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 에세이
  • 연재 에세이
  • 연재 에세이
  • HOME > 에세이 > 연재 에세이

2022년 5월호 Vol.10 - 유종인


[ 조선그림 반려화 이야기 ]

 

단원도(檀園圖) 이야기

 

 스토리라는 말은 범박하게 흔히 쓰인다. 하다 못해 여름날 피부에 땀구멍이 없다는 개의 헉헉거리는 주둥이가 붉게 빼물은 혀에서 듣는 말간 침방울과 침버캐에도 뭔가 핫한 스토리가 있지 않겠는가. 매미소리 구성지게 뭐라 짖어대는지 몰라도 그 안에도 여사여사한 여름날 한철을 극악으로 울려야만 하는 숨탄것의 풍악인지 구라인지 간원과 청혼인지가 있는 셈이다. 스토리, 옛부터 가난을 먹고 살든 그 가난이 기어이 제 삶의 곤궁함을 견디는 한 방편으로 곁에 두든 아무러나 존재의 안팎이자 사방인 그런 얘기는 또 다른 인간의 먹을거리다.

 그림이라면 어떤 스토리라인이 없겠는가. 당연하게도 조선의 그림들 대부분이 이 스토리를 지긋이 제 눈그늘에 소슬한 다크서클로 드리우기도 했고 그 오목가슴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한 모금 품기도 하며 그 뒤뚱한 엉덩짝에 몽고반점처럼 은밀한 내력을 담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림에 시가 들었고 시 속에 그림이 들었다는 저 중화 땅의 동파(東坡)선생의 일갈은 일찍이 회자되는 바다. 그걸 여러 번 들었어도 그림에 이야기가 들었다 하니 거기 무슨 전기수(傳奇叟)라도 들어앉혔나 싶기도 할 것이다. 다만 경중(輕重)의 차이는 있지만 그림 속의 화제나 제발을 보면 그 내력이 순간 얘기의 물꼬를 트는 지경도 있다 하겠다. 

 우리가 조선의 내노라하는 화인(畵人) 중에 손꼽으라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코가 시큰할 이가 있다. 그 중에 단연 김홍도를 빼놓을 순 없다. 그는 확실히 다양한 장르의 그림에서 전지전능을 방불하는 붓놀림을 구수한 몇 안 되는 화인(畫人)의 풍모다. 

 사대부를 비롯하여 예인들은 특히 자(字)나 아호를 본명 외에 거느려 썼다. 김홍도의 아호는 여럿이지만 그 중에 제일 많이 쓴 게 단원(檀園)이다. 서호(西湖)나 단구(丹邱),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취화사(醉畫士), 첩취옹(輒醉翁) 등 여럿을 구슬려 썼다. 그 중에 단원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의 아호이다. 그런데 이 아호는 단순히 이름의 별칭인 아호로서만 기능했던 건 아니었던가 보다. 바로 그가 18세기에 살았던 우거(寓居)의 이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택호(宅號)에 연원하는 김홍도의 아호는 현재 서울 종로구 청운동 근방의 백운동천 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 학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좀 있지만 이러한 비정의 배경으로는 그가 그린 <단원도(檀園圖)>의 풍치의 구도와 그 화제나 제발(題跋)>에 든 내용과 한시 등에서 언술된 지리적 뉘앙스들 때문이다. 



김홍도 <단원도> 지본담채, 135.3 x 78.5cm 개인소장


 몇 해 전 북악산 뒤편 자락의 백사실계곡이나 백석동천(白石洞天)을 가본 지리감에 비춰보면 김홍도의 단원도의 배경과 연원이 제법 엇비슷하다는 예감을 가진다. 아무리 같은 공간이라도 시간이 개입되면 한 지리공간은 상전벽해의 격절과 변모를 거듭한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한 공간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방법은 아닌 듯 싶다. 다만 그 정확한 현대적 위치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아호가 된 집을 무대로 한 아회(雅會)를 벌여 교유했던 김홍도의 단원(檀園)이라는 시공간이 새삼 그리운 것도 여실하다. 자신의 우거(寓居)를 포함하고 있는 정원이나 정원 동산을 아호로 거느렸던 김홍도의 <단원도>는 조선시대 정원양식의 일정한 양상을 가늠하는 한 예도(例圖)로 참구(參究)하는데 요긴한 화폭이다. 요즘에 서울 안에 제법 그럴 듯한 정원을 거느린 화인이나 재력가가 몇이나 될까 모르지만 단원이 살았던 시대의 화인의 집과 뜨락의 풍취는 최대한 자연의 지형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깃들은 모양새가 완연하다. 어우러짐이란 이렇듯 미봉(彌縫)을 넘어서는 졸박한 조화미(調和美)를 거느리게 된다. 

 그림에서도 드러나지만 고아한 모임에는 술과 시가 당연히 따르지만 음악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개이자 향취 대상이다. 단원은 화필에만 능한 게 아니라 악기를 제법 잘 다뤘다. 퉁소가 그렇고 울림의 여운이 자자한 거문고에서 그 남다른 풍악을 퉁겨낼 줄 아는 풍류 악사였다. 

 <단원도(檀園圖)>의 상단 부분을 차지하는 화제(畵題)를 일별하다 보면 처음의 그림이 주는 인상은 점차 웅숭깊어진다. 새삼 눈그늘이 짙어지는 사람의 그윽한 눈빛을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화제는 화가 본인이 쓸 때도 있고 주변 지인이 참여하여 그림과 혹은 화인과의 교유관계 속에서 돋아난 심회를 지인이 시문으로 쓸 때도 있다. 또는 화인(畫人)이 궂기고 후대의 사람이 관기(觀記)를 쓰듯 화제를 들여놓을 때도 있다. 

  <단원도>의 화제와 찬시(讚詩)는 화인과 화인의 지인이 함께 썼다. 바로 그림 속의 세 사람 중 단원 자신과 정란 두 사람이다. 김홍도는 그림에 얽힌 만남과 이별, 그 만남의 즐거움과 슬픔의 소회를 문장으로 썼고 그림 속 아회(雅會)의 참석자이기도 한 정란(鄭瀾) 선생은 두 개의 절구시(絶口詩)를 화락하게 써냈다. 처음 세 사람의 지인의 만남이 있고 다음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이 그림 <단원도>에는 화락하면서도 고적한 내력으로 갈마들어 있다. 문간에 매달아 놓은 청해일사 선생의 절름발이 노새의 휴식의 그늘이나 여운처럼 말이다. 유랑하는 인생사의 한 단면, 그 소슬하고 우수어린 정감의 회자정리(會者定離)가 들어있는 화폭은 그래서 인생의 한 축도(縮圖)도 보더라도 크게 두동지지 않다.



김홍도, <단원도(檀園圖)> 부분


  김홍도와 강희언, 그리고 정란 세 사람이 1781년 김홍도의 우거에서 함께 어울려 화락(和樂)한 시간을 어울린 적이 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784년 12월. 뜻밖에 정란이 영남 지방 안기역 찰방(察訪)으로 있는 김홍도를 유랑 중에 찾아온다. 객지에서 벼슬을 하는 김홍도에게 지인 정란(鄭瀾)은 가뭄에 단비 같이 마음에 습습하니 해갈을 주는 만남인 것이다. 정란, 즉 창해일사의 주유(周遊) 편력은 여느 장삼이사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그러니 매여있는 자와 세상천지를 주유(周遊)하듯 떠도는 자의 조봉(遭逢)이란 기이하면서도 반갑고 뜻밖이면서 또 눈물겨웠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 옛날의 일을 회상하며 닷새 동안 술로 회포를 푼 후 김홍도가 예전 자신의 집에서 모였던 일을 떠올려 그림으로 옮았으니 그 소회를 제발에 적바림해 놓은 것이다. 그림 속 김홍도는 거문고를 타고 있고, 정란은 그 가락에 맞춰 시를 읊는 둣하고, 부채를 들고 기둥에 기대어 술잔을 기울일 타임을 셈하는 이가 강희언이다. 정란이 지었다는 두 편의 시 가운데 두 번째 시문이다.


         檀園居士好風儀  澹拙其人偉且奇 

         誰敎白首山南客  拍酒衝琴作許癡 

         단원거사는 풍채가 좋고 자세가 바르며 담졸 그 사람은 장대하고 기이했네.

         누가 흰 머리 늙은 나그네를 영남 땅에 이끌어 술잔 부딪히고 거문고 타 미치게 만들었나!


 대자연 속에 속박을 풀어헤치고 떠도는 일사(逸士)의 정겨운 지우와의 만남의 소회가 서슴없고 흔연하게 서렸다. 김홍도가 쓴 <단원도>의 제발(題跋) 내용은 또 이렇다.


 “창해(滄海)선생께서 북으로 백두산에 올라 변경까지 이르렀다가 동편 금강산으로부터 누추한 단원(檀園)으로 나를 찾아주셨다. 때는 신축년 청화절이었다. 뜰의 나무엔 햇볕이 따스하고 바야흐로 만물이 화창한 봄날에 나는 거문고를 타고, 담졸 강희언은 술잔을 권하고, 선생께서는 모임의 어른이 되시니 이렇게 해서 참되고 질박한 술자리를 가졌다. 어언 간에 해가 다섯 차례나 바뀌어 강희언은 지금 세상 에 없는 옛 사람이 되어 가을 측백나무에는 이미 열매가 열렸다. 나는 궁색하여 집안을 돌보지 못하고 산남(山南)에 머물러 역마를 맡은 관청에서 먹고 자고 한 것이 장차 한 해를 맞게 되었다. 이곳에서 홀연히 선생을 만나게 되니 수염, 눈썹, 머리칼 사이에는 구름 같은 흰 기운이 모였으되 그 기력은 연로하셔도 쇠하지 않으셨다.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봄에는 장차 제주도 한라산을 향하리라 하시니 참으로 장하신 일이다. 다섯 밤낮으로 실컷 술을 마시고 원 없이 이야기를 하기를 단원에서 예전에 놀던 것처럼 하였더니, 슬픈 느낌이 뒤따르는지라, 끝으로 <단원도> 한 폭을 그려 선생께 드린다. 이 그림은 그 당시의 광경이고 윗면의 시 두 편은 이날 선생께서 읊으신 것이다.”


 새삼 눈을 씻고 들여다봄에 김홍도의 대표적인 아호(雅號)로 크게 회자되게 된 그 자신의 집과 정원을 헤아리듯 다시 보게 된다. 단원이 자리잡은 형세는 계곡이 어지간히 끝나거나 산자락 계곡이 너르게 시작되는 부분에 터를 잡은 듯하다. 집 뒤편으로 갈수록 구릉진 바위의 산세(山勢)가 계곡의 형태로 어우러져 산음(山陰)의 기운이 수목들과 밝게 회통하는 분위기다.

 초옥(草屋)은 그 전체적인 규모를 다 드러내진 않았고 세 사람의 지인과 시중을 드는 시자(侍者)가 있는 누마루 격의 대청이 안쪽으로 단원의 방과 잇대어 있는 꼴이다. 그 단원의 방 벽에는 당비파(唐琵琶)쯤으로 보이는 현악기가 걸려 있다. 그 한켠엔 서책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있고 또 화병에는 꽃 대신 공작의 깃털이 조화처럼 꽂혀 있다. 누마루의 거문고 타는 이는 단원 자신이겠고 부채를 든 이가 담졸(澹拙) 강희언으로 보이며 그 곁에 묵묵히 거문고 튕기는 소리에 침잠해 시음(詩吟)을 골라내는 이가 정란 선생으로 여겨진다. 누마루 앞에는 품이 넉넉한 잎들을 들고 벽오동나무가 훤칠하게 회랑의 기둥처럼 서 있고 또 마당엔 방지(方池)가 수련과 연꽃을 품고 자리했다. 또 두루미 한 마리가 모이를 찾느라 뒷짐을 지고 마당을 배회하는 것이 새삼스럽다. 아마도 예전엔 이렇듯 두루미를 애완의 일환으로 집안에 풀었는지도 모른다. 중국의 임포(林逋)라는 은일거사는 항저우(杭州)의 고산(孤山)에 은일하면서 매화나무를 아내로 두고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는 말로 매처학자(梅妻鶴子)를 회자시킨 풍류의 일속이 아닌가 싶다. 그 기록은, “송나라 때의 임포는 항주 서호의 고산에 은거하였는데 부인도 없고 아들도 없었다.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스스로 즐겼는데, 사람들은 그를 보고 매화로 아내를 삼고 학으로 자식을 삼았다고 말했다.[宋代林逋隱居杭州西湖孤山, 無妻無子, 種梅養鶴以自娛, 人稱其梅妻鶴子.]” 는 적바람이 사서(辭書)인 《사해辭海》 속에 등장한다. 

 또 괴석엔 풍란을 깃들여 고졸한 멋으로 정원을 장식했다. 또 마당 귀퉁이엔 돌로 된 것인 듯 싶은 평상이 우북하게 담을 이룬 바위 곁의 구새 먹은 나무 아래 놓여있다. 무엇이 거기 놓이든 그 무엇이든 담백하고 소박하고 그윽할 마련이다. 또 대문이라기엔 조금 좁은 듯한 문을 향해 가만히 에워싸듯 품은 돌담 가까이 늘씬한 두루미 곁에 파초가 청처짐한 낯으로 푸른 그늘을 뜨락에 드리웠다. 문간 위에는 수양버들이 역시 처진 잎줄기를 주렴처럼 드리웠고 문 밖에는 단원을 찾아온 지인 중 한 사람이 타고온 것으로 보이는 당나귀나 노새 등속이 매어있고 그 탈것을 데리고 온 시자가 문밖 담벼락 아래 다리쉼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림은 만남과 회포와 주담(酒談)이 있는 풍치 낙락한 공간을 내려다보듯 그렸으니 부감법(俯瞰法)의 붓놀림이 완연하다. 

 자신이 사는 공간, 그 터의 이름을 자신의 아호로 옮아 쓴다는 것은 단순히 별칭의 의미만이 아니다. 시공간의 기운과 풍치와 분위기에 음으로 양으로 기운과 영향을 받는 것이 사람이다. 김홍도는 그런 자신이 거처하고 머물렀던 공간의 풍물과 지세와 건축이며 자연 일체를 화업(畫業)의 별호(別號)로 자양분 삼았던 것은 아닐까. 세월의 격절을 이겨내고 이 그림 속의 실제 화인의 공간을 고스란히 겪어보고 싶은 욕심이 헛될 줄을 알면서도 나는 그 바람을 쉽게 놓지 못한다. 그 헛됨을 몰아준 시간의 힘을 그나마 야속하게 느끼지 않는 방편이라면 이 화폭이 아직 그 당대의 그윽한 풍류의 소회(小會)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음은 어느 새 그 화폭 안으로 슬쩍 발을 들여놓는다. 그런 그림 속에 발을 빠뜨린 내 손에는 후대의 술병이 호리병처럼 매달려 있다. 그럼 화폭 귀퉁이에선가 거문고 소리가 튕겨나오고 오동나무 잎에 듣는 한낮 여우비 소리의 투닥거림이 내 귓등을 적시니 그 또한 적당히 굴풋하니 가만히 좋다. 더운 날에도 계곡을 타고 내려온 산바람이 큰 손처럼 반그늘을 드리운 화풍(畫風)이 감도니 후대 알음알음으로 아는 이여, 이 화폭에 눈길을 빠뜨리며 여럿이 나눌 만하다. 



 

 

 

유종인

1996년 《문예중앙》에 시 당선.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아껴 먹는 슬픔』『교우록』『수수밭 전별기』『숲시집』,
시조집『얼굴을 더듬다』『답청』.
미술 에세이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등이 있음.
지리산문학상, 송순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