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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호 Vol.34 - 이정원



 부채의 속도 

 이정원






 안개에 발목을 묻으면
 웬만한 부력은 견딜 수 있어요

 갚을 것이 많아 이생에서는
 조금 더 빨리 굴러가기로 합니다

 속도계를 분침처럼 맞춰 놓으면
 부채의 이자가 덜 불어나겠거니
 아침부터 부지런 부지런 하루 해를 당겨다 쓰고 있어요

 막막함에 실체에 대하여 
 넘나드는 파고에 대하여 
 파헤친 이유와 항변이 아귀가 맞지 않아서

 생활 일기장을 펼쳐
 오늘도 썰물과 밀물을 갈마들며  
 휩쓸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고 적습니다

 진심은 꾹꾹 눌러쓴 필기체를 닮았습니다

 아이의 링거줄을 목에다 감은 적 있죠 곰팡이꽃을 머리에 꽂고 흥얼거리는 날들 졸아든 시간들이 꾸르륵 꾸륵 빠져나갔어요 싱크대의 구정물처럼요 매일이 월요일이었는데 복사꽃은 그토록 진분홍 물감의 덧칠로 왜 생의 조붓한 캔버스에 피어 있었을까요 손가락 마디마다 반지 대신 칡넝쿨을 둘렀고요 좌심방은 부레처럼 부풀었어요 깨금발로 건너기에 도랑은 넓고 깊어서 한 번쯤 새가 되기로 했습니다 부리 오므려 세월을 물어나르고 싶었지요

 갚을 것이 많아
 나는 복수複數의 내가 되었지요
 누구누구의 무엇이 되어 있었지요

 면도기와 칫솔, 속옷과 양말을 챙기면서
 붉으락푸르락 얼굴 화단에 
 꽃들은 또 멋대로 피고 지는데 
 속도계의 눈금을 읽으며
 쌍봉낙타처럼 의혹의 혹을 머리에 이고 
 빽빽한 안개를 살러 갑니다 

 슬픔의 복사뼈 근처
 내 발이 어디 있지?
 내 발목은 어디에 있지?

 해가 설핏 기우는데
 달은 복수초처럼 어느 겨를에 숨어있을까요
 안개 속이 자못 궁금해져서
 조심스레 헤쳐보는 나의 미래
 구르듯 달려오는 나의 미래

 이럴 때 조바심은 금물이랍니다
 내가 나일 때까지는
 탕감된 하루가 노을꽃 소인을 찍을 때까지는










  

 이정원 시인
 2002년《불교신문》신춘문예 등단. 2005년《시작》신인상.
 시집『몽유의 북쪽』『꽃의 복화술』『내 영혼 21그램』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