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 에세이
  • 연재 에세이
  • 연재 에세이
  • HOME > 에세이 > 연재 에세이

2021년 11월호 Vol.05 - 전기철


[ 현대선시읽기 5 ]


벙어리의 울음


서정주 「벽」 

    

 

  덧없이 바래보던 壁에 지치어
  불과 時計를 나란히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긔도 저긔도 거긔도 아닌

 

  꺼져드는 어둠 속 반딧불처럼 가물거려
  靜止한 「나」의
 「나」의 설움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볓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벽차고 나가 목매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壁아

 

 

  미당은 약관 이전부터 대종사 박한영 문하로 입산하였으며,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는 시에서 이런 불교적 소양으로 세속적 인연들을 접목시켰다. 그의 시들 중 <인연설화조>나 <춘향유문>, <신라초>나 심지어 <국화 옆에서>까지도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시들이다. 그만큼 미당은 한국 대표 불교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선시를 쓰는 시인지는 재고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불교시는 말 그대로 불교시이지 선시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는 인연설을 불교적 세계관으로 갖고 있는 시인이다. 불교에서 자아란 인연법으로 이루어진 업(業) 덩어리이다. 미당은 이 업으로서의 시적 주체의 관계망, 곧 인드라망을 중심으로 시세계를 엮어나간다. 그의 시가 쉽게 우리 서정시의 중심으로 직입(直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인연설 때문이다. 눈과 은주발을 구별할 수 없다고 해도 찾안점이 어디냐에 따라 낙처(落處)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등단작만은 선시이다. 「벽」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으로 달마의 벽관(壁觀)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나’라고 하는 업 덩어리를 깨기 위해 달마는 면벽 수행을 했다. 그때 벽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지만 점차 벽이 자신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벽과 내가 둘이 아니라 일원화시켰다. 벽은 넘거나 뚫을 수 없는 경계가 아니라 주체와 일체화했다. 이와 같은 달마의 벽관을 미당은 「벽」이라는 시로 보여준다.
  1연에서 주체는 바라보던 벽에 지쳐 있다가 언뜻 ‘불과 시계’를 죽인다. ‘나’라고 하는 업 덩어리를 없애야 벽이라는 경계가 없어진다. 여기에서 불과 시계는 곧 자아라는 경계이다. 자기가 머무는 시공간이 불과 시계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2연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시간도 공간도 없을 때 ‘나’라는 벽은 허물어진다. 그래서 결국 3연에서 ‘나’라고 하는 업이 소멸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꺼져드는 어둠 속’ 반딧불이처럼 가물가물하다가 순간, 곧 돈오(頓悟)의 순간이 온다. 그때 ‘나’는 벙어리가 된다. 여기에서 벙어리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언전불급(言詮不及)의 세계이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 세계화(世界花)가 핀다. 진달래꽃 피는 봄 언덕에 벙어리 울음이 터진다.
  ‘오∼ 벽아’
벽은 업이 아니라 곧 주체가 되어 버린다. 돈오의 세계이다. 달마의 벽관처럼 벽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때 벽은 경계가 아니라 나와 일체가 되어 자연으로서의 ‘나’이다. 그래서 벙어리의 울음이 돋보인다.
『 벽암록』 제70칙에서 백장은 위산영우에게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도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위산은 백장에게 되묻는다. 화상께서 먼저 말해 보라고. 백장은 뒷날 법손이 끊어질까 염려하여 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설두는 ‘산호나무 숲에 햇살이 눈부시구나.’라고 송(頌)을 붙인다. 말하기 이전의 본래 모습이다. 이는 미당의 벙어리의 울음이다. 선가(禪家)에서는 입을 열면 그르친다고 한다. 오직 체득하는 것이다. 몸으로 직접 체험에서 얻지 않고는 언어라는 관념 덩어리에 끄달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인의 언어 작업은 선에서 본다면 실천일까 아닐까? 여기에 선시의 자리가 있지 않을까 한다.

 



 

 

 

  

전기철

 

   1988년 『심상』 등단.

   시집 『나비의 침묵『풍경의 위독『아인슈타인의 달팽이『로깡땡의 일기,  누이의 방등이 있음.

   2015년 현대불교문학상,  2019년 이상 시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