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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호 Vol.09 - 유종인

 


[ 조선그림 반려화 이야기 ]

 

고양이 이야기

 

어느 날 나는 핸드폰 중고장터 앱에서 저렴한 비용에 고양이 관상을 봐준다는 동네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집에 고양이가 없는 나는 그럼에도 왠지 호기심이 조금씩 발동했다. 어디 없는 고양이라도 빌려 데리고 가 저렴한 관상을 보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걸 봐주겠다는 사람은 비대면으로 사진 이미지를 전송 받아서 고양이 상태를 봐줄 것이다. 그럼에도 왠지 사람이 고양이를 얼마나 아꼈으면 이런 광고의 발상이 돋았을까 새뜻하고 한편으로 기이한 느낌도 들었다. 정치권에서는 권력자의 심기 경호라는 말이 왠지 스산하게 느껴진 적이 있는데 고양이 심기까지 살피는 걸 마다하지 않을 애호가가 적지 않은 것도 애완의 심중이지 싶다.
  개와 고양이는 사뭇 다르다는 평판이 자자하다. 개는 주인인 사람에 대한 복종과 반김이 적극적이고 구순한데 비해 고양이는 주인에 대한 애호가 시니컬하고 독립적인 경향의 새침떼기가 많다고 한다. 충견(忠犬)이라는 말은 있어도 충묘라는 말은 잘 안 쓰는 걸 봐도 고양이의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고양이가 가진 남다른 매력과 미덕을 높이 사고 아끼는 덕에 옛부터 고양이는 집안을 넘나드는 가축으로 스스럼 없었다. 귀하고 귀엽게 여기는 데에는 그만한 외견상의 어여쁨과 매혹이 자리잡는데 고양이는 제 스스로도 그런 자신의 미덕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동물처럼 군다. 꾀가 밝은 짐승이다. 고양이과 중에서 호랑이가 제일 큰 무리이고 고양이가 제일 작다고 한다. 호랑이에게는 흔히 두려움과 외경의 발원이 생기지만 고양이에게는 평온함과 보듬고자 하는 애완의 눈길이 돋는다. 집안 동물치고는 야성이 있어 잘 순치(馴致)가 아니 된 채로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를 즐기는 밀당의 고수이기도 하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生氣)가 뛰놀아라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소이다」 전문, 1924년

 

  시편을 보더라도 고양이와 봄은 뗄레야 떼기 어려운 일종의 짝패와도 같다. 고양이가 봄철에만 사는 건 아니지만 봄 기운 속의 고양이는 그야말로 생동하는 봄의 이미지를 다양한 뉘앙스로 그려낼 줄 아는 숨탄것 중에 단연 으뜸이다. 개와는 달리 묶어 기르지 않는 야성도 야성이지만 그럼에도 풀어놓아 기름을 통해 사람과 인가와 묘한 어울림을 자아내는 바도 여실하다. 그만큼 고양이는 눈치가 빠르고 귀엽고 영리하며 독립심이 남다른 측면이 있다. 어디 그거뿐이랴. 때로 앙칼지고 냉정해서 과연 이놈이 사람이 기르는 가축이나 애완에 속하긴 하는가 하는 서운할 때도 있다. 제딴엔 조금만 심기를 거스르면 돌변해서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는 걸 서슴지 않는다. 언제든 준비된 사나운 상냥함이 고양이의 이중성이며 매력인지도 모른다. 이모저모 고양이를 요물이라고 일갈하시던 옛 할머니의 말씀이 문득 다가든다.

 뒤늦게 그런 생각도 든다. 조선의 화인(畵人)들이 당대에 그렸던 고양이 그림을 데리고 고양이 관상을 봐둔다는 지금 당대의 고양이 점술사에게 데려간다면 말이다. 그림 속의 고양이는 생물이 아니니 관상 보기가 곤란하다가 할까, 아니면 세밀하고 인상적으로 파악한 고양이 그림이니 시대와 상관없이 그 관상의 내력이 가능하다 할까.

 무엇보다 영모화(翎毛畵) 속 고양이 그림이라면 단연 화제(和齋) 변상벽(卞相璧)을 손꼽는다. 일명 변묘(卞猫), 변고양이라고 부를 만큼 그는 고양이를 즐겨 그렸고 잘 그렸으며 다양하게 또 구성지게 그렸다. 다른 사군자나 산수화나 인물화를 제쳐놓고 고양이를 특별히 많이 그린 화인(畵人)의 속내를 특별히 물어볼 짬이 있었으면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근데 어쩌면 그 대답은 의외로 그의 고양이 그림 속에 면면히 도사리고 간직돼 있는지도 모른다. 화폭에 등장하는 다양한 고양이 그림들이 화재(和齋)의 고양이에 이끌린 매력의 포인트를 정치(精緻)하고 살뜰하게 보여주고 있는 거나 아닌가.


 


변상벽, <묘작도(猫雀圖)>, 비단에 담채, 93.7×43.0㎝, 국립중앙박물관

 

  나무에 오른 고양이가 앞발의 발톱으로 나무줄기를 그러잡은 채 뒷발로 몸의 전체적인 균형을 받쳐주는 자세는 긴장감 있으면서도 역동적이다. 본능적으로 몸의 중심 부분이 되는 허리의 등골을 봉긋이 솟은 것과 눈길을 나무 우듬지나 새들한테 향하지 않고 뭔가 켕긴 듯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처리는 단연 압권이다. 특히나 나무에 오르는 고양이와 이런 고양이를 고개를 뒤로 젖히듯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땅 위의 고양이 사이의 상황 처리와 그 호응은 변상벽만의 응시에서 나오는 뛰어난 관찰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특히나 지상의 고양이를 보라. 고개를 뒤로 젖혀 고양이 낯에 드러나는 흰 수염과 샛노란 눈자위와 분홍빛 코 같은 정밀한 묘사는 핍진한 디테일(detail)이 곧 그의 화폭의 생명임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까맣고 흰 털빛으로 구획되듯 조화를 이룬 몸빛의 깔끔함과 뒷다리 근육의 단정한 듯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앉았을 때 앞발 쪽으로 사려놓은 꼬리의 자태는 또 어떤가. 장삼이사 누구든 고양이 자태가 궁금하고 어령칙할 때 이 화폭을 엿보는 것으로 효험이 있지 않을까 싶다. 흔히 사물이나 숨탄것의 형상을 잘 그리는 형사(形似)의 단계를 넘어 그의 고양이는 고양이도 채 눈치채지 못한 속종을 거느리고 있는지 모른다.

 


변상벽, <국정추묘도>, 종이에 담채, 29.5×23.4㎝, 간송미술관
 
  화재의 출중한 묘사력은 그의 <국정추묘도>에서도 핍진하게 드러나는데, 국화가 핀 마당에 가을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털 빛깔이 변죽을 부린 듯 다양하고 검은 터럭을 중심으로 한 얼룩무늬 또한 고양이의 전체적인 느낌을 끌림있는 숨탄것으로 만든다. 웅크린 듯 도사린 고양이의 긴장감과 또 한켠으론 속종에 품은 낙락한 기운 또한 없지 않아서 야누스적인 자태가 배어나오기도 한다. 긴장한 듯 곧추선 털빛조차 간과하지 않고 세밀하게 얼러내는 화인의 공필(工筆)을 단번에 알아차리게 한다. 국화 핀 가을 뜨락의 고양이는 옛부터 안일(安逸)한 가운데 장수(長壽)의 지복을 누리라는 염원이 드리워졌다 한다. 이렇듯 적확하고 정확한 묘사력은 단순히 외형을 잘 그리는 걸 포함해 그 대상의 속종까지 전달한는 이형사신(以形寫神)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는 고양이에만 한정되고 치중한 경지는 아니고 조선시대 회화 중 특히나 인물화 중 초상화에 많이 강조된 화필의 핵심 덕목이기도 하다.  쓸쓸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국화 핀 뜨락의 고양이 그림은 왠지 삿된 것을 가만히 물리쳐줄 것만 같고 뭔가 고즈넉하지만 화락(和樂)한 기미도 불러올 것만 같으다.

 

 

정선 <추일한묘도>, 비단에 채색, 20.8×30.5㎝ 간송미술관

 

  조선에서는 여러 화인들이 고양이를 즐겨 그렸는데 겸재(謙齋)의 <추일한묘도(秋日閑猫圖)> 또한 던적스럽지 않고 스마일한 가을날의 기분과 거기에 어울린 고양이와 꽃과 초충(草蟲)의 어우러짐이 있다. 한갓지다, 라는 말을 굳이 고양이 그림으로 곁들이지만 이런 분위기여도 좋지 않을까 싶다. 만물이 쇠하고 기운이 쇠락하는 가을이라고 하지만 이 화폭에 드리운 풀꽃과 벌레들과 고양이만은 예외인 듯 싶다. 예외가 있으니 가을은 더 새뜻한 색감을 드러내는 듯 하다. 검은 고양이의 매혹과 들국화의 분홍빛, 쑥빛과 여린 초록의 빛깔의 들풀들, 그리고 풀빛을 닮은 섬서구메뚜기의 조아림 등이 한가한 듯 어울린다. 또 공중에 붕붕거리는 소리 들리는 듯한 벌의 발동도 화폭을 흥성하게 한다. 어쩌면 가을은 쇠락과 소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시 솟구치는 발흥과 모종의 생동이 함께하는 시공간이지 싶다.

 

  

심사정, <패초추묘 (敗蕉秋猫)> ,  23 X 18.5 cm, 비단에 채색

 

  현재(玄齋)의 고양이는 겸재나 화재의 고양이와는 조금 다르게 뭔가 인간적인 속내가 갈마든 듯한 느낌이 든다. 가을날의 정취를 아는 사람의 눈빛을 한 고양이라고나 할까. 어딘가 고양이만은 아닌 고양이이고 사람의 속종이 갈마든 고양이의 소슬함이 엿보이는 고양이만 같으다. 아무려나 찢어진 파초(芭蕉)와 어울려 놓은 심사정의 소재 선택이 파격에 가깝게 느껴진다. 남방식물에 속하는 파초와 어울려 놓았으니 가을은 더 패색이 짙으나 고양이의 우뚝 선 듯한 앉음새가 어딘가 명민한 선비의 안으로 삭힌 맬랑콜리를 대신하는 듯도 하다. 또 그 바닥에 메뚜기는 여전히 이곳의 가을이 여전하고 어느 때고 이별하고 변하고 흐르는 것이 시간이란 듯 한 방점(傍點)처럼 돋아 놓았다. 찢어진 파초를 등지고 있음에도 고양이의 유난스런 눈빛에는 묘한 맑은 노스탤지어 같은 게 서렸다. 현재가 아니면 불가능한 화필의 뉘앙스의 번짐이다.

 

 

장승업, <추정유묘(秋庭遊猫)>

 

  오원(吾園)도 적지 않은 수의 고양이 그림을 그렸다. 아마도 고양이가 가진 상징성과 대중적인 염원의 기호가 그런 주문을 낳았는지 모른다. 어느 화목(畵目)에서나 능란하고 능통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오원의 영모(翎毛) 중 고양이 그림 또한 변화무쌍한 생명의 자태와 기운을 얼러내는 면모가 여실하다. 화면을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는 구새먹은 단풍나무엔 단풍이 어지간히 들어 마치 꽃과 같다. 그 아래엔 가을의 전령 같은 꽃 황국이 노랗게 새뜻하니 만개했다. 이만하면 사람이 없어도 그 화폭에 드리운 파안대소의 대리 격이 아닌가 싶다. 가을 꽃 국화와 가을 단풍나무 잎이 서로 대구(對句)하듯 피고 물들었다. 저만치 땅에 반쯤 묻힌 듯한 바위가 어스름처럼 있으니 구색이 여여하다. 무엇보다 화폭의 주인공은 고양이 두 마리의 대조적인 어울림이다. 하나는 가을 뜨락에서 또 한 마리는 단풍나무 중동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다. 지상과 천상을 잇닿는 나무에 오른 흰 고양이는 상서러움의 빛깔이라 흔히 말한다. 땅 위의 젖소마냥 얼룩무늬가 있는 검은 고양이와 단풍나무를 타고 있는 올-화이트의 흰 고양이의 대조가 이채롭다.
  다른 얘기지만 중국의 실권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의 중국 내 개혁개방 노선의 추진 과정에서 그가 했던 말은 재밌으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不管白猫黑猫, 能抓到老鼠就是好猫)’ 라는 그의 일갈은 사회주의에 시장경제의 숨통을 틔우는 마중물이 되기도 했다. 같은 맥락의 선부론(先富論)과 더불어 당대 덩샤오핑의 중국 현대화 전략의 짝패를 이루었다. 그런 비유 속의 흑묘(黑猫)와 백묘(白猫)가 오원의 화폭에서 훤칠한 키의 새뜻한 황국(黃菊)을 사이에 두고 가을날을 능놀고 있다.
  화락(和樂)하라. 화락하지 않으면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날 땡볕 속에서도 그늘이 지리라. 멀리 돌이켜보면 내 어린 날은 짓궂게 가지고 놀던 고양이들이 할퀸 손등의 무수한 상처들로 핏빛이 성성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뭔가 모르게 품에 안고 어르고 싶은 고양이를 쉬 놓지 못했으니 내 어리석음은 고양이의 매력을 간단히 이기지 못했을 게 자명하다. 그날의 고양이가 무수히 할퀸 손등의 상처는 다 아물었으니 이 봄날엔 아파트 단지를 선선히 오가는 길고양이를 불러세우듯 손짓을 내볼 요량이다. 내 손등에 다시 상처를 낼 만큼 붙임성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창문을 열고 내 부르는 손짓에 그저 잠시 멈춰 고개를 돌려 호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다 마저 가는 길 갈 것이다. 그 잠시의 멈춤 동안 나는 우리네 일상의 화폭 속에 생동하는 고양이를 관상처럼 마주할 마련이다.

   

 

 

 

 

 

유종인

1996년 《문예중앙》에 시 당선.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아껴 먹는 슬픔』『교우록』『수수밭 전별기』『숲시집』,
시조집『얼굴을 더듬다』『답청』.
미술 에세이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등이 있음.
지리산문학상, 송순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