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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호 Vol.39-김명철



 
 죄와 벌

 김명철





 가을도 상큼하여 아이와 함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수확이 끝난 포도밭이 보였다
 아이와 함께 이삭을 따서 몇 알 맛 좀 보겠다며 헤헤거렸다

 풀숲을 헤치고 포도밭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발이 흙에 안기듯이 어둑하게 빠져들었다 
 곧바로 땅속에서 쏟아져 나와 얼굴을 쏘아대는 땅벌들!
 혼이 나가고 넋이 빠진 나는 메뚜기처럼 튀었다

 여자에게 물었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도 모르는가 차라리 돌에게 물어보라
 포도가 예민해하는 계절을 돌처럼 다루었으며 
 이제 돌다리는 징검징검 죄나 벌을 건너가기 위한 것보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두드려보는데 뜻이 있다는 것이었다

 남자에게 물었다 차라리 흙에게 물어보라
 포도와 땅벌과 메뚜기를 낳은 흙에게 먼저 신고하지 않았으며
 언젠간 모두 흙으로 돌아가는데 뭔 상관이 있냐는 것이었다

 남자 같은 여자에게 물었다 
 물을 걸 물어야지 물에게 물어보라
 물 먹은 것처럼 일단 사는 게 죄고 벌은 벌이지만
 죄이고 벌이고 간에 벌집 얼굴이 상큼하게 꼴보기 좋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새끼는 어떡하고 너만 튀었냐는 것이었다
 겁대가리도 없이










  

 김명철 시인
 2006년《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짧게, 카운터펀치』『바람의 기원』『우리는 바람의 얼굴을 꽃이라 하고 싶다』, 
 시 이론서『현대시의 감상과 창작』『시 의식의 근원과 발현』, 
 소설집『백석-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