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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인
신작시 2편, 근작시 3편, 시인의 말
ㅣ신작시 2편ㅣ
만연체
-인생
좌정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좌정을 하노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만연체
요사이는 바람만 슬쩍 스쳐도 시큰댄다
길섶의 한삼덩굴처럼 얼크러진 채
어느 한 매듭 술술 풀려난 적이 없는 만연체
장미 한 송이에 마냥 설레는 것은 웬일인가
젊은 날 다른 삶으로 떠난 사랑의 이유를 평생 묻는
어떤 강은 길고 시간들은 자꾸 무너지는데
방학 휴가 온 앞집 아이가 비눗방울을 자꾸 분다
열렬한 짓이다, 라고 두 음절로 써본다
금방 터져버리는 비눗방울을 한사코 불어대는 아이
허망한 짓이다, 라고 다시 써보지만
열렬하지만 허망한 짓이다
허망하지만 열렬한 짓이다
열렬해 본들 허망하단들 또 어쩌랴, 는 만연체
올해 망백望百인 옆집 정읍할매는
담 넘어 수수개떡을 건넨다
먼 산 그만 보고, 따뜻할 때 한 입 떼보라고 한다
시내, 라는 말
시내, 라는 말은
왠지 낭랑한 소리의 완전체.
시내야, 하고 부르면
시냇물 소리가
시리게 흐르는 가을 해어름,
시내는 잘도 흘러서
시리고 푸른 하늘을 한껏 이룩하네.
이쯤 해선 갈대 무리의
그 가없는 흔들림이라든가
환한 구절초의 향기는
시내의 신비를 증폭하는 빛들.
시냇가의 황소는 금년의 끝물을 뜯고는
시냇물에 끔벅끔벅, 제 무죄를 들여다보네.
때마침 능선을 넘는 삭금 일가며
번지는 와인빛 놀,
바람의 물결무늬까지를 비춰내는
시방은 거울의 시간, 시내는
이미 잘 닦은 염주알 시린 목청을 헤며
이제는 다 내려놔, 내려놔 다독이네
금방이라도 격발할 듯한
그리움의 총구로, 다만
별들의 침묵을 겨누게 하며.
ㅣ근작시 3편ㅣ
푸른 장미의 노래
-혼자 넘는 시간 1
혼자 있는 시간, 해거름의 방죽은 고요를 미는 바람과 떨리는 물결의 한량없는 조화 속이다. 그 속을 들고 나는 물총새며 저만큼의 산 위로 번지는 황혼의 자지러짐이 오늘의 만찬에 참예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내겐 거꾸로 든 산영의 그윽함만치나 시간도 잠기는 침묵을 익히는 이때쯤, 또 나는 방죽가에 일제히 나팔을 치켜든 노란 달맞이꽃 떼의 그 환한 나라에 닿기를 무척은 바라기도 했던 것인가. 그윽한 것과 환한 것이 애저녁인 양 섞이는 풍경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밝힌다. 나는 오늘도 푸른 장미라거나 붉은목풍금새라거나 그 꿈으로도 환치되지 않는 노래들과 마주하는, 다만 혼자 있는 시간이라네.
초록으로 쓸어놓은 마당을 낳은 고요는
새암가에 뭉실뭉실 수국송이로 부푼다
날아갈 것 같은 감나무를 누르고 앉은 동박새가
딱 한 번 울어서 넓히는 고요의 면적,
감잎들은 유정무정을 죄다 토설하고 있다
작년에 담가둔 송순주 한 잔에 생각나는 건
이런 정오, 멸치국수를 말아 소반에 내놓던
어머니의 소박한 고요를
윤기 나게 닦은 마루에 꼿꼿이 앉아 들던
아버지의 묵묵한 고요,
초록의 군림이 점점 더해지는
마당, 담장의 덩굴장미가 내쏘는 향기는
고요의 심장을 붉은 진동으로 물들인다
사랑은 갔어도 가락은 남아, 그 몇 절을 안주 삼고
삼베올만치나 무수한 고요를 둘러치고 앉은
고금孤衾의 시골집 마루,
아무 것도 새어나게 하지 않을 것 같은 고요가
초록바람에 반짝반짝 누설해놓은 오월의
날 비린내 나서 더 은밀한 연주를 듣는다
마음이 경각에 닿을 듯
간절해지는 황혼 속
그대는 어쩌려고 사랑의 길을 질문하고
나는 지그시 눈을 먼 데 둔다.
붉새가 점점 밀감빛으로 묽어 가는
이런 아득한 때에
세상은 다 말해질 수 없는 것,
나는 다만 방금까지 앉아 울던 박새
떠난 가지가 바르르 떨리는 것하며
이제야 텃밭에서 우두둑 펴는
앞집 할머니의 새우등을 차마 견딜 뿐.
밝고 어둔 것이 서로 저미는
이런 박명의 순순함으로
뒷산 능선이 그 뒤의 능선에게
어둑어둑 저미어 안기는 것도 좋고
저만치 아기를 업고 오는 베트남여자가
함지박 위에 샛별을 인 것도 좀 보려니
그대는 질문의 애절함을
지우지도 않은 채로 이제 그대이고,
나는 들려오는 저녁 범종 소리나
어처구니 정자나무가 되는 것도 그러려니
이런 저녁, 시간이건 사랑이건
별들의 성좌로 저기 저렇게 싱싱해질 뿐
먼 데도 시방도 없이 세계의 밤이다.
ㅣ시인의 말ㅣ
이쯤 해서 인생을 얘기할 때가 됐나? 그런데 어떻게 얘기하나? 네루다의 시구처럼 “어떤 충만, 어떤 개화, 사랑으로 증폭된 어떤 신선함이” 내 인생에 한 번이나 제대로 있었나? 길섶의 한삼덩굴처럼 얼크러진 만연체의 내 인생을 이쯤 해서 얘기해도 되나?
고재종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