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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 손택수 시인


 

 

 손택수 시집/붉은빛이 여전합니까(창비시선/2020.02)

 


 

망원동

 

 

도라지 속살은 막 퍼올린 찬물 빛이다

역 귀퉁이 쓸모없어진 전화 부스 옆에서

하루종일 도라지 껍질을 벗기던 노인

도려낸 상처 위로 끼치던

그 정갈한 향을 나는 얼마나 좋아하였던지

코끝에 심심산골을 옮겨온 듯

시장 귀퉁이 들끓는 소음 먼지 속에

그저 정물처럼 묵묵히 앉아 있었다

지상에 와서 아까운 몇 가지를 뽑으라면 십년 넘게

내 귀갓길을 지켜준 노인의 도라지를 빠뜨릴 수 없으리라

껍질을 벗기는 일이 우물을 푸는 일이라

먼지잼처럼 지나가던 망원,

돌아와 보니 그곳이 가장 먼 곳이었네

 

 

 

붉은빛

 

 

뽈찜을 먹습니다 대구는 볼을 부비며

사랑을 나누는 버릇이 있다지요

 

한때 저도 그러하였습니다 이쁜 것이 보이면 먼저

볼을 부비고 싶었지요

볼에 불을 일으키고 싶었지요

 

볼이 떨어져나갈 듯 치운 날이었어요

大口처럼 벌어진 진해만과 가덕만 사이

한류와 난류도 볼을 부비면서

살이 오르는 곳

 

동백처럼 탱탱 언 볼에 감아드린

목도리도 제 살갗이었습니다

동해 시린 물을 맞던 남해 물결이었습니다

 

대두 알처럼 붉은빛이,

당신 볼에도 여전합니까

 

 

 

지게체

 

 

부산진 시장에서 화물전표 글씨는 아버지 전담이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아버지가 시장에서 대접을 받은 건 순전히 필체 하나 때문이었다

전국 시장에 너거 아부지 글씨 안 간 데가 없을끼다 아마

지게 쥐던 손으로 우찌 그리 비단 같은 글시가 나왔겠노

왕희지 저리 가라, 궁체도 민체도 아니고 그기

전시장 지게체 아이가

숙부님 말로는 학교에 간 동생들을 기다리며

집안 살림 틈틈이 펜글씨 독본을 연습했다고 한다

글씨체를 물려주고 싶으셨던지 어린 손을 쥐고

저꾸먼 삐둘어지는 글씨에 가만히 호흡을 실어주던 손

손바닥의 못이 따끔거려서 일찌감치 악필을 선언하고 말았지만

일당벌이 지게를 지시던 당신처럼 나도

펜을 쥐고 일용할 양식을 찾는다

모이를 쪼는 비둘기 부리처럼 펜 끝을 콕콕거린다

비록 물려받지는 못했으나 획을 함께 긋던 숨결이 들릴 것도 같다

이제는 지상에 없는 지게체

 

 

 

냉이꽃

 

 

냉이꽃 뒤엔 냉이 열매가 보인다

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 만에 알다니

봄날 냉이무침이나 냉잇국만 먹을 줄 알던 나,

잘 익은 열매 속 씨앗은 흔들면 간지러운 옹알이가 들려온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이제서 돌아왔니

아가와 어머니가 눈을 맞추듯이

서로 보는 일 하나로 가지 못할 곳이 없는 봄날

쉰내 나는 쉰에도 여지는 있다

나는 훗날 냉이보다 더 작아져서,

냉이뿌리 아래오 내려가서

키 작은 냉이를 무동이라도 태우듯

들어올리 수 있을까

 

그때, 봄은 오고 또 와도 새

봄이겠다

 

 

    

한 켤레의 구두*

 

 

구두가 아니라 발을 벗어놓았다

가죽은 발이 빠져나간 뒤에도 부르튼 발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해진 가죽 위에 앉은 먼지들은 소멸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아마도 타박이는 저 먼지들이 체액에 젖은 구두 가죽 속으로 스며들어 까맣게 뭉친 빛을 내는 것이리라

 

바람도 눈보라도 들판도 가죽의 살갗 속으로 들어와 어느새 그들을 닮은 발을 바람벽처럼 안아주고 있는 것이리라

 

세족식이라도 하듯 지상으로 내려온 노을빛이

무쇠솥에 데운 물처럼 발을 품어주고 있다

 

발톱이 돌조각 같았던 사람

무덤구덩이 속처럼 컴컴한 구두에 발을 집어넣는다

 

발등 위에 어린 내 발을 올려놓고 걸음마를 시키던,

낡은 구두만 남겨놓고 그는 어딜 갔는가

 

* 빈 센트 반 고호, oil and canvas. 45×37.5

 


 

 

여기 적힌 그대로, 그 있는 그대로에 힘입어 시 읽다 말고 나가 걸었지 뭐야.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이라 그랬지. 회복이라는 단어, 보자마자 나 왜 설레었을까 하니 꽃니 자국 같은 말인 거라. 곰취나물 그렇게 잡아당기다 간 거 대체 누구라는 이라니, 덕분에 취해서는, 엉겁결에 착해져서는 내가 내 걸음에 낯설어도 하게 되는 거지. 가만히 앉은 채로 넘어가는 저를 볼 줄 아는 산의 눈빛, 나는 그 산책으로부터 얼마나 멀어진 거라니. 풀리는 다리, 주저앉는 꼬리뼈…… 허나 시인의 종이가 나를 품고 시인의 바위가 나를 업지 뭐야. 냉큼 그만큼의 가벼운 살림이 싫지 않은 데는 그 덕분에 하늘을 빤히 올려다보게도 되어서지. 가을 하늘이 얼마나 푸르냐고 물어보니 나는 이미 말한 가을 하늘을 다시 보게도 되는 거지. 명품을 간파하는 눈이 생겼는데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고 정작 네 살갗에는 무덤덤……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에게 이 구절을 편지로 옮겨주는데 쓰라려, 쓰라립지 뭐야, 존재하지 않아도 좋은 무엇이 된 것만 같은 이 느낌, 붉은 빛이라고 서둘러 써둘 참이지.

 

                                                                                                                                                                         김민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