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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호 Vol.04 - 전기철


  [ 현대선시읽기 4 ]


선미(禪美선명한 돈오의 세계


조지훈  「아침」 

 

실눈을 뜨고 벽에 기대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짧은 여름밤은 촛불 한자루도 못다 녹인채 살아지기 때문에 섬돌 우에 문득 石榴꽃이 터진다

 

꽃망울 속에 새로운 宇宙가 열리는 波動! 아 여기 太古쩍 바다의 소리 없는 물보래가 꽃잎을 적신다.

 

방안 하나 가득 石榴꽃이 물들어 온다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풀잎단장시집에서는 아침이라는 제목으로 실렸으나 뒤에 조지훈 시집에서는 제목이 花體開顯으로 바뀐 위 시는 시적 상상력을 통해 선정(禪定)에 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침은 언어를 통해서 선정에 드는 돈오(頓悟)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 돈오의 경지는 花體開顯이라는 표제에서도 잘 보여준 바, 꽃이 피어남과 내가 반야에 눈뜸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을 통해 나와 자연이 상대적인 분별에서 떠나 무심합도(無心合道)의 견성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 현대선시에서 선과 시의 만남을 이만큼 잘 드러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 시에는 아침이라고 하는 시간적 현상과 주체의 깨어남을 꽃이라는 매개를 통해 나타나는 선미(禪美)가 선명하다.

1연은 주체의 잊음, 내려놓음이다. 곧 부처의 눈처럼 실눈을 뜨고 정좌에 드는 과정이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면 곧 나를 내려놓음에 드는, 즉 선정으로 들어가는 문에 이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는 표현은 상대적인 분별의식이 없어짐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다. 2연은 문득에 모아진다. 이는 돈오(頓悟)이다. 여름밤이 짧다고는 하나 시간 자체를 잊어버림의 경지이다. 이때 문득 石榴이 터진다. 핀다가 아니라 터진다고 했다. 돈오이기 때문이다. 속에서는 먼지 한 톨에서 우주를 열고 닫는데, 하물며 꽃으로 제 자신이 나고 들고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3연은 그 구체적인 경지이다. 그 경지에서는 한 송이 꽃 속에 우주가 들어간다. 꽃 피는 순간은 우주의 파동이며, 먼 태고의 물보라가 꽃잎을 적신다. 선정에 들면 시공간이 모두 초월된다. 4연에 이르면 내가 石榴꽃 속으로 들어가 앉는다라는 물아일체의 경지, 곧 선정에 든다. 여기에서 아침은 새롭게 열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의 세계이다. 주객의 분별에서 떠나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인 세계이다. 하지만 1연에서의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과는 다르다. 1연에서의 무념(無念)이 정좌에 드는 과정이라면 4연에서의 무념은 돈오 이후의 걸림 없음의 세계이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한 세계이다.

아침과 함께, 혹은 이어서 읽어야 하는 시가 낙화이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이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아침이 꽃이 피는 순간이라면 낙화는 꽃이 지는 순간이다.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피는 것 못지않게 지는 순간 또한 선미(禪味)가 있다. 꽃이 지는데 우련붉다. 그 붉음은 숨어 사는 이의 마음이다. 꽃은 피면 지는 실상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 실상은 숨어 사는선가(禪家)의 마음이기도 하다. 따라서 울고 싶어라를 감상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 순간의 선미(禪味)에 젖음이기 때문이다. 이 눈물은 너무 행복해서 흘리는 젖어듦이다.

()의 언어 문제, 더욱이 시화를 맛보기 위해서는 조지훈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그가 불단(佛壇)의 강사이기도 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는 바다.

옴 마니 밧메 훔!

돈오의 세계에서 피는 꽃이여!

 

 

 

 

  

전기철

 

   1988년 『심상』 등단.

   시집 『나비의 침묵『풍경의 위독『아인슈타인의 달팽이『로깡땡의 일기,  누이의 방등이 있음.

   2015년 현대불교문학상,  2019년 이상 시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