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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호 Vol.25 - 이승희

 

 

이승희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신작시 2편ㅣ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작약이 아닌 것들만 가득했다

 죽는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거기와 이곳의 사이는 없고

 환상이라고 하면 환상이 이미 환상이 아니다


 여기는 한 번쯤 죽어야 올 수 있다는 말을 지독하게 혐오했다


 물고기가 바라보는 곳을

 새 한 마리도 바라본다

 나도 그곳을 바라본다

 모두 다른 곳인데 한 곳에 있었다


 작약이 거기 있다

 허공에 뿌리를 두고

 꽃을 물속에 두었다

 누가 밀어 넣었을까

 누가 밀어 올렸을까

 어떤 반성과 참회가 꼭대기를 흔들었다  

 내가 혐오하는 말은 모순일지도 모른다


 무수하게 산란하는 물고기들이

 내 얼굴을 스쳐 간다


 작약 속을 걸었다

 작약이 없다

 이 모든 게 작약이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을 혐오한다

 치욕스러웠고

 슬펐다


 반복되는 작약


 피가 물속으로 퍼져갈 때 작약꽃이 피었다


 나는 집을 만들 손이 없었다







 


 밤은 정말 거대하고 큰 새가 맞는다네

 


 나는 날마다 접혔다 펴진다

 조금씩 늘어났다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잠시 살았다가 또 잠시 죽었다가 하였다

 괜찮았다

 거대하고 큰 새는 날마다 나를 낯선 곳에 두고 날아갔다

 날마다 조금씩 늦게 왔고 조금씩 빨리 갔다

 그것도 좋았다


 새의 깃털마다 마을이 하나씩 들어 있다

 뼈를 구부려 지은 집마다 불이 켜지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떠나는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는 마음이 있다

 그렇게 골목마다 환한 피가 흐르던

 우리는 야행성이었다

 새의 종족

 날개뼈를 숨기고 태어난다


 나는 밤이 숨겨둔 무수한 새를 본다

 별을 가두고 있는 별처럼

 날마다 흩어지고 멀어지며 

 우리는 같이 잠들고

 같이 죽는다


 새는 새로 이루어져 있고

 새는 새로 갈라져 있다

 새가 죽으면 새가 태어나는 밤

 죽은 새는 발견되는 일이 없다

 건축되는 새 

 혹은 밤


 손가락을 물어뜯으면 무수한 새가 흘러나왔다



   


  

근작시 3편ㅣ

 

 어떤 마음에 대하여

  -감모여재도


 

 물속에 오동나무를 심는 마음이 있다 연꽃도 그런 마음 모란도 그런 마음 오리 두 마리도 그런 마음이어서 


 가만히 헤엄을 치게 하였다 그런 마음을 싣고 돛단배가 온다 


 마음에 무엇을 들이는 마음 그런 마음이 더욱 따뜻하여 소나무가 자란다 바위 속을 지나 지붕 끝을 지나간다 머리를 붉은 해에 닿고서야 편안해진다

 지붕에는 매화꽃이 피었다 잘 모르는 마음인데 잘 알 것 같은 마음이다 마치 씨앗이 백 개나 된다는 유자가 막 벌어진 것 같은데 어떤 논리가 없이 알 것 같다 이를테면 지금 여기는 너무 멀고 멀리 거기는 지금 내 앞에 와서 머무는 것 그런 것처럼 없는 이가 자꾸 나를 보러 오는 것이니 


 물속에

 연꽃은 연꽃이 아니고 모란은 모란이 아니고 복숭아는 복숭아가 아니어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

 그리고

 거기서부터 걸어와야 하는 것

 그리고 나를 지나가야 하는 것


 높은 누대

 푸른 기와

 오색 꽃구름을 밟으며 오시라고


 붉은 문을 열어두었다

 슬픔을 마음껏 열어 두고

 폐허가 한없이 늘어나 반짝였으므로


 그러므로

 작약이 피었다







 안방 몽유록*
                      

 


 나는 지붕 위에서 그네를 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네를 타는 사람들은 이 산과 저 산으로

 버드나무처럼 휘어졌다

 몇은 매달린 줄도 없이 마을보다 큰 꽃 속으로 들어왔다 나오곤 했다


 세상은 붉은 목단 한 송이였고

 마을은 점점 소실점 끝으로 멀어져 갔다


 목단 나무줄기를 따라

 강물이 흘렀다

 강물을 따라 구름이 흐르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물고기들이 노을처럼 퍼지고 있었다


 나는 점점 높은 계단으로 밀려가는 중이었다

 그것은 마치 눈물이 자라는 것처럼

 아래로부터 강물이 흘러 올라왔다


 그네를 타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꽃 피던 마을도 지나갔고

 목단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아주 멀리 있는 사람

 그러니까 잠깐 공원을 걸어가는 사람

 모자를 들치고 지나간 개미

 혹은 모자 속에서 자라는 자두나무


 그런 후에도 계속 멀어지는 사람

 말을 잃고 

 자라는 버드나무처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란을 지나 걸어가는 사람



* 조선시대 신광한의 가전체 소설 제목 변용


 

 

 

 

 

 밤 배


                   

 잠의 뒤꼍으로


 꽃이 피듯 배가 밀려왔다


 나의 등을 가만히 밀어왔다


 죽은 이의 편지 같아서


 슬프고 따뜻해서 


 그렇게 배에 올랐다


 배는 공중에 떠서 


 시작과 끝이 없는 이야기처럼 흘러갔다


 눈이 내리듯 천천히 흘렀다


 가는 것이 꼭 돌아오는 것 같았다



 

 

 

 

시인의 말ㅣ

 

 

 나는 물속에서 라디오를 듣는 게 좋다. 물을 타고 건너오는 말들은 어떤 말이든 다정해진다.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닌데 나에게 하는 말 같다. 누구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위로의 말 같다. 

 보이는 것보다는 들리는 것이 좋다. 어떤 말들은 내 몸을 그냥 지나간다. 그런 것들을 무심히 바라보는 게 정말 좋은 것이다. 이 세상 좋은 것들은 다 내 것이 아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좋아진다. 

 집에서 기린을 키우기로 했다.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믿음을 요구할 수는 없다. 애초 그런 생각이 없다. 그런 것도 좋다. 나의 기린은 물속에서도 우아하게 걷는다. 밤새워 찰랑찰랑한다. 





  



 

 

 이승희 시인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등이 있음.

 전봉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