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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호 Vol.35 - 권기선



 필사 노트

 권기선






 많은 사람 속 밝은 하늘 아래를 걷는 일은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 세트장 같기도 했다

 햇볕이 내려온 청록색 숲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푸른 잎을 모아 잉크로 만들어보고도 싶었다

 필사 노트 한 권을 채운 기념으로 시를 쓴다

 대학 시절 시작한 노트에는 진은영 김혜순 윤동주 쉼보르스카 기형도 보들레르 허수경 오규원 조용미 이병률 등등의 시인이 쓴 시를

 권기선 시인이 썼다 한 땀 한 땀
 술에 취해 쓴 시도 있다

 필사의 노력으로 필사했달까

 좋다고 옮겨 쓴 마음의 각고에는
 미래의 아내와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이 있었다

 결혼하지 않았지만
 (할 수는 있을까)

 마음이 생겼다, 좋게 읽은 시를 모아
 아내와 아기에게 읽어주는,
 이런 생각을 하면 술에 취했어도 연필은 잘 깎였고
 긴 시를 옮겨 적어도 손가락이
 아프지 않았다

 아빠 기선은 주기적으로 시를 읽고 시를 쓴다

 시에 시 얘기가 나온다는 말을 또 들을 테지만 이제 염려하지 않는다

 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림이나 사진은 읽어줄 수 없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간 시는 필사하지 못합니다

 미안해 아기야 그런 시는
 아빠가 쓰지 않았어

 주황빛 해는 지고 있고
 나란히 걷는 시간을 사진으로 간직하듯
 아내를 맞이하는 상상만큼
 미래의 아기를 생각하는 일에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에 좋아서
 마지막
 세상에 남은 시처럼
 영원할 것처럼 필사한다

 늙었어도 유일한 아빠의 마음은 어느 순간 무너져
 얼마 전부터 기선의 아빠는
 좋은 아빠가 되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고백하고

 아비의 죄책감

 근원이 고작
 해주지 못한 경제적 풍요인데

 영화의 한 장면*에서 울었던 나는
 결혼하고 아이의 아빠가 되어
 아버지를 찾아가
 젊은 아빠와 어린 아들이었던 시절로 돌아가
 해변에서 뛰어논다
  
 늙은 아버지와
 나,

 이렇게 생각하면 이 시는 절망적이어서
 우리 아기에게 읽어주지 못한다

 그림 금지 사진 금지 절망 금지
 느끼함 금지

 마음에 찰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맑은 시를 아기에게 들려주고 미래의 아내에게 오늘 밤 평온한 말을 시시콜콜 털어놓으며
 잘 가꿔진 정원을 순수하게 보여주는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간밤에 내린 비와
 젖은 거리마다

 울고 싶은 마음의 폭이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사각사각
 마음에 언어를 쏟는다



 *리처드 커티스 감독, 도널 글리슨, 레이철 매캐덤스 주연의 영화〈어바웃 타임〉
 
 **기형도,「진눈깨비」








  

 권기선  시인
 2019년《매일신문》신춘문예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