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송이
이병초
누구에게 얻어터져 눈두덩이
퍼렇던 여자 초저녁인데
이미 취한 여자, 처음 보는 내게 자신을
‘카수’라고 소개한 뒤
소주를 쭈욱 들이켰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나 돈 있다? 이러면서
지갑에 만 원짜리를 꺼내어 천천히 찢어가면서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 송이〉를 불렀다
살짝 허스키한 음색이었다
고향이 어딘지 몰라도 밑거름 먹은 들판의
해금내를 간직한 목소리였다
바람벽에 세든 쥐 오줌 냄새를 아끼는 것 같기도 했다
포장마차 흐린 불빛을 빨아들이며
음정을 느릿느릿 찍어 넘기는 목타루에
피 냄새가 엉기고 있었다
누가 노래를 들어 주든 말든
음표 한 개 한 개에 허투루 다가서는 법 없이
못난 세상에 격렬해지려는
목타루를 애써 참는 음색, 음색에
해금내가 되엉기고 있었다
무교동 낙지 골목 근처에서 만났던
그 목소리, 흐린 불빛에 젖어 반짝이던 해금내를
눈두덩 퍼렇던 꽃송이를
1985년 여름 후로 만난 적 없다
이병초시인
1998년《시안》으로 등단.
시집『밤비』『살구꽃 피고』『까치독사』『이별이 더 많이 적힌다』,
시비평집『우연히 마주친 한 편의 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