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원不願, 이 세계
백인덕
빈 길 길게 움켜쥔 반사경 뒤
구식 전봇대와
은행나무 그늘은 분명한데
목숨 걸어도
모르는 건 단 하나도 건너가지 못하는
서슬푸른 오후,
빗소리 두 마디로 꽉 채울 담벼락 따라
노란 꽃 폈다 지고
하얀 밤 오고
하얀 꽃 폈다 지고
붉은 밤 오고
붉은 꽃 폈다 지고
심연深淵의 밝은 밤 이후
새로 꽃 피운 오후,
검은 꽃만 가득 담긴 반사경 뒤
바람 부는 대로
꽃의 질감으로 펄럭이는
세발자전거와
입간판을 괸 모래주머니들
입은 벌렸지만, 이 세계
모르는 건 단 하나도 건너가지 못하는.
백인덕 시인
1991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등과 산문집『나는 숨쉰다, 희망한다』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