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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호 Vol.38-이혜미



 
 얼음으로부터

 이혜미





 오토바이를 타고 나선계단을 올랐어 
 끝없이 이어지는 소용돌이를 따라             

 높이 더 높이, 
 구름을 뚫고 선 키오스크를 만났지
 달처럼 밝았어

 아름다운 영화들이 상영 중이었지만 
 성인인증이 필요했다
 어떤 장면을 만나기 위해 어른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 신의 창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계단이
 무너지고 손에 쥔 
 핸들이 녹아내리고

 소설과 눈보라
 솜사탕에 닿은 혀끝   
 인증번호 6자리
 긴 양말과 젖은 편지

 진눈깨비 같은 사람에게 휘감겨
 흔들리던 한때를 생각하면 
 차가워진 입술이 푸르게 떨렸다 
 너무 꽉 쥔 마음이 더 빨리 녹아 사라지듯이  

 오래 지어 가진 거짓말은 개인적인 진실이 된다

 그래서 소설과 거짓말의 차이는 
 얼마나 긴 시간을 견뎠는지에 있어
 얼음과 어른의 차이처럼 

 몰래 간직한 유년을 얼음조각처럼 달게 굴리면
 입속에서 낯선 색들이 

 흘러나오고

 나는 비밀을 빛이라 믿으며
 키오스크 앞을 서성이는 사람 

 좋아해
 녹지 마
 속삭이면서

 입가를 타고 데워진 말들이 넘쳐 나올 때
 무엇을 더 껴안아야 할지 알 수 없었지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달까지 오르던 꿈처럼
 숨겨둔 얼음을 향해 가던 그 어둠 속에서는










  

 이혜미 시인
 2006년《중앙일보》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보라의 바깥』『뜻밖의 바닐라』『빛의 자격을 얻어』『흉터 쿠키』,
 산문집식탁 위의 고백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