고요하면서 맑기만[澄]을 바라지 않는다 (흐린 물과 섞인다). (孰能濁以靜者將徐清 孰能牝以主者將徐生 保此道者不欲尚浧) ; if浧=澄@古文, ※ 浧=滿.
   * [백서본] 흐리면서 고요한 자가 서서히 맑아지고 암컷의 성품을 지니고서 묵직한 자가 서서히 살아난다. 이러한 도를 (숨겨진 채) 간직한 자는 가득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져도(낡아도) 이루지(다시 만들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다. (濁而靜之徐清 女以重之徐生 葆此道者不欲盈 是以能敝而不成)
   - 노자61장 : [백서본] (암컷은 늘) 고요함(안정)을 위하여 으레 아래에 처한다.
   - 노자57장 : (성인 가로되)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되더라.
   - 노자45장 : 맑고 고요하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다.
[해석] 천자는 맑고 고요해야 (나서지 말고 무위하여야) 하지만 도를 잘 닦은 사람(선비)은 맑고 고요한 경지에 도달하고서 탁한 것과 어우러질 수도 있어야 한다.
   - 노자22장 : 패이면 (오히려) 채워지고 해지면 (오히려) 새로워진다.

 

[詩說]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流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 파블로 네루다 「시」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 1904년 남칠레 국경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체코의 시인 얀 네루다의 이름을 딴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을 사용했으며, 이 이름으로 일생을 살았다 한다.

  

그러니까 관념의 더께가 덕지덕지 붙은 도(道)에 관한 상투성을 걷어내기 시작한다면 도는 정말 생동하는 그 무엇이겠다. 도를 살아보는 일이어야 한다면 그걸 아주 그윽이 잘 살아보려는 자연스런 발로라면 그것은 정말 삶과 죽음이 하나로 가는 일생의 것이어도 아쉽지 않겠다. 유명한 시인의 삶에서건 시정의 장삼이사(張三李四)의 흔전만전한 일상의 주변이건 잘 들여다보면 도의 기미(機微)는 어디나 소슬하고 완연하다. 여기에 충만한 것이 저기에 모자랄 수도 있고 저기에 미만(彌滿)한 것이 여기에 가물 수는 있어도 그렇다고 아주 없지만은 않다는 것, 도가 그렇듯이 파블로 네루다에게는 시(詩)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널리, 깊이, 어느 곳, 어느 시기에나 도(道)가 도 아닌 적 없듯이, 시 또한 시인에게는 시가 시 아닌 적 없어라.
 도(道)와 그 도를 잘 닦은 이가 어떻길래 우리는 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것이며, 시(詩)와 시를 사는 시인이 어떻길래 우리는 때로 시와 두동진 강퍅함에 머물러 모질게 사는 것일까. 도가 삶을 어렵게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삶이 도를 무력화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삶이 도(道)을 삼이웃으로 삼고 도가 삶에 만연한 대기(大氣)이자 공기여도 크게 두동질 바가 아니라면, 시(詩) 또한 그 시인의 호흡과 눈길로도 삶과 자연과 우주와 소소한 공동체의 마을에 내리는 별빛에서 새삼 만연해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도(道)의 태생과 시(詩)의 태생은 그 처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작동하듯 만연한 기운을 마음에 들이는 연대의 공통분모를 갖고 찾는 것이 종요롭다.  
   도(道)이어도 좋고, 시(詩)여도 좋다. 그런 것은 ‘그렇게, 얼굴 없이/그건 나를 건드리더군.’ 이런 계기는 소름이 끼치도록 그러나 가만히 좋지 않겠습니까. 무릇 나를 건드리는 것이 기분 나쁘게 소름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마뜩지 않을 수 없는 기운을 번져올 때의 그 전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시켰을까. 도(道)와의 소개팅이나 주선, 시(詩)와의 소슬한 마주침과 스침이란 말이다. 이런 기운이나 분위기는 우리를 우주적으로 소슬하게 띄웁니다. 아니 그렇겠습니까. 
    본명,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의 <시(詩)>는 ‘고동치는 논밭’에서 바라본 우주적인 고독과 적막을 환희와 율동과 ‘순수한 지혜’의 계기로 영접하는 무량한 영감(靈感)의 파노라마로 몸과 마음에 휘감아볼밖에 없다. 새삼 일상의 어느 순간과 지점에서 우주적인 교감의 굴헝에 빠진 즐거움을 마주하는 순간의 떨림과 그 확장이 번져온다.
 그야말로 나와 그대의 이 우주 속에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작음에 주눅이 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살 떨리도록 얼[魂] 떨리도록 똥겨 알아가는 전율에 나와 그대가 도의 ‘일부임을 느꼈고’ 또 시의 ‘일부임을 느꼈’다 함이 아닐까. 
    ‘난센스’를 좋아하세요? 라고 물을 때 우리는 여러 대답을 얼러낼 수도 있겠다. 간단하게 좋다와 싫다. 혹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다는 입장 정도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난센스를 단순히 여흥으로 대하는 입장은 둘째 치고 우리 삶이, 그리고 우리 일상의 도처에서 난센스는 여름 나팔꽃처럼 피어있다 라면 어떨까. 보름 전에 돌아가신 독거노인이 쓰다 버려진 목발을 지주처럼 휘감아 이 아침에 나름 영롱한 꽃나팔을 부는 나팔꽃과 파란 메꽃을 우리는 뭐라 부르면 좋을 건가. 도를 사는 발단은 도의 기미를 아는 마음의 기척이고, 시를 발견하는 겨를은 시가 바로 내 곁에 눈짓을 보내고 있음을 알아채는 서슬에 있다. 무릇 도(道)와 시(詩)가 영욕을 마다하지 않고 궁궐과 사창가 골목을 가리지 않으며 빈천과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음에 편재(遍在)하다니, 작은 복(福)이 큰 복이다. 서로 한번 일면식도 없지만 천상병 시인의 자족하는 복(福)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의 ‘별들과 더불어 굴렀’다는 그 시흥의 스케일과 그러므로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라는 흥취에 서로 두동지지 않을 터이다. 이처럼 도가 박복하면 시가 어찌 홍복(洪福)을 누리고 열 수 있을까. (다음호)

 

 

 

 

 

 

유종인

1996년 《문예중앙》에 시 당선.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아껴 먹는 슬픔』『교우록』『수수밭 전별기』『숲시집』,
   시조집『얼굴을 더듬다』『답청』.
   미술 에세이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등이 있음.
   지리산문학상, 송순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