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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호 Vol.30 - 김준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김준현







 저들은 그림자가 아니라 해녀들
 다큐멘터리 속에서 석양 속에서 귀가하는 해녀들은 그림자와 한통속이 되어
 걷고 있었다, 해녀들? 너의 억양이 해녀들을 
 해에 녀로 바꿔서 그래, 저 태양으로부터 새카맣게 걸으며

 물 위로 떠오르는 포도 알처럼 알은 영어로 egg 자 봐, 나는 포도 껍질을 벗겼다 얼마나 새파랗게 질려 있는지 얼마나 오래 숨을 참았는지 

 우리는 침대 위에서 육체와 해체를 오가고 있었고 
 노른자와 흰자를 섞으면 노른자만 남았다, 오늘도 스크램블 에그를 하자 
 숟가락 둘이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다
 영원할 것만 같다 노랗고 환한 음식에서 올라오는 김

 겨울에도 바다로 들어가? 응, 바다로 들어가 0도에도 0, 0, 0 0같은 공깃방울들이 일그러지며 콧구멍 밖을 탈출해 수면으로 올라가도 저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갑자기 노래를? 나는 노래를 했다 저들은 입술이 노래지도록 참지 앞니로 누른 아랫입술에 노랑이 가득해지도록 빈자리의 힘이란 이렇게 노래지는 거, 노래라는 거
yellow와 song이 하나가 되자 

내가 부르던 노래가 사는 데를 네게로 옮겼다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너는 왜 자꾸 뜻밖에서 흥얼거리니?  
언제 우리 해녀처럼 입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볼까? 
나는 0을 키우기 시작해 0으로 바꿔놓았다, 이 안에 들어가서 호흡을 할 수 있을까?
유정란처럼 나를 박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닭의 울음만으로 바깥의 시간을 알 수 있어서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달걀들을 헤아렸다, 여섯 개가
모양도 크기도 색깔도 냄새도 동일해서 단 한 번만으로는 죽을 리 없는
전생을 품고 있을 것만 같아
소리를 낼 것만 같아
달걀은 다만 참고 있을 뿐인데 

스크램블 에그, 삶은 달걀, 계란찜, 계란말이…… 죽어서 할 수 있는 게 이토록 많아
숨을 참을 수 없어서 떠오른 생각이
조개, 멍게, 해삼, 소라를 쥐고 올라왔다 바다는 깊고 내가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얕은
침묵을 너는 통역할 수 있니? 조개, 멍게, 해삼, 소라는 
너의 입에 맞지 않았다   



 








 김준현  시인
 2013년《서울신문》신춘문예로 시, 2015년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으로 동시, 2020년현대시로 평론 등단. 
 시집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흰 글씨로 쓰는 것』, 동시집 『토마토 기준』『나는 법』, 청소년시집 『세상이 연해질 때까지 비가 왔으면 좋겠어』, 평론집『2023년 젊은평론가상 수상작품집』(공저)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