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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호 Vol.34 - 최정란



 코끼리날

 최정란






 오월은 푸르구나아* 코끼리는 늙는다 무럭무럭 
 오늘은 코끼리날 우리들 세상, 

 코끼리가 가장 할 만한 일은 
 늙는 일, 다시 늙는 일, 잘 늙는 일
 한숨도 열망도 내려놓고 낯 뜨겁지 않게 
 더 잘 늙는 일

 꿈이 있다면 분홍 코끼리로 다시 태어나는 일
 아무 것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일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

 아침에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은 날이 언제 지나갔을까
 코끼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벗어나지 못해 안달하던
 유리벽과 시멘트 정글이 나날이 좋아진다
 사는 일이 갈수록 좋아진다, 염치없이

 늙어보기도 전에 영원한 잠의 세계로 떠난  
 시퍼런 코끼리를 생각하면
 이 늙음은 얼마나 미안하고 쓸쓸한 행운인지

 늙는 일이 이렇게 미안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진작 늙어도 좋을 것을 
 좀 더 젊어 늙었더라면 
 좀 더 자주 귀를 펄럭였을 것을
 좀 더 다정하게 코를 문지를 것을 

 거울 속 두 귀가 코끼리의 얼굴을 더듬는다
 한 겹 아래 죽음을 펄럭펄럭 다독거리며 
 얼굴과 귀가 확인하는 쓸쓸한 배후
 거죽과 거죽이 만난 뼈의 잿빛 온도

 거울 속 코끼리의 영혼이 느릿느릿 붉어진다 


*린이날 노래〉에서.












  

 최정란 시인
 2003년《국제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독거소녀삐삐』『장미키스사슴목발애인입술거울여우장갑』이 있음.