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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호 Vol.07 - 유종인



[ 조선그림 반려화 이야기 ]


선유도(船遊圖)와 풍류 이야기



   심사정, 〈선유도(船遊圖)〉, 1764년, 지본 담채, 27 cm × 39.5 cm, 개인 소장



   “…배에는 싣고 다니기 난감해 보이는 물건들이 실려 있다…”
   <선유도(船遊圖)>에 대한 인터넷 상의 여러 글들을 접하면서 내 눈을 지긋이 끈 것은 이 문장이었다. 그림에 대한 다양한 품평은 여느 조선의 그림을 평할 때와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개별 그림의 개성적인 면모와 화인(畵人)의 특장과 관련지어 설명하거나 평가를 드리우는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그럼에도 인용한 문장의 필자가 위와 같이 ‘난감해 보이는 물건들’이 실려 있는 배를 언급할 때 ‘난감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단순한 수식언(修飾言)을 훌쩍 뛰어넘는 의미의 증폭으로 다가왔다. 난감함은 문제 유발의 꽃으로 바다 뱃전에서 마구 아니 슬며시 꽃대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아무려나 선상(船上)에 실린 외적(外積)된 물건들에 대한 필자의 난감한 시선은 과연 선유도를 그린 현재(玄齋)에게도 공히 난감함으로 여겨졌을까. 몇 백년 후의 그림을 보는 필자나 당대 그림을 그린 화인(畵人) 심사정(沈師正)은 난감함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고 여겼던 것일까.
   난감함이 불러올 파국을 염려해 미리 배에 싣기를 포기하는 것이 사회 일반의 통념이라면 현재(玄齋)는 굳이 당대에 왜 배에 올려놓고 싣기엔 난감해 보이는 물건들을 실어 그림을 그려나갔을까. 물론 그에 앞서 필자가 언급한 ‘배에는 싣고 다니기 난감해 보이는 물건’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일 수밖에 없다. 심사정의 이<선유도(船遊圖)>는 어쩌면 이 ‘부적절해 보이는’ 혹은 ‘난감해 보이는’ 것을 배에 싣는 행위로부터 즐김[遊]의 안목을 정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배에 얹기 난감해 보일 물건들의 품목들이란 대체 무엇일까. 화면의 뱃전 이물과 고물을 일별하면 이렇다.
   대를 쪼개서 엮어 만든 둥근 돔 형태의 창이 드리운 임시 선방(船房)이 배의 중앙에 있다. 뱃전 이물에는 풍랑의 바다를 평온한 듯 심상하게 그윽이 내다보는 두 선비가 있고 고물 끝자락에는 긴 장대인가 노(櫓)로 힘겹게 물살을 헤쳐나가는 사공의 진력(盡力)이 있다. 그런 두 선비와 선방, 그리고 뱃사공 사이에 그 두 선비가 데려온 듯한 각종 기물이 옹립돼 있다. 좀 생뚱맞다. 아무리 좋기로서니 뭍의 집안 안팎에 두고 즐겨도 충분할 것을 풍랑이 심상치 않은 뱃전에까지 드리운 심사는 무얼까. 애완(愛玩)의 물건들은 멀리 가물가물한 수평선까지 대하게 됐으니 이는 분명 뱃놀이하는 선비의 고집이다. 고집인데, 즐거이 그리고 기꺼이 또 버릴 수 없이 곁에 두고야 마는 인생의 반려(伴侶)같으니 이는 즐김의 상승고도와 하강고도 어느 자리에 두고 난처해도 버릴 수 없음이다. 한 질(秩)의 청록색 책갑을 두른 서책과 꽃을 꽂은 백자 화병과 연적 같은 기물과 괴석 같은 늙은 매화등걸 분재가 있다. 그리고 그 고매(古梅) 위에 바닷새가 아닌 정수리가 인주밥처럼 붉은 두루미 즉 단정학(丹頂鶴)이 균형을 잡으며 앉아있다. 이 모두를 받쳐주고 있는 장식이 없는 옅은 에메랄드빛 서안(書案)이 있다. 이것들이 다 무어란 말인가.
   또 푸른 물결의 파도는 도저해서 여느 장삼이사들 같으면 불안과 더럭 무섬증이 일었을 바닷물이 뱃전을 호시탐탐 넘보는 지경이다. 그럼에도 뱃전 이물의 두 선비는 먼바다를 보거나 하늘로 눈길이 들려 있을 뿐 동요하는 기색이 없는 오히려 한유(閑遊)의 기미가 완연하다. 대담하기는 이미 오래 전이어서 이 정도의 풍랑은 오히려 즐거운 롤러코스터나 바이킹, 혹은 디스코 팡팡 같은 놀이기구에 어지간히 단련된 젊은이의 심상한 표정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환호작약하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배 뒷전에 실은 애완 기물들을 간간이 곁눈질하면서 이들은 풍랑의 호들갑을 점잖게 다독이듯 격랑 속 고요를 즐기는 듯도 하다. 아마 그런 것이라면 선비들의 애완이나 풍류는 뱃놀이나 그 뱃전에 실은 애완의 권속 같은 기물이나 뱃전을 넘보듯 요동치는 격랑은 한갓 외물(外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조건을 통해서 오히려 자신들 안에 돋아나는 묘한 심정적 결기랄까 새삼스레 벼려지는 호기(浩氣)를 즐기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그러기 위해서는 좀 과장되더라도 뱃놀이 주변의 파도와 물결은 더 격정적이고 격랑(激浪)의 기운이 종요로웠는지도 모른다. 현재가 그려낸 배를 둘러싼 물결의 수파문(水波紋)은 그래서 도식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며 물살의 이미지가 구성지다. 파도 물살의 높낮이를 잘 배합하듯 그 물결의 헤어 스타일을 능란하게 변주해내었다. 일찍이 두보(杜甫)는 그의 시에서 ‘물 하나 그리는 데 열흘, 돌 하나 그리는데 닷새(十日畵一水 五日畵一石)’라고 일갈했다. 그림에서 물과 관련된 풍광은 보긴 쉬워도 그걸 구성지고 실감있게 그리기는 여의치 않다. 드센 파도의 흰 머리카락을 한껏 바람에 들춰냈는가 하면 파도 물살에 패인 볼우물인양 소용돌이 와류(渦流)를 군데군데 물결 위에 지어놓았다. 마치 물살 위에 피어난 크고 파란 부용꽃의 너울거림만 같다.
   삶이란 도처에서 그리고 시시때때로 난감한 물건이 아닌가. 그것은 단순히 배에 실린 외물(外物)로서의 부적절한 수화물을 넘어 더 오롯하고 기꺼운 눈길이 가는 이유는 그것이 실용(實用) 너머의 심미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심미(審美)란 무엇인가. 외물의 적정성의 문제를 넘어 어느 순간 나의 심중으로 화두처럼 확 이적(移積)돼 골똘한 눈길을 끄는 건 이런 현실적으로 무용한 것들의 심미성(審美性), 바로 아름다움 때문이다. 풍류는 때로 이런 의외성(意外性)이 지닌 매력을 완상하고 곁에 여실히 두고자 한다. 쓸데없는 것을 쓰고자 함이 풍류의 심성 중 하나다. 뱃놀이에 어여쁘고 농염한 기생이나 세련된 악공(樂工)들 대신에 자신이 평소 즐기고 아끼는 기물을 태웠다는 것, 여기에 풍류의 남다른 결기가 서렸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흔히 이 <선유도>를 선비화가의 내면의 그림이라고 해석하는 측면도 일견 고개가 끄덕여진다. 거센 파도의 바다는 당대 현재 심사정이 처한 삶의 불우(不優)와 단절된 출사의 상황 같은 암울한 현실을 상징하고 그럼에도 배 안에서 풍랑의 불안에 휩쓸리지 않은 평온하며 유유자적한 와유(臥遊)의 자세는 그가 배에 실은 골동의 애장품들과 더불어 나름의 신념과 풍류의 자세로 대별 된다는 시각이다. 좀 도식적인 해석이기는 하지만 무리한 것만은 아니다.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은 역적의 자손이었다. 번듯한 양반이었으나 출사는 꿈도 못 꿨다. 전제시대의 사회적 연좌제가 완연하던 시대였다. 죄의 혈통을 철저하고 완고하게 묻는 시대였다. 강제된 인간의 사회적 조건은 그 인생을 이미 반 이상 확정지어 놓는다. 심사정의 할아버지 심익창(沈益昌 1652-1725)은 과거시험 부정사건과 연잉군(延礽君, 후일 英祖) 시해 모의사건으로 집안이 몰락했다. 현재의 아버지와 그 자신은 다행히 삼족을 멸하는 극악한 치죄에서 벗어나긴 했다. 그럴 때 그들이 엄혹한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벼슬과 권력의 영달이 원천봉쇄 됐을 때 남은 것은 좌절과 쇠락한 삶이 아니면 새로운 세속의 개척이었다. 아마도 현재(玄齋)에게 있어 새로운 세속의 개척이란 바로 그림과 결부된 풍류적인 초탈과 안빈낙도가 아니었을까. 풍류란 때로 이렇게 곁다리나 여줄가리가 아니라 본류(本流)의 삶일 때도 있다.  
   그것은 탁자와 그 위에 옹립된 여러 기물들을 통해 통념화된 풍류의 해석이 조금은 달리할 수 있는 계기를 보여준다. 앞서 ‘배에 싣기엔 난감한 물건들’을 내가 언급한 것은 바로 이런 일반적인 풍류의 통념에서 비켜난 의외성(意外性)이 삶의 본래 모습으로 추구된 화인(畵仁)이있었기 때문이다. 외곬이란 말은 편벽되지만 그것이 삶의 길이어야 할 때 풍류는 선택이 아닌 본류인 셈이다. 
   풍류 애호가들이나 선비들이 즐겼다는 이런 기물은 철학, 신념, 기개나 애호, 풍류 따위의 상징이 배어있다. 이런 기물들의 다양한 취급은 청나라 공동서화(骨董書畵)의 수입에 따른 수집과 거래가 빈번해진 당대 분위기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오원 장승업이 창안했다는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는 앞서 심사정의 <선유도(船遊圖)>의 풍랑과 파도가 꽃밭처럼 가득한 바다의 뱃전 고물 가까이 탁자에 올린 기물들의 구성과 매우 흡사한 뉘앙스를 준다. 당대 선비들의 풍류의 격식을 보셔주는 청동 향로나 세발 달린 솥[鼎]이나 괴석, 난초, 수선화, 벼루, 게, 무, 복숭아, 매화가지, 조개 등 다양한 기물과 숨탄것들이 등장한다. 물론 장식적인 대상과 기복적(祈福的)인 상징물 등이 있지만 풍류적인 애호의 물건도 너름새 있게 포진해 있다. 길상(吉祥)과 서물(瑞物)과 풍류의 애장물(愛藏物세)들. 세상에 크게 소용되거나 실용에 가깝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애호의 눈과 손길이 가는 것들, 그런 사물을 귀히 여기고 거기서 심정적 여유와 새뜻한 기운을 북돋우는 것도 풍류의 한 축이지 싶다.

 

 


   장승업, 〈백물도권(百物圖券)〉, 19세기, 종이에 수묵 담채, 38.8cm × 233 cm, 국립박물관


 장승업, 〈백물도권(百物圖券)〉 부분



 

   기명절지도는 정조 시대의 책가도(冊架圖)의 영향력과 당시 수입된 청나라 말 해상파(海上派)나 영남파(嶺南派)의 세화(歲畵)는 물론 길상화(吉祥畵)의 기운도 너름새 있게 받아져 그 독특한 화목(畵目)으로 정착된 바가 있다. 풍류는 이렇게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서 서민 백성들 대중으로 그 오지랖을 넓혀갔다. 당시에 조선이나 청나라에서 기명절지도류가 유행한 것은 풍류의 세속화와 함께 금석학(金石學)과 서화골동 취미의 너른 유행도 한 몫을 했다 싶다. 말의 어패가 있겠지만 풍류의 세속화란 말 그대로 누구나가 풍류를 즐기고자 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다는 말이다. 풍류를 고상한 특정계층이나 집단의 전유가 아니란 얘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실천적인 화두가 여실하다. 고정물이 아닌 풍류라면 무엇이 딱히 풍류의 항목이나 품목이 될 수 없다는 것, 여기에 ‘배에 싣기엔 난감한 물건들을’ 배에 실었던, 그리고 그것을 풍랑의 뱃전 한켠에 실어 화폭에 그렸던 화인(畵人) 심사정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무엇을 하고 싶은데 외부의 시선이나 여러 제약으로 꺼려지는 난감함을 타파하는 것이 어쩌면 풍류의 초발심이지 싶다. 그럴 때마다 자유가 조금씩 숨을 트인다. 일상은 따분하고 주니가 들지 않고 매순간 생동하고 낙락한 송뢰(松籟) 어름에 있지 싶다.
   그런 풍류에 눈뜸이 불편하지 않고 당신의 몸과 마음에 잘 맞는가. 묻는다. 풍류라는 말은 어느 땐 긍정적이면서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동시에 풍기기도 한다. 자본주의적 시각에서라면 풍류는 상류층의 일상적 누림이 가능한 경제력의 뒷배를 받지만 하층민에게는 꿈에 본 전생의 호사스런 어령칙한 기억 정도일까. 풍류는 무엇을 빼고 무엇을 추가할 항목이 특정하게 주어져 있는가. 풍류는 누구에게는 고된 노동이고 누구에게는 흔전만전한 여가일 수가 있는가. 풍류는 너르게 보면 무엇이든 그 낙락한 즐김일 텐데 그것을 따로이 옛 풍류의 항목만을 규정해 오늘에 추수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며 시대적 오류란 말을 수긍하는가. 그러면 오늘에 와서 새로이 자본주의의 책략과 관계없이 새로운 갱신되어야 할 풍류라는 게 있는 것인가. 정말 풍류는 골동(骨董)이 아니라 주걱으로 밥을 퍼담고 국과 찌개를 끓일 수 있으며 때론 책장 한켠에 놓고 그윽이 바라볼 기명(器皿) 같은 것일 수도 있는가. 실용이지만 완미한 관상과 휴식일 수도 있는 맥락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 풍류의 정신이지 싶다. 
   일상과 예술을 잇듯이 풍류의 옛 말씀들을 상고하자면 그 근원이 되는 단초를 《서경(書經)》에서 엿본다. 서경의 대우모편(大禹謨篇)에는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희미하니, 오직 정(精)하고 일(一)하여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구절이 오롯하다. 이 말은 고대 순(舜)임금이 자신의 자리를 우(禹)에게 양위하며 치심(治心)과 근신(勤愼)의 뜻으로 전할 말이다. 그런데 이 열여섯 글자의 한자어에 담긴 함의가 매우 함축적이고 웅숭깊어서 단순히 제왕학이나 유교적 심성수련의 덕목이 되는 구절로만 한정하기는 아깝다는 생각이다. 요는 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좀 더 번져 풍류의 얼이나 본성으로 보면 어떨까. 인심을 불안정하고 가변적이며 감정과 욕망에 휘둘릴 소지로 본 마음이라면, 도심은 유연하면서도 굳건하며 일정한 깨달음에 심지가 닿아있는 천심의 여줄가리로 본 것이다. 이런 이분법이 딱히 마뜩하지는 않지만 그대로 품은 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아우라를 넓혀 들여다볼 때 풍류의 얼이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속악해지고 무분별해지는 인심이라면 그 인심을 끌어 고아하고 호연한 기상과 웅숭깊은 관대함의 대도(大度)에 잇닿게 하는 중정(中正)과 결속의 매개자로 풍류 씨를 두자는 것이다. 이럴 때 도심은 단순히 어느 학파나 주의주장에 속한 교조적인 아젠다(agenda)를 넘어선 것이다. 
   그럴 때 풍류는 시대를 불문하고 세속과 탈속을 잇고 사소함과 거창함을 하나로 보며 엘리트와 루저의 분별을 무의미하게 한다. 가난과 풍요를 화합하게 하고 전쟁과 평화를 하나의 물결과 들판으로 잔잔하고 푸르게 하며 남자와 여자를 조화의 숲으로 이끈다. 보수와 진보와 중도를 어울리게 하며 질시와 증오와 사랑을 한 몸의 여러 신체 부위로 서로 돌아보고 돌보게 한다.
 많은 이들은 명품과 유명 메이커로 치장한 안심의 둘레를 겉 보일 때 노브랜드(no-brand)로 소박하고 담박하니 거칠 것 없는 뫔의 걸음걸이도 풍류의 십시(十匙) 중 하나가 아닌가. 자본주의는 대중에게 뻐기는 걸 좋아하게 만들지만 풍류는 뻐길 거 없이 그윽이 만족한 미소를 무한대로 번져내게 한다. 자본주의는 그 어마어마한 자본으로도 쪼들림이 쏠려 있지만 풍류는 무일푼에 가깝게 두루 미소가 흥건하다.
 현재의 <선유도>는 내게 단순한 뱃놀이 신선놀음의 여흥으로만 비쳐지지 않는 게 그 난처함으로 둘러싸인 자신을 그려냈다는 데 있다. 망망대해 파란만장의 풍랑이라는 난처함과 일엽편주 배 한켠에 누가 보면 힐난을 할만한 골동서화나 애장품을 올려놓은 생뚱맞은 난처함 등등이 모두 그렇다. 그런 가운데 와유(臥遊)로써 바다와 하늘을 대한다. 아니 그 자신 한자락 허심(虛心)과 허정(虛靜)의 정수리가 붉은 두루미로 화(化)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난처함이야말로 세상에 미만(彌滿)해 있는 불가역성을 조금씩 다독이고 되돌려 흔쾌히 풍류의 입문으로 가자는 기제(機制)거나 기미 같은 거나 아닌가. 우리를 둘러싼 크고 작은 난처함이야말로 볼썽사나운 불운의 거스러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의 전환을 꾀하는 풍류의 견인차거나 계기가 아니었나. 궁즉통(窮則通)을 매개하는 복수초 같은 산수유 노란 꽃망울 같은 풍류의 눈썰미여.
   오늘 나는 겨울 속에 시르죽는 난초 화분을 신문지를 펼치고 뒤집었다. 썩고 말라버린 뿌리를 잘라내고 다듬어 난석을 다시 채워 심었다. 죽음은 좀 더 나중으로 물리자고 중얼거렸다. 좀 더 일찍 보살필 걸, 갈변한 난초의 원망이 귓전에 어린다. 그리고 길게 물을 주었다. 저녁엔 붉은 망에서 양파 두 개를 꺼내어 칼로 껍질을 벗기며 다듬었다. 웍팬에 양파를 볶으며 눈이 매워 눈물을 흘리다 참기 어려워 욕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았다. 눈이 붉었다. 애써 미소를 지어보려고 했으나 얼굴이 일그러졌다. 풍류다. 너무 소소하고 자질구레하고 일상이지만 이 안에 어디 숨어 숨바꼭질을 하는가 풍류여. 이마저도 나는 풍류의 여줄가리라 억지를 부려보는 것이다. 이런 소일 밖에도 풍류는 오히려 무궁무궁하다. 어둔 창밖을 보니, 떠도는 눈송이 몇이 유리창에 붙었다 떠난다. 없는 것 없다, 풍류의 갓맑음이여. 

 

 

 

 

 

 

 

 

유종인

1996년 《문예중앙》에 시 당선.
2003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조 당선.
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아껴 먹는 슬픔』『교우록』『수수밭 전별기』『숲시집』,
시조집『얼굴을 더듬다』『답청』.
미술 에세이 『조선의 그림과 마음의 앙상블』등이 있음.
지리산문학상, 송순문학상, 지훈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