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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호 Vol.12 - 유종인


[시로 읽는 노자 이야기]

 

노자(老子)와 시마(詩魔) 1

 

[들어가는 말]

이천여 년의 격절을 무릅쓰고 여기에 노자를 어눌하게 불러내 본다. 내 협량한 앎과 단견 곁에 다시 모셔와 깨우고자 한다. 그 다시 헤아림이 좋고 나쁨을 비켜 가고 그 현묘한 오의(奧意)에 벗어나 질정을 들을 만해도 크게 책망하지 않는 도의 오지랖 안에 머물러 서성거려도 좋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나의 어리석은 노자적 지향은, 저 웅혼한 도의 혼돈(渾沌)의 헤아릴 수 없는 도가니 속에서 한 국자 정도 떠낸 이해나 몰이해로 그 라오쯔의 생기를 조금이라도 즐거이 재발견하고자 한다. 노담의 말씀에 대한 내 속종과 느낌을 주변 삼이웃들에게 대신 생각과 꿈을 꿔주듯 새삼 건넬 수만 있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불민한 내가 노자를 다룸은 석학이나 제현들의 명석함에 견줄 바도 못 되거니와 그럼에도 이리 재우쳐 불러 그 현묘한 도용(道用)이 아직도 우리 지구촌 이웃의 현실과 마음살림에 미미하게나마 그 음미가 아주 버릴 거 없이 쓰이는 바가 있을까 해서다. 고리타분한 옛것을 넘어 새뜻하게 변용의 쓸모와 기운을 오늘에 차릴 마련을 기대해 본다. 미력하나마 그런 내 협량한 소견과 오독을 무릅쓰고 예 능놀고자 한다.


 

제1장 第一章 體道(觀眇)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                                      

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말해질 수 있는 도가 진정한 도는 아니요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은 아니지만
   무는 천지의 비롯됨을 이름하여 가리키고
   유는 만물의 통칭을 일러 가리킨다
   본디
   늘 무를 가지고는 그 세계의 묘함(묘한 요체)을 보려하고
   늘 유를 가지고서는, 그 구체성(가장자리)의 실상을 보려 한다
   이 둘은 나온 데가 서로 같고 이름을 달리하지만
   같이 일컬어 그윽하고 아득하다고 한다
   더욱 현묘하고도 현묘함에 이르는구나
   온갖 묘함의 것들이 들락이는 문이구나

 

[補註]
   - 노자25장 : (그것은) 가히 천하(천지)의 어미라 하겠다. 나는 (아직) 그 이름을 알지 못하여, 자를 지어 도라고 하고 억지로 이름 지어 크다고 한다.
   - 노자52장 : 천하에 비롯이 있으니 그것을 천하의 어미라고 한다. ( 天下有始 以爲天下母 )
   - 노자40장 : [왕필본] 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 (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
   [죽간본] 천하의 모든 것은 유에서 나오고 무에서 나온다. ( 天下之物生於有 生於亡 )
   - 노자6장 : 그윽한 암컷(현묘한 여신)의 문을 일컬어 천지의 근원이라고 한다.

  [詩說]

이름 불리지 않은 그윽한 이름이 되고 싶다
   그리하여, 영원으로부터 덜떨어진 이름,
   바위로부터 떨어져나온 돌 부스러기의 노래,
   바위와 바위 사이를 스쳐간
   바람과 그 바람에 허물을 벗은 뱀의 또 다른 이름,
   징글징글한 푸른 비린내가 나름 건네오는 여름의 갖은 호명들,
   욕을 들어도 좋은 신기한 외계의 별칭들,
   비온 뒤 솟아난 버섯들의 연애의 눈총 같은 축축한 이름들이여
   누군가 나의 허물을 말하였으나 어느 새
   내 허물을 메우고 그윽이 비워주는 당신의 눈길이여

 

비무장지대(DMZ)에서 희귀종 버섯이 하나 발견됐다. 그 이름은 ‘선비먼지버섯’이었다. 먼지버섯류에 속하는 이 버섯은 중국이나 북한지역에서 발견된 것과 차이점이 있어 새로운 학명(學名)을 세계적으로 공인받아 등재하기에 이른다. 최초에 학계에서는 선비먼지버섯을 ‘Astraeus koreana’(아스트래우스 코리아나)라는 이름으로 명명(命名)했지만, 이 버섯을 처음 발견한 故류천인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버섯의 학명을 ‘Astraeus ryoocheoninii’(아스트래우스 리우채니니)로 바꿨다. 비록 버섯박사는 유명을 달리했지만, 그의 이름은 희귀 선비먼지버섯의 학명, ‘아스트래우스 리우치니니’라는 자연계의 이름 속에 갈마들어 있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존재의 이름이 버섯이라는 하나의 숨탄것의 이름에 너나들이 배어있는 듯하다. 
   이름이, 언어라는 분별지(分別智)의 미혹의 상태, 즉 혼돈(混沌)의 무명(無名/無明) 대상을 만상(萬象)의 유명(有名)으로 밝혀내는 계기가 그 소슬한 쓰임에 깃든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분별의 신호등인지라 그 속에서 분별되기 이전의 무명과 무지의 상태를 세상에 갓밝혀 구분의 대상으로 이끌어낸 분별지(分別智)의 도구이다. 인식과 구분을 위한 도구로서의 이름의 갓밝음이여. 이름은 분별적인 보편의 반열의 모든 사물과 현상들에 개별적 인상을 돋워내 주는 말의 눈썰미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름은 개별적이지만 본질적이지는 않다. 
   이름은 그 언어적 호명을 통해 다른 무엇의 상태와 현묘(玄妙)하게 상통할 기회를 갖는 마련이다. 자연계를 비롯한 모든 현상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속에서 쓰이는 이름은 여러 차별적인 분별심을 내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모든 유무형의 사물과 상황을 지칭하는 이름은 그 자체로 중립적이며 언명(言明)에 쓰이는 일반론에 부합된다. 도나 유무(有無)를 이름과 결부시켜 보면, 이름은 그 대상 전체를 다 온전히 규정할 수 없고 온전히 다 드러낼 수는 없다. 다만 그 가까이 근처나 근동에 머물러 그 현묘함을 아울러 볼 따름이다. 
   세속적으로 때로 분별과 차별을 동일시한 개념인 이름에 덧붙은 편견과 선입견은 사악함에 가깝다.  
   희귀한 선비먼지버섯은 그 이름이 없었을 때는 으늑하고 담담한 혼돈의 잠재태(潛在態)로 기생(寄生)했지만 류천인 박사의 발견과 그 후학들의 노력과 명명(命名)으로 만상(萬象)의 일원으로 능동태(能動態), 즉 생태계의 일원으로 분별되어 희귀하고 뜻깊은 이름의 시초가 되었다. 기쁘다, 이 기쁨은 배제나 일방적인 선호로서의 분별(分別)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지극한 관심으로 무(無) 속에서 유(有)의 여줄가리 하나에 분별해 낸 눈길이지 싶다. 그럼에도 이름은 그런 차원에서 선점(先占)된 무의미일 수도 있다. 
   언어란, 주변 사물들과 대자연의 숨탄것들의 분별을 위한 기호체계일 텐데 이걸 노담(老聃)은 도(道)의 근원적 위치와 생태적 우주적 살림의 형태, 그 혼돈(chaos)과 생성(生成)의 존재 형식으로 갈파하며 심원하게 들여다 볼 따름이다. 
   분별하라, 그러나 차별하지 않음이니 기쁨이고 가만한 아우름이다. 무명에게 유명을 지어주는 일, 만물은 그리고 그 만물 속의 사람이 서로에게 즐겨 불리는 것, 그것이 인기(人氣)이다. 연예나 정치, 사회 각 분야의 스타가 누리는 인기는 변화무쌍하고 우여곡절을 지닌다. 그러나 세상에 두루 펼쳐있는 만물과 숨탄것들이 서로에게 주는 관심과 불가침은 너나들이 존재의 상태를 흥성하게 이뤄낸다. 
   무명과 혼돈의 상태는 이렇듯 많은 것을 얼러내고 베풀어주는 근원적인 상태로 늡늡하고 혼돈된 질서로 웅숭깊다. 이걸 주재하는 것은 도의 관심과 사랑의 호명(呼名)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름을 불러주라, 그 이름에 낙락한 정감을 드리워주라. 선비먼지버섯이 이름을 받고 다시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날이 있다면, 그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주면 좋겠다. 이름은 만물을 그 순간만큼의 현존을 기념하듯 변별하는 기호체계이다. 그러나 도(道)는 분별지(分別智)라거나 분별적 기호체계로 설명되는 대상이나 물질이 아니다. 학명상으로 선비먼지버섯을 Astraeus ryoocheoninii’(아스트래우스 리우채니니)라고 이름하든 아니든 관계없이 버섯이 나고 자라고 죽고 종균을 퍼트리듯 따오(道)의 존재 형식은 큰 바뀜이 없음이다. 
   세상에 인간이 쓰는 언어는 존재를 기념하는 언어의 한시적인 반짝임의 눈길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은 그림자 없는 그늘이고 태양 없는 햇빛이다.

 

선비먼지버섯 사진 (자료출처:산림청)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때
   그는 나에게와서 꽃이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싶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김춘수의 시편은 그런 면에서 의미론의 관점에서는 연애시적인 끌림이 자자하나 도나 유무(有無)의 존재방식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다만 라오쯔의 도나 유무의 세계에 대한 밝힘의 간절함이나 의지의 차원에서는 언어적 언명의 접근법을 범용했다는 의미가 있다.


‘선비먼지버섯’ 이 실린 논문 표지 사진 [국립산림과학원 제공]


먼지버섯 속(Astraeus sp.)의 이 먼지버섯들은 한약재 효능을 담은 본초도감에서 산해(山蟹), 지지주(地蜘蛛) 등으로 달리 불렀다. 이 사소한 이칭(異稱)이나 별칭(別稱)은 재밌는 생각을 덧보태준다. 보다 근본적인 사유를 더듬어볼 수도 있겠다. 먼지버섯이라고 불렀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한의학서(韓醫學書)인 본초도감은 앞서 산해(山蟹)라는 별명을 돋아냈다. 마치 산(山)의 바닷게[蟹] 같다고 했으니, 이름 없던 시절의 이 버섯은 김춘수 시인의 ‘그냥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것인데-오늘날 우리 지구촌이 호되게 겪고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covid-19)도 그 처음의 불온한 무명의 상태는 몽매(蒙昧)에 가까웠다- 어느 순간 산에 나는 게 모양의 버섯이란 재밌는 언어적 호명(呼名)의 눈총을 받는다. 또 달리는 땅[地]의 거미[蜘蛛]와도 같다 했으니 이것도 그 겉모습에 대한 인상으로 지은 별명이 분명하다. 애초에 고정된 것이란 없었으니, 그 처음은 혼돈(混沌)이고 세상의 눈총과 그윽한 눈길이 그리운 무명(無名)시절이었던 것이다. 버섯의 포자는 출혈이 있는 외상부위에 지혈작용을 한다고 알려졌다. 호명은 달라도 그 성질이나 특장은 같으니, 도를 부른다고 해서 특출나게 도(道)이고 역시 도(道)가 아니라고 해서 도가 그 작용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도라는 광대무변한 현황은 아무런 차이가 없음이다.

 

선비먼지버섯의 상부 절개된 이미지 사진


꽃 자체와 꽃다운 아리따움은 별개일 수도 있고 동일시(同一視)될 수도 있다. 꽃과 버섯은 다른 숨탄것이지만, 꽃이 드문 간화기(間花期)에 습하거나 마른 땅을 뚫고 솟은 은은한 버섯은 보기에 따라서 묘한 아리따움과 신기한 귀염성이 도도록하다. 귀여움과 아리따움은 꽃의 속성(屬性)이기도 하니 여름 꽃이 잠시 드믄 비오는 시기엔 이 버섯을 꽃처럼 여겨도 섭섭하지 않다. 이렇듯 사물은 구별되는 속성과 동일시되는 속성이 함께 갈마들어 있다. 도(道)는 이 둘을 차별하지 않고 품고 낙락하게 벌려 놓는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이 도(道)의 생기(生氣)라면 버섯이 피고 종내 벌레들에게 파먹히는 것도 도의 생기(生氣)다. 그 이름, 즉 호명(呼名)을 어찌 하느냐에 따라 다를 뿐, 돌에서도 꽃다운 것을 볼 수 있고 비 온 뒤 왁자해진 계곡물 소리에서도 꽃의 숨소리를 엿들을 수도 있다. 하얀 물보라에서도 꽃의 이미지를 얼핏 건네받을 수 있다. 꽃을 꽃에서만 찾는 것은 그 외형의 가장자리이나 꽃다운 것은 거의 모든 것에서 찾고 발견하는 것은 그 실상이 연결됨을 바라보는 것[觀其徼]일 수도 있고, 풀밭에 눈 개똥에 달라붙은 똥파리의 청동빛 몸의 찬란에서 꽃의 생색(生色)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런 눈길은 숨탄것 사이의 묘한 맥락을 한데 바라보고 살피는[觀其妙] 마음의 눈썰미일 수 있다.
  언어의 명칭 부여의 기능이란 의미부여 이전에 기호적으로 대상 사물에 대한 분별지(分別智)가 선행하기 마련이다. 처음 ‘꽃’이라는 명칭 이전에 이라는 대상이 꼭 ‘꽃’으로만 불릴 이유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떤 계기로 분별적 대상으로 꽃이 되는 순간 그것은 구분된 숨탄것의 아름다움으로 간곡하다. 간절한 부름은 간절한 생을 여툰다.

 


  당신과 내가 처음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 이름은 껍데기인 게 아니라 그 사람에 배어들며 그 사람을 키우고 옹립한다. 꽃의 옹립, 옹립(擁立)한 꽃은 한 부름, 그 기꺼운 호명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름이라는 형식이 내용을 포괄해버리는 지경이다. 애초에 우리가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면 지금의 꽃 이름을 작명하기에 따라서 똥이나 돈이나 돼지나 텔레비전이나 그 무엇으로 특정돼 불릴 수도 있었다. 모든 사물은 이름이라는 언어의 북새통 속에서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이 세상에 크거나 작게 등극해 살다 간다. 그러나 이 장(章)에서 노자가 도(道)와 이름[名]과 유무(有無)에 대해서 말하는 대의(大意)는 그것들에 대한 원인적 개념규정은 아닌 듯 싶다. 최진석 교수는 ‘노자의 관심은 우주의 발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노자를 발생학적이나 창조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著) 라는 언술은 유의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도(道)는 만물에 작용하듯 담지(擔持)돼 있고 그 대상에 미치지 않는 바가 없다. 그윽하고 웅숭깊게 살리고 또 쇠하게 하며 소멸과 변전(變轉)의 몸을 달리하는 그 모두가 도와 동떨어지거나 두동질 수 없음이다. 불가적으로 보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흐름 위에 삼라만상은 띄워져 있다. 그러니 끊이지 않는 흐름 속에 갈마들게 해 유전(流轉)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한다. 인간에 의해 규정된 도(道)나 이름은 한시적이고 한계적인 대변(代辯)에 지나지 않는다고 노담은 말한다. 무량하고 무한한 것을 유한하고 유한하고 한정된 것으로 규정할 수 없음이다. 한마디로 미봉책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이지만 언어로 근접하려 보여주려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드넓음과 웅숭깊음으로 바라보려 해야 도나 이름이 그나마 협량한 관념의 그늘이 아닌 실체적 보편성의 너름새를 가진다 함이 아닐까.
 도는 노자에게 있어 이러이러한 규정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저렇게 섣불리 규정될 수 없음의 상태로써 그 무한한 정도를 가늠될 따름이다. 도(道)에 관한한 실체와 실체 없음이 대척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반영되는 관계이다. 고착된 실체가 아니며 분별된 존재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며 특정된 관념의 범위에 매몰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므로 그 치우침 없는 너름새의 변화무쌍이 현묘하고도 현묘함[玄之又玄]을 거둘 수 없구나. 깨어있음과 깨어있지 않음이 반목하지 않고 한데 어울린다.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상(萬像)들 간의 작용과 반작용을 구별하여 채찍질하여 배척하지 않는다. 만물을 살리기도 하고 때가 되어 쇠(衰)하여 병들어 죽게도 한다. 또 그 형상을 온전히 은성하게 했다 저마다 변형시키며 소멸시키기도 한다. 그 웅숭깊은 마련은 단순히 검은색의 뉘앙스가 아니라 특정해 형언할 수 없는 웅숭깊은 변모와 소멸에 따른 생성과 유전으로 현묘(玄妙)함에 이른다. 꽃이 피는데 같은 색깔로 피지 않으니 일색(一色)이 아니어서 조화롭고 우리 주변에 계절을 타며 저마다의 생리와 생태를 실현하며 능놀듯이 한다. 도는 관념이 아니라 실제이면서 드러냄만 있는 게 아니라 숨기듯 배어있음도 있다. 견주어 차별하는 바탕이 아니라 어울려 무엇 하나 간과됨이 없이 이렇게 저렇게 어울리며 배척하지 않고 버성기지도 않는다. 특정되지 않다고 해서 특별한 것에 못 미치지도 않는다. 그리고 무수히 낳고 다른 차원으로 변화를 이끄니 그 흐름은 쉼 없이 낳고 기르고 죽이고 다시 살리는 ‘중묘지문(衆妙之門)’일 따름이다. 여름꽃이 다 스러져간 쓸쓸한 자리에 겨울 초입까지 국화꽃이 산비탈에 새뜻하니 이마저도 도의 여줄가리, 아니 도의 정수(精髓)가 따로 있지 않으니 모두에 편편(遍遍)해라.

 

 


   제2장 第二章 觀噭(養身)


   天下                                    
   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教           
   萬物作焉而不辭 *1              
   生而不有 *2       
   爲而不恃 [爲而弗志] *3  
   功成而弗居 [成而弗居] *24
   夫唯弗居 是以不去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추한 것이고
   선한 것이 선한 줄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다
   본디
   유와 무는 서로 더불어 생겨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더불어 성립하고
   긴 것과 짧은 것은 서로 더불어 비교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더불어 기울고
   악기소리와 목소리는 서로 더불어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더불어 따라 간다
   그러므로 성인은
   (부러 일을 벌이지 않고) 무위의 일에 머무르며
   (스스로 이루도록) 불언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이 일어나도 말하지 않고
   낳고서도(자라나도) 제 것으로 삼지 않고
   베풀고도 그것에 어떤 뜻을 두지 않고
   이루고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무릇 오직 그것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떠나가지(버림받지) 않는다


  [補註]
   - 노자20장 : (학문의 관점이나 도의 관점에서 보면) 선함과 추악함(아름다움과 추함)은 그 차이가 어떠한가.
   - 노자58장 : 그것에는 (절대적인) 올바름이란 없다. 바른 것이 다시 기이한 것이 되고 선한 것(좋은 것)이 다시 요사한 것(재앙)이 된다.
   - 노자11장 : 유(有, 유형, 실유)가 이로운 까닭은 무(無, 무형, 텅빔)의 쓸모됨 때문이다.
   - 노자29장 : 본디 천하만물이란 어떤 것은 앞서 가고 어떤 것은 뒤따른다.
   - 노자48장 : (장차) 천하를 얻으려는 자는 항상 '아무 일도 벌이지 않음'으로 해야 한다. 일을 벌이기에 이르면 천하를 얻기에는 부족한 자이다.
   - 노자34장 : 큰 도는 두루 퍼져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디에나 벋친다. 만물은 이에 의지하여 살지만(생겨나지만) 도는 말하지 않는다.
   - 노자51장 :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낳고서도 제것으로 삼지 않고 베풀고도 그에 기대지 (관리하지) 않으며 자라게 길러내게 하고도 채잡지 않는다.
   - 노자38장 : 높은 덕은 (무위하여) 일부러 베푸는 일도 없고 베푸는 까닭(이유, 의도)도 없다.
   * 1 : [죽간본] 만물이 일어나도 (진작·흥기해도) 다스리지 (관리·통치하지) 않고 (萬物作而弗治也)
   [백서본] 만물이 일어나도 (진작·흥기해도) 다룰 수단·방법을 꾀하지(강구하지) 않고 (萬物作而弗始也) ; 始=谋划(謀劃),
   * 2 : [죽간본, 백서본]에는 이 문구가 없음
   * 3 : [죽간본, 백서본甲] 하고서도(베풀고도) 그것에 (어떤) 뜻을 두지 않고 [왕필본] 베풀고도 기대지 않고
   * 4 : [죽간본] 이루고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백서본,왕필본] 공을 세우고도 (공이 이루어져도)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詩說]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
   약장수 기타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신경림, 「파장(罷場)」 전문

 

못난 얼굴이 혐오나 무시의 감정이 아니라 ‘얼굴만 봐도 흥’겨워지는 지경, 이것은 여사여사한 세상 우여곡절과 나름의 세파를 겪은 다음에 우연처럼 아니 필연처럼 당도하게 되는 마음의 냅뜰성이지 싶다. 시편에서는 미추(美醜)에 대한 분별적이고 편파적인 관념을 훌쩍 뛰어넘은 도력(道力)을 치장하고 있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의 삶의 지리멸렬한 세파를 겪음으로 미추의 형식적인 분별을 완화시키고 늡늡해진 마음의 정경을 진솔한 얘기로 진설한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겨워지는 지점에 있어 분별적 선민의식이 와해된다. 특권층의 우월감이란 사실 열등감의 발호일 수도 있으니 자신의 처지에 열등감에 젖은 사람도 그걸 우월감 아니 자부심으로 되살리는데 힘꼴을 써도 좋으리라. 지나친 우월감이 파락호를 만들 때 열등감을 잘 고쳐쓰자면 겸손한 능력자로 어느 날 훤칠해질 수도 있으리라.
   못난 것을 못나고 추(醜)함으로 보지 않고 그걸 슬쩍 넘어서 ‘흥(興)’겨움의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것은 삶의 지난함과 간난(艱難)이 가르친 바가 아닐 수 없다. 지나친 미추(美醜)의 분별이 사람들 사이에 모멸감과 집착과 시기심을 얼러낼 소지를 항시 지니게 된다. 아름다운 것이 언제까지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보고, 추하고 못난 것이 언제까지나 그 자체로 추하고 못난 면만 지니게 되는가를 되짚어볼 때가 마음이 소슬하다. 모든 숨탄것들과 사물은 흐름 위에 놓인 변물(變物)이다. 이 변화하는 상태의 한 지점에 나와 당신이 놓여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나의 비탄을 상대의 기쁨과 굳이 바꾸려 하지 않아도 된다. 내 것이 불만스러우니 상대의 미소조차 가증스러운 것이다. 웅숭깊어지는 마음은 이럴 때 그 속종을 달리 지니게 되기도 한다. 
상대적인 격절(隔絶)과 우열(優劣), 즉 우월감과 열등감은 사실 하나의 손, 그 손등과 손바닥의 경우와 같다. 높음과 낮음의 권력은 그 상대적인 거리두기와 이권에의 집착에서 더 심각한 갈등과 분쟁의 골이 생긴다.

 

  

호수공원의 처진수양벚나무 모습


처진벚나무가 있다. 흔히 수양벚나무라는 이 벚나무 수종(樹種)은 여느 벚나무와는 다르게 가지가 버드나무처럼 아래로 쳐졌다. 그리고 대개는 가지에 달리는 꽃의 수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그 꽃들의 피는 간격이 다른 화려한 벚나무에 비해 조금 성긴 편이다. 그리고 가지는 하늘로 치솟은 다른 벚나무에 비해 청처짐하게 늘어졌다. 그런데 이런 능수벚나무는 오히려 그 꽃들의 성김과 가지의 처짐을 통해서 오히려 또 다른 아취(雅趣), 그 나름의 멋스러움과 끌밋함을 자아낸다. 흔히 세상에서는 ‘처졌다’라는 말을 열등한 서열의 끄트머리나 꼴찌의 속성으로 치부하지만 이 처진수양벗나무에서는 하나의 아름다움의 겨를로 화사하고 돌올하다. 세상 사물이나 상황들을 놓고 볼 때 사람들이 이러니 저러니 듣그럽게 우열을 따지고 가치를 놓는 것까지야 그렇다치더라도 그걸로 그 대상을 아예 예단하고 속단하며 폄훼하는 것은 어딘가 안타깝다. 노담(老聃)의 눈길로 보면 세간의 어느 아름다움에의 칭송은 어느 추함을 달리 보아버린 맹목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 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두번은 없다」

 

서로 다독이듯 길러주라, 서로 끌밋하게 안아 길러주되, 어렵게 괴롭게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고통에 길들지 않게 길러주는 방편을 엿보고 모색하자. 나는 먼저 내게 그리 말해야 한다. 내가 깨닫기 전에 그대가 먼저 알았을 일을 가지고 내가 먼저 떠드는 어리석음을 멀리하자.
 서로를 북돋워 길러주려는 마음, 너무 자기 잇속만 따지다보면 자기 애욕(愛慾)에 얽매어 고통의 애옥살이를 하기 십상이다. 지나친 시비분별(right or wrong/discrimination), 그런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언뜻 명민하고 영악하고 슬기로운 자세이자 삶의 영특함일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친 차별과 편파를 품는 편견으로 돌아서면 그것은 헛똑똑이 혹은 윤똑똑이의 독선과 가납사니처럼 까탈만 부리다 갈등만 증폭시킬 수 있다. 냅뜰성 있는 인간은 노자의 말처럼 절대적인 것에의 집착에서 거리를 두고 놓여날 때 비롯된다. 그런 마음의 트임이 시원할 때 우리는 갈등하는 대상과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높고 낮음이나 길고 짧음, 어려움과 쉬움 같은, 혹은 더 나아가 있음과 없음마저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편차나 개념일 때가 완연하다. 아니 상대적인 것마저 품고 서로 상보적(相補的)인 관계의 양상으로 나아갈 것을 라오쯔는 설파한다. 그러니 겉으로 분별을 위해 따지는 척 하더라도 속으로까지 지나치게 따져 편파적인 갈래로까지 나아가지 말라는 뜻이다. 노담(老聃)의 이런 조화론적인 관점은 지나친 여러 갈등의 국면을 누그러뜨리고 다독이는 측면이 있다.
   예전에 나는 대학의 문학과를 가지 못해 문학을 하지 못할 거라는 어느 편견에 홀로 맞선 적이 있다. 그런 마음이 치기 어리게 우뚝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종자가 따로 있느냐고 술을 마시고 밤이슬 내리는 밤거리를 쏘다녔다. 성에가 하얗게 번진 불 꺼진 가게의 유리창은 섭섭하고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자신의 빈한함과 열악한 조건과 부족한 배움과 졸렬한 기교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가 없다. 물론 그런 자신의 처지나 상황을 직시할 필요는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종요로운 것은 자신을 학대하고 자멸을 위한 자학이나 그 자학을 공고히 하여 자신의 처지를 누구의 탓으로 돌리려는 공격성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교훈이나 계시가 아니라 모든 숨탄것들이 스스로 살리는 투박한 겸손과 얼마간의 자족, 그윽함의 소용일 따름이 아닐까.
   없는 것을 탓할 때마다 그것이 있는 것을 재창조하는 역량을 부른다는 사실을 어렵지만 생득적(生得的)으로 품을 때 기꺼운 마음이 든다. 기교가 없고 총량적인 역량이 없는 자신의 처지는 하늘이 준 것이고 부모님이 생물학적으로 물려준 것이며, 인생이 현실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음을 그럴 수 있음으로 받아들일 때 좀 더 시야는 트인다. 먼저 많이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거나 조건이 좋은 기량이나 재주를 가지고 태어난 삶이 앞서갈 수는 있어도 끝까지 앞서 갈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미리 절망한다고 미리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주름이 판치는 들판과 산과 강과 같아서 어느 순간에 자기를 변신시킬 수 있는 기회나 계기가 꽃봉오리로 허공을 치받을 때가 있다. 허공은 비어 있음으로, 그 공중(空中)이기에 꽃이든 바위든 욕설이나 새소리든 빛이든 받아 품을 수 있다. 자신의 부족함은 결핍이라는 공중의 조건과 같다.
   ‘힘겨운 나날’ 들은 많은 불만과 감정의 기복을 돌출시키지만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 하며 언제까지나 감정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처진벚나무, 수양벚나무는 그 처진 모양새로 더 아취(雅趣)가 있고 그 아취로 인해 다른 여느 벚나무보다 그 열등한 분별을 넘어 나름 독특한 수종(樹種)으로 끌밋하고 돌올하며 매력을 발산한다. (뒤)처짐을 낙오(落伍)나 열등함의 뉘앙스가 아닌 여유(餘裕)와 스케일의 스타일로 개척해보는 것, 쉼보르스카는 이걸 ‘미소 짓고, 어깨동무’ 하는 생의 자세나 의지의 방식으로 불러낸다.
   부모가 자식을 길러냄에 있어 소유하지 않듯이, 모든 숨탄것들 자신도 자신을 길러냄에 있어 지나친 소유관념은 고통의 삼이웃이 되기 십상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길러내는 방식에서 엇나간 자기소유의 옥생각일 따름이다. 나도 내 관념을 어떤 때는 가만히 버릴 때가 있다. 좀 아쉽고 내가 너무 주관이 없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지만, 던적스러운 집착일 때는 그 생각을 나로부터 놓아주어야 한다. 방생(放生)의 품목을 좀 넓혀본 거다. 좀 더 나은 생각으로 나를 번지게 할 필요가 있을 때, 말이 아닌 스스로를 똥기는 가르침[行不言之敎]을 찾는 것은 재밌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견주어 느끼거나 좋아지는 방편을 찾으면 그만이지, 몸과 맘이 상할 지경으로 비교해 괴로우면 그건 고통이 새로 돋아 넘친다. 나의 옹졸함과 몬존함은 어느 순간 애틋하고 순정한 끌밋한 것으로 달리 보이거나 변모할 수 있다. 마음을 괴롭히는 견줌이 아니라 마음을 북돋우는 견줌일 때, 노자는 스스로 길러낸다 하지 않은가. 양신(養神/養身)은 그렇게 우리의 실존이 된다. 좀 뒤처지면 어떤하랴. 그런 당신이 내가 혹은 모든 숨탄것들이 기껍다, 사랑홉다 하여야지.
   처진 벚나무에서 왕벚나무보다 성기게 피어나고 좀 더 늦게까지 반그늘에서 피는 수양벚꽃들의 늘어진 자태는 그 가르침의 훤칠한 환한 현역(現役)의 도(道)가 아닌가.

 

 


   제3장 第三章 安民(養身)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心不亂 [使民不亂]            
   是以 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強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天(夫)知者不敢爲也 *1~         
   爲無爲則無不治                     

 

재능 있는 사람을 높이지 않아야
   백성으로 하여금 다투지 않게 할 수 있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아야
   백성으로 하여금 도둑이 되지 않게 할 수 있고
   욕심낼 만한 것을 드러내 현시하지 않아야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의지를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
   언제나 백성으로 하여금 앎이 없고 욕심이 없게 한다
   이른바 안다는 이가 감히 나서지 못하게 하고
   무위를 실천한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補註]
   - 노자64장 : 성인은 욕심내지 않음을 욕심내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
   - 노자12장 :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동에 장애를 일으킨다 (사람으로 하여금 거리끼는 짓을 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 노자65장 :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백성이 지혜(지략)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림은 나라의 적(나라에 어지러움을 일으키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요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함은 나라의 복이다.
   - 노자10장 : 백성을 보살피고 나라 다스릴 때 앎을 내세우지 (지식·지혜·지략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밝고 환하게 사방에 통달해도 앎을 내세우지 (지식·지혜·지략으로써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노자48장 : 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날로 줄어든다. 줄어들고 줄어들어 무위의 경지에 이르면 무위로도 이루지 못함이 없다.
   * 1 : [백서본] 무릇 지혜로운 자(무엇을 좀 아는 사람)로 하여금 감행하지 않게 하고 (나서서) 하지 않(도록 하)기만 해도 다스리지 못할 것(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使夫知不敢弗爲而已 則無不治矣)


  [詩說]
   이 장(章)의 쓰임은 지나침에 대한 경종으로 읽힌다. 우선하는 어느 명품이나 물질 품목이나 사상, 주장이나 미학적 견해들이 우뚝해질 때 그 폐해는 자못 공고하고 오래간다. 그 자체의 끌밋한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인해 다른 무엇을 배척하는 분쟁과 알력(軋轢), 갈등의 진원이 될 소지를 역력하게 한다. 명석하게 분별하여 나눈 상황 속에서 우리는 분쟁과 알력이 생기도 차별과 적대가 싹을 틔우는 것을 도처에서 보아왔다. 
   어느 분야건 가치적인 서열을 매기는 행위는 결국 시기(猜忌)와 불필요한 과열된 경쟁심리와 서열의 우위에 있는 대상 속에서만 만족과 행복을 찾는 쓸데 없는 심리가 작용한다. 우열이 아닌 우선의 순리를 찾는 데는 심상하거나 무관심하면서 짧은 서열의 앞선 자가 된 것을 인생 최고의 가치나 의미인양 떠들어댄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들을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 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
   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
   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프랑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소박한 일상에 대한 권면(勸勉)과 가만하고 소박한 평화에 대한 유지와 보수 같은 옹호와 우주적 앎을 향한 무지의 옹립 같은 너름새가 있다. 프랑시스 잠의 위 시편은 누구에게만 주워진 특권적인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가능한 삶의 범위를 예시해 놓은 소박한 관망과 정직한 노동의 일상에 대한 아낌과 애호이다. 이러한 자연과 노동의 여건 속에 허황된 마음을 지니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의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전언이지 싶다.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이 일상에 천국을 임대차(賃貸借)한다. 거창한 정치권력과 으리으리한 재력이 꼭 필요치 않다. 
   소박함의 인간은 위대함에 가깝다. 권력의 최상층은 오래 지키기 어려워도 소박한 인간의 속종은 그 소슬하고 평범한 위대함을 오래도록 지킬 수 있다.

 


   김득신, <강상회음도>, 종이에 담채, 22.4×27㎝,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조선 화인(畵人) 김득신의 <강상회음도(江上會飮圖)>를 보고 있으면 구중궁궐의 권력 암투와 모략과 살의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직감적으로 그리고 반대급부적으로 받아들게 된다. 어로(漁勞)를 끝낸 어부들이 강가 청처짐한 버드나무 밑에 편하게 펼쳐 앉아 소반과 음주와 쉼을 나누는 한유한 풍경은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게[使心不亂]’하는 일의 종요로움을 선사한다. 분별적인 치우침으로 극단의 가치, 즉 귀한 물건이나 협량한 미학이나 뽐내는 재능 등으로 그 마음을 소란스럽게 하면 그 평화는 흐지부지 날아간다. ‘그 의지를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弱其志 強其骨 ]’함은 흔히 백성이나 현대의 국가 국민이나 시민을 우민화(愚民化)함이 아니라 그 마음의 기초를 소박하게 하여 허황된 욕망에 휘둘리지 말고, 저 뽐냄의 자질과 소유(所有)에의 얽매임과 충족되지 않는 불만과 괴로움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취지같다. 그리하여 그 소박한 마음과 거짓없는 노동에 따른 몸의 견실함을 오히려 돋우자는 말이지 싶다.  
   화폭에 드리운 중년급의 어부들과 까치머리 총각으로 보이는 젊은 축들이 버성기듯 어울려 있다. 강바람에 먼 데를 무연히 바라는 멍을 때리는 이와 불콰하게 술잔을 드날리는 이, 구운 생선을 발라내 먹으며 밥술을 뜨는 이, 그리고 뭔가 다른 별미를 궁색하느라 손길이 바쁜 이, 엿보듯 한 자리 끼어볼 요량이 든 젊은이까지 강가의 자리는 나름 흥성하다. 삶과 자연이 서로 견주듯 풀어놓고 따로이 가르칠 것 없이 억지스럽지 않은 모종의 겨를을 무위(無爲)인 듯 강바람처럼 그 몸과 맘에 배게 한다. 욕망을 배우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욕망을 건너다 보고 그런 왠지 억지스러움과 고통이 예견된 처지가 있음을 자연스레 똥기게 하는 것, 어쩌면 화폭의 어부들이나 그 어름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처한 노동과 휴식과 자연의 여건은 그 자체로 하나의 깨달음의 방편이 날로 달로 거느려지는 자연의 시공간이지 싶다. 배우고 말 것도 없이 노동이고 농땡이고 분별할 것도 없이 그림 속의 저 장삼이사들이야말로 고귀한 자연의 여력들이다. 일하고 있음과 능놀고 있음이 한 겨를이니 서로 갈마들었다 해야지 싶다. 삶을 욕망하였으나 그 괴로움에서 한 축 놓여났음을 보는 듯하다.

 

 

 

제4장 第四章 道用(無源)


   道沖                
   而用之或不盈       
   淵兮 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도는 텅 빈 그릇과 같지만
   그 쓰임에 가득 차서 넘치는 일이 없다
   못처럼 깊은 것이 마치 만물의 근원과 같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엉크러짐을 풀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어우러진다
   물에 가라앉아 있는 듯 없는 듯하다
   나는 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한다
   하늘님보다 먼저인 것 같다


  [補註]
  - 노자15장 : 이러한 도를 간직한 사람은 가득 차서 넘치려고 하지 않는다.
  - 노자45장 : 크게 가득 찬 것 (큰 충만)은 텅 빈 듯하지만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 노자56장 : (도를 아는 이는) 구멍을 막고 문을 닫으며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엉킴을 풀고 빛을 누그리고 티끌(세상)과 어우러진다.
  - 노자25장 : 흐릿하게 섞여 이루어진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천지(우주)보다 먼저 생겼다.

  [詩說]
   나는 기명(器皿)과 벼루와 화분을 좋아한다, 더불어 가방도 좋아한다. 그 쓰임새로 인하여 좋아도 하지만 더불어 가만히 쌓아놓고 이리 쓸까 저리 쓸까 하릴없이 궁리를 하면서 즐거운 마련이 든다. 결국 쓰이지 않고 먼지를 쌓게 되어도 어느 날 먼지를 훌훌 털어내면서도 이 적막한 쓸모에 대해서도 기꺼워지곤 한다. 더러 아주 드물게 누군가에게 덥석 안겨주는 재미도 쏠쏠하고 종요롭다. 완제품이나 신제품이나 명품만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화단이나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것을 가만히 줍기도 하고 중고매장이나 덤핑행사에서 사기도 한다.
   빈 화분에 오일장에서 산 싸구려 춘란(春蘭) 몇 촉을 심어놓고 스스로 대견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다 봄날에 심어 가을이 채 되기도 전에 갈변(褐變)하여 죽게 만들기도 한다. 내 불찰의 원인조차 모르면서 가끔씩 근심을 얻기도 한다. 화분이라는 가방, 그릇이라는 가방, 자아(自我)라는 가방이나 그릇, 혹은 마음이라는 도(道)는 어디까지 번지고 확장할 수 있을까.
   도(道)는 확장이 잘 되는 그릇이거나 가방이거나 화분 같다. 밑구멍이 꽉 막혀 화초의 뿌리를 썩게 하는 화분은 입은 있고 항문(肛門)이 없는 동물과 같다. 넘치는 것을 밑으로 빼 흘려버릴 줄 아는 화분은 슬기롭고 낙락한 기물이다. 그 큰 주둥이 입구와 그 작은 항문 출구 사이에서 식물이 자란다. 도(道)의 여줄가리라면-도의 여줄가리가 따로이 있을까 싶지만-, 덧없이 죽기도 하고 애써 기꺼이 살기도 하며 그 사이에서 병들어 시르죽고 그 반대로 꽃이 피고 풋것의 열매가 돋아 맺히기도 한다. 발갛게 익은 열매는 저절로 눈길을 부른다. 햇빛이 거기서 더 윤기나고 듬쑥하게 어울린다.
 이 어울림이 남다르다. 어둠과 어울리는 불빛처럼 거기 달겨드는 부나방처럼 어울림은 상극(相剋)의 대척을 넘어선 끌림이 완연하다. 이 끌림의 번짐이야말로 사물과 숨탄것들과 모든 관계를 이어주는 어우러짐의 파장(波長)이다. 어울림이 없으면 혼자서 즐거운 마련도 있겠지만 그리 쉽지 않다. 어울림이 불화를 엮기도 하지만 어울림이 더 많은 즐거운 변수(變數)를 얼러내기도 한다. 어울릴 때 웃음과 아이디어와 기쁨의 원천이 도드라진다. 웃음과 흥정과 너나들이의 장날은 공포의 심연(深淵)을 오래 지녔던 이도 다양한 시장통 풍물들 앞에 사뭇 경계가 풀리며 무구(無垢)해지려 하고 왠지 기꺼운 마련이 든다. 불안과 집착과 강박을 우리의 가슴의 상점에서 모두 첫날부터 떨이로 팔어버릴 노천의 하늘빛을 왜 우리는 종종 쐬어보지 못했는가.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가없는 하늘은 그림처럼 고요하고, 물결은 쉴 새 없이 넘실거립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소리치며 뜀뛰며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모래성을 쌓는 아이, 조개껍질을 줍는 아이,
   마른 나뭇잎으로 배를 접어 웃으면서 바다로 떠나보내는 아이,
   모두들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놉니다.

아이들은 헤엄칠 줄도 모르고, 고기를 낚을 줄도 모릅니다.
   어른들은 진주를 캐고, 상인들은 배를 타고 오고가지만, 아이들은 조약돌을 모으고 또 던질 뿐입니다. 
   아이들은 보물에도 욕심이 없고, 고기를 낚을 줄도 모릅니다.

   바다는 깔깔거리며 부셔지고,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죽음을 지닌 파도도 자장가를 부르는 엄마처럼 예쁜 노래를 불러 줍니다.
   바다는 아이들과 함께 놀고, 기슭은 흰 이를 드러내어 웃습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하늘에 폭풍이 일고, 물 위에 배는 엎어지며, 죽음이 배 위에 있건만, 아이들은 놉니다.
   아득한 나라 바닷가는 아이들의 커다란 놀이터입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바닷가에」

 

다함 없는 바닷가에 태초의 아이들이 현세의 아이들로 갈마들듯 능놀고 있다. 그 바다와 바닷가는 태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함 없는 변전을 통해 한번도 스러져 사라진 적이 없다. 무엇이나 그렇다. 바다는 수많은 생명의 숨탄것들과 주검을 같이 거느리지만 어느 한쪽으로 쏠려 본 적이 없다. 회복하고 회복하는 중이며 늘 소멸하고 소멸하면서 달리 동시에 생성하고 생성하는 중이다. 이것이 바다의 현황이지 싶다.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아이들이 바다를 꺼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바다라는 미지(未知)가 왜 즐거운 지 모르고 즐거운 천진(天眞)이다. 속속들이 바다를 알지 못한다고 바다를 즐기지 못할 바는 아니다. 앎의 바다가 아니라 모름의 바다로도 바다는 곁에서 파도거품을 아이들의 발등을 적신다. 분별로써 안다고 해서 바다가 더 즐거워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바닷가는 난파의 죽음이 넘실대고 또한 풍요의 고기들이 지느러미를 뒤채며 나오는 곳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냥 즐거이 놀기에 전념한다. 바다에 반짝이는 윤슬의 햇살과 바람과 깊이를 모를 파도의 심연과 하얀 갈매기의 고독과 수면을 차고 나는 날치의 날랜 사랑이 어울린다. 이 어울림 속에서 바다는 무정형(無定形)으로 살아있다. 죽음마저 품은 채 거대한 육지의 그릇 속에 담겨 살아있다. 낡은 고깃배는 바다를 담은 육지의 그릇의 이가 빠진 것처럼 바닷가에 걸치기도 한다. 그렇다고 바다가 상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폭풍이 일고, 물 위에 배는 엎어지며, 죽음이 배 위에 있건만, 아이들이 놉니다’ 라는 구절에서 도(道)에 대한 우리의 옥생각을 풀고 원래 그런 것처럼 도(道)의 훤칠함이 트인다.
   바다라는 수평선이 있고 물결이 항시 넘실대는 그릇, 그 광대무변한 기명(器皿)은 애써 채움이나 애써 비움이 따로이 없다. 그 둘은 서로 어울리며 따로이 채우고 별도로 비우지도 않는 듯하다. 그 무량(無量)함 곁에 우리는 ‘아이들’처럼 ‘보물에도 욕심이 없고, 고기를 낚을 줄도 모’르면서 살 수 있을까. 그 곁엔 항시 ‘죽음을 지닌 파도도 자장자를 부르는 엄마’일 때가 있다. 다사로움과 그악스러움이 저 윤슬의 바다 물결에 한몸으로 갈마들어 있음이다. 선악미추의 형태가 아니라 그 아우름이 넘실대고 출렁이며 파도를 치다 수평선으로 잔잔해질 따름이다.
   어디에나 틈입(闖入)해 있어서 가만한 미소로 우리를 엿보는 수평선의 눈길처럼 도(道)의 얼굴과 눈과 마주칠 때는 가만히 기껍다. 어눌한 듯 달변인 도(道)가 나를 고치고 당신을 쓰다듬는다. 잘 돼보자고 흐름을 알아가자고 가까스로 겨우 존재하는 듯 하지만 손을 잡으면 광대하고 쾌활하고 소소하고 가만히 기껍다.

 



   제5장 第五章 用中(虛用)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虛而不淈]                 
   動而愈出 [沖而愈出]*1        
   多言數窮 [多聞數窮]*2              
   不如守中 [不若守於中] *3          

 

하늘과 땅은 무정하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성인 또한 무정하다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은 듯
   속이 비었지만 다하지 (고갈되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 내뿜는다
   말이 많으면 곧 막힌다
   가운데를 지키느니만 못하다

 

[補註]
   - 노자79장 : 하늘의 도는 친함[親]이 없다. 항상 선한 사람에게 베푼다.
   - 노자56장 : (그는 친함과 친하지 않음의 구별·차별을 넘어선 사람이므로 그와) 가까워질[親] 수도 없고 멀어질 수도 없다.
   - 노자17장 : 으뜸은 아래에서 그가 있는 줄은 안다. 그 다음은 (낮은 덕으로 다스리는 그를) 가까이[親] 여기고 치켜세운다.
   - 노자23장 : 말[言]을 적게 하여 스스로 이루도록 한다.
   - 노자17장 : (임금이) 망설이며 말[言]을 귀하게 여겨도 (말을 아껴도) 공을 세우고 일을 이룬다.
   * 1 : [죽간본] (1) 텅 비었지만 더욱 나온다 (沖=盅or 空虚). (2) 움직여 내뿜으며 더욱 더 나온다(沖=涌搖).
   * 2 : [백서본] 듣는 것이 많으면 곧 막힌다. 듣는 것이 많으면 천명이 빨리 다한다.
   * 3 : [백서본] (풀무처럼) 마음 속에 텅 빔(충허,沖虛)을 지키는 것이 낫다. 가운데를 지키는 것이 낫다.
   - 노자16장 : 비우고 비워 더 비울 것이 없는 텅 빈[虛] 경지에 이르러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을 두텁게 지키라.
   - 노자48장 : 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를 닦으면 날로 줄어든다.
   - 노자64장 : (성인은) 배우지 않음을 배우고 뭇사람이 지나쳐 간 곳으로 되돌아간다.
   - 노자57장 : 법령이 더욱 뚜렷해질수록 도둑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성인은 말했다. 내가 하는 것이 없어도 백성이 스스로 자라나고 (화육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되고 내가 벌이는 일(사업)이 없어도 백성이 스스로 부유해지고 내가 바라는 것(욕심)이 없으니 백성이 스스로 순박해지더라.


  [詩說]
   장마가 목전 앞까지 가까운 유월의 흐린 낮이었다. 호수공원을 돌고 우거진 등나무가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았다. 보랏빛 등꽃이 주렴처럼 치렁치렁하던 때는 가뭇없이 가고 초록의 잎들만 무성해졌다. 또아리를 틀 듯 또는 서로 사무치게 등나무 줄기가 얽혀 등나무가 하나의 동아리를 이루었다. 등나무 줄기 한켠의 초록의 가지들 속에 초여름인데도 반 주먹 정도의 꽃이 미련처럼 남아있다. 등나무 잔화(殘花)였다. 등나무 그늘에서 잠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간이 습한 바람이 불었다. 그때 내가 앉은 자리 낮은 허공으로 등나무 줄기 끝자락의 앳된 연초록 넝쿨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때마침 내 눈길에 하늘거리는 등나무 줄기 끝자락의 앳된 넝쿨 곁에서 같이 바람을 타는 숨탄것이 눈에 띄었다. 가만히 보니 거미였다. 다리가 좀 긴 편이고 몸엔 연두빛이 어려서 반투명에 가까웠다. 내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한두 줄 외가닥의 거미줄에 의지한 채 공중을 소요하듯 날아다니는 듯 했다. 서커스단의 공중그네를 타는 화장을 한 앳된 소녀만 같았다. 등나무 줄기 으늑한 곳에 거미줄을 촘촘하게 쳐놓고 벌레 먹잇감이 걸려들기를 묵묵히 집요한 침묵 속에 기다리는 거미의 굴레를 벗어던진 거미만 같았다. 훤하게 트인 공중에서 날개도 없이 외줄 거미줄을 밧줄 삼아 선회와 활강을 하는 작디 작은 새만 같았다. 적어도 먹는 걱정과 궁리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훤칠하게 풀어놓은 자유의 거미였다. 일에 얽매인 거미가 아니라 노는 것에 풀린 그런 숨탄것이었다. 얼마쯤 그렇게 그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는 몸짓은 춤만 같았다. 좀 놀 줄 아는 녀석이군. 거미에 대해 나름 긍정적인 눈길을 흐뭇해 하는 순간이었다. 아마 그런 가만한 찬탄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무언가 거무스름한 물체가 휙 하고 낚아채듯 내 앞을 스쳤다. 다음 순간 그것은 정말 날개를 달고 있는 흔한 일상의 참새였다.
   그 자유롭고 헌헌장부 같던 거미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참새 부리에 물려 아물거리고 있었다. 불과 되지도 않는 순간의 거미에게 있어서는 부지불식간의 참사였다. 참새는 자유로운 영혼의 거미를 부리에 물고 등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후르륵 거미를 물고 날아가버렸다.
   참새가 그렇게 크고 엄정해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자유인처럼 바라보던 생생한 거미에 대한 내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풍비박산이 나고 나의 관념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몬존한가 갑자기 몸과 맘이 떨려왔다. 내가 생각한 자유라는 가치나 관념은 마침 거미를 발견한 참새의 식탐 앞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너무나 당연하고 득의만만한 참새의 자세 앞에 자유라는 가치나 생명의 안타까움은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거기에 어떤 선악적 판별이나 윤리적 개입은 개칠 같은 것이고 사족(蛇足)이었다. 이 작은 짧은 순간의 에피소드에서도 나는 아무 것도 더하고 뺄 것이 없는 철저한 방관자에 지나지 않았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수기에 대한 출판사의 서평은 2차 세계대전의 나치 파시즘이 자행한 수용소에 대한 적나라한 목격담과 그 끝나지 않는 악마성의 현재진행형에 대한 진단으로 돌올하다. 폴란드의 수용소가 해체되고 해방되기까지 6백만 명 가량이 주검이 돼 대기와 대지와 물로 흩어지거나 스며버렸다. 허망을 할 겨를도 없는 미미한 흩어진 존재가 되었다. 어느 인터넷 상에 올린 이 책의 독자는 인간이 인간을 격하시키고 멸절시키려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게 ‘이름 지우기’라고 한다. 매우 적절한 뼈아픈 지적이다. 노자 1장에서 이름, 즉 호명(呼名)은 만물의 어머니라고 한 부분이 여기에 가닿는다. 사람의 이름이 아닌 다른 기호로 대체되고 전락하게 된다. 일본 군국주의 망령이 생체실험에 동원된 사람들은 정당한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마루타라는 사물로 개체적인 단명(單名)이 되었다. 개별적인 이름이 박탈되고 소실된 인간의 경우는 결코 인간의 가치 속에 머물거나 살지 못한다. 이 참혹한 경우는 인류사에 여러 방점을 남겼다. 일본의 2차세계대전 동안의 갖은 만행이 그랬고 베트남전쟁의 학살이 그랬으며 캄보디아에서의 크메르루주의 대학살이 또한 독일 나치스 정권의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다. 인간이 어찌 이러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망연자실함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만행을 개전(改悛)할 만한 계기나 엄단은 당대 현실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라는 말은 ‘천지불인(天地不仁)’ 에 대한 가장 직설적이고 인간적인 호소이자 한탄이다. 그러나 그런 하늘로 대변되는 어떤 윤리적 주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에 대한 천상의 응징이나 개입은 노자에게 있어 도(道)의 메뉴얼이 아닌 것이다.

레비의 작품은 개인의 경험을 다루면서도 줄곧 목격자·증언자로서의 거리를 유지하며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담아내고, 인간의 파괴와 파멸에 관한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고찰을 증류해낸다. 그는 결코 고통을 전시하지 않는다. 그것의 근본적인 조건을, 그 생생한 상황을 목격하고 기록할 뿐이다. 철저하게 냉정하면서도 인간적인 시선으로 가장 생생하고 가장 가슴 아프게. 그럼으로써 그의 작품은 우리가 지금 다시 아우슈비츠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유대인을 동정하기 위해서나 독일인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생존자를 칭송하기 위해서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고통을 인간의 차원으로 보편화하여 우리의 역사적 상처로 받아들이고 진정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게다가 애초에 그가 목격한 광기와 폭력의 본질은 개인적 분노를 투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정확히 표현했듯이, 사악한 한 마리 괴물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하고 선량하고 순종적인 시민들의 집합적 힘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대개 비정상적이거나 어리석거나 잔인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환영받았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 수백만의 추종자들이 그들을 따랐다. 비안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한 이런 추종자들은(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타고난 고문 기술자들이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런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훨씬 위험하다.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회스, 트레블링카 수용소 소장이었던 슈탕글,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병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출판사 서평 인용)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刊)라는 나치 치하 수용소에서의 인간의 삶이랄 수 없는 기간 동안의 참혹한 경험에 대한 기록은, 인간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에 대한 외부적인 선정(善政)의 부재(不在)를 서늘하게 둘러보게 된다. 시대의 간극을 넘어 사람들은 그 처참한 상황의 대역하고 싶은 않은 당사자가 되어 그 절체절명의 극한을 구원할 외부의 강력한 종교적 윤리적 권위의 간섭을 종요롭게 생각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기력과 무대응이고 오히려 방관과 방치의 보편성만을 키울 따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이 야속하다 못해 그런 신적 존재에 대한 부정과 저주가 자자해질 만하다. 신의 무용론과는 별개로 노담의 자연관이나 세계관은 이런 처참한 역사의 순간에도 역시 더 극명하게 도드라진다. 불인(不仁)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었어, 라는 언사 속에 불인(不人)이라 하더라도 그 역시 천지자연의 도(道)는 종교적 결행과 윤리적 법적 징치(懲治)를 결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악해진 인간의 만행 역시 인위(人爲)를 포함한 자연의 한 흐름으로 참관(參觀)될 따름이다. 참혹할 수는 있어도 즉시 교정에 나서야 할 윤리적인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은 윤리에 의해 작동되지 않기 따름이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타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마르가레테는 전형적인 독일 여인 이름이고, 줄라미트는 전형적인 유대 여인 이름이다.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

 

여기 2차 세계대전 중에 루마니아 태생의 시인은 유대인의 게토로 지정된 곳에서 강제 이주된 부모와 함께 각기 수용소에 강제 입소된다. 부모님이 수용소에서 나치스에 죽임을 당하고 파울 첼란( Paul Celan (1920 – 1970)) 역시 강제 노역의 수용소에서 죽음 직전에 풀려난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독일 히틀러 파시즘 정권의 유대인 절멸정책의 시행으로 600만명 가량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궂긴 목숨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첼란은 루마니아어가 아닌 독일어로 시를 썼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의 푸가>처럼 자신의 절규의 언어를 들어야 하는 대상이 다름아닌 나치 독일의 숱한 사신(邪神)들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어눌하지만 절절하고 강렬하지만 한없이 미약한 존재의 절망의 심연을 보여주는 첼란의 언어는 천지간(天地間) 기댈 데 없는 인간이 인간에게 당하는 아비규환의 단말마이다. 그러나 끝내 한 줌 재와 연기와 부산물로 화한 숱한 유대인들로 대변되는 ‘마르가레테’와 ‘줄라미트’는 삶을 살 수가 없었다. 유대인이라는 분별 속에 그들은 생존이 유예된 멸살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유대인을 어떤 합리적 이성적 판단이나 판결이 삭제된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 취급됐으니 그들을 지상에서 몰아내려는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이라고 시인은 수차례 규정한다. 죽음의 명인(名人)을 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천지간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유대인의 저 절망에 찬 눈빛과 몸짓을 어느 힘 있는 관계자가 보았더라면, 신은 거기서 왜 예외였던가. 이렇게 묻는 사이, 수용소에 수용되지 않은 사람들은 적어도 인간의 범위에 들어있지 싶다. 그러나 가스실에서 정신을 잃고 죽어가는 이름도 없이 번호만 부여된 유대인들은 ‘풀로 만든 강아지’ 혹은 추구(芻狗)처럼 허망한 대상들이다. 기꺼이 구휼하듯 구제될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존재, 그 숨탄것들이란 얼마나 애절하고 안쓰러운가. 그러나 천지의 흐름은 몰인정하니 불인(不仁)하다 한다. 노담이 말하는 성인(聖人)조차 불인(不仁)하다 한다. 천지의 몰인정함이 성인에 옮아앉아 역시 몰인정하다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도의 아우라(aura)는 무신론과는 별개로 인간의 가치적 혹은 당위적 판단과 행위를 품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지간의 뭇 자연에서 사람에게로 묻어온 성인의 불인(不仁)은 편파적이지 않는 가치중립적인 위상을 드러냄이지 싶다. 선이나 진리를 가장한 이데올로기적 주장과 행위적 치우침을 품지 않음이다. 위선과 위악 모두를 거세한 자리에 노담의 성인은 겨우 발을 붙이는 것일 테다. 왜 그러한가. 천지자연은 신적 혹은 조물주적인 윤리의식의 주재(主宰)가 아니라 그 자체의 상호적 인과관계로 번성하고 쇠할 따름이다. 다만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 의지적 일탈, 즉 인위(人爲)의 불모성을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라오쯔에 있어서의 소박하고 소슬한 선각(先覺)이지 싶다. 이 천지의 대자연 속에 인간만이 이런 억지를 살아서 부렸고 부리고 있으며 부리려 한다는 자각, 짐짓 거기서부터 도(道)에의 바라봄이 돋아나지 않을까. 
   도에는 선민의식이 없다. 이 가차없음은 실제로 천지간에 고요하고 그윽하며 언제까지나 만연하다. 있음도 없는 것 같고 없음도 있는 거 같다. 아니 있음도 있음만 같고 없음도 없음만 같다. (다음 호)

 

 

 

 

 

유종인

1996년 《문예중앙》에 시 당선.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아껴 먹는 슬픔』『교우록』『수수밭 전별기』『숲시집』,
   시조집『얼굴을 더듬다』『답청』.
   미술 에세이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등이 있음.
   지리산문학상, 송순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