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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호 Vol.01 - 전기철

 

 [ 현대선시읽기 1]

 

 

 

선시禪詩는 오래 전부터 쓰여 왔다. 우리 선시가 삼국시대의 향가 제망매가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때, 선시는 우리 시의 출발과 함께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로 선사, 시인들에 의해 지금까지 선시는 한 번도 그 맥이 끊어진 바 없다.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선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시 읽기는 시로 수용하는 선, 참선의 행위로서의 시를 독해하는 일이며, 시와 선이 만나는 지점을 찾는 것이다.

은 명상, 참선을 통해 본성을 직관하기 위한 수행이다. 본성이란 공, 무아無我, 연기緣起에 따라 체득한 본래의 불성이다. 곧 선정禪定에 들어 있는 그대로를 깨닫는 일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나 불립문자不立文字는 이러한 참선의 생활화, 체험을 통해 도를 얻는 방법으로, 주체를 비우는, 혹은 내려놓는 생활선生活禪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선시는 생활선으로서의 시이다. 선시에 대단한 불교적 진리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생활 속에서 어떻게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를 리듬 있는 노래가 선시이다. 그러므로 선시는 언어의 울림이다.

 

 

바람도없는공중에 垂直의파문을내이며 고요히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발자취입니까

지리한장마끝에 서풍에몰녀가는 무서운검은구름의 터진틈으로 언뜻언뜻보이는 푸른하늘은 누구의얼굴입니까

꽃도없는 깊은나무에 푸른이끼를거쳐서 옛탑위의 고요한하늘을 스치는 알수없는향기는 누구의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못할곳에서나서 돌부리를울리고 가늘게흐르는 작은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노래입니까

연꽃같은발꿈치로 가이없는바다를밟고 옥같은손으로 끝없는하늘을만지면서 떨어지는날을 곱게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입니까

타고남은재가 다시기름이됩니다 그칠줄모르고타는 나의가슴은 누구의밤을지키는약한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현대 선시를 말할 때 한용운에서 출발하는 게 거의 정설이 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그의 알 수 없어요는 시적, 선적 울림이 크다. 선시를 말의 울림이라고 할 때 알 수 없어요는 한 리듬 단위가 조금 길지만 자연 현상이 느리게 넌출지는 듯한 느낌을 수용한다. 5에서 8에 이르는 리듬감은 자연의 느린 울림이다. 이런 울림은 시적 주체가 자연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의미적 측면과 짝을 이룬다. 주체의 내려놓음이다. 1행에서 5행까지는 주체를 수동적으로 둔다. 보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1행에서 오동잎이 바람도 없는데 수직의 파문을 내며 떨어지는 현상이나 2행의 긴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3행의 꽃도 없는, 푸른 이끼에 뒤덮인 옛 탑 위의 향기, 4행의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작은 시내나 5행의 수평선을 물들이고 하늘과 해까지 단장하는 저녁놀이라고 하는 자연 현상을 시적 주체는 사심 없이 그대로 수용한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시적 언어는 몰아의 경지에서 얻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나를 내려놓은 후 바라보는 자연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때문이다.

그런데 6행은 주체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주체는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되기까지 하는, 그칠 줄 모르고 타는 욕망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는 욕망하는 주체가 아니다. 그것은 약한 등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등불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5연까지의 오동잎, 푸른 하늘, 향기, 작은 시내, 저녁놀과 같은 자연물로서의 이다. 여기에서 가슴이며, 이 가슴은 생명체로서의 보편적 개념이다. 모든 사물에 불성이 있듯이 가슴이 있는 것들에는 다 불성이 있다. 그 주체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을 때 달마가 답한 不識’, 곧 분별심 없는 이다. 5행까지는 자연 현상이 주체와 감각적으로 만남을 표현했다면 6행은 반대로 감각을 가진 가슴을 자연 현상으로 연결시켜 누구가 되게 한다. ‘누구는 특정 인칭이 아니라 알 수 없어요의 누구이다. 다시 말하면 너도 되고 나도 되고, , 그녀 등 두두물물頭頭物物이다. ‘한 생각에 번뇌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부처라는 화엄경의 언급처럼 누구는 자연이면서 화자이다. 그러므로 알 수 없어요는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인지의 경계를 넘는다. 이는 이 침묵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사구四句와 백비百非를 넘는 세계는 불가지론의 세계와는 다르다. 침묵마저도 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 수 없음은 불가지론의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게 아니다. 그것은 약한 등불이 어루만지는 가슴들이며, <군말>에서 기룬 것은 다 님이라고 한 그 ’, 침묵하고 있는 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이 아니라 나의 가슴이 등불이 되는 지점이다. 님의 침묵에서 은 사랑의 대상이면서 사랑하는 주체이며, 또한 사랑한다는 표현은 모든 의미를 머금은 침묵으로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눈으로 먹고, 귀로 보고, 손으로 맛보며, 혀로 만지는 언어로 만나는 호소이다.

 

 

  

 


  

전기철

 

   1988년 『심상』 등단.

   시집 『나비의 침묵『풍경의 위독『아인슈타인의 달팽이『로깡땡의 일기,  누이의 방등이 있음.

   2015년 현대불교문학상,  2019년 이상 시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