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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호 Vol.37 - 안상학


안상학 시인

신작시 2근작시 3편시인의 말


 ㅣ신작시 2편ㅣ

  

 어떤 손님 

 

 

 대관령 출신 소설가 김 아무개가 모처럼 대관령 산골짝 고향 집엘 갔더니만 연로하신 아배가, 어이쿠 귀한 손님 오셨네, 하면서도 손님맞이는커녕 숫제 본체만체하길래 대략 난감하던 차에 그렇게 하룻밤 눈은 내리고, 눈처럼 쌓여, 눈처럼 머물다가, 아침나절 눈 녹듯 슬그머니 집을 떠나와서는 그렇게 또 집을 잊고 살던 어느 날 아배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의 손님이 되어 떠나갔다는 부음을 들었다는 것이다. 


 안동서 올라온 손님 접대하겠다며 원주 어디 실내포차에 퍼질러 앉아 술잔을 들다 말고 예의 그 김 아무개는 아니래도 서러운 얼굴을 더욱 서러워하며 하필 아배의 마지막 말씀이, 어이쿠 귀한 손님이 오셨네, 라며 손님을 앞에 두고서 끝내 찔끔찔끔 눈시울을 적시는 통에 비슷한 경험의 소유자인 나도 나인지라 크게 공감하며 짭조름한 눈물을 안주 삼아 후회막급의 술잔을 낫잡아 기울였던 것이었다. 


 그나 나나 이제는 손님을 기다릴 법한 나이가 되었지만 그는 손님이 아예 없고 나는 아들이 없어서 더욱 적적한 집의 주인장으로 꼼짝없이 늙어갈 터수다. 

 



 망북화望北花 

 

 

 이른 봄날 주천강변에 자목련을 심었다


 그가 나무에게 이름을 지어주자 말했다

 나는 망북화라 불러주자 했다


 그가 뜻을 물었다 나는 

 자목련 꽃은 일제히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북쪽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눈 녹은 양지바른 산 쪽을 가리켰다


 그는 돌아서며 그럼 저쪽이 남쪽이냐고 물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아직 눈이 얼어붙어 있는 남쪽 산의 북록을 바라보았다 


 그는 망북화 망북화 이름이 참 좋다고 말했다

 나는 아직 눈이 얼어붙어 있는 남쪽 산을 바라보며 다시금

 자목련이 굳이 북쪽을 향하여 피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사월에도 눈이 온다는 강림의 아주 이른 봄날 일이었다  



 

 

 

 


 ㅣ근작시 3편ㅣ

  

 설중매雪中梅



 지금 여기서 내가

 눈 속에서 꽃을 피우든지 꽃으로 피어서 눈을 맞든지


 나는 꽃으로 향기로울 때 

 잎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잎으로 푸르를 때 

 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금빛 열매를 달았을 때 

 향기가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나목으로 동토에 섰을 때 

 그 모든 것이 없음을 서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꽃이었고 향기였고 잎이었고 열매였고 나목이었고 또 나는 꽃이었다가 향기였다가 잎이었다가 열매였다가 나목이었다가 또 나는 꽃이었으니 


 나는 지금 내게 없는 기쁨을 노래한 적 없다

 나는 지금 내게 없는 슬픔을 노래한 적 없다 


 나목이 나목을 잃고 꽃이 꽃을 잃고 열매가 열매를 잃고 잎이 잎을 잃고 향기가 향기를 잃을 때에도 


 꽃에 앞서 잎을 내세운 적 없다 잎에 앞서 열매를 열매에 앞서 나목을 나목에 앞서 꽃을 꽃에 앞서 향기를 내세운 적 없다


 내가 눈 속에서 향기를 피우든지 향기로 피어 눈을 맞든지


 나는 수많은 하나의 지금 

 무수한 하나의 여기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을 뿐이다 




 


 가문비나무 



 마음이 아프면 죽고 싶다가도

 몸이 따라 아프면 살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단단하게 하려면 겨울이 길어야겠습니다

 고통을 새기려면 거센 바람에 오래 흔들려야겠습니다

 슬픔을 아로새기려면 거친 눈보라가 제격이겠습니다


 슬픔의 소리가 노랫말을 얻을 때가지

 고통의 소리가 선율을 얻을 때까지


 마음에 지지 않으려면 몸에 울음소리를 새겨야겠습니다

 몸에 지지 않으려면 마음에 신음소리를 새겨야겠습니다


 길고 긴 밤의 시간을 건너고 건너서

 수없이 많은 겨울의 시간을 지나고 지나서


 거짓말 같이 봄이 오고 믿을 수 없는 여름이 오고

 도둑 같이, 다시 겨울을 부르는 가을이 오면 

 나는 내 모든 것을 내던지겠습니다


 누군가 내 몸을 잘라서 고통을 보자 하면 선율을 내놓겠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쪼아서 슬픔을 보자 하면 노래를 내놓겠습니다


 아픈 마음의 소리를 아픈 몸이 노래합니다

 아픈 몸의 소리를 아픈 마음이 노래합니다


 마음이 못내 아파서 죽을 생각을 하다가도 

 몸이 못내 아파서 다시 살 마음을 내었습니다  


 


 

 버력더미 자작나무 



 강원도 하고도 정선, 정선 하고도 사북 어디

 폐탄으로 쌓아올린 버력더미 검은 산에는 

 어디선가 날아온 자작나무 씨들만이 오직

 불모의 검은 땅에 뿌리 내리고 싹을 틔워

 그 곧고 희디흰 줄기를 쑥쑥 뽑아 올리며 산다는데


 검은 땅에서도 희디희게 살아가는 자작나무의 마음은 아무래도 푹푹 내리는 함박눈을 닮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네 


 이도저도 다 떠나보낸 동지섣달 함박눈 푹푹 내리면

 어떤 물도 하늘에서 내려오면 희디흰 색이 되는 한겨울이면 

 버력더미나 자작나무나 새하얗게 덮어주는 눈의 마음


 검은 땅에서 흰 몸을 뽑아 올리는 자작나무야

 검은 산에서 흰 숲을 이루어가는 자작나무야


 애당초 자작나무의 마음속에는 버력들이 떠나온 갱도의 깊은 슬픔 같은 어둠에 뿌리를 둔 어떤 서러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네 



 




 ㅣ시인의 말ㅣ

  

 내 사주팔자의 일간日干은 갑목甲木이다. 오행으로 나무의 날에 태어난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무에 관심이 많다. 최근에 쓴 시들 중에서도 나무의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게 적지 않다. 나에게서 나무의 이야기를 발견하거나, 나무에게서 내 이야기를 알아채는 날이면 한 편의 시가 되곤 했다. 나무와 내가 함께 쓴 시다. 

 나무와 나는 사계를 순환하는 삶도 닮았지만 한 곳에 뿌리 내리고 평생을 살아가는 삶도 닮았다. 그러나 한 곳에 뿌리 내리고 산다는 것, 나무는 언제 보아도 그러려니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늘 옮겨가고 싶어서 안달인 것만 같다. 옮겨 앉기에 대한 욕망을 누르고 누르며 지내보지만 쉽지 않다. 최근 몇 년간 여러 차례 사는 곳을 벗어나려고 시도를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지금도 목하 꿈꾸는 중이다. 발 달린 짐승이 어딘들 못 갈까만 그게 쉽지가 않다. 여전히 나무에게서 나를 발견하려는 마음의 소치다. 


 

 

 

 

 

 

  

 

 안상학 시인

 1988년《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아배 생각』『안동소주』, 동시집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 등이 있음. 

 권정생문학상, 백석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